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페이 역
허페이 기차역이 장거리 버스터미널 인근에 있어 기차역 인근 호텔에 짐을 풀고 바이두를 검색해 보니 허페이에서 우한까지 고속철도가 연결돼 있어 두 시간 반이면 갈 수 있다.(1人/105.5元) 그래서, 우선 기차역으로 가 내일 우한(武漢)으로 가는 기차표를 산다.
▶ 강이 호수가 된 소요진공원
안후이성(安徽省)의 성도인 허페이(合肥)는 삼국시대에도 허페이는 강남과 중원을 잇는 교통 요충지로 강남을 평정해야 하는 조조나 북방 할거를 꿈꾸는 손권 모두에게 있어 중요한 지역이었다. 동시에 허페이는 비옥한 토지와 풍부한 담수 자원을 가지고 있어 농경생활에도 안성맞춤이었다. 때문에 당시 창장(長江)과 화이허(淮河)를 사이에 두고 대치했던 조조와 손권은 허페이를 차지하기 위해 자주 전쟁을 치뤘다. 그래서, 허페이는 삼국고성(三國古城)이라고도 불리는데 그만큼 치열한 싸움이 벌어진 곳이기도 하다. ‘일진일퇴(一進一退)’하던 허페이 쟁탈전 중에서도 가장 치열했던 전투가 바로 ‘소요진(逍遙津)’ 전투다. 소요진은 허페이 옛 성의 북동쪽에 있는 강나루였는데 오랜 시간이 흐르며 강줄기가 변하여 지금은 아름다운 호수가 있는 소요진공원이 되었다.
▶ 소요진공원 정문
허페에서의 일정은 소요진 공원을 찾는 것으로 시작한다. 호텔에서 아침을 먹고 체크아웃한 다음 짐을 호텔에 맡겨 놓고 걸어서 소요진공원으로 향한다. 허페이 역에서 20여 분 걸으니 화이허 강이 나오고 조금 더 가면 소요진공원이다. 소요진공원의 입장료는 무료다. 이런 고마울 데가!
▶ 말을 타고 있는 장료의 동상
공원을 들어서니 늠름한 모습으로 말을 타고 있는 장료의 동상이 제일 먼저 눈에 띤다. 두터운 투구와 갑옷, 허리에 비켜 찬 칼, 말고삐를 굳게 잡은 두 손. 고함소리를 내며 전장을 누비는 맹장, 장료의 위용이 그대로 느껴진다.
▶ 비기교(飛騎橋)
이른 시각임에도 사람들이 많다. 손권이 장료의 공격에 허겁지겁 달아난 비기교(飛騎橋)는 입구에서 10 여분 정도 올라간 곳에 있다. 옛 비기교 자리에 새로 다리를 만들었는지 역사적 정취는 온데 간데 없고 안내판도 없어 시민들이 그냥 지나다니는 다리에 불과한 것이 안타깝다.
▶ 소요진 전투 당시의 삼국정립도
215년, 북방 패권을 장악한 조조는 한중의 장로를 치기 위해 병력을 정비한다. 한중토벌에 모든 병력을 동원하면서 조조는 장료에게 7,000명의 군대를 맡겨 허페이를 사수할 것을 명령한다. 조조가 한중으로 떠나자 손권은 기다렸다는 듯 10만 대군을 이끌고 위나라의 경계를 넘어 파죽지세로 환성을 함락하고 여세를 몰아 허페이를 공격해 허페이는 순식간에 위기에 빠진다. “나와 악진은 돌격대를 이끌고 손권과 정면으로 승부하며 소요진(逍遙津)으로 적군을 유인하겠소. 이진은 따로 군대를 이끌고 소요진에 매복해 있다가 오군이 다다랐을 때 다리를 끊으시오.” 장료는 곧 이진과 악진을 불러들여 작전을 세웠다. 수하에 있는 7000명의 병사 중 800명의 돌격대를 꾸려 선두에 선 장료는 맹렬한 기세로 적진을 향해 돌진했다. 번개 같은 칼날에 수십 명의 목이 베어졌고 장료는 순식간에 손권이 있는 본진까지 이르렀다. 선봉대를 보내고 진영에 남아 승리를 확신했던 손권은 장료의 반격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상황의 급격한 반전에 목숨을 부지하기 바빴던 손권은 300명 남짓한 근위병의 비호를 받으며 적진에서 탈출하고자 했다. 장료에 쫓기며 있는 힘을 다해 소요진에 다다랐지만 있어야 할 다리는 이미 매복해 있던 이진에 의해 끊어져 후였다. 숨통을 조여 오는 급박한 순간, 손권은 남은 군대에 뒤를 부탁하고 말고삐를 잡아당기며 끊어진 비기교(飛騎橋)를 뛰어넘었다. 비록 손권은 놓쳤지만 기지를 발휘해 10배가 넘는 대군을 격퇴한 공로로 장료는 정동(征東)장군에 임명되고 천하에 명성을 떨치게 된다.
▶ 장료의 묘라고 전해지는 '의관총(衣冠冢)'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공원을 가로질러 안쪽으로 향한다. 어느 덧 장료의 묘라고 전해지는 '의관총(衣冠冢)'을 가리키는 안내판이 보인다. 아담하지만 깔끔하게 정리된 길 양옆으로 무덤을 지키는 동물상이 늘어서 있었다. 계단을 딛고 비각에 오르니 우거진 측백나무사이로 의관총이 모습을 드러낸다. 삼국시대 허페이 최고의 영웅 장료가 사용한 갑옷과 투구가 묻혀있다는 흙무덤은 다소 초라해 보이기도 했지만 상쾌한 공기와 지저귀는 새소리가 무덤 속 주인공을 위로해 주는 듯하다. 옛 전장터에 공원을 조성하고 ‘고소요진 공원’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도, 공원 입구에 장료의 동상을 세워둔 것도 모두 삼국시대 위나라와 오나라 간의 혈투와 그 혈투의 주인공인 장료를 기억하려는 허페이 시 당국의 배려일 것이다.
▶ 아침 했살에 빛나는 호수와 소요루
▶ 소요각(逍遙閣)
비기교를 건너니 널따란 소요호가 아침햇살에 반짝인다. 호수 가장자리에 있는 소요각(逍遙閣)은 우아함의 극치를 보여주고 섰고, 호수 가운데 섬까지 이어진 아치형다리 끝에 있는 소요루(逍遙樓)와 함께 한 폭의 그림을 그려내고 있다.
▶ 허페이 시민들의 공원이 된 소요진전투현장
소요진은 본래 허페이의 강나루였으나 오랜 세월 속에서 강줄기가 변하며 지금은 호수를 품은 소요진공원이 되었다. 1800여년 전, 군사들의 함성과 군사들이 흘린 피로 가득했을 전쟁터가 이제 호수공원이 되어 허페이 시민들의 놀이시설과 나무,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메우고 있다.
▶ 허페이에서 발굴된 유물
▶ 소요진 전투 미니어처
소요각에는 허페이에서 발굴된 유물을 전시해 놓았는데, 특히 허페이에서 장료와 손권이 벌였던 전투 현황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꾸며놓은 삼국역사문화관’이란 전시실이 있다. 안후이를 비롯한 중국 전역에서 가장 먼저 생긴 삼국시대 전문 전시관이라고 한다. 인형 하나 하나마다 동작과 표정이 매우 사실적이어서 보는 것만으로도 마치 당시의 전투에 참가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 명교사 입구
소요진공원을 둘러본 뒤 교노대(喬弩臺)로 발길을 옮긴다. 교노대는 조조가 허페이에서 병력을 정비하고 친히 석궁과 궁술을 가르치던 장소다. 소요진 공원 정문을 나서 지하도를 건너 5분 정도 걸어가니 백화점과 유명 브랜드상점이 즐비한 번화가가 모습을 드러냈고 중심에 교노대가 자리잡고 있다. 반가운 한국가요가 울려 퍼지고 외국어로 쓰인 간판이 빼곡한 현대의 거리에 남아 있는 역사의 흔적이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 교노대가 명교사로 바낀 유래를 설명하는 안내판
조조가 궁술을 가르쳤던 곳이라는 설명에 삼국유적공원에서 보았던 지휘대와 넓은 공간을 떠올렸다. 그러나 흐르는 시간 속에 과거의 흔적이 사라지는 것은 당연지사. ‘천하삼분(天下三分)’의 시대가 끝이 난 뒤 수 천 명의 군사를 지휘하던 조조의 교노대는 터만 남게 되었고 그 터 위로 사찰이 들어섰다. 첫 번째 사찰인 ‘철불사(鐵佛寺)’는 남북조시대 (502~549)에 지어졌으나 얼마 되지 않아 소실됐다. 그리고 200여 년이 흘러 당(唐)대에 지금의 ‘명교사(明敎寺)’가 세워졌다. 명교사 때문인지 교노대는 명교대라고 불리기도 한다.
▶ 명교사 대웅전
▶ 명교사 와불전 내 와불
절 안을 살펴보기 위해 계단을 올랐다. 문턱을 넘기 전부터 진한 향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절 안에는 부처님께 향을 올리고 기도하려는 사람들이 꽤 많아 보인다.
▶ 조조가 군사들의 식수로 사용했던 옥상정(屋上井)
대웅전 옆의 작은 정자로 가니 정자 가운데는 놀랍게도 우물이 있다. 우물 입구가 당시 주변 집들의 지붕보다 높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옥상정(屋上井)이다. 268년, 조조 군사의 식수로 사용되던 우물로 물맛이 좋았을 뿐만 아니라 1년 내내 마르지 않았다고 한다. 우물 입구 주변에 남은 물을 끓어 올릴 때 생겼었을 법한 줄 자국이 세월의 흐름을 설명해주는 듯 했다.
교노대 정자안에 있는 커다란 범종에는 명교사라는 글씨가 부조되어 있는데 이 정자 만이 이곳이 과거 교노대였던 것을 유일하게 알려주고 있다.
아침 8시 30분에 호텔을 출발해 소요진 공원과 교노대를 둘러 봤는데도 11시 20분 밖에 안됐다. 이제 시내버스를 타고 과거 허페이 신성 터에 조성된 삼국유적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