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인들의 독립운동은 크게 다섯으로 나눌 수 있다. 한말 의병, 광주 3·1운동, 광주학생독립운동, 해외에서의 독립운동, 국내에서의 항일운동이 그것이다. 광주를 포함한 전남은 한말 최대 의병항쟁지였다. 1909년의 경우 전국 의병참여자 중 45%가 광주·전남인이었다. 1919년 3·1 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전남 최초, 최대 만세지가 광주였다. 3월 10일 광주천에서 시작된 3·1 만세운동은 이후 장성·함평·화순 인근으로 확대되었으며, 광주에서만 수백 명이 체포되고 104명이 재판을 받았다. 수피아여학교 여학생이던 윤형숙은 일본 헌병이 내리친 칼에 왼팔이 잘리기도 했다.
1929년 광주에서 광주고보생들에 의해 시작된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전남은 물론 전국·해외까지 확산되었고, 320여 개교 54,000여 명 이상의 학생이 참여했다. 광주에서는 260여 명이 구속되고 성진회, 독서회, 소녀회, 보안법 관련 등으로 173명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광주·전남이 의병항쟁에 이어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였음은 2019년 국가보훈처의 수형인 조사에서도 확인된다. 일제하 독립운동과 관련되어 형무소에 수감 된 5,323명의 수형자 및 수형인 명부를 전수 조사하였는데, 광주·전남인이 1,985명으로 37.3%를 차지하고 있다.
광주·전남이 본적인 독립운동가 중 독립유공자로 국가의 서훈을 받은 자는 1,295명(2020년 12월 기준)으로 전국 대비 7.76%다. 이는 광주·전남이 한말 최대 의병 항쟁지였고, 2019년 국가보훈처에서 전수 조사한 수형자 인원수를 고려해보면 다소 아쉽다. 전라남도 출신 서훈자 중 광주가 본적인 분은 26개 시군 중 가장 많은 115명으로 8.9%를 차지한다. 이는 광주가 전라남도의 경우 독립운동이 가장 활발한 곳이었음을 말해준다.
한말 의병에 참여하여 서훈을 받은 광주 출신은 독립유공자 115명 중 20명이다. 김동수·김원국·김원범·임창모·조경환·박봉석 의병장은 비교적 높은 등급인 독립장을 받았고, 김재민·박원형·송학묵·윤영기·이기섭·임윤팔·신덕균은 애국장을, 김자술·박돌개·양동골·이경오·이운집은 애족장을, 조성학은 건국포장을 그리고 이문거는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광주 3·1운동으로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은 자는 32명이다. 광주천 큰 장터에서 시작된 광주 3·1만세 운동은 전남 최초의 만세운동이었고, 천여 명이 참여한 최대 규모의 만세 시위였다. 광주 3·1운동으로 104명이 구속되어 재판을 받았고, 김복현(김철) 등 모의하고 주동한 인물들은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광주 3·1운동을 모의하고 주도한 김강·김선명·김용규·김태열·범윤두·이주상·정병소·최병준·최수향·최영균·최정두·최한영·최흥종·홍덕주 등은 애족장을 받았고, 광주 3·1운동 당시 앞장서 참여했던 김덕순·김상원·김장수·민성숙·배광석·양순희·유상규·윤형숙(윤혈녀)·이남채·이병환·이창호·임영구·정삼모·조공찬·차학봉·최순우·홍금돌·홍승애 등은 건국포장 및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장재성 등 173명은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재판을 받았다. 이중 비밀결사인 성진회 및 독서회 회원으로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주도한 학생들이 비교적 높은 형량을 선고받았는데, 성진회를 창립하고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주도한 장재성은 광주지방법원에서 가장 높은 7년을 선고받았다.
광주학생독립운동과 관련하여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받은 광주 출신은 총 28명이다. 성진회 회원이었고 퇴학 후 ‘김기권 문방구점’을 열었던 김기권은 애국장, 강석원·김복근·김안진·김용준·박세영·박옥련·박현숙·임병욱·장경례·장매성·최성원·최정기는 애족장을 받았으며 강사채·고순례·김두채·김종호·남협협·박계남·박채희·윤해병·이강오·이강후·이수동·이순·조기석·주만우·주말순은 건국포장 및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국내에서 군자금 모금 및 학생운동 지도, 노동·농민 운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들도 많았다. 이 중 24명이 독립운동가로 서훈을 받았다. 조선 청년 총동맹 회원으로 신사상운동을 전개한 김재명과 노동조합을 결성한 김호선, 임시정부의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한 노석정과 문동길·이윤호, 대동단(大同團) 단원으로 활동한 노석중은 애국장을 받았다. 강해석·김덕선·김이현·김태호·문근실·박오봉·서재익·유한선·장순기·전순협·주봉식·지용수는 애족장을, 김유성·김재중·차남진·최영훈·최원순·허권삼은 건국포장 및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미국·일본·중국 등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분들도 많았다. 미국에서 공립협회 활동을 한 정원도는 애족장을, 일본에서 독립운동을 한 박노백·장영규·조성인은 애족장을, 김기중과 최창모는 건국포장을 받았다. 임시정부 산하 한국광복군에서 활동한 광복군 박상기는 애국장을, 박남현은 애족장을 받았다. 광주고보 재학 당시 독서회 회원이었던 이경채는 ‘조선독립선언문’ 등 격문을 살포하다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른 후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였고, 2·8독립선언서를 지니고 귀국한 후 광주 3·1운동 당시 주역으로 활동한 정광호는 상하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교통부 참사 등을 지냈다. 최혜순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인 함평 출신 김철의 부인으로 임시의정원 전라도 대표로 활동하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경채와 정광호는 애국장을, 최혜순은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