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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4: 3 구하여도 받지 못함 - 약 4: 6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약 4: 3 구하여도 받지 못함 -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
그러나 우리가 기도할 때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는 것은 응답받지 못할 것이다. 또 악한 동기와 의도를 가진 자들의 기도도 결코 응답받지 못할 것이다. 악을 품은 기도는 결코 응답받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세상적 욕심을 품고 그것을 위해 구하는 것은 잘못 구하는 것이며 그는 결코 구한 것을 얻지 못할 것이다.
즉 그가 구한 것은 그 자신에게 해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엄마에게 칼을 달라고 할 때, 엄마가 그것을 그 아이에게 줄 수 없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지혜로우시고 선하신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구하는 것들 중 우리에게 유익한 것만 주실 것이며, 우리에게 해가 되는 것은 결코 주지 않으실 것이다.
1]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본 절에서 야고보는 만족을 채우기 위해 그릇된 동기에서 구하는 문제를 지적한다. 본 절의 '정욕' 역시 1절과 마찬가지로 '쾌락'을 가리킨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쾌락을 채우기 위해서 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자의 간구는 외면하시나 의로운 자, 진실하고 참되게 구하는 자, 자신을 낮추고 회개하는 자,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자의 간구는 들으신다.
단지 성도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는 것은 얻지 못한다. 그 이유는 그것이 성도에게 해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어린 아이가 칼을 달라고 한다고 그것을 줄 수 없는 것과 같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유익한 것만 주시고 해가 되는 것은 주지 않으실 것이다.
* 시 34: 15 -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 귀는 저희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 도다.
* 시 145: 18 -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 도다.
* 눅 18: 14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 요 5: 14 -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
2] 우리들은 있는 자입니다. : 김정남 목사
< 다툼이 일어나는 이유 >
4장에 들어서면서 지혜롭지 못한 자의 삶으로서 왜 사람들이 다투는지에 대해 그 원인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본문 4장 1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이 구절에서 지체란 ‘믿는 형제들’을 말합니다. 목회자인 야고보의 입장에서 그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로 느껴졌을까요? 왜냐하면 그가 말하는 다툼이 세상 사람들의 다툼이 아니라 믿는 자들의 다툼, 즉 교회 안에서 함께 주님을 섬기는 형제들의 다툼이기 때문입니다. 왜 사람들이 다투게 될까요? 몇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1. 활동 공간이 작으면 다툼이 많이 일어납니다.
생활공간이 적으면 다툼이 일어날 가능성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작은 교회는 가족처럼 위해 줄 것 같은데 왜 의외로 작은 교회에서도 다툼이 잦게 일어나는 것일까요? 생활공간이 적은 상태에서 마음을 넓히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세계적으로 대단히 선동적인 성품을 지녔다고 합니다. 그래서 로마 제국 내에서 가장 다루기 힘든 민족이 유대민족이었습니다. 같은 민족끼리 논쟁이 많았고, 수시로 많이 다투는 편이었습니다. 그렇게 된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가지고 있는 꿈과 사명과 능력에 비해 영토가 작았기 때문입니다.
흔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사소한 다툼을 잦게 하는 편이라고 합니다. 아마 인구에 비해 땅이 좁은 것도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주차 공간이 작아 주차하기가 힘들면 주차 문제로 주민들 가운데 싸움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처럼 활동 공간이 작으면 다툼이 많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활동 공간이 적어도 마음이 넓으면 다툼을 현저히 줄일 수 있습니다.
2. 내부지향적인 삶을 추구하면 다툼이 많이 일어납니다.
삶을 살아가는 방법에는 구심성 삶이 있고, 원심성 삶이 있습니다. 공동체에서도 구심적 공동체가 있고, 원심적 공동체가 있습니다. 두 가지 특성이 다 있어야 가장 바람직한 인생, 바람직한 공동체가 됩니다. 모이는 것은 소중한 일입니다. 그러나 모이기만 하면 안 됩니다. 계속 모이기만 하면 다툼도 많아집니다. 그러므로 모인 후에는 사명을 가지고 흩어져야 합니다.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믿었으면 실천해야 합니다. 그처럼 내부지향적인 삶에서 사명지향적인 삶으로 변화시킬 때 다툼이 줄어들게 됩니다.
사탄이 싸우자고 달려드는 영혼이 있습니다. 바로 자기중심적인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면 사람과의 다툼도 많이 일어나지만 무엇보다 사탄이 마음에 찾아와 끊임없이 노크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을 통해 사탄이 찾아오게 만들고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겠다고 하지 말고, 선교하는 삶을 통해서 아예 사탄이 찾아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승리의 비결입니다.
3. 가진 것이 없으면 다툼이 많이 일어납니다.
물질적으로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 성격이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가진 것이 꼭 물질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질이 없지만 대신에 다른 좋은 것을 가진 사람도 많습니다. 그처럼 있어도 없는 사람이 있고, 없어도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는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을 버려야 하고, “나는 내 나름대로 가진 것이 많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 본능이 문제가 아니라 큰 정욕이 문제입니다 >
이 모든 다툼의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요? 야고보 사도는 그 근본 원인을 인간의 정욕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1절에서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뇨”하고 반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 2-3절 말씀을 계속해서 보십시오.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야고보는 정욕 때문에 다툼이 생기고 기도 응답까지 막힌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 다툼의 문제를 해결하는 해결책은 무엇일까요? 정욕을 없애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인간의 본능을 없애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참으로 힘든 일이고, 사실상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도 아닙니다.
인간의 본능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본능을 주셨을까요? 첫째,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주셨습니다. 둘째, 꿈의 밑천으로 삼으라고 주셨습니다. 셋째, 거룩한 열정의 불씨로 삼으라고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본능이 문제가 아니라 거대한 정욕이 문제입니다. 그 거대한 정욕이 기도를 막고, 기도 응답을 막는 것입니다. 기도가 만사를 변화시키고, 사태를 역전시키는 능력이 있어도 기도에 정욕이 들어가면 잘못 구하는 것이라고 야고보는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므로 응답 받은 것을 정욕으로 쓰려고 하지 말고 사명으로 쓰려고 해야 합니다. 또한 나를 위해 쓰려고만 하지 말고 하나님을 위해 쓰려고 해야 합니다.
< 우리는 많은 것을 가진 존재입니다 >
어떻게 이 거대한 정욕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해결이 어려운 문제이지만 해결책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대개 싸우는 사람을 보면 ‘없는 사람’이 싸운다고 조금 전에 말씀드렸습니다. 성인군자라고 해도 자신이 가진 것이 없는 왜소한 존재라고 생각하면 싸우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성인군자는 별로 싸울 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인군자는 있는 것이 아주 많기 때문입니다. 즉 그의 마음과 성품은 항상 “나는 가진 것이 많다”는 의식으로 풍요롭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나는 가진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많은 것을 주셨다!”라는 인식입니다.
우리는 정말 많은 것을 가진 사람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실상 많은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없는 것 같으나 있는 자이고, 무명한 것 같으나 유명한 자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있는 사람’입니다! 무엇이 그토록 있습니까?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죽 꼽아 보았는데 정말 많이 있습니다. 영원한 기업도 있고, 회개할 줄 아는 마음도 있고,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 그리스도의 성품, 선한 양심도 있습니다. 또한 영원한 삶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의 건강한 삶도 있고, 마음이 통하는 성도간의 교제와 사랑도 있습니다.
또한 주는 마음과 주어야 더 기쁨이 생기는 마음도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도가 십일조를 드리는 것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십일조를 드리지 않으면 오히려 마음이 불편하고 십일조를 드려야 마음이 편합니다. 그런 소중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얼마나 풍요로운 영적 자산입니까?
그뿐만이 아닙니다. 우리 성도에게는 무릎을 꿇는 자세도 있고,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대상도 있고, 또한 새벽마다 사랑의 대상을 만나러 제단을 향해 새벽공기를 느끼는 싱그러움이 있고, 그 대상을 향해 걸어갈 때 느껴지는 뿌듯한 자부심도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얼마나 풍요로운 자입니까?
무엇보다 전능하신 성령이 친히 함께 해 주시는 역사가 있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인도가 있고,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또한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를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도 있습니다. 바른 길 가도록 우리를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사람이 진실로 복된 자녀입니다.
이러한 풍요로움이 얼마나 우리 마음을 풍요롭게 만듭니까? 그리고 이런 풍요로운 마음을 가지면 우리의 시기와 다툼은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입니다. 항상 “나는 많은 것을 가진 자다!”라는 의식으로 넉넉하게 사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약 4: 4 세상과 벗된 것이 -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 )
간음한다는 말은 육신적 의미뿐 아니라, 영적인 의미를 가진다. 육신적으로 간음하는 것은 육신적인 욕망에 따라 행하는 육체 사랑으로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다.
영적으로 간음한다는 것은 우상숭배, 이 세상을 사랑, 돈을 사랑, 쾌락을 사랑하는 등 이 세상의 것들, 육신적인 것들, 물질적인 것들을 하나님처럼 혹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바울은 탐심을 우상숭배라고 말했다.
* 골 3: 5 -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그러므로 간음하는 자들은 세상과 벗된 것이요 그것은 하나님과 원수 되는 일이다. 하나님의 원수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지 말아야 하며 그것은 세상의 욕망을 다 버림으로써만 가능하다. 그러나 이 세상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과 원수가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불행한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2장에서 말하기를,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하였다. (요일 2: 15-17).
1] 간음한 여인들아!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모이칼리데스'는 여성 명사로 문자적으로 '간음하는 여자들'을 가리키나 실제로는 구약성경에서 자주 나타나듯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영적인 불충실성을 나타낸다.(Burdick, Adamson).
전통 사본에는 '간음하는 남자들과 여자들이여'라고 되어 있다.
'간음한다.'는 말은 육신적으로나 영적으로 다 적절하다. 육신적으로 간음하는 것은 육신적 욕망을 따라 행하는 육체적 사랑으로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다. 영적으로 간음한다는 것은 우상숭배, 세상사랑, 돈 사랑, 쾌락 사랑 등 하나님 대신에 무엇을 더 사랑하는 것을 가리킨다. 탐심은 우상숭배이다(골 3: 5).
* 호 2: 2-5 - 2 너희 어미와 쟁론하고 쟁론하라. 저는 내 아내가 아니요 나는 저의 남편이 아니라. 저로 그 얼굴에서 음란을 제하게 하고 그 유방 사이에서 음행을 제하게 하라. 3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저를 벌거벗겨서 그 나던 날과 같게 할 것이요 저로 광야 같이 되게 하며 마른 땅 같이 되게 하여 목말라 죽게 할 것이며 4 내가 그 자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음란한 자식들임이니라. 5 저희의 어미는 행음하였고, 저희를 배었던 자가 부끄러운 일을 행하였나니 대저 저가 이르기를 나는 나를 연애하는 자들을 따르리니 저희가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들을 내게 준다 하였느니라.
* 렘 31: 22 - 패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
* 겔 23: 45 - 의인이 음부를 심문함 같이 심문하며 피를 흘린 여인을 심문함 같이 심문하리니 그들은 음부요 또 피가 그 손에 묻었음이니라.
* 말 3: 5 -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 술수 하는 자에게와 간음하는 자에게와 거짓 맹세하는 자에게와 품꾼의 삯에 대하여 억울케 하며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케 하며 나를 경외치 아니하는 자들에게 속히 증거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야고보는 이 비유를 통해 수신자들의 육신에 속한 모습을 암시하고 있다(Gibson, Tasker, Manton).
2]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야고보는 본문에서 '세상'과 '하나님', '벗'과 '원수'를 대조시키고 있다.
'세상'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영역을 가리킨다. 따라서 사람이 세상과 벗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대적하고 원수 관계를 맺는 것이다.
야고보는 수사학적인 질문을 통해 수신자들의 세상과 벗됨을 지적함으로 그들이 '쾌락'과 '정욕'에 사로잡혀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간음하는 자들은 세상과 벗된 것이요 그것은 곧 하나님과 원수 되는 일이다.
하나님의 원수는 하나님께로부터 진노와 심판의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지 말아야 하며 그것은 세상의 욕망을 다 버림으로써만 가능하다.
세상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과 원수가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불행한 길이다.
3]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되고자 하는'(불레데)는 '- 할 작정이다'라는 의미를 가진 '불로마이'의 단순과거이다. 무엇을 하려고 계획한 자가 정해진 계획대로 이루었음을 의미한다.(Burdick, Robertson, Manton).
* 딤전 2: 8 -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 딤전 5: 14 - 그러므로 젊은이는 시집가서 아이를 낳고 집을 다스리고 대적에게 훼방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말기를 원하노라.
* 딛 3: 8 - 이 말이 미쁘도다. 원컨대 네가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
이것은 하나님께 불충스런 자들이 저들의 계획된 목적에 따라 '고의적으로' 세상과 짝한 것을 뜻한다.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는 말은 사람들이 스스로 세상과 벗 되는 것이 결국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결과로 나타나며 하나님과 원수 된 책임이 인간에게 있음을 시사한다(Manton, Reicke).
약 4: 5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 )
성령께서는 신자들 속에 거하신다. 주께서는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요 14: 16).
사도 바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다(롬 8: 9). 그런데 우리 속에 거하시는 성령께서는 우리가 하나님보다 세상의 것을 사랑할 때 우리를 향해 시기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 중 두 번째 계명에서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3, 4대까지 이르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출 20: 4-5).
그는 자신을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부르셨다. 우리가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하나님처럼 혹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거나 섬기거나 의지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시고 질투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 사랑, 명예 사랑, 돈 사랑, 쾌락 사랑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기를 원하신다.
그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참으로 이 세상의 욕망들을 다 버리고 오직 하나님과 내세 천국만을 바라며 살아가야 한다.
1]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본문은 해석상 두 가지 문제를 갖고 있다.
(1) 본문에 나타난 인용문의 근거가 어디인가?
이에 대한 견해는 네 가지이다.
Ⓐ 70인 역의 창 6: 3-7과 출 20: 5이다(Mayor, Knowling, Ropes).
Ⓑ 신약성경의 마 6: 24과 롬 8: 7, 요일 2: 15이다(de Wette).
Ⓒ 상실된 히브리 복음서나 외경 가운데서 인용한 것이다(Resch, Moffatt, Spitta, Debelius).
Ⓓ 축자적인 인용이 아니기 때문에 출 20: 5, 34: 14 그리고 슥 8: 2이다(Burdick, Moo).
이러한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2) '성령'(프뉴마)에 대한 해석의 차이이다.
'프뉴마'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 인간의 영(NIV, NEB, GNB, Phillips).
Ⓑ 성령(JB, Martin, Adamson, Burdick).
전자의 견해는 '시기하기'(프도논)의 사용 예에서 비롯된 해석이다. 즉 '프도논'은 하나님의 행위를 수식하는 데 사용되지 않으며(Mitton, Mayor) '선한 행위'로 인식되지 않기 때문에(Trench) 본문에서 '프도논'이 수식하는 '프뉴마'는 하나님께서 창조 때에 인간에게 불어넣어 주신 '인간의 영'을 의미한다.
그러나 '프도논'은 '젤로스'(열심, 시기)와 혼용되어 '하나님의 질투'를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다.(I Macc 8:16, I Clem. 3.2, 4.7, 5.2, Martin, Mussner)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은 '에'(혹은)가 헬라어 본문에는 삽입되어 있어 본 절과 앞 절이 연관된 것임을 나타낸다. 따라서 '프뉴마'는 '성령'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모든 성도들 속에는 성령님이 내주(內住)하신다.
* 행 5: 32 -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 롬 8: 9 -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성령 안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 고전 6: 19 -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그런데 성령님은 우리가 하나님 대신 세상의 것을 사랑할 때 우리를 향해 시기하신다.
* 출 20: 4-5 - 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 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3, 4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이것은 세상사랑, 명예 사랑, 돈 사랑, 쾌락 사랑을 버리고 하나님과 그의 말씀과 천국만을 사랑하라는 요구이다. 이것은 거룩한 시기심이다. 우리는 참으로 세상의 욕망을 다 버리고 주님만을 따라야 한다.
2. 겸손에의 권면 ( 4: 6 – 10 )
⑥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⑦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⑧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⑨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⑩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약 4: 6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
더욱 큰 은혜란 이 세상의 것들을 미워하고 자기를 부정하고 세상 욕심을 극복하여 하나님만 사랑하도록 하는 은혜를 가리킨다.
그러나 이 은혜를 받기 위해 성도 편에서도 성실해야 한다. 우리는 우선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겸손해야 한다. 교만과 세상 욕망은 친구이다.
교만은 이 세상적인 명예심에서 나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1]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혹자는 본문이 5절과 연속된 구문이라고 주장하나(Manton, NIV) 5절과는 대조를 이루는 독립된 문장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Burdick, Martin, Moo).
야고보는 앞 절에서 언급한 내용 즉 하나님께서 질투하기까지 자기 백성을 사랑하셔서 그 요구하시는 바가 엄격할지라도 또한 더욱 큰 은혜를 주셔서 백성들의 결점을 보완하신다는 점을 들어 수신자들을 위로하고 있다.
2]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본문은 잠 3: 34(LXX)의 인용이다. 본문에서의 '교만'이 잠 3: 34에서는 '거만'으로 언급되어 있다. '교만'은 남을 비웃거나 업신여기며 자신의 우월성을 드러내는 것을 의미한다.(Manton)
'겸손'은 자신의 부족을 인식하여 영적인 통회(痛悔)를 하며 창조주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을 의미한다(Tasker).
야고보는 인용문을 통해 하나님에게서 떠나 자신만을 인정하고 자기만족을 위해 '쾌락'을 추구하는 '교만한 자'와 자신의 부족을 인식하고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의지하여 순종하는 '겸손한 자'를 대조시켜서 수신자들에게 '쾌락을 추구하는 자'와 같이 되어 하나님과 원수가 되지 말고 자신의 결점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며 순종하는 자가 될 것을 권면한다(7절).
'더욱 큰 은혜'란 세상을 미워하고, 자기를 부정하고, 세상 욕심을 극복하여 하나님만 사랑하도록 하는 은혜를 가리킨다. 그러나 이 은혜를 받기 위해 우리 편에서도 성실해야 한다.
우리는 우선 교만을 버리고 겸손해야 한다. 교만과 욕망은 친구이다. 교만은 명예욕에서 나온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