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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동서원
[2] 김굉필과 그의 시대
[3] 훈구파와 사림파
[1] 도동서원
1) 도동서원의 위치는 어디에 있는가?
o 행정구역상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에 위치하고 있다.
o 현풍에서 구지면 사무소를 지나 낙동강을 오른편에 끼고 약 4km쯤 위치.
o 현풍에서 도동리로 넘어가는 고개 다람재에 올라서면 5대서원의 하나로 꼽힌다는 도동서원(道東書院)이 한눈에 들어온다.
2) 5대 서원이란 ?
① 도동서원(道東書院), ②소수서원(紹修書院 ; 주세붕), ③옥산서원(玉山書院 ; 회재 이언적), ④도산서원(陶山書院 ; 퇴계 이황), ⑤병산서원(屛山書院 ; 유성룡)
3) 도동서원은 누구를 봉사한 서원인가?
o 조선 성리학 *오현(五賢)중의 한분으로 조선조 유학사(儒學史)에 큰 획을 긋는 한훤당 김굉필(寒喧堂 金宏弼)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서 건립한 서원이다. 도동(道東) 이란 ‘성리학의 도가 동쪽으로 왔다’ 는 자부심 넘치는 의미가 담겨 있다.
o 뒤에 서원 건립에 공이 컸던 한강 정구(寒岡 鄭逑)선생을 함께 배향했다.
* 정구(寒岡 鄭逑)선생 ; 한훤당 선생의 외증손이며 퇴계와 남명의 학통을 이은 당대의 대유학자
4) 조선 오현은 누구인가?
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정암 조광조, 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이며 이중 한훤당 김굉필은 수현(首賢 ; 으뜸가는 분)이라 일컫는다.
5) 도동서원의 내력은?
o 1568년 유림에서 현풍현 비슬산 기슭(현재 위치에서 9km 떨어진 곳)에 사우를 지어 향사를 지내왔다. 1573년 쌍계(雙溪)서원으로 사액되었으나 1597년 왜란으로 전소되었다.
o 그 후 1605년 지금의 자리인 보로동(甫老洞)으로 옮겨 사우(祠宇)를 재건하고, 보로동(甫老洞)서원이라 하였다. 쌍계서원터는 인가가 가깝고 장터가 있어서 학생들이 유숙하며 공부하기에는 적합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o 1607년 도동서원(道東書院)으로 사액되었다. 이때부터 마을 이름도 보로동에서 도동으로 바뀌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1871년)시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전국 47개 주요서원중의 하나이다.
6) 현 도동서원의 위치의 특징은?
o 낙동강을 향해 돌출해 있는 작은 구릉위 경사진 지형지세를 잘 이용하여 동북향을 향해 자리 잡고 있다. 그 뒷산을 대니산(戴尼山)이라고 하는데, 공자(호 중니)님을 머리에 인다는 뜻이다.
o 서원 뒤 대니산 기슭에 한훤당의 묘소가 있고 산 너머에 솔례촌에 선생의 생가가 있다. 서원-묘소-대니산-생가가 한 일직선상에 이어진다.
7) 서원과 사찰의 위치상의 차이는 무엇인가?
o 도동서원은 앞으로 낙동강이 유유히 흐르고 뒤로는 나지막한 산을 배경으로, 다람재에서 내려다보면 그 정경이 마치 한폭의 동양화를 연상하게 한다. 이와 같이 서원은 앞 전경이 유생들이 심성을 수련하는 데 호연지기를 기를 수 있는 전망이 일품인 것이 특징이다.
o 불교의 사찰은 절 뒤의 배경이 일품이다. 웅장한 건물과 탑과 뒷산의 웅장한 배경이 모두 예배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절은 뒷배경이 장엄하고, 서원은 앞배경이 일품인 것이 일반적인 특징이다.
8) 도동서원의 건물 구조를 크게 나누어 보면?
o 도동서원은 산지형 서원의 배치형태로 진입공간, 강학공간 제향공간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그밖에 신도비 유물전시관, 전사청, 증반소 등이 있다.
9) 진입공간의 건물은?
o 진입공간에는 정문인 외삼문과 문루(門樓)인 수월루(水月樓)가 있다.
o 수월루는 일종의 여유공간 누각으로 1605년 중건 당시에는 없었으나, 1855년 건립되었는데 1888년(고종25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973년에 중건되었다. 정면3칸 측면 2칸 팔작지붕으로 된 건물이다. 유생들의 휴식처나 강독공간으로 사용되었다.
o 수월루에 올라서면 동북쪽에서 흘러오는 낙동강과 고령 개진면 일대의 평야가 한눈에 들어와 시원스럽다.
10) 강학공간에는 어떤 시설이 있는가?
o 강학공간 내에는 강당(中正堂), 동재(=거인재 居仁齋) 서재(= 거의재 居義齋), 장판각 등이 있다.
o 강당에서 앞을 바라보면서 왼쪽(서쪽)에 있는 것을 서재라고 하지 않고 동재라고 하며, 오른쪽 (동쪽)에 있는 것을 서재라고 한다. 우리나라 전통 건축물들은 주건물이 앉은 자리에서 보아 왼편을 동(=청룡), 오른쪽은 서(=백호)쪽으로 본다.
o 동재는 거인재 (居仁齋), 서재는 거의재 (居義齋)라고 이름을 붙였다. 오륜중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이 방위로는 仁=동/ 義= 서/ 禮=남/ 智= 북/ 信=중앙에 해당한다.
o 동재는 상급반, 또는 나이가 상위인 학생들의 거처이다.
o 강당앞 기단위에는 정료대라는 석물이 설치되어 있는데 이것은 야간조명대이다.
11) 환주문(喚主門)이란 어떤 의미인가?
o 강학공간 출입문인 환주문은 규모는 작으나 구성이 특이하다. 사모지붕을 하고 그 위에 절병통을 얹어 놓았는데, 작고 간결하면서도 아름다운 기품이 있다.
o 환(喚, 부를 환)주(主)라는 말은 ‘내 심성의 주가 되는 근본을 찾아 부른다’는 뜻을 가졌는데 한훤당의 선생이 지은 시에서 따랐다한다.
12) 담장이 특이하다는데?
o 담장의 모습이 매우 아름다워 전국에서 최초로 토담이 보물로 지정되었다.
o 자연석을 정렬시킨 지대석 위에 자연막돌을 쌓고 그 위에 암기와를 5단으로 줄을 바르게 놓아 그 사이에 진흙층을 쌓아 올리고 1m 간격으로 수막새를 엇갈리게 끼워 넣었다. 담장의 암기와와 수막새를 사용한 것은 음양의 조화를 통해서 생명력을 불어넣고 장식효과를 최대한 살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o 돌과 흙과 기와를 골고루 이용한 견고한 축조기법이나 수막새의 장식무늬도 귀하지만, 이 담장이 지형에 따라 꺾이고 높낮이가 바뀌며 만들어내는 담장면의 변화와 담장지붕이 그리는 모습은 우리 건축에서나 볼 수 있다.
13) 강당의 모습은 어떠한가?
o 도동서원의 강당인 중정당은 강학공간으로 높은 기단위에 세워진 정면 5칸 측면 2칸반의
*주심포기둥에 맞배지붕으로 된 건물로써 좌우 앞 퇴가 있는 1칸은 온돌방이고 가운데 3칸은 앞면을 개방한 대청이다.
o 강당 대청 뒷벽 중앙의 ‘道東書院’ 이라는 사액현판은 한석봉의 글씨이고, 그 아래 중정당(中正堂)이란 현판이 걸려있고, 퇴계 이황의 글씨를 모각한 ‘道東書院’ 현판은 앞면 미간에 걸려있다.
* 주심포 : 기둥머리 바로 위에 얹은 공포.
* 공포 : 처마 끝의 무게를 받치기 위하여 기둥머리에 짜 맞추어 댄 나무쪽.
14) 강당의 기둥 윗부분에 흰 종이를 발라 놓은 것은 어떤 의미인가?
o 퇴계 선생 등 후학들은 한훤당을 동방도학지종 이라 하여 존경하였다. 선생이 우리나라 성리학의 종(宗)임을 도동서원 건축에서도 나타내 보이기 위한 것이다.
o 왕릉 정자각(丁字閣)에 칠하는 백분칠을 대신하여 기둥머리에 흰 창호지를 붙여놓았으며, 강당기단에도 왕릉 망주석에 새겨지는 다람쥐같은 형상을 한 세호(細虎)를 새겨놓았다. 도학지종이라는 한훤당 선생의 학통을 이어받은 종으로서의 수위서원(首位書院)임을 내세운 것이다. 이는 전국 650여 서원중 도동서원만 유일하게 표현되어 있다.
15) 강당의 기단(基壇)의 모습은?
o 강당의 기단은 지대석과 면석, 그리고 갑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돌들이 서로 물리도록 다듬어 쌓았다. 수백 개의 돌들 중 하나도 같은 돌은 없다. 12면석 돌에 다른 돌들이 면마다 아귀 맞게 쌓아진 것도 있다.
o 기단의 갑석 바로 아랫단 면석사이에는 여의주와 물고기를 물고 있는 용머리 4개가 설치되어있으며, 다람쥐 모양의 길함을 나타내는 동물상과 서화(瑞花)가 좌우면석에 조각되어 있다.
*서화(瑞花) ; ‘풍년이 들게 하는 꽃’이라는 뜻으로 ‘눈’을 비유하는 말.
o 이 기단은 높이가 무려 150㎝에 이르고 있어 건물의 위용을 더 높여주고 있다.
16) 제향(祭享) 공간은?
o 제향공간에는 사당(祠堂)이 있다. 강당과 사당 그리고 담장이 1963년 보물 350호로 지정되었다. 사당은 중정당 뒤에 가파른 계단을 올라서 서원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기단위에 세운 정면 3칸, 측면 3칸의 주심포기둥에 맞배지붕으로 된 건물로 정면 3칸에는 칸마다 밖여닫이 널문을 달았고 내부는 통칸으로 틔웠다.
o 사당앞 내삼문 아래 자라머리 모양의 석물이 있는데 이것은 풍수상 서원 주변지세가 자라 형상이기에 자라의 몸중에서 기가 제일 좋은 자라 목 위에 서원을 앉혔음을 의미한다.
o 한훤당 김굉필의 위패와 한강 정구 선생의 위패를 모신 제향공간으로 한강 정구(寒岡 鄭逑)선생은 서원 건립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고, 유품을 정리할 때의 공헌을 인정해서 1678년 추가 배향하였다.
o 위패 좌우에는 창건당시에 그린 벽화 두 점이 있다. <강심월일주(江心月一舟>와 <설로장송(雪路長松>인데 달이 떠있는 강가에 한가로이 떠있는 일엽편주와 풍상을 겪은 꿋꿋한 노송에 달이 걸려있는 그림으로서 한훤당 선생의 유시(遺詩)를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다.
o 향사는 매년 음력 2월 중정과 8월 중정에 지내고 있다.
17) 유물전시관에는 무엇이 소장되어 있는가?
o 임금이 하사한 서책과 제기, 경현록 목판 등이 소장되어 있다.
18)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의 생애는 어떠한가?
o 한훤당 김굉필 선생은 1454년(단종2) 서울 정릉동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서흥(경주 김씨의 한 분파), 자는 대유(大猷) 호는 한훤당(寒暄堂), 시호는 문경(文敬) 본관은 서흥(瑞興)이다. 고려 후기 사족인 증조부 중곤이 수령과 청환(淸宦)을 역임하다가 아내의 고향인 현풍현에 이주하게 되면서 이곳을 근거지로 삼게 되었다.
o 그는 19세 되던 해 경남 합천군 가야면 개천바위 위에 한훤당을 짓고 선비들과 사귀면서 학문을 닦았다. 그는 21세 때 김종직(1431-1492)의 문하에 들어가 소학을 배웠는데 이를 계기로 소학에 심취하여 스스로 소학동자라 일컬었다. 이후 평생토록 소학을 독신(篤信)하고 모든 처신을 그것에 따라 행하여 소학의 화신이라는 평을 들었으며, 나이 30세에 이르러서 6경들을 섭렵하였다.
o 1480년(성종11)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게 되었고, 그 뒤 사헌부 감찰, 형조좌랑 등을 역임하면서 송사사건을 처리하는데 속결하면서도 법에 어긋남이 없고 공정하기로 이름났으며 일거일동이 소학의 법도에 따랐다.
o 1498년 무오사화(연산군 4년)가 일어나자 단지 김종직의 문도였을 뿐인데, 붕당을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장 80대와 원방부처(遠方付處)의 형을 받고 평안도 희천에 유배됨으로써 5년간의 짧은 관직생활은 끝났다.
19) 김굉필은 사후에 어떻게 모셔졌나?
o 성균관 유생들의 문묘종사(文廟從祀)건의가 계속되어 1577년 (선조 10)에는 시호가 내려졌고, 1610년 (광해군 2)에는 대간과 성균관 및 각도 유생들의 지속적인 상소에 의하여 정여창(鄭汝昌 1450-1553년), 조광조(趙光祖 1482-1519), 이언적(李彦迪 1491-1553), 이황(李滉 1501-1570)과 함께 조선 5현으로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었다.
o 한훤당 선생을 입향한 전국의 서원으로는 대구 달성 도동서원, 전남 순천 옥천서원, 전남 경현서원 전남 화순 해망서원, 경북 상주 도남서원이 있다.
20) 은행나무의 내력은?
o 은행나무는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서 제자를 가르쳤다는 데서 유래하여 어느 서원 앞에나 다 심어져 있다. 도동서원의 은행나무는 한강 정구 선생이 도동서원의 사액기념으로 식수한 것이라 전하며 수령은 약 400년으로 도동서원의 역사를 그대로 말해준다.
* 도동서원이란 명칭은 다른 곳에도 있다.
ㅇ 대구광역시 달성군(達城郡) 구지면(求智面) 도동리(道東里)에 있는 도동서원 외에도
ㅇ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扶安邑) 연곡리(蓮谷里) 도동서원 ; 김구(金坵)의 덕행을 추모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 황해남도 송화군(松禾郡) 도동서원(주자(朱子)와 조광조(趙光祖)·이황(李滉)·이이(李珥) 등 추모)
ㅇ 충청남도 천안시(天安市) 목천읍(木川邑) 서리(西里) 도동서원(주자(朱子), 정구(鄭逑)·김일손(金馹孫)·황종해(黃宗海) 등 추모. ●
[2] 김굉필과 그의 시대
◈ 무오사화 (戊午士禍)
ㅇ 유자광․이극돈(김종직과 유자광은 일찍이 개인감정)은 김종직 일파를 증오하여 보복에 착수하였다.
1498년(연산군 4) 《성종실록》을 편찬하자, 실록청(實錄廳) 당상관(堂上官)이 된 이극돈은, 김일손이 사초에 삽입한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일을 비방한 것이라 하고, 이를 문제삼아 선비를 싫어하는 연산군에게 고하였다.
ㅇ 사림파 김일손․권오복(權五福)․이목(李穆) 등은 무록(誣錄)한 죄를 씌워 죽이고
ㅇ 정여창(鄭汝昌)․강겸(姜謙)․이수공(李守恭) 등은 난을 고하지 않은 죄로,
ㅇ 김굉필(金宏弼)․이종준(李宗準)․이주(李冑) 등은 김종직의 제자로서 붕당, 조의제문의 삽입을 방조한 죄로 귀양보냈다.
ㅇ 한편 이극돈․유순(柳洵)․윤효손(尹孝孫) 등은 수사관(修史官)으로서 문제의 사초를 보고하지 않은 죄로 파면하였다. 이로써 사화 발단에 단서가 된 이극돈이 파면된 뒤 유자광은 그 위세가 더해진 반면, 많은 사림파 인사들이 희생되었다.
◇ 조의제문의 내용
선생님께서 질문하신 '弔義帝文'은 '의제를 조문하는 글'이란 의미입니다.
의제는 중국 초나라의 왕이었는데, 항우에게 살해당하였습니다. 김종직이 의제의 꿈을 꾼후 그 혼령을 위로하기 위해 조의제문을 지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조의제문을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이 사초에 실었고, 이것이 연산군대에 문제가 되어 무오사화의 빌미가 되었습니다. 즉 연산군은 김종직이 세조가 단종을 축출, 살해한 것을 항우가 의제를 살해한 것에 빗대었다고 생각하여 옥사를 일으킨 것입니다.
조의제문의 내용이 길기 때문에 원문은 생략하고 해석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원문은 [연산군일기] 30, 4년 7일 신해조에 나와있으므로 참조하시면 되겠습니다.'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이) 그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실었다. 그 내용에 이르기를
"정축 10월 어느날 나는 밀성으로부터 경산으로 향하다가 답계역에서 숙박하게 되었다. 꿈에 훤칠하게 생긴 한 신이 일곱가지 문양이 새겨진 왕이 입는 옷을 입고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초나라 회왕 손심인데 서초패왕에게 살해되어 빈강에 버려졌다.'하였는데 문득 사라졌다. 나는 꿈에서 깨어나 놀라 생각하기를 '회왕은 남초 사람이고 나는 동이 사람이다. 지역으로도 만여리가 넘고 시간으로도 천여년이 훨씬 넘는데 꿈속에 나타나 감응하니 이것이 무슨 상서일까? 또 역사를 살펴보아도 회왕이 강에 버려졌다는 기록이 없으니, 이것은 항우가 사람을 시켜 비밀리에 때려 죽이고 강물에 던진 것이 아닐까? 이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하고는 드디어 글을 지어 조문하였다.
하늘이 법칙을 마련하여 사람에게 주었으니 어느 누가 四大와 五常이 높은 줄 모르겠는가? 중화라서 풍부하고 이적이라서 인색한 것이 아니거늘, 어찌 옛날에만 있고 지금은 없겠는가? 나는 동이의 사람이요 또 천년 후의 사람이건만, 삼가 초 회왕을 조문하노라. 옛날 조룡이 아각을 가지고 장난하니 사해의 물결이 붉어 피가 되었다. 비록 바다속의 철갑상어 같은 큰 물고기들이라도 어찌 보존할 것인가? 그물을 벗어나기 급급하였으니, 6국의 후손들이 숨고 도망가서 평민의 짝이 되었다네. 항량은 남국의 장군가문사람으로 물여우를 닮아 일을 일으켰다. 왕위를 얻되 백성의 소망을 따름이여. 끊어졌던 웅역의 제사를 보존하였네. 건부를 쥐고 남면을 함이여. 천하엔 진실로 미씨보다 큰 것이 없도다. 어른을 보내어 관중에 들어가게 함이여. 또한 족히 그 인의를 보겠도다. 羊흔狼貪이 군사들을 마음대로 죽임이여. 어찌 잡아다가 도끼위에 기름칠 아니했는고? 아아, 형세가 너무도 그렇지 아니함에 있어 나는 왕을 위해 더욱 두렵게 생각한다. 도륙을 당하여 젓장과 포가 됨이여. 과연 하늘의 운수가 어그려졌구나. 빈의 산은 우뚝하여 하늘위로 솟았고 그림자는 해를 가리어 어두워 졌도다.
빈의 물은 밤낮으로 흘러 넘실거리는 물결은 돌아올 줄을 모르는구나. 하늘은 길고 땅은 영원하니 어찌 한이 다하리. 왕의 넑은 지금도 떠돌아다닌다. 내 마음이 금석을 꾀뚫음이여. 왕이 문득 나의 꿈속에 임하였네. 자양의 노필을 따라가자니 생각이 진돈하여 흠흠하도다. 술잔을 들어 땅에 부음이여. 바라건대 왕의 영령은 와서 흠향하소서."
◈ 연산군(燕山君)-내죄를 내가 안다.
ㅇ 연산군은 조선 제10대의 왕(1476~1506/ 재위 1494~1506). 휘 융, 성종의 맏아들. 즉위 3년 동안은 별탈 없이 보냈으나, 1498 무오, 1504년 갑자 두 차례사화를 일으켰다.
ㅇ 각도에 채홍사(採紅使)․채청사(採靑使) 등을 파견해서 미녀와 양마(良馬)를 구해오게 하고, 미인을 가인, 재인, 여인 고인… 등 135 등급까지 분류하고, 따로 뽑은 여인을 興淸樂, 그들 친정집은 흥청거리다.의 어원이 됨.
ㅇ 큰어머니 월산대군 부인, 누이동생 惠愼옹주(임사홍자 임숭재 처, 40여 민가 철거, 임숭재 집과 창덕궁을 튀워 놓음) 근친 상간, 간사한 여인 장록수, 전비
ㅇ 성균관의 학생들을 몰아내고 그곳을 놀이터로 삼는 등 황음(荒淫)에 빠졌다.
ㅇ 생모는 연산 4살에 쫒겨나고 7세에 사사됨. 어린 연산은 애정결핍으로 너무 먹어댔다. 사슴을 발로 차다가 부왕의 꾸중을 듣고 아버지 공포증, 즉위 후 이틀만에 활로 쏘아(아버지 상징) 죽이고, 선왕 제삿날 소찬이 나오자 활로 부왕의 초상을 쏘았다. 효자 열녀를 죽였다.
ㅇ 내관 김처선이 간하자 죽이고 문서에 處자 善자도 못쓰게 함. 좋아하던 처용무 이름도 풍두무로 바꿈. 사람들의 입이 무서워지자 내시들 가슴엔
口是禍之門 舌是斬身刀 閉口心藏舌 安身處處牢 라고 쓴 목판을 차고 다니게 함. 입은 재앙을 볼러오는 문이오, 혀는 자기의 몸을 베는 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입을 닫아 깊숙히 혀를 숨겨둔다면 어디에 있어서도 몸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 (당 말 馮道의 시)
ㅇ 경연(經筵)을 없애 학문을 마다하였고, 사간원(司諫院)을 폐지해서 언로(言路)를 막는 등 그 비정(秕政)은 극에 달하였다.
ㅇ 1506(중종 1) 성희안(成希顔)․박원종(朴元宗) 등의 중종반정에 의해 폐왕이 되어 교동(喬桐 : 江華)으로 쫓겨나고, 연산군으로 강봉(降封)되었고, 귀양간지 두달만에 병으로 죽었다.
ㅇ 쫓겨날 때 내죄를 내가 안다 라고 하였고, 폭군의 마지막 소원은 큰마누라 신씨를 한 번 보고 죽었으면 이었다. 시를 좋아해서 문집이 있었는데 중종 때 불태워졌다. 자기 생각에도 미치광이 같았는지 狂자가 자주 보인다.
ㅇ 그의 치세로 성종 때 양성한 많은 선비가 수난을 당하여 학계는 침체되었다. 개국 100년의 조선조에 한 시대의 획을 긋게 하여, 이후 50년은 사화(士禍)라는 유혈극이 잇따라 일어나 그것은 선조 이후 붕당정치로 확대 악화되고, 한편으로는 임진․병자 등 국난으로 국운은 쇠퇴의 길을 밟게 되었다.
◈ 중종 반정 (中宗反正)
ㅇ 1506년(연산군 12) 9월 1일 밤. 성희안(成希顔)․박원종(朴元宗) 등이 연산군을 폐하고 진성대군(晉城大君:中宗)을 왕으로 추대한 사건.
ㅇ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지낸 성희안과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 박원종은 재위 12년간 폭정으로 국가의 기틀을 흔들어놓은 연산군을 폐하기위하여 당시에 인망이 높던 이조판서 유순정(柳順汀), 연산군의 총애를 받고 있던 군자부정(軍資副正) 신윤무(申允武) 등의 호응을 얻어 왕이 장단(長湍) 석벽(石壁)에 유람하는 날을 기하여 거사하기로 계획을 꾸몄다.
ㅇ 1506년 9월 1일, 박원종․성희안․신윤무를 비롯해서 전 수원부사(前水原府使) 장정(張珽),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 박영문(朴永文), 사복시첨정(司僕寺僉正) 홍경주(洪景舟) 등이 무사를 규합하여 훈련원에 모았다. 그들은 먼저 권신(權臣) 임사홍(任士洪)․신수근(愼守勤)과 그 아우 신수영(愼守英) 및 임사영(任士英) 등 연산군의 측근을 죽인 다음 궁궐을 에워싸고 옥에 갇혀 있던 자들을 풀어 종군하게 하였다.
ㅇ 이튿날인 9월 2일 박원종 등은 군사를 몰아 텅 빈 경복궁에 들어가서 대비(大妃 : 成宗의 繼妃)의 윤허를 받아 연산군을 폐하고, 진성대군을 맞아 왕으로 옹립하니 그가 조선왕조 제11대 왕인 중종이다.
[3] 훈구파와 사림파
◇ 관학파 ( 훈구파 勳舊派)
ㅇ 조선을 세운 신진사대부들은 숭유배불주의(崇儒排佛主義)를 내세워 성리학을 정치지도 이념으로 정착시키는 동시에 사회개혁과 국가운영의 기본이념으로 삼았다. 이러한 문화정책은 특히 세종․세조에 의해 주도되어 개성이 강한 관학의 학풍을 이룩하였다.
ㅇ 관학과 집현전을 통해서 학문을 닦고, 군주 비호하에 양성된 관료들이다.
ㅇ 지방적 붕당성이 약한 반면, 국가나 민족에 대한 자각이 강하였다.
ㅇ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위신을 높이는 문제에 관심, 부국강명 추구, 실용적학문 숭상
ㅇ 국가창업 과정에 기여한 정도전․하륜(河崙)․권근(權近) 등과 그의 제자들로서, 집현전․홍문관을 중심으로 관찬사업에 적극 참여하여 학문을 크게 진작시켰으며, 특히 사장(詞章)에 능하였다.
ㅇ 정인지(鄭麟趾)․최항(崔恒)․신숙주(申叔舟)․양성지(梁誠之)․서거정 등이 많은 업적을 남겼다.
◇ 사림파
ㅇ 조선의 개창을 둘러싸고 길재와 같은 일부 학자들은 왕조 교체가 유교적 윤리와 의리에 어긋난다고 생각하여 역성혁명에 참가하기를 거부하고 향촌에 내려가 학문과 교육에 주력하였다. 그들은 김종직에 이르러 그 수가 크게 늘어 영남을 중심으로 이른바 사림파를 형성하였다.
ㅇ 사학을 통해서 지방적 붕당을 형성, 일종의 야당적 입장.
ㅇ 사림을 주체로 하여 자치적으로 운영되는 사회체제 희구, 고시제도보다 천거제도 국가에서 진휼하는 의창보다 향촌에서 자치적으로 진대하는 사창제, 수령통제하의 오가작통제 보다 자치적 공동체로서의 향약실시 주장.
ㅇ 사림의 민주 이념은 어디까지나 사림을 주체로 하는 것이며, 사림외의 무인, 기술직인, 농공상 등을 사림의 지배하에 종속시키려는 신분적 편협성, 신분제를 더욱 경직시킴
ㅇ 사림은 성리학을 철저히 신봉, 그 밖의 학문, 사상 철저히 배격. 성리학에 세련된 만큼 민족 신앙에 대한 거부 반응이 컸고 중국과의 의리적 사대관계 희구
ㅇ 경학(經學)에 치중하고 경학의 기본 정신을 수기치인(修己治人)에 있다고 생각. 인간의 심성을 연구하는 데 주력하였다.
ㅇ 사림파는 길재의 제자인 김숙자의 아들 김종직(영남사류의 師宗)과 그의 제자들인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김일손(金馹孫) 등으로서 훈구파의 일방적 비대를 막으려는 성종의 발탁으로 중앙 정계에 진출하지만, 훈구파와 정치적 갈등이 불가피하였고, 그러한 갈등 속에서 사림들은 치명적 타격을 받았다.
☞훈구파는 민족의 외향적 성장에 기여, 사림파는 민족의 내향적 성장에 공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