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p
국립고궁박물관에 가면 5학년 2학기 3단원 ‘유교문화가 발달한 조선’에서 사진으로만 봤던 조선 왕실 문화재들을 직접 만나볼 수 있다. 왕실의 의식주를 채웠던 유물들을 보며 빛나는 조선의 모습을 상상해보자.
세자 시강원 상아패
세자의 스승에게 내려지는 시강원 상아패.
지난 편에 효명세자의 성균관 입학식 그림을 설명한 바 있다. 세자의 교육은 나라의 운명이 달린 중차대한 일이었기 때문에 세자를 가르치는 스승을 임명하는 일 역시 나라에서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중 하나였다.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스승에게는 상아패를 내려 그 신분의 고결함을 증명하였는데, 상아패는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시강원과 왕의 수결을 아로 새겨놓았다.
자격루
세종 때 장영실은 자동 작동되는 <자격루>를 만드는 등 조선 과학의 꽃을 피웠다.
국립고궁박물관 천문 과학 전시실에는 600년 전 만들어진 물시계의 원형을 그대로 복원한 <자격루>가 놓여있다. 이 <자격루>는 일정 시간이 되면 <자격루>의 작동원리에 따라 설치되어있는 인형들이 북과 징을 치며 시각을 알려준다. 처음 만들어진 물시계들은 관원들이 지키고 있다가 정해진 시각에 종을 쳐서 시각을 알려 주어야하는 불편함이 있었던데 반해, <자격루>는 자동 작동 원리를 따른다.
예로부터 시계는 조선왕들의 주요 통치수단이었다. 시계는 백성들이 농사짓는데 여러 가지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있게 해줄 뿐 아니라, 규칙적인 생활을 할 수 있어서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백성들이 규칙적인 삶을 살게 되고 나라가 질서 있게 돌아가게 되면 왕의 권위도 그만큼 높아지기에, 세종은 이 <자격루>를 만들기 위해 신하들에게 아낌없이 투자하였다. 특히 장영실을 국비장학생 격으로 중국에 유학을 보내 여러 가지를 배워오도록 하였고, 마침내 조선은 흐린 날 그 성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는 해시계 대신 언제 어느 때나 시각을 알려줄 수 있는 <자격루>를 얻게 되었다.
천상열차분야지도각석 ( 보물 제 837호 )
천상열차분야지도각석. 눈으로 관측할 수 있는 모든 별들이 기록되어있다.
조선의 왕들은 천문학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천문을 아는 왕은 백성들의 생업인 농업을 관장할 수 있고, 농업이 잘 돌아가면 백성들의 삶은 윤택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유교에서는 왕을 ‘하늘을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식이나 혜성과 같은 천문현상이 나타나면 왕에게 벌을 내리는 것으로 여기기도 하였다.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되어있는 <천상열차분야지도각석>은 직육면체의 돌에 천체의 형상을 새겨 놓은 천문도이다. <천상열차분야지도각석>은 고구려의 천문도를 표본으로 삼고 오차를 고쳐 완성했다. 이 천문도는 중국 남송 때의 <순우천문도>(1241년)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 된 것으로 그 역사적 가치가 크다. 놀라울 정도로 섬세하게 묘사한 이 천문도에는 눈으로 관측할 수 있는 모든 별들이 총망라되어있어 당시 과학의 수준을 가늠케 해준다. 2008년 4월 8일 우리나라 최초의 우주인 이소연씨가 천상열차분야지도가 새겨진 스카프를 우주에 가져가서 더욱 유명해 지기도 하였다.
고종황제 초상
서양화 기법이 도입된 고종황제초상
황제의 상징인 통천관을 쓰고 강사포를 입고 있는 고종황제의 초상은 고종의 은은하고 기품있는 외모 때문에 다시 발걸음을 돌리게 만든다. 고종의 어진에서는 기존의 어진들과는 달리 매우 서구적인 미술기법을 볼 수 있다. 자세히 보면 얼굴이나 의복에 명암이 선명하게 들어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어진으로는 이례적으로 뒷배경을 자세하게 묘사했는데, 서양식으로 문양이 들어간 휘장이 드리워져있음을 알 수 있다. 사진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발 아래로 양탄자가 부드럽게 깔려 있다. 점점 달라져가는 조선의 모습을 대변해주는 새로운 감각의 어진이 바로 고종황제의 초상이다.
동궐도
<동궐도>에는 산과 언덕에 둘러싸인 궁의 전각과 다리, 담장은 물론 연꽃과 괴석 등 조경까지 실제와 같은 모습으로 선명하고 세밀하게 묘사되고 있다.
현재 창덕궁과 창경궁은 과거 궁궐의 모습을 모두 반영하고 있지 않다. 여러 가지 이유로 많은 전각들이 소실되고 일제에 의해 파괴되어 과거 화려했던 궁궐의 일부분만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국보 제 249호로 지정된 <동궐도>라는 궁궐지도덕분에 과거 영화로웠던 창덕궁과 창경궁의 모습에 대해 잘 알 수 있다.
< 동궐도>는 경복궁 동쪽에 있어 동궐로 불리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는 병풍이다. <동궐도>는 원근법과 채색처리 등에서 서양화의 기법이 등장하여 미술학적으로 흥미롭지만,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많은 전각들과 궁궐터에 어떤 건물들이 존재했고 당시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 자세하게 표현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더욱 인정받는다. 예를 들어, 현재 인정전 바닥은 일제에 의해 잔디가 깔렸다가 네모난 납작 돌이 깔려있지만, 사실은 경복궁처럼 아름다운 받석으로 깔려있었다는 것, 숙빈 최씨가 머물던 보경당은 원래 예쁜 전각이 있었다는 것 등이다. 일제가 바닥을 파고 호수로 만들어버린 창경궁의 춘당지는 <동궐도>에 보면 임금이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해 직접 농사를 지었던 내농포라는 논이 자리 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등,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궐내각사들도 <동궐도>에서는 그대로 살아 숨쉬고 있다. 반대로, 지금 있는 전각들과 같은 모습을 <동궐도>에서 만나게 되면, 그 한결같은 궁궐이 무척 반가운 생각이 든다. 지금도 청기와인 선정전은 <동궐도>에도 청기와 그대로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이 <동궐도>를 아이들이 보다 쉽게 다가갈 수 있게 하기위해 전시실에는 태블릿 pc가 설치되어있으며 태플릿 pc를 통해 <동궐도>의 전각이 하는 일과 각 전각에서 거주하고 일했던 사람들의 역할도 자세하게 공부해 볼 수 있다. 태블릿 pc를 통해 창덕궁 인정전에서 벌어지는 국가행사를 감상하며 조선시대로 여행을 떠나보자.
대한제국의 수입 도자기
대한제국의 황실에서 사용하던 수입도자기
조선 왕실은 대한제국이 수립되기 전에는 경기도 인근 왕실전용도요에서 생산한 그릇만을 사용했다. 그러나 서양과 통상조약이 수립된 후부터 왕실에 서양식 도자기들이 수입되기 시작했다. 현재 남아있는 대한제국의 수입 도자기는 프랑스, 영국, 일본 등지에서 수입한 것으로, 황실의 전통 문양인 오얏꽃을 넣어 자체 제작한 도자기들이 대부분이다. 서양문화가 유입되고 있는 과정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국립고궁박물관 맛집 <고궁뜨락>
<고궁뜨락>은 지하철 역에 가깝게 있어 박물관 투어 전후로 이용하기 좋다.
따뜻한 궁궐 담장을 바라보며 은은하고 고풍스러운 분위기에서 맛있는 전통음식과 서양음식등 퓨전요리를 즐길 수 있는 레스토랑이 국립고궁박물관에 있다. <고궁뜨락> 에서는 아이들이 쉽고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김치볶음밥, 궁중떡볶이, 쇠고기덮밥 등의 간단하고 맛있는 메뉴부터 장어구이정식이나, 떡갈비정식과 같은 고급스러운 메뉴도 있다. 식사를 하지 않더라도 햇빛 내리쬐는 테라스에 앉아 궁궐이 주는 고풍스럽고 아름다운 분위기를 느끼며 차 한 잔 마시는 것도 좋을 것이다.
국립고궁박물관과 함께 가봐요 - 경복궁
인터넷으로 미리 예약하여 경복궁 내 경회루를 꼭 가보자.
경복궁은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세우며 건축한 조선 최고의 아름다운 법궁이다. 개국공신 정도전이 ‘큰 복이 있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지은 ‘경복’ 이라는 이름을 붙여 경복궁이라 이름하게 되었다. 경복궁은 바로 국립고궁박물관과 같은 공간에 위치해 있어 연계 관광하기에 좋다.
조선 초기 왕자의 난으로 인해 경복궁에 머물기가 불편해진 태종은 창덕궁을 지어 옮겨 살았던 것을 시작으로, 실제 조선의 왕들은 경복궁보다 창덕궁에 더 많은 시간을 머물렀다. 그 후 크고 작은 화재에 시달리다가 임진왜란 때는 완전히 불에 타 200년이 넘는 세월동안 폐허가 되었지만, 흥선대원군 때 복원되었다. 그러나 이도 잠시, 일제에 의해 짓밟혀 고종황제가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기고(아관파천), 다시 빈 궁궐이 되었다. 현재 경복궁은 과거 모습의 4분의 1도 되찾지 못했다. 그러나 차츰 복원작업이 이루어지면서 그 모습을 되찾아 갈 것으로 예상된다. 국립고궁박물관과 함께 경복궁에서 아름다운 사계절의 변화를 느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