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 2,18-25; 마르 7,24-30
하느님께서 세상의 온갖 것을 창조하실 때마다 보시니 “좋았다”고 하셨는데, 유일하게 보시고 좋지 않으셨던 것이 있습니다. 뭘까요? 오늘 독서의 첫 구절에 나온 것처럼,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을 보시니 좋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짝을 만들어 주시는데, 아담의 갈빗대를 하나 빼내어 하와를 지으셨습니다. 최초의 외과수술이죠? 갈빗대로 여자를 지으셨다는 것은 남자와 여자가 동등하다는 의미입니다. 목뼈나 머리뼈로 지으셨다면 여자가 남자 머리 위에 있고, 발뼈로 지으셨다면 여자가 남자 발밑에 있을 텐데 갈빗대로 지으셨기에 동등합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하느님의 첫 번째 말씀은 “빛이 생겨라”인데, 사람의 첫 번째 말은 연가이고 감탄사입니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불리리라.” 여기서 남자, 여자는 각각 잇쉬와 잇샤로서, 발음이 비슷합니다. 남자와 여자는 동등하면서 이처럼 동반자입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에게 말씀하시는데, 가히 충격적입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런데 이 여인도 지지 않고 응수합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마르코 복음 전체에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는 경우는 딱 한 번인데, 바로 오늘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이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이 여인은 성경 전체에서 예수님과 말싸움해서 이긴 유일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과 만나기 전에는 주로 유대인들에게 기적을 베푸셨는데, 이 여인을 만난 후부터 이방인들에게도 기적을 베푸십니다. 여인을 만나기 전에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베푸시는데, 이는 유대인들에게 베푸신 것이고, 이후에 나오는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이방인들에게 베푸신 것입니다. 분기점이 되는 것이 이 여인과의 만남입니다.
오늘 복음에 대해 크게 두 가지 해석이 있는데요, 첫째는 예수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기 전에 이방 여인의 믿음을 시험해 보셨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님께서 실제로 당신 자신이 우선적으로 유대인들에게 파견되셨다고 생각하셨는데, 이 여인의 말,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이 말로 인해 여인에게서 배우셨고, 이후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셨다는 것입니다. 놀랍지요?
20년 전, 시카고의 CTU 대학에서 성경을 가르치시던 바바라 보우(Barbara Ellen Bowe, 1945-2010) 수녀님이 한국에 오셔서 특강을 하실 때 제가 들으러 갔었습니다. 그때 보우 수녀님이 이 두 번째 해석을 말씀하셨습니다. 통역하시던 수녀님이 깜짝 놀라면서 ‘이 뜻으로 얘기하신 게 맞냐?’고 재차 삼차 확인을 한 후 통역을 했습니다.
두 번째 해석을 따른다 해서 교리적으로 크게 문제되지는 않습니다. 주교회의에서 출판한 ‘주석성경’은, 프랑스 공동번역 성경을 참조하여 두 번째 해석을 지지하는 듯 보입니다(주석 성경, 신약, 96쪽). 흔히 오늘 복음에서 여인의 믿음과 인내를 칭찬합니다. 그런데 두 번째 해석을 따른다면, 우리가 더 놀라야 할 것은 이방 여인에게서 배우시는 예수님의 겸손입니다. 예수님은 참 하느님이시고 참 인간이셨습니다. 인간으로 예수님은 성모님과 성 요셉에게서 말도 배우셨고, 기도하는 법도 배우셨고, 예의범절도 배우셨습니다.
인간의 가장 고귀한 특성 중 하나는 배운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만나든, 그 사람에게서 무엇인가 배우려고 한다면 젊은 것입니다. 그런데 만나는 사람마다 ‘너보다 내가 많이 안다’고 가르치려고만 한다면 늙은 것입니다. 3월부터 본당 솔로몬 대학이 개강할 텐데요, 많은 어르신들이 배우러 오실 것입니다. 배우려 하시기에, 젊으십니다.
한편, 첫 번째 해석을 따른다 하더라도 이 여인의 말은 무척 중요합니다.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선민사상을 가진 유대인들이 복음을 전할 때, ‘굳이 이방인들에게도 전해야 하나’는 의문을 품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에게는 자기 스승에게 따박따박 말대꾸해 가면서 자신의 딸을 치유하시도록 한 이 여인의 말이 마음에 깊이 새겨졌을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로 하여금 이 말을 듣게 하기 위해 이런 대화를 유도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둘 중 어느 해석을 따르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이 여인과의 만남으로 예수님의 사목 방향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이 아닌 우리 모두는 이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에게 큰 빚을 지고 있습니다. 자신의 자존심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딸에 대한 사랑으로,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르며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드러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천주교인이 아닌 다른 분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우리 본당은 우리 교우들의 신앙생활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지역의 복음화를 위해 빛과 소금으로서의 소명을 실천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어쩌면 지금 성당에 나오시지 않는 분들 가운데에도 다른 이름으로 하느님을 부르며 애타게 복음을 기다리는 수많은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이 계실 수 있습니다. 그분들을 기억하며, 또한 지진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시리아와 튀르키예 주민들을 기억하며 기도드립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