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10-15
주의 손에 있나이다
다윗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솔로몬이 왕이 되긴했습니다만 다윗으로서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걱정은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나이가 어리다는 것입니다. 29:1을 보면 "내 아들 솔로몬이 홀로 하나님의 택하신바 되었으나 오히려 어리고 연약하다"고 했습니다.
솔로몬 자신도 열왕기상 3:7에서 자신을 "작은 아이"라고 표현했습니다. 40년 동안 나라를 다스린 노왕 다윗에 비하면 어린 나이임에 틀림없지만 그러나 아버지 눈에는 회갑 지난 아들도 어려 보이기 마련인 것입니다.
1960년 총각시절 다섯 분의 장로님이 계시는 시골 교회에서 전도사로서 목회를 한일이 있었습니다. 두분 장로님은 60이 지난 분들이었고 세분은 50대였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나이가 제일 많은 장로님이 주일 낮 예배 기도 순서 를 맡아 기도를 인도하실 때마다 담임 전도사를 위해 기도를 하시곤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도내용입니다.
"이 시간 어린 종이 나와서 말씀을 전하겠사오니.... " "전도사에게 은혜를 주셔서 양을 잘 치게 해 주옵소서...."
어느 날 그 장로님과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장로님, 제가 너무 어리지요?" "어리긴 한창 젊은 나이지....“
그 다음부터 그 장로님은 어린 종을 젊은 종으로 바꿔주셨습니다.
다윗의 걱정은 어린 나이에 아들이 왕 된 것이 걱정이었던 것입니다.
둘은 관리 능력이 걱정이었습니다.
이 점은 솔로몬도 걱정이 컸습니다.
열왕기상 3:8 이하를 보면 백성은 수가 많아 다 셀 수도 없고 재판하기도 힘들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왕상 3:12).
어느 목사님 아들이 미국에서 신학 공부를 마치고 33세에 목사가 되어 300여명 모이는 큰 교회 담임 목사가 되었 습니다. 2년이 지난 어느 날 아버지가 아들이 목회 하는 교회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걱정은 설교나 제대 로 할까, 행정은 제대로 해낼까, 교인 대하는 태도는 얼마나 서툴까, 태산 같은 걱정을 안고 아들을 만나게 되었습 니다. 그런데 그 아들은 2년만에 5에이커의 땅에 600석 교회를 사고 교육관이며 체육관 시설을 갖추는가 하면 교 인이 2년 동안에 450명으로 불어나는 맹활약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신기하고 기특하게 여긴 아버지가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대단하고 장하구나, 언제 어디서 목회를 배웠느냐"고 아들의 대답은 "아버지 저는 35년 동안 아버지 그늘에서 보고 배웠습니다."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솔로몬 역시 하나님이 지혜와 총명을 주셨고 그리고 어려서부터 부왕 다윗의 그늘 밑에서 보고 배웠던 것으로 나라를 다스린 것입니다.
셋은 성전 건축 문제였습니다. 다윗의 평생 소망은 하나님을 모실 집을 건축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그 일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췄습니다.
건축에 필요한 모든 재료 건축비를 넉넉하게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윗의 성전건축을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서 다윗은 자신의 성전 건축 꿈을 솔로몬에게 물려주면서 성전 건축을 당부하게된 것입니다.
그러나 걱정은 솔로몬은 어리고 연약하고 성전 건축의 역사는 크다는 것이었습니다.
본문은 성전 건축을 위해 자신과 백성이 하 나님께 드린 헌금 내용을 열거하면서 넉넉하게 채워주신 은혜를 감사하여 드린 기도입니다.
그 기도 내용을 주목 할 필요가 있습니다.
1.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10절을 보면 "다윗이 온 회중 앞에서 여호와를 송축하여 가로되 우리 조상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영원 히 송축을 받으시옵소서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9절 끝을 보면 " 다윗 왕도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니라"고 했고 22절을 보면 "이날에 무리가 크게 기뻐하여 여호와 앞에서 먹고 마셨더라"고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기쁨으로 드렸고 찬양했고 먹고 마셨다는 것입니다.
일을 해도 기쁨으로, 헌금을 드려도 기쁨으로, 먹어도 마셔도 기쁨으로 봉사를 해도 기쁨과 즐거움으로 해야 합니다.
다윗은 그날의 기쁨과 감격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백성들도 그날 함께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노이로제나 우울증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감정이나 속마음을 꼭꼭 접은 채 털어놓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희로애락에 얽힌 감정을 표시하지 않고 가슴에 묻어 두는 것이 그 증상의 특징입니다.
기독교는 고백의 종교입니다.
입으로, 말로, 소리로 내 감정과 내 마음을 털어 내는 것을 고백이라고 합니다.
찬송 소리가 커야하고 기도가 분명해야 하고 신앙고백이 확실해야 합니다.
다윗은 회중 앞에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법궤를 다윗 성으로 옮길 때도 백성이 보는 앞에서 춤을 추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사람들 보는 앞에서 술주정을 부리거나 추태를 보이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송축하는 것은 의무이며 권리이며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소리내어 기도하고 입을 크게 열어 하나님을 송축하시다
2. 주의 손에 있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본문 10절에서 14절을 주목해 보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께 로 말미암고", "주의 손에 있나이다",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라는 말씀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권능도, 이기는 것도, 영광도, 주권도 부와 귀도, 천지에 있는 모든 것도 다 주께 속하였으며 주의 손안에 있으며 주께로 말미암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다윗의 위대한 신앙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져보면 정권과 권력 재물과 부귀는 모두 왕에게 속해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는 주께 속해 있으며 주의 손데 있다고 고백하며 기 도했습니다.
지난 9일 스웨덴 임마누엘 한인교회 창립20주년 기념행사에 참속하기 위해 서울을 떠나 영국을 거쳐 스톡홀름을 방문했습니다. 20년전 스톡홀름에 살고있는 교민들과 입양아 선교를 위해 교회를 설립하고 충신교회 선교사를 파송했습니다.
현재 스톡홀름에 살고 있는 한국교민은 700여명인데 반해 입양아 수는 800명이 넘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매년 100여명이 입양되고 있습니다. 제가 기념식에서 설교를 했고 스톡홀름 시장과 대사가 축사를 하는 등 뜻깊은 기념 식을 가졌습니다. 그 기념식에는 한국교민과 스톡홀름 시민등 300여명이 참석해 예배를 드렸습니다.
서울에서 영국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타이타닉"이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타이타닉은 그 당시 과학문명이 만들어 낸 초호화 여객선이었습니다.
그 배에는 2200명의 여객이 타고 있었고 그 들 대부분은 그 당시 저명인사들과 돈 많은 상류층 인사들이었습니다.
향해 도중 “타이타닉"은 빙산과 충돌 선체 중 간이 부러지면서 침몰하기 시작하여 최후를 맞게 된다는 영화였습니다.
저는 그 영화를 보면서 몇 가지 느낀 점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영화 제작이 장엄하고 재미있었습니다.
배가 침몰하고 바닷물이 배안으로 휩쓸려 드는 장면은 장관이었습니다.
둘은 인간의 오만과 오류였습니다.
그 당시 <타이타닉호>는 최고의 설계와 최상의 기술진에 의해 제작된 세계최고의 호화여객선이었습니다.
그래서 빙산 정도는 문제도 되지 않는다는 오만으로 먹고 마시고 춤추며 항해를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 앞에 썩은 나무토막과 같았습니다.
그토록 크고 웅장한 배가 마치 무토막 잘라지듯 갈라지는 모습은 오만하고 건방진 인간들에게 주는 하나의 큰 경고였습니다.
셋은 제한 근원입니다.
<타이타닉호>에는 2200명이 승선했지만 구명정을 이용해 탈출할 수 있는 인원을 1500명으로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구명보트를 1500명분만 만들어 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배가 침몰하기 시작하자 아이들과 여자들 먼저 구명정에 탈 수 있도록 조치했습니다.
그리고 구명정에 탔더라도 배가 뒤집히거나 물에 뛰어내린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 속에서 얼어죽고 생존자는 극소수에 불과 했습니다,
즉 제한된 수만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하나님의 선택과 제한구원을 생각했습니다.
믿는 사람과 구원의 방주인 교회를 떠나지 않는 사람만 구원을 받는다는 진리가 새삼 감격스러웠습니다.
넷은 사명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배가 침몰하기 시작하고 바닷물이 배안으로 밀려들면서 배 안은 아수라장으로 변합니다.
그런 와중에서 <타이타닉>승무원들은 잔 한 명이라도 승객을 구출하기 위해 온갖 힘을 다 기울입니다.
그리고 그 배에는 현악사중주 악단이 있었습니다.
배가 침몰하기 시작하자 그들은 갑판으로 나와 노래를 연주하기 시작합니다.
도피할 생각도 버리고 연주를 계속합니다.
그들의 연주소리와 아비규환이 어우러져 합창이 됩니다.
배가 점점 더 기울어지기 시작하자 그들은 "내주를 가까이하려함은"이라는 찬송을 연주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죽음이 다가오자 끝까지 연주할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한다며 서로 악수하고 갑판을 떠납니다.
끝까지 자기 자리를 지키며 사명을 다하는 사람들이 <타이타닉호>안에도 있었습니다.
세계 최대의 <타이타닉>도 바다에 떠있는 빙산앞에서는 썩은 나무토막만도 못했습니다.
하물며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모습이나 능력이라는 것들은 한점 먼지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 진리를 일찍이 터득한 다윗 왕이기에 그는 “권능도, 구원도, 부도, 영광도, 생명도, 다 주의 손에 있나이다“ 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의 손에 있나이다"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3. 즐거운 마음으로 드렸습니다.
14절을 보면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 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모든 것이 주님께 속했고 주의 손안에 있고 주님이 주셨기 때문에 즐거운 마음으로 주님께 드렸다는 것입니다.
십일조나 현금생활을 바로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 것을 드려야 된다는 강박관념 때문입니다.
내 것이라고 생각하면 억울하고 아깝고, 어떻게 번 돈인데, 어떻게 모은 돈인데, 어떻게 지킨 돈인데 그것을 깨트려 하나님께 드린단 말인가 라고 생각하면 드리기도 힘들고 감사한 마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신 것, 주님께로부터 온 것, 주님의 손에 있는 것을 일시보관 했다가 돌려드린다고 생각하면 다윗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물질뿐이겠습니까?
시간을 드리는 것도 즐거움으로 재능을 바치는 것도 즐거움으로 찬송과 경배와 예배를 드리는 것도 즐거움으로 드려야 합니다.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여행을 가고 놀러가는 것보다 예배가 더 즐거워야 합니다.
이유는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며 하나님께 나를 드리는 시간이며 하나님이 예비하신 은총과 사랑과 축복을 받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15절 끝에서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림자가 무엇입니까?
해가 지거나 가리워지면 없어지는 것, 실체가 없어지면 따라서 없어지는 것이 그림자입니다.
다윗은 인생을 그림자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왕도, 권력도, 영광도 돈도, 그림자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그림자 같은 인생과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실체이신 하나님을 붙잡아야지 그런 자를 붙잡으면 안됩니다.
그림자 붙잡으려다 하나님을 버리면 안됩니다.
다윗의 고백과 기도에 귀를 기울입시다.
“다 주께 속하였나이다.
주께로 말미암았나이다.
주의 손에 있나이다.
주의 손에서 받았나이다.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신 주님께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신 주님께 드립시다.
주님과 함께 살아갑시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