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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 중 하나인 시민법을 정하실 때에 있는 자 편에서 정하지 않으시고, 가난하고, 없는 자들, 소외된 자들을 위해 은혜를 베풀 수 있는 길을 많이 마련해 두셨습니다. 특히 종들이나, 과부, 고아들을 긍휼히 여기도록 제도를 만드셨습니다.
이 은혜로운 법 중에 '고엘'이라는 제도가 있습니다.
'고엘'이란 것은 '구속자', '기업을 무를 자'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나라에 하나님께서 정하신 구속의 예가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가, 빚으로 땅을 잃어버렸을 때에 누군가가 댓가를 지불하여 그 땅을 회복하여 원 주인에게 돌리는 일을 하는 것을 '그 땅을 구속한다'라고 합니다.
둘째는, 어쩌다가 다른 사람의 노예가 되었을 지라도 누군가가 그 댓가를 지불하면 그 노예된 자리에서 놓임을 받습니다. 이를 '종된 데서 구속한다'고 말합니다.
셋째는, 남편도, 자식도 아무도 없는 과부가 되었을 때에 가까운 친족 중에 누군가가 그 여인의 모든 삶을 책임지고, 가정을 일으키고, 자손이 그 가계에 끊이지 않고 계승하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고엘의 하나님, 곧 구속의 하나님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애굽에 종노릇하는 이스라엘을 돌아보시고, 그들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시고, 그들을 대져의 손에서 건져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되시고, 이스라엘의 주와 남편이 되시기 위해서 고엘로서의 의무와 사랑을 다 하신 것으로 나타납니다.
또 그리스도는 특별한 의미에서 모든 믿는 자들의 고엘이 되십니다. 자신을 많은 사람의 속량물로 내어주심으로 우리의 영원한 죄 값을 치르신 우리의 고엘로서 우리를 죄와 사망과 마귀에 종된 데서 건져주시고, 우리의 기업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우리를 사시되 보배로우신 피로 사셨다고 베드로 사도는 말씀했습니다.
구속자의 자격이 있습니다.
아무나 돈이 있다고 돈을 내었다고 구속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가까운 친족 중 한 사람이어야하고, 또 힘이 있는 유력자여야합니다.
또 자원하는 자라야 합니다. 이 일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난하고, 과부된 이방여인으로서 아무런 소망이 없는 룻 같은 사람을 위해 하나님께서 열어놓으신 것이 고엘입니다. 구속의 방법입니다.
룻은 자신의 처지와 입장을 바로 알았습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은혜를 구하는 일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우리 인생을 룻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그녀가 겸손히 은혜를 구했을 때에 하나님은 보아스를 통해서 은혜를 입혀줍니다. 그 은혜는 겨우 하루 하루를 연명할 수 있는 양식정도를 주는 것이 아니라, 풍성한 은혜로 날마다 더해 주셨습니다.
불안하고, 쉼이 없는 룻에게 가장 필요한 필요한 은혜는 '안식할 곳'이었습니다. 이 안식할 곳, 가정을 만드는 일을 시어머니 나오미의 명령에 순종을 통해서 이루게 됩니다.
이제 보아스를 통해서 룻에게 기업을 무를 구속의 은혜가 이루어집니다. 곧 잃어버린 땅을 찾습니다. 또 끊겨진 가계를 이을 자손을 얻게됩니다.
이 땅과 자손문제는 창세기 부터 계속되어온 하나님의 구원의 언약의 주제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시겠다는 그 축복이 바로 땅과 자손의 복입니다. 이는 보이는 가나안 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천국을 말하는 것이고, 자손을 말하는 것은 구원하실 메시야를 보내주실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룻에게 필요한 것이 땅이요, 자손인 것 같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영원한 천국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구속입니다.
그런데 룻에게 어떻게 구속이 이루어집니까?
첫째로, 이 구속의 역사에 룻이 한 일이 없습니다.
룻이 한 일은 단지 은혜를 바란 것 뿐입니다.
이 모든 일은 누가 합니까? 보아스가 합니다.
보아스는 이 룻을 사랑합니다. 이 일에 책임을 지고 행합니다.
이 구속은 그저 말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보아스가 직접 나서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었습니다.
보아스는 밤에 자리에 찾아온 룻에게 말했습니다.
(룻3:13하)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노니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행하리라. 내가...네게 행하리라...너는 누웠다가 네 집으로 돌아가 기다려라 했습니다.
지금부터 룻이 할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저 기다리는 것 뿐입니다.
보아스가 이 일에 책임지고 행하겠다고 했습니다.
나오미도 룻에게 말하기를 (룻3:18) “이에 시모가 가로되 내 딸아 이 사건이 어떻게 되는 것을 알기까지 가만히 앉아 있으라. 그 사람이 오늘날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
우리를 영원한 죄와 사망에서 구속하신 하나님의 구속역사는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구속의 역사는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행하심으로 이 놀라운 구속의 은혜가 우리에게 오게되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와서 공으로 받은 이 구속의 은혜에 대하여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합니까?
이 대속의 역사를 이루는 데 우리가 한 일이 있습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은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단독사역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공으로 무엇을 베푼다고 할 떠에는 우리의 가진 것 가운데 제일 나은 것은 제가 써야 하니 돌려 놓고, 그보다 못한 것을 내 놓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도 공으로 왔다고 하니까, 우리는 우리된대로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찌끼를 우리에게 주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구속의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서 우리를 극히 사랑하셔서 제일 귀한 것, 제일 소중히 여기시는 것을 내어 놓았습니다. 이 은혜가 공으로 주시는 것이라고 결코 값싼 것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독생자를 우리를 위해서 내어 놓았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이루시기 위해 친히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워낙 큰 것을 받았기 때문에 이 은혜를 느끼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일반 은총의 것도 워낙 귀하고 꼭 필요한 것은 값이 없습니다. 이는 값싼 것, 쓸모없는 것이란 뜻이 아니라, 값으로 계산할 수 없는 무한한 가치의 것들은 공으로 주십니다. 햇빛과 공기, 물은 없어서는 못삽니다. 그러나 이를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셨지만, 아무도 하나님께 그 값을 지불하지 않고, 못합니다. 우리에게 베푸신 구속의 은혜가 그렇습니다.
보아스같이 여호와의 열심은 이 일에 대하여 다 이루시기 까지 쉬실 수 없이 전력을 다해서 지금도 진행하고 계심을 믿습니까?
이 역사를 이루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있는 전부를 다하셨는데, 우리가 한 일이 있다면 자랑할 것이지만, 아무 공로 없는 죄인을 용서해주시니 그저 감사하고 감사할 것 뿐이지 않습니까? 은혜로 선물로 얻은 구원입니다. 주께로 거저갑니다.
둘째로, 약속을 신실하게 지킨 보아스입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다하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는 이 기업을 무르는 일을 행하는데 대해서 룻에게 약속을 한 대로 다 이루기 까지는 쉬지 않고 일했습니다.
성문으로 올라갔습니다. 성문은 당시에 백성들의 송사나 기타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심판석입니다.
성읍 십인이 장로를 청하여 공적인 인정을 받으려 했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했던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보아스는 헌신적으로 이 일을 해 나갔습니다. 이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는 보아스의 태도는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한 약속을 때가 찬 경륜을 따라 이루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그림자를 보는 것 같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인생에게 보내주실 것을 창세기 3장에서 약속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이 약속을 끝까지 바라보도록 하셨고, 때가 차매, 성경의 약속대로 유대 땅 베들레헴에 동정녀의 몸에서 메시야를 나게하시고, 성경대로 십자가의 고난을 받게 하시고, 성경대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죄 가운데서 영원한 멸망으로 아무런 소망 없는 인생들에게 구원과 생명을, 영생을 주셨습니다. 믿습니까?
약속의 하나님께서 그 모든 약속을 이루어주셨습니다. 또 우리를 위해 이루실 것입니다.
이 하나님을 약속의 하나님 여호와라고 합니다.
이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도 이 죄 사함과 구원을 약속하셨고,
세상 끝날까지 떠나지 않고,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고,
우리를 악한 원수들에게서 지켜 보호하실 약속을 하셨습니다.
진리와 성령의 감화하심으로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약속을 믿습니까?
또한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영접하려고 다시 오실 것도 약속하셨음을 믿습니까?
영원한 천국의 소망으로 살아가는 자들에게 이 약속은 믿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가 됩니다.
보아스 보다 더 신실하게, 더 열심으로 쉬지 않고, 이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쉬지도 않으십니다. 다 이루기 까지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실 것입니다.
셋째, 기업을 무르는 데 희생을 결단하는 보아스입니다.
이 구속의 역사는 말로만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문에 앉은 보아스는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과 가장 가까운 친족이 있음을 알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 집안의 기업을 무를 수 있는가를 확인했습니다. 엘리멜렉이 모압으로 갈 때에는 자기 땅이 필요 없어서 남에게 팔았지만, 이제는 나오미와 룻이 돌아왔기 때문에 그 땅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나오미가 가난하여 땅을 도로 찾을 길이 없기 때문에 그 친족이 과연 대신 무를 수 있을까 해서 물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대신 물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 모압여인 룻이 있는 줄도 모르고, 나오미가 늙었으니, 대가 끊겼으니, 그 땅은 얼마있지 않아 자기 소유로 돌아 올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순순히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보아스의 말을 듣고는 곧 그 말을 취소했습니다.
보아스가 젊은 여인 룻이 있음을 말하면서 그 여인과 결혼하여 그 집안의 대를 이어가야하는 의무가 있음을 말했을 때에 그 사람은 허락했던 말을 취소했습니다.
그 친족은 기업을 무르는 일이 자기에게 유익이 된다고 생각했을 때에 그렇게 하겠다고 했으나, 룻과 결혼하는 것은 자기에게 유익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 사실 룻이 모압 이방여인이라는 것도 탐탁하게 생각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이 친족의 기업을 이어주는 것이었지만, 자신에게 유익이 없다고 생각하여 거절하고 만 것입니다.
보아스는 어떤 희생이나, 어려움이 있을 것을 알면서도 이 일을 자신이 자원함으로 책임집니다. 이것이 사랑의 힘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구속의 힘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 십자가의 대속을 앞두고 기도할 때--
(마26:39)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셨습니다. 당신의 뜻, 당신의 생각 보다 아버지의 뜻을 먼저 생각하시고, 어떤 고난과 손해와 모욕과 희생과 죽음이 있을지라도 이 길을 마다 않으시고, 그 수욕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 구속의 역사에 자기 희생, 손해 없이 말로 되는 것이 없습니다.
보아스는 그리스도의 모형으로서 자신이 이 룻의 모든 땅과 자손문제를 책임을 지고 해결하는데, 어떤 희생과 손해도 감수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룻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날개아래 보호함을 입으러 온 룻을 긍훌히 여겼고, 자기의 옷자락에 덮히기를 원하는 룻을 사랑했습니다.
(룻3:10) “가로되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빈부를 물론하고 연소한 자를 좇지 아니하였으니 너의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룻3:11) 내 딸아 두려워말라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네가 현숙한 여자인 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
주님께서 낮아지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주님께서 고통 당하지 않으셨으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주님께서 낮아지시고, 가난해 지심으로 우리가 부요해지고, 심히도 존귀하게 되었음을 믿습니까?
십자가에서 지불하신 그 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가 씻음 받고, 우리가 의롭게 되었음을 믿습니까?
우리가 이 은혜를 안다면 보아스같이 형제를 사랑하므로 불쌍히 여겨 형제 구원을 위해, 또 죄 빚 탕감을 위해 우리가 책임을 느끼고 이 일에 열심해야 마땅합니다.
이 구속의 역사에는 손해도 있을 것입니다. 낮아짐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생각하면서 참아야합니다.
(룻4:10) “또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사서 나의 아내로 취하고 보아스는 룻을 사서 아내로 삼았다“고 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
(벧전1: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벧전1: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고전6: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했습니다.
나를 돈으로 사서 자유 해방 시켜주었다고 해도 그 은혜를 입은 것을 인해 얼마나 감사해야하겠습니까?
나를 옥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한 사람이 대신 옥에 갇혔으니, 이 은혜를 어떻게 감사하겠습니까?
나를 육신의 죽음에서 건져주는데, 어떤 사람이 큰 수고를 했다고 해도 우리가 얼마나 감사해야하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이 나를 옥에서 건져내어주고, 죽음에서 구출하기 위해서 애를 쓰다가 그가 나를 구하고는 그가 죽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를 생각해야 마땅하겠습니까?
여러분, 나를 육신이 고통하는 감옥에서 건져주고 죽음에서 구출해준 그 어떤 이에게 감사해야한다면 왜 주님께 감사하지 않습니까?
주님은 나를 일시적이고 잠간 고통하는 감옥이 아닌 영원한 지옥이라는 죽음의 감옥에서 나를 건져 주셨습니다.
어떤 부족하고 못난 인생 가운데 이런 일을 했다고 해도 내가 그를 위해 사는 것이 마땅한데, 이 주님은 하나님이십니다. 만왕의 왕이요, 만 주의 주이십니다. 세상을 지으신 분이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낮아지심과 고난과 희생입니다
이러니 우리가 날마다 아니, 영원히 이 주님의 은혜, 우리를 사랑하심,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며, 찬양하며, 영원히 영광돌리는 예배와 경배함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이 은혜를 깨달으면 지루함이 없습니다. 너무도 크고 놀라운 은혜, 황홀한 구원입니다.
유려한 보아스가 가난하고 아무 것도 없는 룻을 사랑하므로 이 일을 했으니, 룻은 어떻게 보아스를 대해야합니까?
(룻2:13) 룻이 가로되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나는 당신의 시녀의 하나와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이 시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
(룻3:9) 가로되 네가 누구뇨 대답하되 나는 당신의 시녀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 당신은 우리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은혜를 입기를 원하는 자세도 종의 자세요, 은혜를 입고 나서도 종이 되어야합니다.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존귀히 대우하십니까?
(시8:4)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시8:5)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시8:6)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으니 (시8:7) 곧 모든 우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어족과 해로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시8:9)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보아스의 은혜를 입은 룻과 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성도여러분이여, 주님의 구속의 은혜를 생각하고 감사하며, 찬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가 알기도 전에 나기도 전에 우리를 위해서 이 모든 것을 다 이루어 놓으신 하나님, 약속하시고, 약속을 신실히 이루시는 하나님, 큰 희생과 고난을 다 받으셔서 피로 우리를 사신 주님의 은혜,
어찌 다 말로 다하며, 어찌 만입으로 감사 찬송 다 하겠습니까?
찬송 196장
날 구원하신 은혜를 영원히 찬송하겠네!!
주밖에 없는 사랑을 만백성 알게 전하세!!
이 세상 어디 가든지 내 주만 생각하겠네!!
내 주를 사랑한대도 내 맘에 부족하도다!!
출처 한서노회(http://cafe.daum.net/harns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