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5장 섭리에 관하여
2항 제1원인이신 하나님의 예지와 작정에 따라 만물은 변함없고 절대 확실하게 발생한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동일한 섭리에 의해서 제2원인들의 성질을 따라서 필연적으로 자유롭게 혹은 우연적으로 일어나도록 명령하신다.
3항하나님께서는 일반적인 섭리에 있어 여러 가지 수단을 사용하신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 수단들 없이 그것을 초월하여 또는 수단을 역행하여 자기의 기쁘신 대로 자유롭게 역사하신다.
1. 기적
기적은 있는가? 이것에 답하기 전에 기적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기적이란? 일반적인 자연의 법칙을 벗어나는 어떤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자연의 법칙도 일반적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자연은 인격이 아니며 스스로 존재하고 움직이고 판단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모든 일을 당연하게 여겨서 그럴 뿐 조금만 깊이 생각해 봐도 모든 게 경이롭고 놀라운 기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자연적이고 일반적인 일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적을 자연적이고 일반적인 어떤 일을 벗어나는 것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기적을 논할 필요가 없을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모든 게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고 사람 눈에 기이하고 놀라운 것이지만 하나님이 세우신 자연의 질서 다시 말해 통상법칙을 따르지 않는 일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기적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특히 어떤 특정한 시점에 이런 기적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모세의 시대, 엘리야와 엘리사의 시대, 예수님의 공생애와 초대교회, 이런 시대들은 다른 때와 달리 기적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기적에 대해 주의해야 할 점은 기적은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어떤 특별한 뜻에 따라 발생하는 것입니다. 교회와 신자에게 기적들이 빈번하게 일어날 것이라 여기는 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통상적인 수단을 사용하십니다. 통상적인 수단이란? 일반은총에서 주어진 것들입니다. 우리는 질병을 고치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지만 질병을 위해 의학을 주셨다는 걸 믿어야 합니다. 그런 것을 배척하고 기도만 한다면 그건 기도가 아니라 미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통상적인 수단을 통해 역사하심에도 때로 이것이 우연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비록 통상적인 자연 질서를 따르는 것이라 해도 그 이상의 것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의학을 사용할 때 의학이 기대하지 않았던 그 이상의 효과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의 이면에는 제1원인이신 하나님의 예지와 작정을 따라 발생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일반적인 섭리에 있어서 여러 수단을 사용하십니다. 여러 수단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들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수단 없이도 혹은 초월해서 또는 그것을 역행해서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의학이라는 수단 없이도 심지어 그것을 역행해서도 역사하시기도 합니다. 예수께서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리신 것과 같은 일이 그런 경우에 해당합니다.
이것을 비상섭리라고 말합니다. 통상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비상섭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뜻을 따라 특별한 상황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오늘날에는 선교지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2. 이적의 은사
기적은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 두 번째로 생각해 봐야 할 점은 그렇다면 초대교회와 같이 오늘날도 이적은 은사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개혁교회는 기적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비상섭리라고 부릅니다. 빈번하게 발생하는 일은 아니지만 분명 하나님은 우리의 지각을 뛰어넘어 역사하십니다. 그렇지만 이적의 은사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들을 지닐 수 있습니다. 개혁교회 안에서도 은사는 폐지되었다고 보거나 점진적으로 폐지되어 가고 있다고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개혁주의 밖의 복음주의 경우는 이보다 훨씬 은사주의를 강하게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적의 은사는 당연히 있고 교회가 그것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극단적으로 가르치기도 합니다.
이들이 주장하는 이적의 은사는 방언, 예언, 신유와 같은 것들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주장들에 대해 성급하고 경솔한 판단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오늘날에도 존재하느냐 하지 않느냐와 같은 논쟁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경이 이런 은사를 어떻게 보고 있고 평가하느냐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방언의 은사에 대해 절제를 요구했습니다. 그 이유는 방언이 개인에게 유익할지는 몰라도 교회에 유익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은사는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지 교회를 위해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성령이 은사를 주시는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이적의 은사 물론 다른 모든 은사를 포함해서 이것이 구원받은 자의 증거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가롯 유다는 사도의 직분과 제자로서 부여받은 이적을 행하는 능력이 있었음에도 그는 참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습니다. 사울 왕에게 성령이 임했으나 그가 참 하나님 백성인지는 의문이며 발람에게 성령이 임해 예언했으나 그는 거짓 선지자의 대명사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때에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이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답하는 이들에게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성령이 행하시는 가장 놀라운 이적은 누군가 은사를 받아 놀라운 일을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행하시는 일은 신자의 심령에 역사해서 그의 심령이 변화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죄악 된 본성이 거룩한 본성으로 변화되게 하는 이 역사가 진정한 기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성은 그 어떤 것으로도 변화되게 할 수 없고 무엇보다 죄악 된 본성이 변화되는 것은 만물을 다시 창조해서 새롭게 하는 것보다도 더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적의 은사는 교회를 위해 교회에 외적으로 소속된 모든 이들에게 주어질 수 있지만 심령이 변화되는 이 은혜는 오직 하나님의 백성에게만 주어지는 기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것을 새 창조 즉 중생이라 말하며 신자의 새 삶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신자는 통상적인 방법이 아닌 비상한 어떤 일에 너무 많은 주목과 가치를 두면 안 됩니다. 그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바가 아닙니다. 그런 일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던 시기나 하나님을 참되게 알 수 없는 제한적인 상황에서 베푸신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완성된 성경이 있고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일반적이지 않은 일들을 경험할 수 있지만 그마저도 성경의 말씀에 비추어서 해석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사도행전 20장에는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떠나며 장로들과 고별할 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22절에서 23절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 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성령은 바울에게 결박과 환난이 있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바울은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것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는 복음을 증언하는 일에 당연히 있어야 할 것으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이 아니었다면 구원이 없었듯이 우리도 십자가를 지고 그 길을 따르지 않는다면 구원의 길은 없습니다. 신자는 기적의 길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을 따라갑니다.
사도행전 21장에도 선지자 아가보가 바울의 띠를 가져다 수족을 잡아매고 성령이 말씀하시기를 바울을 이같이 결박해서 이방인의 손에 넘겨줄 것이라 했습니다. 예언은 미래의 사실을 알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언은 미래의 사실을 단순히 알게 하는데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그 예언을 듣고 예루살렘에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울은 13절에서 이렇게 답합니다.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우리는 여기서 성령이 바울을 어떻게 변화시키셨는지 그의 믿음의 실체가 무엇인지 보게 됩니다. 참된 믿음은 예언이나 기적이나 방언을 믿거나 혹은 하나님의 음성이라 생각되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처지와 형편이든지 예수를 위해 죽을 것도 각오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이고 저는 이것이 진정한 비상섭리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하나님이 행하시는 기적이 있습니다. 이적을 행하는 은사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다른 견해를 지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의 믿음이 어느 토대에 놓여 있느냐입니다. 그것에 따라 우리의 영원한 삶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질문
1. 이적이라 불릴 만한 일들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예를 들어 방언이나 혹은 신비한 체험들, 그런 이적들에 대해 당시에는 어떻게 생각했고 지금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2. 통상섭리와 비상섭리의 차이가 무엇인지 설명해보세요.
3. 만약 과학과 의학을 불신하고 배척하는 신자가 주위에 있다면 어떻게 말해 주겠습니까?
4. 극단적 은사주의, 신사도주의와 같은 이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