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속보 외 4편
송현경
1.
누군가 긁어놓은 벽을 바라본다
폭력의 흔적은 언제나 붉다
벽 속으로 악물고 사라지는 흔적들
어름어름 살아지는 우리와
열심히 살이 찌는 그들
모두 같은 얼굴이다
2.
베란다에서 눈을 감고 있던 14살의 아이가
자신의 흔적을 빠르게 지우고 만다
내가 바라는 것은 오직, 후회
붉은 악마의 얼굴을 한 너희들의 눈물이다
심장박동이 빨라진다
모두 빠르게 아이를 읽고
쉽게 식은 눈물을 속보로 모은다
카메라로 분해된 장면들이
좀처럼 섞이지 않는다
모두 같은 계원들이다
3.
반짝하는 순간 소멸해버리는
우리의 이야기는 맵고 쓸쓸해
하나도 되돌려 받지 못하고 간다
오렌지를 나눠먹으면서 생각한다
습관적인 뉴스 밖에서
홀로 헐렁하기는 얼마나 어려운가
문득,
온몸이 가렵다
어디론가
또 내가 잠시 사라지려는가 싶다
길음역 사거리
남해안 여수 멸치가 도로를 지나간다
확성기에서 흘러넘친 파도가
가로등을 적신다
멸치 꼬리라도 되기 위해
거리를 서성이는 충혈된 눈은
감는 것을 잊었다
곳곳에 설치된 무인카메라의 겨냥 받으며
범죄자의 피
그 하나의 표적으로
자꾸만 등이 굽는다
비린내 풍기며
톡하고 부러질
멸치 대가리 되어
겹겹이 쌓인 몸이 스칠 때마다
굳은 비늘이 떨어진다
끓는 물에 샤워만하고 버려질
똥 빠질 운명,
한 상자에 만원(滿員)이다
하이힐
나의 공연을 본 적 있나요?
현관문을 밀고 나오는 나는
막대를 뒤꿈치에 붙인 무명 곡예사
비틀거리며 내딛는 첫 발을 무시마세요
언제나 처음은 두려운 거죠
열다섯 살, 곡예사의 사명을 뒤집어쓰고 태어난
나를 발견하던 날
뒤꿈치에 웃음과 울음의 흔적을 새겨 놓았죠
막대와 이어진 인조가죽 속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발이
구겨진 모습 그대로 말라있어요
나의 묘기는 당신을 위한 것
그게, 결국 나를 위한 거래요
잘게 부서지는 군중들의 박수소리를
막대로 꾹꾹 눌러 밟으며 움직일 때마다
종아리에서 자라는 은빛 물고기는
카리브 해를 꿈꾸며
뻐끔뻐끔
처진 아가미가
꿈틀거려요
역류
사람들이
그것을,
백 년 만에 내리는 폭우라고 했을 때,
끊임없이 물을 들이킨 하수구의 맨홀 뚜껑은
나를 비췄어 맨홀을 찾는 나의 연애를
주량 넘친 하수구가
소화시키지 못한 썩은 물을
마구 토해내기 시작했지
아마 거기서
소화 안 된 너도
함께 쏟아졌을 거야
그 깊은 곳에서부터 맨홀 속 물은
원을 그리며 퍼져
비늘을 만들었어 거대한 물고기가
굽이굽이 밀려와
비늘을 타고 와
나를 삼켰지
나는 너를 내 안으로 깊숙이 내려 보내
잔잔하게 흐르게 하고 싶었을 뿐인데,
맴돌다 정화되어 사라지게 하고 싶었을 뿐인데
맨홀 뚜껑을 찾아
어둠 속을 침전하는 중이야
온갖 것들이 섞여 있는 물속에서
비가 그칠 때까지
맨홀이 뚜껑을 찾을 때까지
그리고
백년 뒤 폭우가 다시 내리는 날,
또 한 번 열리겠지
그때 난 너를
닫고 말거야
거울 앞에서
누구에게도
속살을 보이지 못한
벌거벗은 사과 하나가 거울 앞에 앉아
화장을 한다
아프리카 원주민의
소리 없는 의식처럼
시간은 새벽이고
누런 얼굴에 껍질을 두른다
수분이 날아가 버석해진 표면을
크림으로 덮고
병든 표면에 새 살을 칠한다
더덕더덕
독한 살점이 자라난다
점점 살아나는 윤기가
붉게 흐른다
껍질 속에 갇혀야만
비로소 자유로운
<당선 소감>
송현경
나는 언제나 경계에 서있었다. 경계가 주는 모호함은 나 자신도 모호하게 만들었다. 색으로 치자면 나는 파스텔 계열 어딘가에 위치하고 있을 것이다. 채도를 높여 진해질 용기도 없고, 그렇다고 무채색으로 살기도 싫었다. 두 발을 얹어 놓고 어디에서도 발을 빼지 못해 항상 분주하고, 지쳐 있었다.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들을 하는 거라 여기며.
그 사이, 시는 항상 나의 왼편에 머물렀다. 어른이란 꼬리표를 단 뒤로 친구들과 취업 걱정을 하며 치열하게 살고 싶은 나는 오른쪽에 있었다. 갓 글을 깨우칠 무렵 할머니는 왼손으로 글씨를 쓰는 나의 손등을 때리시며 오른손으로 연필을 옮겨놓으셨다. 나는 겨우 연필을 오른손으로 고쳐 잡았지만 밥은 기어코 왼손으로 먹었다. 밥 먹는 일이 본능이라면 나에게 시야말로 본능이었다. 그래서 나의 몸은 항상 왼쪽으로 기울었고, 선택의 순간에 나는 늘 시 앞에 있었다.
그래서 나의 시도 경계에 있다. 어디로도 온전히 가지 못하는 소외감과 불만족은 나를 가장 나답게 만든다. 요즘 양손잡이의 시 쓰기로 살지 않는 시인이 있을까? 라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다. 그러나 나는 누구보다 치열하게 경계에 있을 것이다. 신인상을 받으면서 분명한 한 가지 목표가 생겼다. 나의 시를 오른쪽의 당신들이 좋아하게 해주고 싶다. 나의 시가 당신들의 왼편을 건드렸으면 좋겠다.
확신을 갖는 일만큼 불행한 것도 없는 것처럼 시 속에서 더 많이 헤매려합니다. 많이 부딪치겠습니다. 심사위원 세 분의 선생님들과 애지에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시의 길로 이끌어 주고 언제나 힘이 되는 황학주 선생님과 <발견> 동인들, 그리고 저에게 여러 형태로 사랑을 남겨준 인연들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약력
1988년 서울 출생.
서울여자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국문학과 대학원에 재학 중이며.
<발견>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이메일 a_a27@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