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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는 마음에 원하는 대로 살기로 결단했습니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버렸습니다.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거부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떠났습니다. 자신을 하나님으로부터 완벽하게 분리시켰습니다. 더 이상 성민에게 요구되는 율법과 규례에 따라서 살 이유가 없었습니다. 죄로부터 돌아서라는 하나님의 외침을 들어야할 이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신을 파괴하는 것이 존재하는 유일한 목적이라도 되는 것처럼 죄를 버리지 못했습니다. 온갖 종류의 죄에 완전히 매몰埋沒되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사사건건 정면으로 충돌했습니다.
전에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끔찍한 환난과 함께 완벽한 진멸을 자초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원수의 공격은 그야말로 파상적이었습니다. 유다는 대응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백약이 다 무효했습니다. 그야말로 너무나 무기력하게,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국토 전체가 피로 얼룩졌습니다. 유력한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구사일생으로 환난을 면하고 살아남은 사람들 가운데 일부가 이집트로 도망쳤습니다. 이집트 여러 지역으로 흩어졌습니다. 유다 출신이라는 사실을 숨겼습니다. 이집트 사람처럼 행동했습니다.
이집트 사람들 속에 섞여 살았습니다. 얼마 동안은 속일 수 있습니다. 계속 속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죽는 순간 아예 잊혀 질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에게나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내 말을 똑똑히 들어라. 내가 가까운 곳에만 있고 먼 곳에는 없는 줄 아느냐? 사람이 아무리 숨어도 내 눈에서 벗어날 길은 없다. 똑똑히 들어라. 하늘과 땅 어디를 가나 내가 없는 곳은 없다.”(렘24:23-24)라는 증거대로,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아무리 발버둥 친다할지라도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사람의 일이 제 눈에는 모두 잘돼 보여도 여호와께서는 속생각을 헤아리신다.”(잠16:2),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다 옳게 보여도 여호와께서는 마음을 헤아리신다.”(잠21:2), “사람의 마음은 천길 물속이라.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여호와만은 그 마음을 꿰뚫어 보고 뱃속까지 환히 들여다본다.”(렘17:9-10)라는 증거대로, 하나님은 지으신 만물과 저와 여러분을 모든 순간 감찰하십니다. 마음속에 은밀하게 숨겨져 있는 생각과 의지와 계획을 꿰뚫어보십니다. 구체적으로 헤아리십니다. 당연히 하나님에게는 단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다 알려져 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당신께 드려진 제물을 은밀하게 훔칠 정도로 탐욕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었던 아간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진멸하셨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어가는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서 회개를 선포하라는 당신의 명령을 외면할 정도로 분노와 증오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었던 요나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물고기 밥이 되게 하셨습니다. 특히,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날, 저와 여러분이 쏟아냈던 언행들은 단 한 가지도 빠짐없이 모두 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숨겨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던 유다 사람들이 저지른 죄였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는 토해 버리실 정도로 가증스럽게 여기시는 우상숭배자인 이집트 사람들처럼 살기 위해서 몸부림치고 있던 유다 사람들 곧 사랑하는 당신 백성을 잊을 수 없으셨습니다. “...내가 예루살렘과 유다 모든 성읍에 내린 모든 재앙을 너희가 분명히 보았다.”(렘44:2a)라는 증거에 따르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는커녕 오히려 우상 숭배에 깊이 빠져버린 자기 민족에 얼마나 두렵고 끔찍한 재앙이 임했었는지 똑똑히 목격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이 떠나온 유다 땅에서 얼마나 가공可恐할만한 일을 하셨는지 분명히 보았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로 북적거리던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은 인적을 찾을 수 없는 돌무더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거기다 그들은 유다의 죄와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했던 선지자와 함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이집트로 도망친 후에도 유다 왕들과 왕비들은 물론 백성 특히 부녀자들이 거룩하게 구별된 땅 유다와 예루살렘 거리에서 저질렀던 역겨운 우상숭배의 죄로부터 돌아서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배척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반복해서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었던 두렵고 떨리는 하나님의 징계를 자청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살아야 한다는 이유 하나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의도적으로 조상들의 심판을 자초했던 죄를 잊으려고 몸부림쳤습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일반화되어 있었던 죄를 잊으려고 몸부림쳤습니다. 잊혀 지지 않았지만, 아니 절대로 잊을 수 없었지만 완전히 잊혀 진 것처럼 하나님께서 가증스럽게 여기는 죄를 반복해서 저질렀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설마 이곳 이집트에서까지는 아니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생각과 행동이 서로 맞지 않는 모순에 빠져 있었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사랑하는 그들을 잊을 수 없으셨습니다. 포기할 수 없으셨습니다. 이집트까지 도망가서 저지른 악행을 빠짐없이 다 보셨습니다. 다 아셨습니다. 전쟁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징계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원망과 놀라움과 저주와 조소의 대상이 되게 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에 내렸던 벌을 그대로 내리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이집트 땅으로부터 도망쳐 나오는 자들 외에는 당신의 징계를 모면하고 살아남아서 유다로 돌아갈 수 있는 사람이 없게 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역겨운 우상 숭배의 죄로부터 돌아서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 가운데 지극히 일부만이라도 구원해 내기 위해서였습니다. “너희 조상들은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는 나쁜 버릇을 고치고 돌아오지 않았다.”(렘44:5)라는 증거에 따르면, 그들의 조상들은 여호와의 권위를 무시했습니다. 자비를 베풀어주시는 여호와의 호소와 간청에 어떤 감동도 받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가증스럽게 여기시며 미워하시는 우상 숭배에 완전히 매몰埋沒되어 있었습니다. 완전히 몰두沒頭해 있었습니다. 완전히 빠져 있었습니다. 기쁘게 여겼습니다.
돌아서야겠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죄를 끝없이 만들어냈습니다.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죄를 그들은 오히려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지극히 죄 친화적이고, 죄의 경향성이 농후하며, “죄 곧 나, 나 곧 죄”이면서, 지극히 작은 죄 하나도 외면하지 못하는 저와 여러분들 역시 그다지 다르지 않습니다. 이집트로 피한 유다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공개적으로 선지자가 선포한 하나님의 작정을 더 이상 듣지 않겠다고 반발했습니다. 따르지 않겠다고 반발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느니 차라리 하늘 황후에게 분향하며 섬기겠다고 반발했습니다.
“우리가 하늘 황후께 분향하고 제주를 바칠 때 어찌 남편들 모르게 하였겠소? 여왕의 신상을 박아 제병을 굽거나 제주를 따라 바칠 때 어찌 남편들 모르게 하였겠소?”(렘44:19)라는 증거에 따르면, 반발을 주도하는 세력은 여인들이었습니다. B. C. 622년, 요시야는 대대적으로 종교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오랫동안 끊어져 있었던 유월절 절기를 회복시켰습니다. 유다 땅과 예루살렘 골목과 산골짜기보다 많았던 신접한 자와 박수와 드라빔과 온갖 종류의 우상들과 모든 혐오스러운 것들과 산당들을 눈에 띄는 즉시 하나도 남가지 않고 모두 다 없애 버렸습니다.
“여호와께로 돌아가 마음을 다 기울이고 생명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모세의 법을 온전히 지킨 왕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왕하23:25)라는 칭찬을 들을 정도로 여호와께 열심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전심全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민 이스라엘의 배교와 범죄로 인해 이미 시작되고 있었던 하나님의 징계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B. C. 609년, 이집트는 앗수르와 연합했습니다. 바벨론과의 전투를 위해 출정했습니다. 요시야는 이집트를 막아섰습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을 진멸시킨 앗수르의 대한 좋지 않은 기억 때문이었습니다.
그야말로 허무하게 전사했습니다. 마침내, 유다는 이집트 군대에게 정복당하고 말았습니다. 유다 왕은 폐위되었습니다. B. C. 605년, 신흥강국 바벨론이 이집트를 격파했습니다. 유다를 공격했습니다. 이집트를 섬기고 있던 유다 왕은 바벨론에 충성해야 하는 엄청난 변화를 겪어야 했습니다. B. C. 597년, 바벨론은 두 번째로 예루살렘을 공격했습니다. B. C. 586년, 예루살렘을 완전 정복했습니다. 유다 왕의 두 눈을 뽑았습니다. 바벨론으로 끌고 갔습니다. 선지자 역시 유다의 다른 포로들과 함께 사슬에 매인 채 바벨론으로 끌려가던 중, 사령관의 호의로 풀려났습니다.
당시, 바벨론은 그댜랴를 유다의 총독으로 세웠습니다. 동시에 각처에 뿔뿔이 흩어져 있던 군사들과 백성들이 이 소식을 듣고 몰려들었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바벨론에 항복하고, 거주하는 곳에 집을 짓고, 농사를 지으며 거주하라고 외쳤습니다. 자신 역시 거주하는 땅에서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서 생활하겠다고 외쳤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겠다고 외쳤습니다. 선지자가 선포했던 외침이었습니다. 그렇게 유다는 서서히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유다는 자신들이 다스려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던 다윗의 후손들이 반기를 들고 일어났습니다.
은밀하게 암살 계획을 세웠습니다. 마침내 죽이고 말았습니다. 어렵게 잡은 안정의 기회를 날려버렸습니다. 백성들을 다시 흩어버렸습니다. 유다 지역을 격랑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어버렸습니다. 끔찍한 참화였습니다. 이집트로 도망친 유다 사람들은 이 모든 일들을 빠짐없이 목격했습니다. “우리는...하늘의 황후께 약속한 대로 분향하고 제주를 바쳐야 하겠소. 우리는 조상들과 왕들과 고관들과 함께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거리에서 하던 대로 하겠소. 그때 우리는 어떤 재앙도 당하지 않고 배불리 먹으며 잘 지냈단 말이오.”(렘44:17)라고 외쳤습니다.
그들은 쉬지 않고 이어지는 불행과 재앙을 자신들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주어진 결과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늘 황후 대한 제사와 정성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늘 황후”는 전쟁과 사랑의 신입니다. 당시 중근동 지역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습니다. 다산과 풍요를 주관한다고 믿었습니다. 바벨론에만 180 여개의 산당이 세워질 정도로 인기가 있었습니다. 사실 그들은 한때,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대단히 활기차게 진행된 요시야의 종교 개혁을 지지했습니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개혁의 기쁨까지 맛보았습니다.
이후 쉬지 않고 비극적인 사건들이 이어졌습니다. 개혁에 대한 기쁨에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실망과 환멸로 바꿔버렸습니다. 여호와가 무능無能하기 때문이라고 여겼습니다. 여호와를 대신할 신神을 찾아 동분서주했습니다. 이전에도 섬겼던 하늘 황후를 떠올렸습니다. 아이들은 나무를 모았습니다. 아비들은 불을 지폈습니다. 여자들은 과자를 만들었습니다. 번제를 드렸습니다. 술을 따라 바쳤습니다. “여자의 남편은 여자가 한 어떤 약속이나 맹세를 지키게 하거나 취소시킬 수 있다.”(민30:13)라는 율법 규정과는 정반대로, 여자들이 하늘 황후 숭배를 주도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어떻게 남편의 허락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하늘 황후를 섬길 수 있었겠느냐고 반발했습니다. 우상을 섬기면서, 우상을 가증스럽게 여기시고 또 극도로 증오하시는 여호와의 율법 규정을 제대로 지켰다는 참으로 해괴한 주장을 펼쳤습니다. 가족 전체가 하늘 황후 숭배에 깊이 연루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고백했습니다. 특히, 그들은 하늘 황후를 섬길 때 문제가 전혀 없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어떤 재앙도 당하지 않고 배불리 먹으며 잘 지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여호와를 섬기면서부터 쉬지 않고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자신들은 여호와보다 하늘 황후를 섬기겠다고 주장했습니다. 율법을 따르지 않겠다는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불순종하겠다는 의미도 아니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필요 없다는 의미였습니다. 자신들 마음에서 하나님을 배척하고 완전히 몰아내겠다는 의미였습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주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겉모습만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속으로는 썩어 들어가고 있는 고름을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내뱉지 말아야할 말을 쏟아놓았습니다. 그야말로 방귀 뀐 놈이 성내는 꼴이었습니다. 적반하장賊反荷杖이었습니다.
소위 성민이라는 거룩한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생각나는 대로 지껄였습니다. 하늘 황후를 극진히 섬기면서 예배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금방이라도 쏟아질 정도로 목구멍까지 차올라와 있던 욕망의 노예가 되기 위해서였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들에게 “너희는 안팎으로 손발이 맞아 하늘 황후에게 분향하고 제주를 바치기로 서원했으니까 그대로 해야겠다면서 뜻을 굽히지 않고 그대로 하고 있다. 좋다, 서원을 지키려거든 지켜봐라. 서원한 대로 하려거든 해 봐라.”(렘44:25b)라고 선포하셨습니다. 하고 싶은 대로 해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이집트 땅 어디에서도, 당신의 이름을 두고 맹세할 유다 사람을 찾을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유다 사람들이 칼에 맞아 죽고, 굶어 죽어 마침내 진멸되어 완전히 없어지는 것을 똑똑히 지켜보게 하겠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이집트를 벗어나서 유다로 돌아갈 사람은 몇 되지 않으리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때가 되면, 당신과 그들의 말 가운데 과연 누구의 말이 옳았는지 똑똑히 알게 되리라고 선포하셨습니다. 무엇보다 “보라! 내가...이집트의 바로 호브라 왕을 그의 원수들 곧 그의 생명을 찾는 자들의 손에 넘겨주리라.”(렘44:30a)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세상 어디에서도 도움을 얻지 못하게 하겠다고 선포하셨습니다. 호브라는 이집트 왕입니다. 유다가 바벨론을 대적하여 반란을 일으키면 지지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자신의 약속이 진실이라는 증거를 보여주기 위해서 유다에 군사를 파견하기도 했었습니다. B. C. 570년, 그의 통치 말년 생각지도 않은 전쟁이 발생했습니다. 동시에 따르고 있던 군사들 가운데 일부가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휘하의 장군을 급파했습니다. 반란의 현장에 도착한 장군은 돌변했습니다. 자신 역시 왕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이후, 이집트 일부 지역을 분할 통치했습니다.
3년 뒤에는, 호브라까지 처단해 버렸습니다. 이집트로 피신한 유다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졸지에 의지할 대상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끈 떨어진 연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회개하고 우상숭배로부터 돌이킨 몇 명을 제외하고 모두 다 이방인의 땅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류의 궁극적인 결과입니다. 한편, 예루살렘 함락 직후 유다를 떠나 이집트로 피신했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시는 아니 반드시 이뤄주시는 미래는 물론 갱신과 부흥과 희망으로부터 완전히 제외되었습니다.
회복된 미래는 하나님의 뜻대로 바벨론에 끌려가 있는 포로들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환난과 시험의 때에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을 찾아야하는 이유입니다. 환난과 시험이 아무리 어렵고 힘겨울지라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땅에 머물러야 하는 이유입니다. 또 “우거하다גּוּר(구르)”는 “(손님으로서) 거주하다, 위축되다, 두려워하다.” 등의 뜻입니다. 유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낮선 땅 이집트로 피신했지만 단 하루도 평안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순간순간, 긴장되고 또 위축된 상태에서 전전긍긍했습니다. 이집트 사람들의 눈치를 살펴야했습니다.
무엇보다 이집트로 도망가기로 결정한 것 자체가 황폐하게 변해버린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든지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라는 여호와의 목소리에 순종하지 않은 결과였습니다. 특히, 그들은 이집트에서 우상 숭배를 버리지 못한다면 여호와로부터 임하는 단오하고도 끔찍한 심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큰 자든 작은 자든 모두 다 칼과 기근과 염병을 통해 진멸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조소거리, 모욕거리, 저주거리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시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수 없었습니다. 언약 백성들에게만 주어져 있었던 특권을 더 이상 누릴 수 없었습니다.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반복해서 들어왔던 하나님의 말씀이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眞理였다는 사실을 통곡하며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호와는 온 땅의 주인이십니다. 지으신 세계와 존재 하나하나를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절대 주권과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탁월한 섭리로 친히 다스리십니다. 여호와에 대한 오해와 거절과 불신과 적대감이 쌓이고, 쌓이고 또 쌓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더 힘들고 어려워졌다는 주장은 적반하장賊反荷杖의 죄입니다. 돌이킬 수 없는 죄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수없이 많이 반복해서 저지르고 있는 파렴치한 죄입니다. 미래는 물론 갱신과 부흥과 희망을 다시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Kay Arthur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통치하시기에 나는 모든 것에 감사할 수 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John MacArthur는 “걱정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결여된 결과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환난과 시험의 때에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문제라고 주장하지 않을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적반하장賊反荷杖의 죄를 저지르지 않을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차라리 솔직하게 인정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환난과 시험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경험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마음과 뜻과 힘과 정성 곧 전인격을 다 동원하여 감사할 수 있는 복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