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디가 덮인 묘지옆은 우리의 놀이터다
나이든 형들과의 경기에서도 항상 승자가 되었다
그 때의 승기는 평생을 승자로 위치를 잡게 한다
작은누님과 난 나이차이가 4살인가 났다
누님이 공부를 하면 난 아랫방에서 듣고 따라하곤했는데
구구단을 외는데도 누님이 잊고 까먹으면 내가 알려주곤했다
누님의 자존심이 많이 상했을거다
그래서 간혹은 다투기도 했다
국민학교 1학년에 개근상을 받았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무조건 학교를 가야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폭우가 쏟아져 길이 끊어져도 산을 넘고 위험을 감수하고도 학교를 갔던 기억이 있다
삶의 자세가 잡히고 책임감이 생긴 참으로 보람있는 상이었다
우등상을 계속 받았다
졸업때까지 언제나 우등상을 받아서 주변에서는 공부 잘 하는것으로 인식이 되었으며
나의 자신감이 이대 형성 되었나 생각한다
4학년때 선행상을 받았다
그 상이 나를 언제나 착한 아이로 살게 만들었다
세상의 문제를 스스로라도 풀어야하는듯한 생각을 많이하게 했다
씨름장사타이틀을 언제나 내가 차지했다
공격을 하고 방어를 할줄알았고
씨름의 이치를 알았다
그래서 언제나 난 장사타이틀은 나의 차지였다
세상을 대범하게 살수 있었던 이유가 된듯하다
전교어린이회장 선거에서 내가 선출 됐다
난 겸손이 심하게 지켜야하다는 교육을 통하여 고사를 했지만
담임선생님의 지시로 그대로했다
평생 나의 책임감의 범위가 넓어진 이유가 됐다
친구들의 자잘못이 다 나의 이유로 생각되었다
국민학교 졸업날 교육감상을 받았다
졸업시험 1등을 했기에 나의 몫이 었다
늘 자신감과 두려움이 없이 도전하는 욕기가 생긴듯하다
중학교 2학년에 대구로 유학을 왔다
누님의 권유로 타지로의 진학이 막힌다는 그 당시의 상황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대구로 전학을 왔다
남들은 생각도 못할때 몇 안되는 전학생중의 하나였다
중학교 2학년 체육시간에 씨름을 했다
전국 단체전 2등을 한 씨름선수들과의 대결에서 월등한 기량으로 기겼다
학생들이 난리가 났다
씨름선수가 나왔다고 체육서냉님에게 알렸는데
당장 사진을찍어오라고 하셨다
대회에 바로 투입할려고했는데 우리엄마의 만류로 그만 뒀다
그때부터 학교에서는 힘의 심벌로 내가 늘 거명 되었다
고등학교때는 핸드볼로 존재감을 조금 보였다
서로를 알기전이어서 팀웍을 이뤄서 승리하지는 못했는데
가능성을 보고 차기에 승리를 다짐해지만 기회는 없었다
대학에서도 씨름으로 완전히 두각을 드러냈다
전국한의대체육대회 행림제에서 6년간 씨름 우승을 만들었다
선배후배들의 기억에 힘으로는 문정경이라는 인식이 강하게 심어줬다
졸업후 동창회장인 이규현선배의 추천으로 장생한의원에 취업을 했다
대구에서 유명한 한의원에 내가 선정 된것이다
1년을 할아버지 밑에서 진료를 보고 할아버지가 나가서 개원하라고 하락을 해줬다
환자들이 할아버지와 같은 진단이나온다는 얘기가 많으니 그렇게 하라고 하시곤 돌아가셨다
마무리 해드리고 난 개원을 했다
개원후 고향의 모교가 폐교되고 어느 종교단체로 팔려서 모교가 없어진다는 정보를 듣고
급하게 동참회를 재건해서 불매운동으로 학교를 지켰다
아직도 동참회가 잘 되고 있는데 그 일로 내곡초등학교의 부지는 군에서 매입하여
낫질의 문화의 중심지로 보존되고 있다
2대 달서구의원으로 재선거에서 무투표 당선 되었다
많은 출마 예정자들을 대화로 설득하여 혼자 출마하여 당선 된것이다
몇 억씩 들여서 하던 시절에 난 돈 30만원정도 들이고 당선 되었다
40에 한의원을 그만 두었다
의료업으로 호구지책을 삼지 않겠다는 나의 철학을 지켰는데
친구들의 기술을 갖고도 사용하지 않는것도 죄악이라는말에 걸려
허한방병원장으로 갔다
10년간 170억의 적자를 보고 허준영이사장은 옥상에서 뛰어 내리고 싶다고 할때
내가 가서 경영개선을 시켜 흑자로 돌려놓았다
직우너 150명은 이사장을 싸이코라 외면하고 이사장은 직우너들을 나의 도난 먹는 버러지라 칭하면서
서로가 버티던 시기에 나의 기획력과 실행력은 전직원의 호응을 받고
양방의 병원장고 과장들의 적극적인 협조로 분위기를 쇄신하고 정상화시켰다
지금도 그 병원에서는 인사듣고 나간 유일한 사람이라 칭송듣고 있다
나의 후원회라고 있었다
야유회겸 등산을 몇 번 다녔는데 술이 지나치게 과한 분위기라 사람을 죽이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난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지 죽이는 사람 아니니 등산회를 조직하여 건강을 돌보기로 했다
술을 절제하고 차안에서는 금주등 몇 가지 원칙을 엄하게 적용하여 많은 호응을 받았다
3천명의 회원에 정기산행 버스 5대씩 다녔으니 대구시내 산악회장과 산대장은 모두 벤치마킹하려 왔가고 본다
많은 프로그램으로 회원들의 자존감을 대단히 높인 대단한 모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