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연대기(孔子 年代記)
-사마천의 사기 공자세가47권-
○기원전 552년 : 11월 노(魯)의 창평향 추읍에서 출생(아버지숙량흘,어머니안 징재) 周영공21년, 魯양공22년(일설 21년)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
○기원전 549년(3세) : 아버지 숙량흘 사망
○기원전 544년(8세) : 놀 때 항상 제기를 벌려놓고 제사지내는 놀이를 함
○기원전 535년(17세) : 어머니 안씨와 사별. 양친 합장
○기원전 533년(19세) : 송의 견관씨(幵官氏)와 결혼
○기원전 532년(20세) : 아들 공리(孔鯉)가 출생(자 백어)
노나라의 위리(委吏:소 등 희생에 쓰이는 가축의 관리)가 됨
○기원전 531년(21세) : 노나라의 사직리(司職吏:회계를 담당하는 벼슬)가 됨
○기원전 522년(30세) : 12월 주나라로 가서 노담(노자)에게 예를 묻다
중궁(仲弓) 유약(有若)이 태어남.
○기원전 517년(35세) : 삼환씨(계.숙.맹씨-즉 노환공의 후손으로 노나라의 실력자)의 반란으로 군주인 소공과 함께 제나라로 망명- 최초의 정치적 행동
○기원전 515년(37세) : 노나라로 귀환. 벼슬을 아니 하고 제자들을 받아 교수함.
○기원전 514년(38세) : 제자 안회(자 자연) 출생
○기원전 507년(45세) : 제자 자하 출생
○기원전 506년(46세) : 제자 자유 출생
○기원전505년(47세) : 제자 증삼(증자) 출생
○기원전 502년(50세) : 노나라의 실력자 계환자의 가신 공산불뉴의 반란 발생. 공자에게 참가 권유하였으나 공자는 참가하지 않음
○기원전 501년(51세) : 제자 민자건 출생
노나라의 군주 정공에게 등용되어 중도(仲都:노나라의 지방 고을 이름)의 지방관이 됨
○기원전 500년(52세) : 노나라의 사구(司寇:사법 장관). 사공(司空:건설부 장관)이 됨. 군주 정공을 모시고 제나라의 경공과 협곡에서 회맹하고 노나라의 잃어버린 땅을 되찾음
○기원전 498년(54세) : 중신(3환씨)들의 세력을 약화하기 위한 巨城(거성:큰 성)파괴작업 착수. 계씨와 숙씨의 성은 파괴하였으나 맹씨는 거부. 군주의 권한강화 목적으로 대부인 소정묘주살(죽임)
○기원전 497년(55세) : 제나라에서 노나라의 국력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미녀80명을 보내옴. 이로 인하여 군주인 정공과 계씨 등이 정사를 소홀히 함.
공자는 벼슬을 사직하고 제자들과 함께 위나라로 망명
○기원전 496년(56세) : 위나라를 떠나 광(匡)땅(현재 하남성 장원현)에서 구속. 제자들의 노력으로 가까스로 석방되어 이후 진(晉)나라로 가려다 다시 위나라로 돌아옴
○기원전 495년(57세) : 송나라의 사마환퇴(일명 사마추)가 공자를 죽이려 함
○기원전 492년(60세) : 위나라의 영공이 죽고 출공이 즉위
○기원전 489년(63세) : 진(陳)나라에서 채(蔡)나라로 가던 중 폭도들에게 포위되어 양식이 떨어짐. 채나라에서 섭공을 만난 후 다시 위나라로 돌아옴
○기원전 487년(65세) : 계속 위나라에 머무름. 제자 염유가 노라로 가서 계씨의 가신이 됨. 부인 견관씨 죽다.
○기원전484년(68세) : 노나라에서 공자를 부르므로 노나라로 귀국(유랑 14년 만). 벼슬을 아니하고 시.서.예악.주역 등 정리하며, 교육에 힘씀
○기원전 483년(69세) : 제자 안회와 외아들 공리(당시 50세)가 죽음
○기원전 481년(71세) : 노나라에서 기린을 얻다. 노나라의 연대기 춘추(春秋)를 제작
○기원전 480년(72세) : 제자 자로가 위나라의 정변에 관련되어 죽음을 당함
○기원전 479년(73세) : 공자의 죽음(夏4月己丑日)
노나라의 도읍(수도) 곡부의 북쪽 사수(泗水)의 언덕에 장례함. 제자들이 心喪(심상: 상복은 입지 아니하나 마음으로 장례를 치름과 같이 함)3년을 한 후 임지로 돌아갔으나, 제자 자공만은 3년상을 치른 후 다시 공자의 무덤위에 여막을 짓고 3년을 시묘함
한민족의 9,200년 실존 역사를 단군신화로 왜곡한 주범들
●환단고기(桓檀古記)---恒泉(늘샘) 강수원 번역편.
발행일: 1985년 11월 15일
발행처: 온누리
번역 : 恒泉(늘샘) 강수원
1916년 전북 고창 출생. 고창고등보통학교 졸업.동경 전수대학 졸업.
일본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43년 시모노새끼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
히로시마 형무소에서 복역. 1945년 8.15해방과 더불어 귀국.
이리(현 익산) 남성고등학교 국사교사로 재직. 원폭 피해자 협회장 역임.
※ 강수원님께서 저술하신 책 "환단고기" 번역본 p200~p208까지를 발췌해서 소개 합니다.
강동수<민초>
환단고기의 해제
우리의 지상 목표인 민족 중흥과 조국의 선진화 사업을 이룩함에는 사기를 드높여야하고 사학(史學)을 밝여야 한다.
사학이 밝지않으면 사기를 떨치지 못하며, 사기를 떨치지 못하면 나라의 뿌리가 흔들리고 정법(正法)이 갈라진다.
나라의 뿌리가 흔들리고 정법이 갈라지는데 어찌 중흥과업 및 조국의 선진화 작업을 이룰 수 있겠는가.
나라에는 나의 꼴이 있고, 역사에는 얼(魂)이 있으며, 나라는 역사와 더불어 이어가며 발전한다.
나라에는 역사가 있고 나라의 꼴에는 얼이 있다.
꼴만 있고 얼이 없으면 나라를 보전할 수가 없다. 우리는 신시(神市( 개천(開天) 이래로 스스로 그 전통을 이어왔으며,
나라와 민족은 그 전통을 이어받으며 지속적으로 발전했다. 이것이 우리의 정통 이념과 주체성을 이루었고 전통문화를 이루었다.
이러한 전통이 민족혼이다. 이를 잃어버리고 어찌 나라를 보전하며 중흥과업인들 이룰 수 있겠는가.
우리는 이러한 고귀하고 찬란한 민족혼을 잃고, 남의 정신에서 살다가 국권을 빼았기고 후진국으로 전락했다.
광복 후 천우신조로 나라는 되찾았으나 역사와 얼은 되찾지 못하고 있다.
이에 우리는 민족의 중흥과 조국의 선진화를 위해 크게 자각하고 반성하여 일대 혁명을 이루어야 한다.
첫째, 조국의 현대화와 선진화를 위한 민주혁명이다.
둘째, 조국의 평화 통일을 위한 민족 혁명이다.
셋째, 정신 사상의 개선을 위한 교육과 사학 혁명이다.
이 혁명에서 가장 기본이 되고 선행 되어야 할것은 교육 혁명과 사학 혁명이다.
그러나 선행 되어야 할 사학 혁명은 실로 난제중의 난제이다. 왜냐하면 우리 역사상 가장 기본이 되는 고전(古典)은 거의 인멸 되었거나
왜곡 . 위조 되었으며, 이를 착각 오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1. 고사(古史)의 인멸
우리 고사는 5천년이란 기나긴 역사속에서 거의 인멸 . 왜곡 . 위조됐다.
첫째, 외적의 침략에 의해 불타 없어진 것만도 고구려 동천왕때 관구검에 의한 환도성함락(A.D. 244), 백제 의자왕때 나당(羅唐) 연합군의
사비성함락(A.D.660), 고구려 보장왕때 나당(羅唐) 연합군의 평양성함락(A.D.668), 고려 고종때 원(元)나라의 침략전쟁(1233), 조선조
선조때의 임진왜란(A.D.1592), 인조때의 병자호란(1636)에서 수 많은 전적과 사서가 불타고 약탈당하여 없어졌다.
둘째, 국내 정변에 의해 불타서 없어진것으로는, 신라말 경순왕(727)때 후백제왕 견훤이 신라의 서울 경주를 점령 신라의 모든 전적을
완주(完州)로 옮겼는데 왕건 태조가 후백제를 쳐 합병할때 모두 불타 없어졌다.
셋째, 정치적 의도에 의해 벙책적으로 분서 . 소멸한것은 조선조 3대 태종11년(1910)에 5북학당을 송제(宋制)로 설치하고 정주학(程朱學)을
정교(政敎:정치와 종교)의 기본으로 하는 숭유정책(崇儒政策)을 강행하면서 비 유교적 서적을 불태웠고, 1910년에 왜적이 국권을 박탈하고,
신민정책을 강행하면서 그나마 몇점 안되는 고서마저 몰수해 불태워 버렸다.
2. 역사의 왜곡 날조
이와같이 외세 침략과 국내의 변란 또는 정치적 정책의 소용돌이속에서 뜻하지않게 방화 . 약탈 . 분서 등의 갖가지 수난을 당하면서도 간신히
맥을 이어온 약간의 사료마저 종교적 . 사상적인 외세의 침입으로 인한 편견때문에 우리의 민족사론은 외래 신교와 외래 사상과 문화만을
맹신하는 얼빠진 사대주의자에 의해 박멸됐으며 그들의 손에 의해 왜곡 날조 당했다. 이와같이 우리의 역사는,
(1) 중국 사가(史家)들에 의한 위조---
중국 사가들은 소위 춘추필법이라고 해서 중국을 높이고 존중하며 주변국가를 오랑캐라고 천시하는
존화황국사관(尊華皇國史觀: 중국은 황제나라라 하여 역사를 높이 보게함)에 빠져 그들의 국치(國治)에 관한 역사는 모조리 없애버렸을뿐
아니라 역사를 위조하고 날조했다.
(2) 사대모화주의자(중국을 흠모하는자)에 의한 위조---
옛날 단군조선 이래로 올바르고 밝은 역사서, 이를테면 배달유기(倍達留記) . 단군세기(檀君世紀)를 필두로 고구려때의 유기(留紀).
신집(新集). 백제때의 백제기 . 백제본기 . 백제신찬 . 신라때의 신라본기 . 삼성기(三聖紀) . 표훈천사(表訓天詞)등 많은 고사들은 수난을
겪어 없어지고 현재 넓리 알려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만이 남아있어 신시(神市) 개천과 단군 건국역사를 말하는 이들은 이것만을 들먹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대주의와 외래종교에 빠져 우리의 역사를 왜곡 날조한 대표적인 위사이다.
① 삼국사기(三國史記)는 독실한 유학자인 김부식의 지휘아래 쓰여졌으니 이는 우리 국사라기보다는 한(漢)나라 역사책에 얽매이고,
유학에 빠져 중국 공자가 우리를 오랑캐라 말함을 스스로 달게 여기고, 기자(箕子)가 귀화했다는것도 무조건 믿고, 한무제가 토벌
했다는것도 믿으며 당고종이 평정했다는것도 믿으면서 우리 선민(先民)의 자랑할만한 빛나는 무훈(武勳)이 있음을 찬양하기는커녕
부질없이 황국사관에 의해 쓰여진 역사서이다.(규원사화 참조).
김부식이 고려 인종(仁宗 . 1123~1146)을 위해 삼국사기를 엮을때, 옜날 썽인뜰의 꽁쩎은 끼쑬하찌 아니하꼬 따만 "해동삼국은
역년(歷年)이 장구하나 옛날에는 기록할 문자가 거칠고 옹졸해서 사적이 빠지고 없어져 지나간 일이 희미하다" 했다.
김부식은 이런식으로 그 책임을 모면하려 했으나 조대기(朝代記) . 고조선비기(古朝鮮秘記) . 지공기(誌公記) . 삼성비기(三聖秘記) .
등의 고전을 구하려는 노력이 조선왕조 7代 세조의 수서유시(收書喩示)에도 보이거늘,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쓸때는 이보다 약 3백년전
이었으니 이런 고서가 전혀 없었을리가 없다. 김부식은 중국책에 빠져 주(周)나라를 높이는데 사대주의만이 옳은것이라 하고, 먼저 그
근본을 세워 내 나라를 빛 낼줄을 몰랐다. 어찌 김부식을 우리 정신을 간직한 사학자라 할 수 있으며 삼국사기를 우리의 정사(正史)라
믿을 수 있겠는가.
② 삼국유사(三國遺史)엮시 독실한 불교신자인 일연(一然)에 의해 쓰여졌다. 때문에 삼국유사는 불교적으로 윤색되었고, 그 기록에는
억측과 억설이 많다.
과거 우리 역사에 대해 복애자는,
"신시씨(神市氏)는 동방 인류의 조상으로 아주 먼 옛날, 나라의 기틀을 잡았으니 단군(檀君)이전의 성인이시다.
고려 공민왕때 청평산인(淸平山人) 이명(李茗)이란 이가, 진역유기(震域留記) 3권을 지었다. 이는 조대기(朝代記)를 인용, 우리나라의
고대역사를 기록한 역사책이다. 이 책에서는 일연이 쓴삼국유사와는 현저한 차이가 있고 특히 선가(仙家)의 말이 많다. 이 책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신(神)으로써 교(敎)를 베풀고, 옛것에 쫓아 풍속이 되니 인심(人心)이 점점 좋아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역사를 파악하는 이 책의 내용이 반고(班固 ; 중국 후한 초기의 역사가)나 사마천(司馬遷 ; 중국 전한때 사학가)의 글에
견주어서 못할게 무엇인가. 한(漢)나라는 한나라요, 우리나라는 우리나라다. 어찌 당당한 진역을 한나라에 견줄 수 있겠는가.
하물며 국사서가 여러번 병화에 없어져 이제 겨우 남아있는것은 다만 도가(道家)와 승려들의 기록만이 전하고 있을뿐이지만 그나마
큰 다행이다. 도가는 단검신인(檀儉神人)이 창업한 줄기를 이었을 뿐 아니라 문헌의 잔맥(殘脈)을 얻었으니 동사(東史)를 논함에 있어
억측과 억설이 많은 승려들의 기록보다 훨씬 낫다고 나는 믿는다" 라고 갈파했다.
사실 불교승려인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는 억측과 억설이 많다. 그 첫머리에 고조선 역사를 기록했는데,
*위서(魏書)에 의하면 또는 고기(古記)에 의하면* 이라고만 했지 고기가 조대기나 삼성기, 고조선비기의 내용과는 전혀 다르게 완전히
신화로만 엮었다.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또 일연도 중국서적에 빠져 그 저서에서 "대저 옛날 성인이 예악(禮樂)으로 나라를
일으키고 인의(仁義)로 가르침을 베풀었으므로 괴력난신(怪力亂神 ; 괴이<怪異>와 용력<勇力> 패란<悖亂>과 귀신<鬼神>)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왕이 일어날때는 부명(符命)에 응하고 도록(圖록)을 받아, 보통 사람과는 다른것이 있었다.
그런 뒤에 능히 큰 변화를 타고 대기(大器)를 잡아 대업을 이룰 수 있는것이다. 그러므로 하수(河水)에서 도(圖)가 나왔고,
낙수(洛水)에서 서(書)가 나와서 성인이 일어났다. 무지개가 신모(神母)를 둘러 복희(伏羲)를 낳고 용이 여등(女燈)에게 감촉되어
염제(炎帝)를 낳았다...... 그 뒤의 일을 어찌 다 적으랴 " 하며 이를 전제로 삼국유사를 쓰기 시작했으니 이는 분명히 우리 고사(古史)를
중국책에서 본 신화(神話)로 윤색하고 불교의 색채를 가미한 억설과 억측으로 꾸미려 했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삼국유사에서는, 우리의 정당한 옛 국사인 삼성밀기(三聖密記)나 조대기(朝代記)에서 웅족(熊族), 호족(虎族), 또는
양가(兩家)라고 쓴것에 비해 족(族)자와 가(家)자를 빼버리고 곰(熊), 범(虎)이라고만 했고,
*함께 이웃에 살았다(同憐而居)는 함께 굴에서 살았다(同穴而居)로,
*한얼님의 계율을 잘 지킬 수 있는 착한 백성이 되게 하여주옵소서(願化爲天戒之氓)는 원컨데 사람으로 되게 하여주옵소서(願化爲人)로,
*다시 참 사람이 되어 큰 일을 할 수 있는 대인이 될 것이다(更得踐形之大人者)는 다시 사람의 모양을 얻을것이다(更得人形)로,
*건전하고 씩씩한 아릿다운 여자의 모습을 얻었다(得健者之容)는 곰은 여자의 몸을 얻었다(熊得女身)로,
*마침내 하늘 사업에 참여할 수가 없게 되었다(終不得與之贊天業)는 사람의 몸을 얻지 못했다(而不得人身)로 고쳐썼으니
어찌 이보다 더하게 정사(正史)를 변위(變爲)할 수 있단 말인가!!
이로 인해 우리 정사(正史 ; 한국의 바른역사)는 완전히 신화(神話 ; 단군신화)로 전락되고 말았다.
역대(歷代)에 대해서도 신시역대(神市歷代)의 18대 1565년을 완전히 빼버렸고, 단군 세기 47대2096년도 완전히 무시,
당고(唐高 = 堯) 즉위 50년 경인(庚寅)에 즉위해 단군 혼자서 1,500년간 나라를 다스리고 1908년간 살다가 중국인 기자(箕子)를
주왕(周王)이 조선왕으로 봉하자 단군께서산신(山神)이 돼 승천했다고 했을뿐 아니라 평양성을 지금의 서경(西京), 고죽국(孤竹國)을
지금의 해주(海州)라고 단정했다.이 또한 우리민족 정사를 중국사에 예속시키고 주(周)나라를 존중하는 사대모화(事大慕華)로
날조한 위조사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런 까닭에 삼국유사는 우리민족 정사(正史)가 될수 없고 근본과 뿌리를 져버리고
조국을 배반한 (忘本背源)의 죄악을 범한 망국사기(亡國史記) 때문에 이를 믿을 수 없다.
그러므로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史)만을 유일한 정사라 믿고 이를 참고해 근거로 삼은 많은 역사서를 어찌 믿으며,
또한 우리의 올바르고 밝은 고사를 참고로 바른 사론(史論)을 전개한 이를 사문난적(邪文亂敵)이라 몰아쳐 단죄(斷罪)를 서슴치않은
무리들 손에 꾸며진 역사를 어찌 우리의 정사라 할 수 있으랴!! 더욱이 조상마저 바꾸고 아비마저 배반하는 환부역조(換父易祖)를
강요하던 왜적(倭敵 ; 일본)의 식민사관(植民史觀)으로 역사를 파괴 날조하려고 수많은 고전과 고사를 불태워버린 왜적의
만행속에서 살아남아 그들의 죄악을 합법화시킨 유일한 근거자료를 제공했던것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우리 겨레는 개천(開天)이래 세검 한몸이신(三神一體) 단군 한배검의 천신도(天神道)로 교를 삼고, 홍익인간*이화세계*경천숭조애인을
3대 이념으로 하고, 그 진리는 삼진귀일(三眞歸一), 반망즉진(返妄卽眞), 반진일신(返眞一神), 즉삼즉일(卽三卽一)하는 삼일철학(三一哲學)이요
삼일논리(三一論理)이며, 그 지향하는 끝 목적(究竟)은 민중을 교화해 밝은이(哲人)가 되게 하고(化象成哲) 속된 세상을 이화(理化)해
한울 나라로 만듬(地上仙國)에 있었으니 우리겨레는 신시개천이래로 그 전통을 이어왔으며, 그 전통에 나라도 섰고 민족도 이루었으며
역사와 정통문화는 찬연히 빛났다. 즉, 천도를 어기는 일이 없는 지상선국(地上仙國)을 이루었다. 이로인해 군자불사(君子不死)의 나라,
예의(禮義)의 나라라는 칭송을 받으며 세계인류 문화를 선도했다. 우리의 겨레는 이러한 정신과 이념으로 이어온 겨레이지 외세에 종속당한
어용학자들이 주장하듯이 근본도 없이 외세에 모든면에서 절대 종속 당한 채 수동적으로 일관해온 겨레가 아니다.
3. 외세의 침입과 역사의 파괴 날조
(1) 외래문화의 침투-----우리겨레는 4천여년의 기나긴 세월을 지나 고구려 말엽이나 통일신라시대 초기부터 한(漢)의 세력을 등에 업은
유교와 불교, 당(唐)의 세력을 등에 업은 도교(道敎 : 천신교의 별파)가 들어온 뒤 천신교(天神敎)를 소홀히 하기 시작 했다.
(2) 천신교의 수난-----고려 태조 왕건(王建 ; 917~942)이 불교와 왕검교(王儉敎 ; 天神敎)를 국교로 한 뒤로 천신교는 그 세력을 떨치지
못하고 불교가 크게 성행했다. 그러다가 고려 원종(元宗 ; 1260~1273) 때 원(元)의 세력과 함께 들어온 라마교(喇마敎)를 홍보하면서
천신교를 금압(禁壓)해 천신교의 교문은 완전히 닫기우고 말았다.
(3) 천신교의 잔영-----위대한 고구려의 전통을 이어받아 건국한 고려도 급작스럽게 성장, 세계 제국으로 군림한 원나라의 침입을 받아
40년동안이나 항쟁하다가 원의 압력으로 천신교는 사교라하여 탄압을 당하고 말았다. 그뒤 고려에는 유교의 성리학(性理學)이 보급되고
천신교는 민간신앙으로 스며들어 종교(宗敎)라는 이름으로 그 잔맥을 이어왔다. 이어 조선왕조가 들어서면서도 김시습(金時習)등
여러 도사들이 고신도(古神道)를 이수해 천신교의 여맥을 전했으나 세상사람들이 천신교를 모르기 때문에 중국에서 전해온 도교(道敎)로
그릇 알고 있었다.
(4) 유교의 성행과 폐단-----이씨 왕조가 서자 유교를 숭상하는 정책을 강행, 정주(程朱)의 성리학만을 숭상하였으므로 다른 학문을
논하다가는 사뭄난적(邪文亂敵)으로 하여 무자비한 규탄과 배격을 받았기때문에 언론의 자유가 전혀 없었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의
전통사상인 천신교를 무속신앙, 미신종교라며 천시.박해 하면서 유학자만을 우대했기때문에 국민은 사대모화주의
(事大慕華主義 ; 중국을 사모하는 주의)로 기울고 민족의 주체성과 민족정신을 몽땅 빼앗긴 얼빠진(失神) 민족으로 전락,
남의 정신에 사는 민족이 되어버렸다. 그러니 이들의 손에 의해 이루어진 전적이나 역사*문화가 우리것일리 없고, 정통적인 민족정사가 될리 없다.
4. 왜적의 역사 파괴
上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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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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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치왕조는 그의 정권을 보전하고 조선침략을 강행하기위해 일본 천황가가 조선에서 왔다는 역사를 음폐, 한반도를 강점하고
식민정책을 강행하면서 위사조직(僞史組織역사를 왜곡날조하던 조직)인 소위 조선사 편찬위원회를 조직하고 전국을 누비며
전체 사료를 약탈, 자기들의 망상을 충족시킬 수 있는 역사서 일부만 남겨놓고 전부 불태워버리고 심혈(心血)을 기울여
저희나라(일본)역사는 말할것도 없고 조선사 36권이라는 위조역사를 완성했다. 심지어 명치는 헌병장교 주윤모(酒윤某)에게 특명,
광개토왕비(廣開土王碑)까지 깍고 고치는 악랄한 방법으로 역사파괴와 위조의 폭행을 감행했다. 이에 조선인은 자주독립의 힘도없고
역사도 가져본 일이 없는 야만민족이라 이민족인 위만(위만조선)에 의해 처음으로 나라가 섰으며 단군조선의 성립은 신화로 꾸민
거짓 역사라 부인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