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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오답은 왜 매력적인가>의 줄거리:
오답은 왜 매력적인가? 책 제목입니다. 수능의 영어 시험을 대비하는 책인데 특이합니다. 정답을 찾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오답을 피하는 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 인생의 가치는 내 행동의 정답률에 있습니다. 오답을 피해야 합니다. 다 이루었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생애 전체가 행동정답률 100라는 뜻도 담고 있을 것입니다. 나는 어떻게 매력적인 오답을 피할 수 있을까요?
오답은 왜 매력적인가
(눅5:12~16)
12. ○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 몸에 나병 들린 사람이 있어 예수를 보고 엎드려 구하여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니
1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나병이 곧 떠나니라
14. 예수께서 그를 경고하시되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가 깨끗하게 됨으로 인하여 모세가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더니
15.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 오되
16.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오답은 왜 매력적인가>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오답은 왜 매력적인가?’
이 제목은 시중에 나와 있는 책의 제목입니다.
이 책은 수능시험을 봐야 되는 수험생들을 위한 책입니다.
특별히 외국어 영역, 꼬집어 말하자면 영어에서 어떻게 오답을 피할 수 있을 것인가를 아주 논리적으로 피력한 책입니다.
그냥 책 소개를 봤는데 내용이 어떤 것이냐 하면 3년 동안 있었던 수능시험 중에서 오답률이 높은 문제들을 6가지 유형으로 나누었습니다.
그 6가지 유형 중에서, 최고의 오답률을 기록하고 있는 문제들을 한두 개씩 뽑아 가지고 그 문제에 논리적인 분석을 가하게 됩니다.
그래서 출제자들이 이 문제 속에서, 오답을 이끌어내기 위해 어떤 의도를 심어 놨는가를 분석해 냅니다.
이런 문제일 경우에 정답률이 20% 밖에 안 되는 거예요.
그리고 오답인데도 불구하고 어느 특정 항목에 집중적으로 한 40% 가량이 그 항목을 선택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게 매력적인 오답이라고 말을 했습니다, 매력적인 오답.
왜 오답이 매력적일까?
모든 시험을 대비하는 책들이 그걸 분석해서 어떻게 정답을 찾을 것인가라는 것을 가르쳐 주잖아요?
근데 이거는 참 특이하게도 어떻게 오답을 피할 것인가를 가르쳐 줍니다.
왜냐하면 오답이라는 게 정답보다도 훨씬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끔 문제를 출제하고 있으니까 그 매력에 빠지지 말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 매력을 분쇄 시키는 겁니다, 매력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
오답을 피하는 길.
‘오답이 왜 매력적인가’ 이 책에서 말해주려고 하는 이 오답을 피하는 길, 이거~ 신앙에 있어서도 정말 치명적으로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내가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고 운명하십니다.
그 말씀은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내려와서 인간으로 살았는데, 인간으로 살면서 행한 모든 말과 모든 행동이 다~ 정답이었다.
100% 정답이었다는 말씀의 뜻을 담고 있다는 겁니다.
‘내가 다~ 이루었다’
내 인생의 질, 가치 이게 정답률에 달려 있다는 거예요.
어떻게 오답을 피하고 정답으로 행동하고 말하느냐에 달려있고, 지금 내가 마음이 불편한 것은 과거에 오답을 행동했기 때문에, 오답으로 말했고, 오답으로 행동했고, 오답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지금 내 마음이 불편한 겁니다.
자, 어떻게 오답을 피할 수가 있겠습니까?
여기에 깊은 아이러니가 있어요.
이 오답이 왜 매력적인가라는 책의 저자들은 수험생들에게 정답을 맞혀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걸 전제합니다.
그러므로 정답을 낼 수 있는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려면 오답의 매력을 깨뜨리고 오답의 매력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어야 되기 때문에 이 책을 쓴 것입니다.
근데 우리는 매~ 인생에 있어서, 인간사회에 있어서 내가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들 가족이든 친구이든 동료이든 뭐 누구든지 간에, 그 모~든 관계는 나에게 생각과 말과 행동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근데 내가 그 모~든 말과 생각과 행동에 있어서 정답을 낼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아야 된다는 거예요.
내가 정답을 낼 수 없어요, 여기에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오답을 피하는 길은 의외로 영어시험을 봐야 되는 수험생들보다 우리가 쉬어요.
인생이라는 게 시험 하나로 결정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수험생들이 영어시험을 볼 때보다, 우리의 문제가 더 중요하고 시급한데, 오답을 피하는 길은 우리가 훨씬 쉽다는 겁니다.
뭘까요?
나는 절대로 정답을 낼 수 없는 자라는 것을 아는 거예요, 그러면 오답을 피할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정답을 찾아내려고 시도하지를 않는 겁니다.
그러면 오답을 피할 수가 있는 거요.
우리가 정답을 내려고, 정답을 찾으려고 시도할 때 반드시 오답에 빠질 수밖에 없어요.
우리는 정답을 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예수님이 이 땅에 안 오셨다고 가정할 때에, 또 예수님 오시기 전에, 하여간 예수님과 연관된 이 구원의 역사가 없다고 가정해서, 일반 사람들 우리가 자연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다 통틀어 놓고 인생이라는 시험을 봤을 때, 100점이 누구겠습니까? 100점이.
100점이라는 말은 말이 안 될지 모르겠어요, 정답을 우리가 낼 수 없으니까.
그러면 가장 현명한 자가 누구겠습니까?
소크라테스에요 소크라테스.
왜? 소크라테스가 뭐라고 말합니까?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
다시 말하면, 결코 어느 문제에서도 정답을 낼 수 없는 자라는 걸 안다.
그러니까 소크라테스가 1등이라는 거예요.
석가모니 부처께서 온~갖 장광설, 팔만대장경의 모든 얘기를 다 만들어 냈습니다.
그 말이 많으면 많을수록 뭐냐 하면, 나는 답을 낼 수 없는 자라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증명하고 있는 겁니다.
많은 말이 필요 없어요.
나는 내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
공자님께서 그 많은 경전의 내용을 다 입으로 토해 내셨지마는, 궁극적으로는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얘기에요.
답을 낼 수가 없다는 얘기에요, 답을 낼 수가 없다.
이게 인간입니다.
누가가 베드로의 사건을 기록합니다, 베드로를 부르는 사건을.
예수님께서 부르시는 사건을 고기 잡는 기적과 함께 써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베드로의 입에서 불쑥 전혀 구약에서 죄인들이 제사를 지냄으로써 사함을 받는 그러한 맥락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고기를 잡느냐 못 잡느냐, 잡았다 잡혔다, 이런 맥락에서 자기 사업의 현장에서 죄인이라는 고백을 불쑥 내뱉게 됩니다.
이 죄인이라는 고백의 내용이 뭐였다고요?
그나마 하나 남은 영역, 어떤 영역? 내가 인생을 살아갈 때 답을 낼 수 있다고 믿었던 영역, 그 영역에서 조차 예수님이 깊은데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하는 말씀을 우습게 여기고 그물을 내렸다 고기가 잡힌 이 이해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도~저히 자기 머리로서는 고기가 잡힐 수가 없는 것이었는데 잡힌 이 상황 앞에서, 내가 도대체 내 인생에 대해서 답을 낼 수 있는 부분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단 한 군데도 자기가 답을 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자기가 답을 낸다면 다~ 빗나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압니다.
‘내가 죄인입니다’라고 말할 때 이 ‘하마르톨로스’.
이 ‘하마르티아’라는 이 죄라고 하는 이 말이 곧 무엇을 말합니까?
빗나간다는 걸 말해요, 빗나간다.
그러니까 내가 무엇인가 누군가에 대해서 어떤 일에 대해서 답을 내기만 하면 다 빗나가는 거예요.
나는 빗나가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나와 관계를 맺고 나에게 어떤 행동을 요구하실 때, 내가 주님을 향하여 행동을 해야 되고, 생각을 해야 되고, 말을 해야 될 때 나의 행동은 빗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고백하고 예수님이 측근으로 부르셔서 따라다니는데, 3년 동안 따라 다니는 동안에 계속 예수님에 대한 생각자체가 빗나가지 않습니까?
계속 빗나가는 거예요.
죄인이라고 고백하고 자기가 답을 낼 수 없다고 고백하고서 쫓아다니는데도 빗나가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다윗과 같은 나라를 재현하실 것이다… 이 땅 위에서 이상 국가를 만드실 것이다. 마르크스가 말하는 것처럼, 신천지가 말하는 것처럼, 이 땅 위에서 뭔가 삶의 이상향을 건설하실 것이다.’
오답을 갖고 쫓아다닌 거예요, 3년 동안.
여러분, 오늘 나병환자를 고치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베드로가 사업장에서 죄인이라고 고백한, 자기는 사업에 대해 전문가인줄 알았는데 아~무런 답을 알 수 없음을 깨닫고 죄인이라고 고백한, 이 의미의 죄인이라는 주제를 아주 집요하게 반복해서 누가가 물고 늘어지고 있습니다.
나병환자를 고쳤다는 것은, 그 당시에 불치병이 고침을 받았다는 것을 메시지로 전하려는 게 아니에요.
나병환자 같은 불치병도 주님의 능력 안에서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신앙의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메시지로 전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럼 메시지의 내용은 뭐냐, 나병환자를 상징적인 의미로 이해하면서, 이 죄인이라고 하는 문제를 더 깊이 심화시켜 나가는 겁니다.
누가가 강조하는 죄인은, 마태와 마가에서보다 더 특징적인 면이 있습니다.
양날의 검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죄를.
죄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을 뿐만 아니라, 이 세상 인간사회에 대한 관계도 끊어진 것으로 누가는 지금 강조하고 있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관계를 맺으면서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기뻐하는 자라는 그러한 소통이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 죄일 뿐만 아니라, 이 세상사회에 대해서도 결코 살아갈 수 없는 자라는 것을 누가는 말하고 있는 거예요.
죄가 바로 그렇게 사회에 대한 관계도 끊어놓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나병환자가 누구입니까?
왜 나병환자를 통해서 베드로가 죄인이라고 고백한 사실을 더 깊이깊이 그 뜻을 드러내고 있습니까?
그 당시 나병환자는 사회로부터 격리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병환자들이 모여서 사는 곳이 따로 있고, 정상적인 인간사회로부터 완전히 소외되고 격리돼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혹시 나들이를 하게 될 경우에, 얼굴을 다 가리고 나들이를 하는데 먼데서 사람들이 걸어옵니다. 이때 자기가 멀리 있기 때문에, 나병 걸린 자라는 것을 모르고 사람들이 걸어올 때, 가까이 오기 전에 소리를 질러야 됩니다.
‘부정하다~ 부정하다’ 이래서 그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게로 오면 안 된다는 걸 깨닫게 해 주어야 됩니다.
그렇지 않고 아무 소리 안하고 사람들이 가까이 왔다가, 나병 걸린 것이 확인이 될 경우에는 동네 사람들이 다 나와 가지고는 돌로 쳐 죽여야 됩니다.
이 나병환자의 현실을 그대로 죄인의 현실로 갖고 오는 거예요.
오버랩을 시키는 거예요, 지금 누가가.
무슨 말일까요?
내가 가정에서 생활을 합니다.
아내와 남편이 부부로서 살아갑니다.
이때 남편이 아내에게 다가오고 아내가 남편에게 다가갈 때, 각자는 이렇게 외쳐야 된다는 거예요, ‘부정하다~ 부정하다’ 내가 부정하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지금 아내인 나에게, 당신을 향한 행동과 생각을 요구하고 있지만 나는 당신을 향한 나의 행동과 생각이 있어서 정답을 말할 수가 없고, 내가 생각하고 내가 당신을 향하여 행동을 하게 될 경우 그래서 당신과의 관계를 통해 당신에게 접촉할 경우에는, 당신이 나로부터 나온 오답에 의해서 오염될 수밖에 없다’라는 걸 알고, 결코 아내가 남편을 향하여 남편이 아내를 향하여 부모가 자식을 향하여 자식이 부모를 향하여 정답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수 없다는 것을, 나병환자가 ‘부정하다~부정하다’라고 말해서 사람들이 내게 가까이 오는 것을 금하는 것처럼 그렇게 금해야 된다 이겁니다.
그러지 않으면 다 오답입니다.
오답을 피할 수 있는 길은, 나병환자가 인간사회로부터 격리되듯이, 내 마음이 내가 속한 인간사회로부터 격리 되어야만 된다는 거예요.
그래야 오답을 피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 세상은 온통 매력적인 오답으로 넘쳐 나고 있습니다. 책을 보면 답이 나올 것 같고, 그 동안 내가 살았던 경험에 비추어보면 답이 나올 것 같고, 아무 생각 없이 관습을 따라 그것이 마치 정답인양 무의식중에 행동하고 있습니다.
요대로 하면 반드시 잘 될 것 같다 그런 오답들이 범람하고 있어요.
어느 인생의 분야도 그 어느 전문가도 그 어느 탁월한 고전적인 책들도, 내가 ‘나’라는 한 인간, ‘나’ 라는 특정한 인격이 지금 놓인 이 상황에서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해야 될 정답을 말하는 것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심리학자라도, 유형을 따져서 이런 경우에는 이렇게 행동하라고 가르쳤다 할지라도 내가 자란 배경, 내 몸의 세포수가 그 저자의 세포수와도 다르고, 내 생김새가 다르고, 나를 바라보고 있는 내 애인의 상황이 다르고 그 애인의 세포가 그 상담가가 자기 애인과 만났을 때 그 애인의 세포수와 다르다 그러면, 얘기는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목회 부흥이요?
부흥한 교회를 보면 내가 배울 수 있습니까?
그렇게 따라 했더니 부흥이 됩디까? 아니에요.
내 목회에서 내가 생각하고 내가 행동해야 될 것은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인데, 그 누구도 세상에는 답이 없는데, 그 답은 하나님으로부터만 와야 된다는 얘기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인간사회 안에서 있는 사람 중에서는 아무도 접촉하면 안 되는 나병환자에게 예수님이 접촉을 하시고 낳게 해 주시고 제사장에게 보내십니다.
예수님만이 접촉이 가능하다는 얘기에요.
다시 말하면, 내가 이 인간사회 안에서 어떤 답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사회로부터 격리되어야 되는 그 나에게 첫 번째로 내가 아니라 그 쪽에서부터 관계를 맺어오는 유일한 존재가 예수님이시고 하나님이시라는 얘기입니다.
아무에게도, 아무하고도 관계를 맺어서는 안돼요.
왜? 정답을 낼 수 없으니까, 다 오답으로 오염시킬 수밖에 없으니까.
그러한 나병환자와 같은 나에게로 다가와서 나를 접촉하고 나에게 관계를 열어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제사장에게로 보낸다는 얘기는 무슨 얘기입니까?
유대사회의 규정에 의하면, 제사장의 확인을 통해서 유대사회의 정상적인 사회인으로서 사회생활로 복귀될 수가 있다는 얘기입니다.
우리가 정상적으로 복귀되려면, 나병이 나아야 된다는 거예요.
이 나병이 나아서 정상적으로 복귀되는 과정을, 주님께서 16절에 한적한 곳에 가서 기도하는 모습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한적한 곳이라는 것이 무엇을 말합니까?
삶이 끊어진 곳이에요.
인간사회에 뜨겁게 팽팽 돌아가는, 사회생활이 끊어진 곳이 한적한 곳입니다.
이곳에 가셔서 기도하시는 이 예수님의 모습. 예수님은 죄인이 아니시고, 당신 스스로만 해도 모~든 답을 다 낼 수 있는 분이시지만, 당신을 마치 모~든 여타의 인간처럼 당신을 낮추시고 낮추셔서, 당신에게는 마치 답이 없는 것처럼 여기시고, 인간사회를 떠나셔서 이곳에서 기도하시는데, 이 기도의 내용이 뭡니까?
세례 받고 올라오셨을 때의 기도에요.
결국, 하늘 문이 열리고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고백을 하시고, 주님도 ‘하나님만이 내가 사랑하시는 대상이고 나의 기쁨의 유일한 대상입니다’라는 이 하늘과 땅이 서로 상응하는 이 기도를 드렸던 것이지요.
이렇게 하나님으로 충만해진 상태에서만 세상으로 복귀될 수가 있다는 거예요.
이게 죄가 극복된 상태입니다.
내가 인간세상 안에서 돈을 벌고 싶고, 명예를 얻고 싶고,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고, 승진하고 싶고, 결혼하고 싶고 대학에 합격하고 싶고, 인간사회 안에서 내 마음의 소원으로 가득 찬 것들을 안고 있는 동안에는, 우리의 나병이 극복될 수가 없고 그렇게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 이외의 것들이 가득 차 있는, 나병의 상태에 있는 동안에는 오답밖에 나올 게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므로 제일 먼저 해야 될 일은, 이 사회로부터 내가 나병환자이다, 절대로 나에게서는 답이 나올 수 없다, 정답이 나올 수 없음을 깨닫고 이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는 겁니다.
아내로부터 남편으로부터 자식으로부터 부모로부터 일로부터 사업으로부터 모~든 것으로부터 내 애인으로부터, 심지어는 내 몸으로부터 내 몸에 대해서도 내 마음은 정답을 낼 수 없기 때문에 격리시키는 거예요, 나병환자처럼.
격리시켜요.
주님께서 한적한 곳으로 가시는 것처럼 나를 격리시켜서 오직 하늘을 향해 기다리는 겁니다. 이 일이 주님의 십자가에서 일어난 거예요.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는 이유가 뭡니까?
내가 나병환자임을 고백하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격리될 수밖에 없는, 답을 낼 수 없는 자라는 사실을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으면서 고백하는 것이고,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으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께서 내게로 다가 오셔서, 내 마음을 채워 주실 때까지 기다리는 겁니다.
이렇게 하나님으로 기쁘고 하나님으로 만족한 상태가 된 뒤에라야 세상으로 다시 복귀되어서 살아갈 때에, 하나님으로 기뻐서 이 세상에서 얻고 싶은 것이 없는 그 상태에서야만 자식을 향한 정답, 아내와 남편을 향한 정답, 직장에서 내게 주어진 일에 대한 정답, 사장님을 향한 정답, 애인을 향한 정답이 내게서 나올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매력적인 오답을 피하는 길!
나에게서 정답이 나올 수 없다는 사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그 주님이 내 모습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서, 하나님으로 성령님으로 하늘의 기운으로 채워질 때까지 기다리신 다음에 세상을 향해 나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는 십자가를 통하여 이 세상 사회로부터 격리되어야 하는 나병환들입니다.
우리가 사람과 관계를 맺고 일과 관계를 맺으면 오직 모든 것이 다 만지는 대로 나병이 전염되듯이, 오답에 의해서 오염되고 전염될 뿐임을 기억하게 하여 주시고, 십자가에서 하늘로 채워질 때까지 기다림을 통하여, 하나님으로 채워진 죄 사함 받은 자로 이 세상을 향해 나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