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장 탓
박갑순
주방 구석에 있는 조리기구들이 유독 눈에 거슬린다. 거실 창문을 통해 투명한 햇살이 집 안을 기웃거리니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치부가 드러난다. 너저분한 조리대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것들. 한때 애지중지 아끼며 가끔이라도 사용하던 물건들인데 두껍게 내려앉은 먼지가 주인 된 지 오래다. 비좁은 주방을 더욱 지저분하고 칙칙하게 하는 저것들을 쉽게 처리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요리에 자신이 없는 탓에 그것들의 도움을 받으면 뚝딱 솜씨 좋은 음식을 만들 수 있을 것이란 믿음 때문이다. 그리고 박봉으로 큰맘 먹고 장만했던 물건들이 아닌가.
궁벽한 시골에서 가난한 농부의 딸로 자라서였을까. 요리 다운 요리를 먹어본 기억이 없다. 한 끼 허기를 채우기 위한 밥을 먹었지 격식을 갖춘 식사를 한 적이 없다. 때깔 좋게 폼나는 요리를 먹어본 적 없으니 만드는 일은 언감생심. 결혼하면서 요리는 가장 두려운 일이며, 시댁에 가는 일을 부담스럽게 하는 큰 요인이었다. 허리 휘도록 청소하고 설거지는 하겠는데 요리는 영 자신이 없었다.
도깨비처럼 요리를 잘할 수 있게 되리라는 믿음으로 구입한 것이 도깨비방망이였다. 처음 그것을 구매했을 때 일류 요리사가 된 것 같았다. 요리에 재주가 없을 뿐더러 직장 생활을 하던 때라 집에 오면 그저 쉬고만 싶었다. 그러나 도깨비방망이가 있으니 힘들이지 않고 요리가 될 것 같았다. 아니 처음엔 그랬다. 안 하던 요리도 해보고, 설명서대로 하면 그럴싸한 요리가 되었다.
믹서기를 사용해서 재료를 갈 때는 그릇을 옮겨서 사용해야 하는 불편이 있었으나 도깨비방망이는 끓는 솥 안에서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으니 진짜 도깨비였다. 저것을 사서 해본 요리가 정확히 무엇이었는지 지금은 생각조차 나지 않는다. 표면이 누르스름하게 변한 채 먼지만 끌어안고 있다. 잘 정돈해서 싱크대 안에 넣어 둘까도 싶었지만, 언제 필요할지 몰라 그냥 그 자리에 두었다. 이렇게 사서 잘 사용하지 않고 쟁여 놓은 기구가 더 있다. 녹즙기, 죽마스터기, 오쿠 등등.
실력 없는 목수가 연장 탓을 한다고 했던가.
주민센터에서 배우기 시작한 파스텔화의 화구도, 몇 년 전 맘먹고 도전한 서예의 도구들도 한구석에 처박혀 있다. 장롱 구석에서 언제쯤 자신들에게 씌워진 죄목을 벗을 수 있을까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지난해엔 피아노에 마음이 갔다. 또 고질병처럼 연장 탓만 하다 말까 걱정되었지만 어려서 그토록 배우고 싶었던 피아노였기에 마음을 다잡았다. 마침 재능기부로 가르쳐주시겠다는 선생님의 배려로 고민 없이 시작할 수 있었다. 두 차례의 전신마취를 하고 대수술을 한 이력 탓인지 자꾸 기억이 희미해진다고 느끼던 중이었다. 손가락을 많이 움직이면 치매를 예방할 수 있다는 정보를 접한 무렵이기도 했다. 학습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는 집에서도 연습할 피아노가 필요했다. 아이들 어릴 때 사용한 클래식 피아노가 거실 한쪽 면을 차지하고 있지만, 그것을 사용할 용기는 나지 않았다. 층간소음 문제가 발생할까 두려웠다. 당근마켓을 뒤적여 피아노 입문용 키보드를 구입하였다. 한 달도 안 돼서 연장 탓을 시작했다. 소리가 날카롭고 시끄러울 뿐만 아니라 건반을 누를 때 터치감이 좋지 않았다. 새로운 연장 구할 궁리를 하던 차에 아들이 사용하던 디지털 피아노를 주었다. 헤드셋을 이용할 수 있어서 시간 구애받지 않고 연습할 수 있어 좋다.
지금은 바이엘 3과 피아노 반주곡 2집 끝부분을 연습하고 있다. 손가락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아서 애를 먹는다. 페이지를 넘어갈 때마다 막막하다. 이 단계에서 도저히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할 것처럼 운지법이 꼬여 엉망인데 지속적으로 연습을 하다 보면 어느새 손가락이 악보를 잘 읽고 있는 것이다.
틈만 나면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나를 발견한다. 아직은 폼나게 노래를 부르면서 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지만 흥얼흥얼 피아노를 치고 있는 자신이 대견하다. 피아노는 아직 먼지 구덩이에 묻히지 않았다.
창문을 기웃거리던 해를 구름이 가렸다. 구름은 이내 거실 창문을 회색빛으로 물들였다. 잠시 후 거짓말처럼 구름이 걷히고 해가 비친다. 탓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는 해.
연장 탓만 해온 나를 비추는 햇살을 보면서 절연한 친구와 지인의 문제가 떠오른다. 어쩌면 그들과의 관계도 연장 탓을 하는 나 자신의 문제가 아니었을까.
어떤 일이건 남을 탓하기 전에 자신을 탓하고 돌아보아야 함을 주방의 연장들을 보면서 생각해본다. 모든 것을 다 해결해 줄 것 같았던 도깨비방망이지만, 그것을 잘 사용하지 못하는 나로 인해 관계는 어그러지고 있다.
오늘 저녁은 잠자는 도깨비를 깨워 맛있는 볶음밥을 해야겠다.
1998년 『자유문학』 시, 2005년 『수필과비평』 수필 등단
수필집 『꽃망울 떨어질라』
시집 『우리는 눈물을 연습한 적 없다』 외 1권
동시집 『아빠가 배달돼요』
제10회 월간문학상 수상 외 다수
현 교정∙교열 전문 〔글다듬이집〕 대표
현 (사)한국문협 광명지부 부회장
14329
경기도 광명시 성채로 37, 401동 303호(역세권휴먼시아)
박갑순
010-9624-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