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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2025년 6월 28일(토)
장소: 고흥일원(소록도-녹도진성, 쌍충사-점심-발포만호성(발포진성)-충무사-발포역사전시체험관-기산도의사유언비-고흥분청문화박물관)
참석인원: 38명
오늘 답사 일정에 대한 노성태 남도역사연구원장의 말씀으로 답사는 시작되고^^
소록도 현장으로--소록도(Sorokdo, 小鹿島)는 전라남도 고흥군 도양읍에 속하는 섬이다. 섬의 이름은 그 형상이 작은(小) 사슴(鹿)과 같다고 하여 붙여졌다. 고흥 반도 끝의 녹동항에서 배로 5분 거리에 있다. 2009년 3월 3일에는 소록대교가 개통하여 육로로도 오갈 수 있게 되었다. 소록도는 한센병 환자들이 모여사는 곳이다. 구한말 개신교 선교사들이 1910년 세운 시립나 요양원에서 시작됐다. 1916년에는 주민들의 민원에 따라 조선총독부가 소록도 자혜병원으로 정식으로 개원했다. 일제강점기에는 한센병 환자를 강제 분리·수용하기 위한 수용시설로 사용되면서, 전국의 한센병 환자들이 강제 수용됐다. 소록도 안에는 일제강점기 한센병 환자들의 수용 생활의 실상을 보여주는 소록도 검시실, 감금실과 한센병 자료관, 소록도 갱생원 신사 등 역사적 건물과 표지판 등이 남아 있다. 이곳에는 수녀로서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았던 고흥 소록도 마리안느와 마가렛 사택이 있다. 소록도는 전체가 국유지로 국립소록도병원으로 지정돼 있다. 주민 대부분은 국립소록도병원의 직원 및 전염력을 상실한 음성 한센병 환자들이다. 또한 환자의 대부분은 65세를 넘긴 고령자다. 환자들의 주거 구역은 외부인이 접근할 수 없도록 차단되어 있다. 병원 직원 등 환자가 아닌 사람들이 거주하는 관사지대(소록리 1번지)와 환자들이 거주하는 병사지대(소록리 2번지)로 나뉘며 병사지대는 외부인의 출입이 제한되어 있다.(자료집에서)
수탄장(愁嘆場)에 대한 노성태 원장의 설명에 집중하는 회원님들!
수탄장(愁嘆場) - 직원지대에 있는 미감아동 보육소 어린이들과 병사지대의 부모가 이곳 경계선 도로상에서 월1회 면회를 하였는데 도로 양 옆으로 갈라서서 면회를 하였다. 이런 면회장소를 환자들은 '수탄장'이라고도불렀다.
중앙공원-1936년 12월 1일 착공하여 3년 4개월 동안의 공사기간을 거쳐 완공하고 부드러운 동산'이라 불렀다. 공원 내에는 한센병 시인 한하운의 보리피비 시비, 일본인이면서 환우들을 가족처럼 아껴주고 헌신적으로 보살핀 소록도의 슈바이처 '하나이젠키치 원장의 창덕비, 그리고 한센병은 낫는다'라는 글귀가 새겨져있는 구라탑 등 환우들의 애한과 박애정신을 엿볼 수 있는 기념물들이 남아있어 보는 이의 신금을 울린다.
한하운 시비 [보리피리이 시비는 원래 소록도병원 4대 원장 스오 마사스에 재임시절 환자들로부터 참배를 받고 훈시했던 연단으로 사용했던 바위이다. 병원 개원 56주년 기념식을 기하여 한센병 환자였던 한하운 시인의 '보리피리'라는 시를 새김으로서 시비라 붙여지게 되었다.
보리피리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故鄕) 그리워 피ㄹ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꽃청산(靑山)
어린때 그리워 피ㄹ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인환(人寰)의 거리
인간사(人事)그리워 피ㄹ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방랑(放浪)의 기산하(幾山河)
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 -ㄹ닐니리
구라탑(救癩塔)-오마도 간척공사에 참여한 국제워크캠프 단원들의 순수하고 진정한 봉사활동과 한센병이 근절되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기념탑을 세웠다. 이 탑은 '현대의학은 능히 한센병을 무찌르고 정복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공적비-오스트리아 간호사 3명이(마리안느, 마가렛, 마리아) 1962년부터 소록도 병원에서 봉사활동을 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1972년 5월 17일 개원 56주년을 기하여 중앙공원에 세웠다. 세마비는 이 세 사람의 이름의 첫 자를 따서 부르는 애칭으로 앞면에는 세 사람의 이름과 국적을 뒷면에는 유래를 새겼다.
이춘상 의거-1942년 6월 20일 환사 이춘상(당시 27세)은 '보은감사일' 행사에 참석하여 승용차에서 내려 연단(현 보리피리 시비)으로 향하던 악명 높은 4대 원장 스오 마사스에(周防正季) 를 칼로 찔렀다. 그는 환자에 대한 가혹한 통제와 원장의 징계검속권, 그리고 전시체제하 과도한 노역과 국방헌금 강요에 대한 반발로서 이 의거를 통해 환자 처우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그는 사형 선고를 받았고, 대구복심법원과 총독부 고등법원에서 각각 항고가 기각돼 이듬해 사형이 집행되었다. 환자들은 "원장의 학정(虐政)이 너무 심해 모두 그에 의거를 반기며 기뻐했다"라고 증언한다. 당시 의거가 일어났던 곳은 원형이 사라졌지만 그 역사적 의미는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생생이 남아있다.
스오 원장 동상(건립년도 1940년)-스오원장은 1933년 9월 1일부터 1942년 6월 20일까지 8년 9개원 동안 4대 원장으로 재직한 일본인으로서 온갖 강압적인 수단으로 환자들을 동원하여 소록도 내의 공사를 추진하였다. 또한, 환자들로부터 기금을 강제 징수하여 1940년 8월 20일은 <보은감사일>로 지정하고 환자들로 하여금 참배하게 하였다. 스오 원장은 강제노역, 가혹행위 등으로 환자들의 불만을 사던 중 1942년 6월 20일 감사일 행사에서 환자 이춘상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춘상은 당시 일제의 법원에 의해 사형에 처해 졌으며, 원장 동상은 태평양 전쟁 물자로 징발 철거되었다. 동상의 자체 높이는 3.3미터 였으며 단을 포함한 전체 높이는 9.6미터였다.
감금실-이 건물은 일제 강점기인 1935년 5월에 건축된 시멘트 벽돌조(139.34제곱미터) 건물로서 한센병 환자를 불법적으로 감금했던 장소이다. 붉은 벽돌과 육중한 담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그 안에는 남과 북으로 두 건물이 중간의 화랑으로 연결된 H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어 형무소와 유사한 구조로 되어있다. 일제 강점기 소록도에 강제 수용된 한센병 환자들을 대상으로 자행한 인권 유린의 현장이다.
검시실- 검사실 또는 해부실이라 불리는 이 건물은 1935년 5월에 건축된 시멘트 벽돌로 건물로서 두 칸으로 나뉘어져 입구의 넓은 방은 사망 환자의 검시를 위한 해부실로 사용되었고 안쪽은 검시 전 사망환자의 유해를 보관하던 영안실로 사용되었다. 사망자는 가족의 의사와 관계없이 우선 검시 절차를 마친 뒤에야 장례식을 거행할 수 있었고 시신은 뒤편의 바닷가에 있는 화장터에서 화장되었다.
쌍충사(雙忠祠)는 충렬공 이대원(李大源, 1566~1587)과 충장공 정운(鄭運, 1543~1592)의 충혼을 모시는 사당이다. 이대원은 1587년 녹도만호(鹿島萬戶)가 되어 남해안에 출몰하는 왜구를 물리쳤고, 다시 흥양(고흥)에 왜구가 침입하자 이에 맞서 싸우다가 손죽도 해상에서 순절했다. 정운은 1591년 녹도만호가 되어 1592년에 옥포 · 당포 · 한산해전에서 일본군과 싸웠으며 부산 몰운대 앞바다에서 순절했다. 이순신 장군의 요청으로 이대원을 모시고 있던 사당에 정운을 추가로 모시게 되었다. 녹도만호를 지낸 이대원과 정운 두 사람의 충신을 모시게 되면서 사당의 명칭을 쌍충사로 변경했다. 정유재란 때 소실된 것을 1681년(숙종 7)에 새로 지었으며, 2년 뒤인 1683년 조정으로부터 쌍충사 사액을 받았다. 1735년(영조 11)에 보수했고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철거되었다가 1922년 고흥 유림에서 뜻을 모아 다시 지었다. 현재의 건물은 1942년 일본인들이 폐허로 만든 것을 1947년에 ‘녹도 쌍충사 복구 기성회’가 결성되어 사당을 중건했으며 1957년에 다시 고쳐 지었다. 경내에는 1947년에 중건된 사당과 1957년에 건립된 강당, 관리사 등의 건물이 있다.
녹도진성에 오르는 회원님들!
녹도진성-녹도진은 만호(종4품)가 배치된 수군진으로, 조선 초기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성곽은 성종 21년(1490)에 2020척, 높이 13척 규모로 축적되었으나 현재 일부 잔존 석렬만이 남아 있는 상황이다. 임진왜란 당시 녹도진은 전라 좌수영 소속의 수군진으로 녹도만호 정운과 송여종이 이순신 막하에서 활약하엿다.
녹도진성 정자에서 회원간의 활발한 이야기는 계속된다...
즐거운 점심시간! 남역원의 발전을 위하여^^
잠깐의 휴식시간이 너무 좋~다! 남역원 답사에는 낭만(浪漫)과 여백(餘白)이 있다^^
발포만호성(발포진성) 일부 모습-이순신은 32살이던 1576년(선조 9) 무과에 급제하였고, 종9품직인 함경도에 위치한 동구비보의 권관이 된다. 이어 훈련원 봉사, 충청병사 군관을 거쳐 1580년(선조 13) 종4품직인 전라도 발포진 만호에 임명된다. 남도와의 첫 인연이었다.
이순신의 발포진 만호 부임은 ‘조선을 구하라는 하늘의 뜻’으로 해석하는 분도 있다. 바람 앞에서 등불처럼 위태로웠던 조선을 구한 ‘신의 한 수’였음은 분명하다. 근거는 이렇다. 첫째, 발포진 만호는 이순신 최초의 수군 경험이었다. 이순신은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으로 첫 관직을 받은 후 육군만 경험했다. 둘째는 벼슬길에 오른 후 처음으로 일선 지휘관이 된다. 그동안은 지휘관을 보좌하는 역할이 전부였다. 셋째는 전라좌수영과의 인연이다. 전라좌수영 관할의 5관 5포 중 1관과 4포의 진이 고흥에 존재했다. 발포진 만호 18개월은 전라도의 바닷길과 지역 실정, 수군 인맥을 쌓는 더없이 소중한 기간이었다. 즉, 발포진 만호 시절에 있었기에, 12년 뒤에 발발한 임진왜란 당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바닷길을 제패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자료집에서)
청렴정신을 일깨워 준 "청렴일화비-발포만호 이순신과 오동나무"-발포진 만호 시절 이순신의 명성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오동나무’를 베어 바치라는 전라좌수사의 명을 거부한 사건 때문이었다. 이 이야기는 조카 이분이 쓴 ‘행록’에 다음처럼 나온다. “(전라좌수사) 성박이 발포로 사람을 보내어 객사 뜰에 있는 오동나무를 베어다가 거문고를 만들려 하므로 공(이순신)은 허락하지 않고, ‘이것은 관청의 물건이요 또 여러 해 길러온 것인데, 어찌 하루아침에 베어버릴 수 있겠소’ 하고는 돌려보냈다”는 것이다. 전라좌수사 성박은 크게 화를 내었지만, 이순신의 ‘공’과 ‘사’를 분명하게 구분했던 투철한 책임감과 청렴 때문에 베어가지 못한다. 발포진성에 이를 기억하고 계승하기 위해 ‘청렴 광장’이 조성된 연유다. 발포진 만호 시절의 투철한 책임감과 청렴성은 향후 조선 수군 최고 지휘관이 되는 데 밑거름이 된다.(자료집에서)
충무사(忠武祠)-충무사는 이순신을 기리는 사당이다. 이 사당은 선조 13년(1580) 7월 이순신 장군이 36세에 이곳 발포만호로 부임하여 선조 15년(1582)년1월까지 모함을 받아 파면되기까지 18개월간 재임하신 것을 기념하기 위하기 위해 만들었다.
충무사 가는 계단에서 잠깐!!
"남도는 위군헌신 국민본분의 중심지"-청렴광장 조성과정에 참여한 노성태 원장
드론으로 촬영한 현재의 발포진 모습(김덕일 회원 동영상 캡쳐)
전시관에서의 노원장의 열정적인 해설에 귀 기울이는 회원님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진중문서-서해어용동(西海漁龍動-바다에 맹세하니 어용이 감동하고) 맹신초목지(盟山草木知-산과 들에 맹세하니 초목도 알아준다)-이 시는 임진왜란때에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반드시 구하겠다는 충무공의 의지와 결의를 담은 우국충정의 시로 알려져 있다.
정걸(1514-1597)-임진왜란 내내 이순신의 곁을 지킨 영웅이 있었다. 흥양(지금의 고흥) 출신의 정걸(丁傑, 1514~1597)이 그다. 정걸은 이순신보다 31년이나 대 선배였지만, 까마득한 후배 이순신을 상관으로 모시며 불멸의 이순신을 만든 인물이었다. (중략) 행주대첩의 숨은 영웅이 또 있다. 이순신의 멘토였던 충청수사 정걸이 그다. 그가 행주대첩에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지는 ‘조선왕조실록’에 다음처럼 나온다. “그날 묘시(오전 5~7시)에서부터 신시(오후 3~5시)에 이르기까지 싸우느라 화살이 거의 떨어져 가는데 마침 충청수사 정걸이 화살을 운반해 와 위급함을 구해주었다.” 또 ‘연려실기술’에는 “전투 중에 화살이 다 되어 진중이 위기인데 정걸이 배 두 척에다가 화살을 실어와 같이 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행주대첩에서 권율이 이끈 전라도 관군이 승리하는 큰 힘이 된 것은 장성 출신 변이중의 화차와 두 척의 배에 가득 실은 충청수사 정걸이 보낸 화살이었다.(자료집에서)
체험관에서 당시 상황을 체험해 보는 회원님들!
의열투쟁의 출발 기산도 의사 유언비(유리개걸지사, 고흥 당오리)-을사오적 중에서도 국민 밉상은 군부대신 이근택이었다. 이근택은 조선 주둔군 사령관 하세가와와 결의형제를 맺고, 일제 추밀원장으로 한국 침략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의 양아들이 되어 거들먹거렸기 때문이다. 이근택도 국민 밉상임을 잘 알고 있었던 듯, 침실 주변에 군인 6명과 순검 4명을 배치하여 경호했고, 일제 헌병대 및 순사분파소와 비상 전화선을 연결해놓고 있었다. 이런 철통같은 이근택의 담을 뛰어넘어 안방에 침투, 이천만 백성의 체증을 뻥 뚫어준 자객이 장성 출신의 기산도다. 그가 이근택 저격 후 10여 년간 숨어지낸 고흥군 도화면 당오리 당곤마을이다. 지금 그곳 당오리 당곤마을 입구 도로변에는 의사를 기리는 추모비가 서 있고, 추모비 앞에는 ‘유리개걸지사(流離丐乞之士-떠도는 걸인 선비)’라 새긴 유언비가 새겨진 돌비가 서 있다. 무덤 앞에 나무비를 세워달라고 했는데, 돌에 새겨져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자료집에서)
고흥지역 청동기 유적-고인돌
포두면 안동고분에서 출토된 금동관묘-포두면 길두리 안동고분은 해발 26미터 내외의 나즈막한 구릉 위에 위치한 직경 36미터, 최대 높이 5미터 내외의 대형 고분으로 구덩이식 돌덧널(석곽) 무덤이다. 무덤방의 크기는 길이 3.2미터, 너비 1.5미터 높이 1.6미터로 평면사다리꼴이다. 출토유물은 금동관묘, 금동신발, 금동귀걸이, 청동거울, 갑옷과 투구, 철제 무기류, 공구류, 옥 등 다양한 껴묻거리가 무덤방 내부에서 출토되었다. 대형고분의 존재와 금동관묘, 금동신발 등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이 고분의 주인공은 남해안 연안 항로상에서 활발한 대외 교류를 전개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안동고분에서 출토된 금동신발
분청사기 상감인화 연꽃 넝쿨무늬 병(15세기, 보물)- 구연은 나팔처럼 벌어졌고, 몸체 아랫부분은 볼록한 모양의 병이다. 목과 몸의 아래쪽에는 연꽃잎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좁은 어깨 부분에는 흰 바탕 위에 연꽃잎이 그려져 있으며, 그 위에 국화무늬와 점무늬가 표현되었다. 몸에는 검은색과 흰색의 이중 상감기법으로 연꽃 넝쿨무늬와 흩날리듯 찍힌 인화 점무늬가 어우러져, 살아 움직이는 듯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이 병은 상감청자의 특징을 그대로 살리면서도, 분청사기로 변화해가는 모습을 확인해 볼 수 있는 작품이다.
분청사기 조화박지 모란무늬 편병(扁甁, 15세기 후반)-물레에서 둥근 병을 만든 후 양쪽 면을 두들기고 다듬어 납작하게 만든 편병이다. 편병은 조선 시대 분청사기로 많이 만들어졌다. 목 아랫부분부터 굽 위까지 몸 전체를 하얗게 붓질했으며, 목에는 꽃잎을 둘러 새기고, 앞쪽에는 잎사귀로 둘러싸인 모란꽃을, 옆면에는 심장 모양의 꽃봉오리를 표현했다. 잎사귀 사이의 면을 긁어 내어 꽃이 피어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분청사기 철화 물고기무늬 장군(獐本)-장군은 조선 초기에 분청사기로 많이 제작되었던 저장용 그릇이다. 장군은 장본(獐本)이라고도 한다. 길쭉한 원통 모양의 몸에 물이나 술을 따르는 구멍이 있으며, 몸 전체를 흰 흙으로 꾸민다. 몸 중앙의 앞뒤면에는 철분이 들어간 물감으로 물고기 무늬를 거침없고 재미있는 느낌으로 그려 넣었다. 물고기는 지느러미를 펴고 넘실대는 물 위를 헤엄치고, 그 위로는 연꽃봉오리가 달린 연줄기가 장식되었다.
분청사기 조화박지 물고기무늬 편병(15세기 후반)-조화박지기법으로 물고기 무늬를 그린 편병이다. 지느러미를 활짝 펼친 물고기 한 마리를 가득 차도록 그렸다. 다양한 도자기에서 물고기 무늬가 나타나지만, 가장 매력적으로 표현된 것이 바로 분청사기의 물고기무늬이다. 물고기를 뜻하는 어(魚)가 중국이 여(餘)와 소리가 같아 여유가 있고 재산이 넉넉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물고기는 알을 많이 낳기 때문에 많이 낳는 것을 뜻한다는 의미가 있다.
사진 보내주신 회원님들 고맙습니다^^
참여한 회원님들! 이번에도 멋졌어요^^

첫댓글 답사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제 답사때 놓쳤던 부분까지 읽으면서 다시 복습하게 되네요~ㅎㅎ
감사합니다^^
글을 따라가니 소록도 숲의 향기, 발포의 바닷바람이 느껴집니다. 벌써 아스라해지는 기억들이 소환됩니다. 행복한 미소가 떠오릅니다^^
기록의 글,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