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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자의 마음
전도서 7 : 1 - 7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지혜자가 어떠한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본문 4절에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잔치하는 집, 요새 말로 하면 연회, 파티하는 집)에 있느니라”하였습니다.
먼저 본문 1절부터 생각하십시다.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하였습니다.
어떤 죄 많은 여인이 귀한 나드 기름 한 옥합을 가지고 예수님께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서 예수님께 온전히 부어 드린 정성어린 장면이 신약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의 예물을 받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여인의 죄를 다 사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축복의 말씀까지 들려 주셨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 여인이 하는 일을 이해하지 못하고 공연히 비싼 기름을 허비한다고 분해하는 사람을 포함해서 둘러선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며 저를 기념하리라”하셨습니다.
이 사건이야말로 오늘 본문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다”는 본문의 아주 좋은 해석이라고 봅니다.
사실 이름 모를 이 여인은 보배로운 기름을 바쳤습니다. 세상 사람, 아니 주님에 대한 사랑이 없는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낭비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아름다운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 이름이 역사를 통하여 주님에게 헌신해야 하는 우리 모두에 큰 본이 될 것입니다.
아름다운 이름은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권력으로 얻는 것도 아닙니다. 지식으로 배우는 것도 아닙니다. 내 몸을 불살라 헌신할 때 얻어지는 상급인 것입니다. 그리고 1절 하반절에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하였고 2절에는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 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하였습니다.
우리가 얼른 생각할 때 이 말을 이해하기가 퍽 어렵습니다. 일반적인 우리들의 관념과는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는 사람이 태어나면 기뻐하고 좋아하고 퍽 희망적이기 때문에 잔치를 합니다. 축하를 합니다, 그러나 세상을 떠나게 되면 슬퍼하며 울고 퍽 절망적인 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반대를 우리에게 말씀해 줍니다.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깊은 진리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역설적인 것을 종종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믿지 않는 사람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납득되지 않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성경이 말씀하는 진리는 무엇입니까? 왜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다고 합니까?
요한계시록 7장 16-17절 말씀을 보세요.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지니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이 환난과 질고, 근심과 걱정, 실패와 좌절 속에 사는 세상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그의 피로 그 옷을 벗어 희게 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속 사람이 날로 새로워져 겉 사람은 후패하나 속 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다가 이 육신의 장막 집 벗는 순간 손으로 짓지 아니한 영원한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게 되고 세상 것은 꿈에 본 듯 다 잊어버리고 하나님 마련하신 생명의 면류관, 의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을 받게 될 때 그 기쁨을 무엇으로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다시 굶주리는 슬픔도 없습니다. 오늘 이 세상에 42억이 넘는 사람들이 살고 있으나 그 절반 이상이 먹는 것 때문에 얼마나 고생하고 있습니까? 우리 나라의 경우만 보아도 얼마 전까지 ‘보릿고개’라는 말을 하곤 했었습니다. 농사하는 사람이면서도 보리쌀이 나기까지 먹을 것이 없어서 풀뿌리를 캐서 끓여 먹어야 하는 굶주리는 고통을 당해야만 했었습니다. 세상에 눈물나는 일 많이 있지만 배고픈 설움이 가장 크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 하늘나라는 다시 주릴 필요가 없습니다.
목마를 필요도 없습니다. 이 세상은 목마른 세상입니다. 만족이 없는 세상입니다. 돈 있는 사람은 있는대로 목이 말라 합니다. 권세 있는 사람도 목이 말라 합니다. 지식 많은 사람도 목이 말라 합니다. 이 세상은 목마른 세상입니다. 그래서 일찍이 하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해서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이사야 55장 1-2절) 하였습니다.
예수님도 사마리아 여인을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한복음 4장 14절)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 나라에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세상에 있으면서 흘린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신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다른 번역에 보면 우리가 흘린 눈물의 방울방울을 씻어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여러 가지 경우에 흘린 눈물 다 닦아주십니다.
사업 실패에서 흘린 눈물도 닦아주십니다.
아들 대학 떨어져 흘린 눈물도 닦아주십니다.
남편 진급하지 않아 흘린 눈물도 닦아주십니다.
억울하게 중상 모략 당해 흘린 눈물도 닦아주십니다.
돈 없다고 업신여기고 천대받아 흘린 눈물도 닦아주십니다.
부모 잃고 흘리던 눈물도 닦아주십니다.
사랑하는 남편 먼저 저 세상에 보내고 눈물짓던 그 눈물도 닦아주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어떤 세상입니까? 하늘 나라 가기 전에는 이 괴로움을 벗을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관문을 통과해서 저 하늘 나라에 가면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만족과 기쁨 , 감사와 감격만이 있는 곳에서 영광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괴로운 인생 길 가는 몸이
평안히 쉬일 곳 아주 없네
걱정과 근심이 어디는 없으리
돌아갈 내고향 하늘 나라
그렇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들려주신 말씀도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하시며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하십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이런 말을 들어보신 적이 계십니까? 죽는 것이 복되다는 말씀을 어느 문헌에서 보신 적이 있습니까? 세상에서는 죽음은 인생의 끝입니다. 그러므로 절망입니다. 그 다음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죽음입니다. 죽음 앞에는 벌벌 떱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주안에서 새로 지음을 받은 사람들은 이 세상에 살면서도 이미 영생을 맛보며 삽니다. 말하자면 하늘 나라 집 비자를 받아 가지고 있습니다. 그저 ‘죽음’이란 것을 말하자면 이 세상 나라에서의 출국 신고인데 이것만 끝마치면 하늘 나라 시민으로 듣기만 하던 그 나라에 직접 가서 바울의 말처럼 “우리가 지금은 모두가 거울로 모는 것처럼 희미하나 그때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듯이 분명히 보게 될”것입니다.
그리고 감격스러운 일이 많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직접 뵙게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엘리야, 다니엘 여러 믿음의 대 선배들을 만나 뵙게 될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울까요?
전에 베드로는 변화 산상에서 예수님께서 변모하시고 모세와 엘리야와 같이 말씀하시는 광경을 보기만 하고 사실 모세와 엘리야 말 한마디 건너보지 못한 베드로가 “여기가 좋사오니 여기에 장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서 다른 하나는 엘리야께서 계시도록 하십시다”하고 제의한 적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좋았으면 그렇게 말했을까요?
사도 요한이 신령한 눈으로 하늘 나라를 어느 정도 구경하고 요한 계시록을 기록하였습니다마는 사실과 비교하면 그 기록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세상에서는 그 이상 다른 무엇으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쓴 것뿐입니다.
하늘나라! 그것은 비교할 수 없는 곳입니다. 그 나라에 가게 되니 좋은 게 아닙니까?
그래서 시편 기자도 시편 116편 15절에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하였습니다. 주 밖에서 믿음 없이 죽는 것을 복되다고 한 것 아닙니다. 성도의 죽는 것을 귀중히 보신다고 했지 믿지 않는 사람 죽는 것을 귀중히 보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 그리고 2절을 보십시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 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이 결국 이와 같이 됨이다.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하였습니다. 잔치 집에 가서 엄벙덤벙 지내는 것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낫다는 이유는 물론 슬픔 가운데 있는 분을 위로해 주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고 잔치 집에는 가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러나 초상집에서 위로하는 것이 더 요긴한 것을 가르쳐 줍니다. 슬픔 당한 사람에게는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여러 부서가 있는데 상례부가 있어서 슬픔 당한 사람들 돕고 있습니다. 그러나 혼인부는 아직 없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도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했습니다.
열왕기상 2장 1-2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다윗이 죽을 날이 임박하매 그 아들 솔로몬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의 가는 길로 가게 되었으니”하였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이 무엇입니까? 죽음의 길입니다. 사는 동안에 가는 길이 다 달라 보이지마는 사실 따지고 보면 그 길은 하나의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일방 통행, One way를 가고 있습니다. 죽음이라는 그 문을 향해서 다 열심히 가고 있습니다. 세상의 다른 일 아무리 냉정한 법에도 예외가 있는데 여기에는 예외라는 것이 전연 없습니다.
돈으로 못할 것이 없는 세상 같지만 이것만은 안됩니다. 권세를 가지면 못할 것 없는 세상이요 법까지도 마음대로 뜯어고치는 세상이지만 이것만은 안됩니다. 다 가야 합니다. 하루 살았으면 하루만큼 그 길이 가까워졌습니다.
그러기에 모세는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다.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저희는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바 되어 마르나이다“(시편 90편 3-6절).
시편 39편 5절 이하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에도 진실로 허사 뿐이니이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은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했습니다.
그래서 옛날 시인은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시편 39편 4절). “우리에게 우리의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편 90편 12절).
사실 우리의 남은 날을 계수하면서 사는 삶의 태도가 지혜있는 사람의 생활 자세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야고보 장로가 지적한 것처럼 우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입니다. 더구나 내일 일을 모르고 삽니다.
그런데 여기 삶의 자세가 달라집니다. 하나님을 중심해서 사는 사람과 세상 중심, 자기 중심해서 사는 사람이 완전히 다르게 삽니다.
세상 따라 자기 중심으로 사는 사람은 세속적인 향락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전에 헬라의 문화가 극성할 때 그 사상을 지배하던 것 가운데 하나가 소위 에피큐리안 학파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인간의 최고의 목표는 쾌락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하였습니다.
하루살이 인생입니다. 그저 내 귀로, 내 눈으로, 내 코로, 내 입으로, 내 발로, 내 손으로, 내 몸으로 하고 싶은 것, 즐기고 싶은 것 마음껏 하자고 합니다. 세속주의, 쾌락주의, 현세주의입니다.
또 그와 반대되는 사람의 생활이 있어요. 그것은 스토익 학파입니다. 소위 염세주의적인 사상이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람이란 이처럼 잠깐이고 허무하니 결국 의의가 없어. 결국 인간의 생활이란 절망의 식은 재로 화하고 말 것이야. 마지막엔 죽음 뿐이야. 그러니 근본적으로 이 세상에서 생을 구하지 말자. 생을 부정하라. 생을 생각하지 말라. 그렇게 되면 이 헛된 생에 대해서 속지 않을 것이다”고 주장했습니다. 불교의 사상도 엄격히 말하면 염세 사상입니다.
그러면 우리 성경의 교훈은 무엇입니까?
성경도 인간의 허무함, 무상함, 순간성을 의미하고 가르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사람으로 말해도 보이는 육신의 면이 있고 보이지 아니하는 영혼의 면이 있습니다. 보이는 육신의 사람은 시간이 감에 따라 늙어가고 후패해 집니다. 여기에는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차이가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밖의 사람 뿐이고 주안에서 믿음으로 속 사람이 새로워진 사람은 겉 사람이 늙어질수록 속 사람이 새로워집니다. 육신의 눈이 멀어질수록 영혼의 눈이 밝아집니다. 육신의 귀가 어두워질수록 신령한 귀는 더 분명해서 하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이것은 보이는 육신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아니하는 영은 영원 불멸한 존재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이 육신이 비록 잠깐이라고 하지만 이 잠깐 사는 세상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하여 기대하시는 뜻이 각각 있습니다. 우리 하나 하나를 향한 경륜이 계십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각자의 사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잠깐 사는 동안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나를 향하신) 하나님이 일을 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권면합니다. “네 사는 날이 많지 못하니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광음을 아껴서 열심히 네 맡은 사명을 다 하라.”
성 엘몬드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일하는 것은 영원히 사는 것처럼 일하고 사는 것은 내일 죽는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퍽 의미 깊은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이 만일 나의 마지막 날이라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겠습니까?
가장 먼저 할 일은 하나님께 미쳐 회개하지 못한 것 다 깨끗이 회개하고 완전히 용서받아야겠습니다. 죄의 짐을 지고는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 사이에 막힌 것 다 헐어야 합니다. 옛말에 “인지장사에 그 언야선”이란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죽을 때는 그 말이 선합니다. 죽음에는 원수가 없다는 말도 있습니다. 왜 서로 시기하고 미워합니까? 아직도 오래 오래 살 것 같아서 그럽니다. 내가 이 세상을 이제 곧 떠난다고 생각하면 미운 사람 있겠습니까? 서로 화목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할 일을 남은 시간에 하는 것뿐입니다. 남을 날이 얼마 안된다고 무슨 특별한 일하는 것 아닙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뿐입니다. 그러다가 부르시면 그대로 갈 것입니다. 그 행하는 일에 복이 있다고 주님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교회 원로 목사님 훌륭한 데가 많으신 분이십니다. 꼭 말씀대로 사시려고 힘쓰십니다. 서양 속담에 “한발은 무덤에 들여놓고 욕심이 제일 많아진다”는 말이 있는데 이 어른은 그렇지 아니합니다. 저를 만나시면 종종 말씀하십니다.
“내가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건강이 이만큼 유지되는데 이 건강이라는 게 언제 어떻게 될는지 아나? 그래서 이제는 아예 내가 책임지고 무엇을 하는 것은 안할래. 그저 건강이 허락하는 시간까지 혹 어디서 설교나 부탁하면 그 시간을 지키는 것이나 해야지” 이런 분입니다. 이것은 욕심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 하시는 마음이십니다.
지금 주로 남한 산성에 가 계신데 거기가 뵙게 되면 뒷동산에 조그만 과일 나무들을 많이 심으셨습니다. 그러면서 “박목사님, 이거 내가 심었는데 아마 6, 7년 있으면 열매가 맺을 거요. 나는 그때까지 살아 있을지 모르지만 박목사님 와서 이 과일을 따 잡술 수 있을거요” 저는 그 말씀을 들으면서 얼마나 감동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해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얼마나 귀합니까?
여러분, 어떤 사람이 지혜 있는 사람입니까? 죽을 날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미련한 사람입니까? 죽을 날을 생각 않고 사는 사람입니다. 미련한 부자가 그랬습니다. 여러분 오늘 저녁의 말씀은 70넘는 노인들에게만 필요한 말씀입니까?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필요합니다.
잠언 27장 1절 말씀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바로 삽시다.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세상에 올 때는 순서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돌아갈 때는 순서가 따로 없습니다. 세상에 온 순서대로 가지 아니합니다. 그러므로 오늘이라 일컫는 때, 일할 수 있는 낮에 힘써 내게 맡기신 사명 다해야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서실 때 “잘했다”칭찬들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