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시 자긍심의 시작 ‘거제의 노래’ ‘거제의 노래’는 거제시를 상징하는 노래입니다. 거제시 자긍심의 시작이면서 거제시민이라는 자부심을 가지는 시작은 바로 ‘거제의 노래’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거제의 노래’를 3절까지 모두 부를 수 있는 거제시민은 아마도 손가락에 꼽을 정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거제의 노래’는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을까요? 또 노랫말은 누가 썼고, 곡은 누가 만들었을까요? #‘거제의 노래’ 탄생
거제의 노래는 1953년 만들어졌습니다.
1995년 6월 25일 발행된 청암 신용균 초대 거제 교육감이 쓴 회고록 ‘孝는 사랑의 샘’에 거제의 노래에 관한 내용이 있습니다. 거제의 노래는 1914년 거제군이 통영군에 통합됐다가 1953년 39년 동안이나 잃어버렸던 거제군이란 이름을 되찾은 것을 기념해 만들었습니다.
‘孝는 사랑의 샘’에 따르면 거제교육청(교육감 신용균)은 삼천리 금수강산의 축도판인 우리 거제를 재천명하기 위해 각 부 면의 특수성과 역사성을 담은 노래를 만들기 위해 공모했습니다.
공모에는 수십 편의 노래가 참여했습니다. 이 가운데 무원 김기호 하청중학교장(1912년 하청면 사환 출생․1978년 12월 4일 작고)의 노랫말이 채택됐습니다.
경상남도 장학사 김원갑 학형의 주선으로 금수현 선생이 곡을 붙이고 장승포초등학교 심순심, 임금진 교사에게 안무를 맡겨 장승포 가설극장에서 첫 발표회를 가져 큰 성과를 얻은 뒤 각 학교에 보급해 애창하게 했습니다.
무원 김기호 선생은 1953년 12월 21일 거제의 노랫말 초안을 만들어냈습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노랫말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거제의 노랫말 초안
1절. 섬은 섬을 돌아 연연 삼백리/구비구비 스며 배인 충무공의 그 자취 /오랑캐 침략에도 지켜온 강토/에야디야 우리 거제 영광의 고장 2절. 계룡산 기슭에 떨어지는 폭포수/구천동 삼거리를 감돌아 흘러갈제/ 갈고지 해금강 절승이로고/에야디야 우리 거제 금수의 고장 3절. 동백꽃 그늘 여지러진 바위 끝에/미역이랑 까시리랑 캐는 아기 꿈을랑 /두둥실 갈매기의 등에나 실고/에야디야 우리 거제 평화의 고장
#‘거제의 노래’ 노랫말
무원 선생은 연필로 쓴 노랫말 초안에 잉크로 겹쳐 노랫말을 고쳐 놓았습니다. 1절의 ‘삼백리’를 ‘칠백리’로, ‘오랑캐 침략에도’를 ‘반역의 무리에서’로 고쳤습니다.
2절은 ‘구천동 삼거리를 감돌아 흘러갈제’를 ‘구천동 한내 흘러 삼거리를 감돌제’로, ‘갈고지 해금강 절승이로고’를 ‘갈고지 해금강은 이 땅의 절승’으로 고쳤지만 3절은 고치지 않았다.
이틀 뒤인 12월 23일 다시 노랫말을 고쳤습니다. 1절과 3절은 그대로 두고 2절을 수정했습니다. ‘구천삼거리 물 따라 골도 깊어 계룡산 기슭에 폭포도 장관인데 갈고지 해금강은 고을의 절승’으로 바꿨습니다.
무원 선생은 거제의 노랫말을 완성한 뒤 노랫말은 쓴 뒷면에 작곡에 참고가 될 수 있도록 작사자의 의도를 밝힌 편지글 형식의 글을 남기는 세심함을 보였습니다.
그는 편지글 형식의 글에서 “가사의 내용은 경쾌 명랑한 민요조를 겨눠 2, 3, 4를 기조로 했다는 것과 거제사람만이 품을 수 있는 애틋한 향수를 주제로 했으며, 극히 인상적이고 대표적인 몇 가지를 등장시켰다”라고 적었습니다.
‘거제의 노래’는 잃어버린 거제군을 되찾은 것을 기념하고 삼천리 금수강산의 축도판인 거제를 재천명하기 위해 거제사람만이 품을 수 있는 애틋함을 담고 있습니다.
청암 신용균, 무원 김기호 선생 등 고향 거제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열정으로 탄생한 ‘거제의 노래’가 거제에서 널리 불렸으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