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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제사 패턴>의 줄거리:
노아와 그의 가족들이 홍수로 인해 땅에서 떠오르기를 지상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 위로 7m까지 이르렀다가 이제 다시금 물이 다 빠지고 방주에서 나와 마른 땅에 발을 딛게 됩니다. 홍수로 모든 것이 쓸려나간 공허한 지상에서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대체 무엇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들은 하나님께 번제를 드립니다. 이렇듯 새롭게 시작하는 인류의 삶의 시작인 번제는 이제부터 일상적인 삶의 패턴이 되어 영원한 새로움의 원천이 됩니다.
제사 패턴
(창8:1~22)
18. 노아가 그 아들들과 그의 아내와 그 며느리들과 함께 나왔고
19. 땅 위의 동물 곧 모든 짐승과 모든 기는 것과 모든 새도 그 종류대로 방주에서 나왔더라
20.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21.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22.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제사 패턴>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제사 패턴’
우리가 세 번째로 패턴이라고 하는 단어를 사용해서 말씀을 함께 나누고 있죠.
‘방주 패턴’ ‘홍수 패턴’ ‘제사 패턴’
이 홍수 사건이 우리가 보통 때 상식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성경 전체에 대해서 또 우리 신앙생활에 대해서 시사하는 의미가 엄청난 것 같아요. 또 새롭게 느낍니다마는…
그래서 그 의미를 이렇게 패턴이라고 이름 붙여서 세 개의 부분으로 나눠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패턴은 반복돼야 될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오늘 제사 패턴은 특별히 새로움이라고 하는 의미와 아주 깊이 연관이 돼있는 내용이 되겠습니다.
날마다 새롭다, 이렇게 얘기하잖아요.
날마다 새롭지 않으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타락이 점점 힘을 발휘해서 왕성해지고, 타락의 상태가 제어되어야 될 것 아닙니까?
원죄의 영향력이 제어돼야 되는데, 새로움이 없어지면 계속해서 이 원죄의 영향력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면서 확장되어 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날마다 새롭고 순간마다 새로울 수 있는 길이 어디 있는가?
바로 제사 패턴에 있다는 거예요.
‘날마다 새롭고 순간마다 새로울 수 없다면 우리는 낙후돼버리고, 옛사람의 상태에 굴복되고 지배돼버리는데, 그 옛사람의 상태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너무너무 지긋지긋해하시고 싫어하시는 원죄의 영향력이 지배하는 상태다’라는 거죠.
여러분, 전 세계에서 성경 다음으로 널리 알려진 책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노자의 도덕경이라는 겁니다, 서양의 언어로도 무려 80여종의 번역본이 나와 있을 만큼, 동서를 막론한 고전이 도덕경이라는 거예요.
노자가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 전에 살던 분인데, 2500년 전에 기록된 그 책이 지금까지도 그렇게 많이 읽힌다는 것도 놀랍고, 또 놀라운 것은 이 도덕경과 관계해서 오독(誤讀)이 그렇게 많다는 겁니다.
분량은 불과 한자로 치면 5천여 자밖에 안 돼요.
근데 이렇게 오해가 많은 책이 또 없다는 얘기죠.
그래서 가장 유명한 도덕경에 관한 연구서나 책으로서는 2천 년 전의 사기의 노자열전이 나오고,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1500년 전 중국의 삼국시대 위나라의 왕필이라고 하는 사람이 쓴 주석본인 ‘왕필 본’이 지금까지 제일 잘 알려진 책인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1973년에 중국 후난 성, 마왕퇴 고분에서 ‘백서 본’이라고 하는 도덕경의 다른 책이 발견된 거예요.
그래가지고 노자 연구가 다시 새롭게 진행되는 겁니다.
2500년이 된 책인데, 새롭게 읽어야 한다는 주장들이 나오고, 우리나라에서도 최근에 나온 책 중에 ‘처음부터 새로 읽는 노자 도덕경’
‘노자 도덕경’이라고 하는 제목인데, 거기에 부제가 달려가지고 ‘처음부터 새로 읽는’
아니 2500년 된 책을 처음부터 어떻게 새로 읽겠다는 얘깁니까?
근데 새로 읽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리고 요즘 들어서 얘기되는 게, ‘지식은 누적되는 것이 아니다’라는 얘깁니다.
끊임없이 과학의 접근방법이 발달함에 따라 전통적인 과학지식들이 자꾸 바뀌어갑니다.
예를 들어 1950년대까지만 해도 인간의 염색체 수가 48개라고 했는데, 이제는 중학생 이상이면 모두가 다 알아요, 염색체 수가 46개라는 걸.
그러니까 누적된 지식이 의미가 없고, 끊임없이 새롭게 지식이 다시 써지고 있다는 얘깁니다.
어제 서울에서 손님들이 오셨어요, 말씀을 계속 듣는 분들인데, 그중의 어떤 분이 오늘의 번제 시즌1과 시즌2를 계속 비교하면서 듣는데 다르더라, 그러시는 거예요.
이와 똑같은 겁니다.
성경의 본문을 가지고 말씀을 전하는데, 그러면 지금 창세기가 8년 전에 전한 것 아닙니까?
그러면 여기서 새롭다는 게 뭘까요?
새롭게 전해야 되는 거죠.
그래서 저는 시즌1에서 전한 말씀을 아예 안 봅니다.
듣지도 않고 녹취문을 읽어보지도 않고 그냥 말씀을 전하는데, 새로워지고 싶어서 그래요.
그때 그 말씀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얻은 말씀이고, 지금도 하나님은 살아계시기 때문에 지금 맺고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오는 말씀을 또 전하고 싶은 겁니다.
이게 새로운 거예요. 누적될 수가 없는 겁니다.
더군다나 기독교인들에게는 삶의 진전과 누적이라는 게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인들에게는 언제나 오늘 하루도 살도록 허락받았으면 오늘 새롭게 시작하는 겁니다.
어제까지 살아왔던 삶에 이어서 오늘 거기에 덧붙여지는 진전된 삶을 사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언제나 출발점에서 다시 시작하는 겁니다.
아니, 그렇게 우리의 삶이 누적도 없고 발전도 진전도 없고 맨날 원점에서부터 다시 출발한다면, 무슨 삶에 발전이 있을 수 있겠는가?
우리의 삶의 진전은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온 삶의 누적의 효과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안에서 누적이 되도 되는 것이고, 진전이 되도 되는 것입니다.
나는 언제나 오늘 새롭게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오늘의 출발점은 내일의 출발점이고, 내일의 출발점은 모레의 출발점입니다.
보통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오늘 출발해 놓았으면, 내일은 오늘 간 것만큼의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고, 모레는 이틀째 도달한 그 자리에서 또 시작하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백 일이 지나도 다시 첫 번째 날의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거예요.
그 출발점이 어딥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언제나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이 삶을.
이렇게 출발점으로 돌아가서 살게 해주는 것이 뭐냐 하면, 제사 패턴이라는 겁니다, 이 지상에서의 삶을.
그러면 우리 이렇게 질문할 수가 있지요.
홍수 패턴과 제사 패턴이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방주 패턴은 구원의 역사를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시는 패턴이고, 언제나 반복해서 새롭게 소수의 사람을 통해서 역사를 새롭게 시작하십니다.
근데 그렇게 새롭게 시작하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패턴이 홍수 패턴이었습니다.
홍수패턴은 이 세상에서 마음의 관심의 대상이 될 만한 모든 대상들이 다 물에 잠겨버립니다. 가장 높은 봉우리보다 7미터 위까지 물이 덮였으니까 수면 위에 떴을 때 대할 수 있는 대상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밖에 없는 겁니다.
그래서 이 홍수 패턴은 하나님과 우리가 가져야 될 관계의 원형을 보여주는 겁니다.
이 관계의 원형을 마음속에 유지하고 있는 자들을 하나님의 방주 패턴의 구원의 역사에 참여시키시더라는 겁니다.
그러면 제사 패턴은 뭐냐?
오늘 노아가 만 1년 10일 만에 방주에서 나와서 땅을 딛게 됩니다.
땅을 딛게 되니까 이제 이 땅 위에서의 삶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거잖아요, 그동안은 방주 안에 있으면서 하나님과의 관계의 원형인 홍수 패턴의 시작을 우리에게 알려줬어요.
근데 이제는 방주에서 내려서 땅에서 삶을 구체적으로 시작해야 되는 거 아닙니까?
아! 참~ 생각만 해도 마음이 딱해요.
홍수가 지상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보다 7미터 더 높을 정도로 이 지구표면을 다 덮은 상태에서 1년 10일이 지나고 이제 물이 다 말라가지고 땅에 발을 딛었는데, 이 땅에 뭐가 남아있겠습니까? 홍수로 다른 사람들만 죽고 없어진 게 아니잖아요.
노아의 집도 노아의 밭도 노아가 일궈놓았던 모든 기업이 다 없어져버렸습니다.
이 광활한 공허, 이 위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어디서부터 손을 대서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우선 집부터 지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먹을 것부터 준비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다 제쳐놓고 오늘 본문에 의하면 제사부터 지내게 됩니다.
땅에 발을 딛고 제일 먼저 한 게 제사를 지낸 거예요.
땅에 발을 딛기 전에는 어떻게 했습니까?
마음의 대상이 되는 것들이 존재하는 이 지면을 덮어버린 홍수의 수면 위에서 하나님 한분만을 대상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이게 하나님과 관계의 원형이에요.
하나님과 관계를 할 때는 그 어떤 대상도 마음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그 하나님으로부터 이제 땅에 내려와 땅을 딛고 삶을 시작하는데, 제사를 먼저 드린 것은, 이제 땅에 살게 되면서 나타나는 일이 뭐겠습니까? 하나님과의 이 원형적 관계의 형태가 허물어지기 시작합니다.
직장에 나가면 당장에 내 마음을 뺏는 일들이 눈앞에 펼쳐지고 진행되잖아요.
가정생활만 해도 벌써 하나님과의 원형적 관계를 유지해나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마음의 대상인 상태를 유지해 나갈 수가 없게 돼버립니다.
그래서 하루를 살고 나면 내 마음에 자식문제 이만큼 얽혀 들어와 있고, 직장문제 이만큼 얽혀 들어와 있고, 배우자와의 관계에 문제, 건강문제가 마음에 깊숙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출발하면 가정문제, 직장문제, 건강문제, 재정문제, 사업문제, 이런 것들이 마음에 얽혀 들어와 있는 상태로부터 출발을 하게 된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상태에서 생각하고 그 상태에서 계획하고 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오늘 본문에 나온 대로 ‘마음에서 나온 모든 생각과 계획이 악할 뿐이다’라는 말이 적용된다는 얘깁니다. 그게 어린아이 때부터 시작되는 거예요.
어린아이 때부터 벌써 마음에 이 지면에서 살다보니까 자기 눈과 귀로 보고 듣고 하는 대상들과 얽혀버립니다, 초등학교 때도 중학교 때도 다 자기 세계가 만들어지기 시작하면서…
오늘 얽힌 그 상태로 잠자고 다음날 일어나서 얽힌 그 상태로 또 출발하게 됩니다.
이러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의 원형이 완전히 깨져버린 상태가 돼버리는 거예요.
보존이 될 수가 없고 유지가 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방주 패턴에서 보여주셨던 것처럼 당신의 주체성을 투입하셔서 이 땅에서 당신의 주체성을 실현시켜 나가실 수 있는 사람을 발견할 수 없게 되는 겁니다, 또 다시.
노아 홍수 후에 노아가 이 땅으로 내려와서 자손을 낳고 손자, 증손자, 고손자, 이렇게 계속 늘어나겠지마는, 그 사람들의 체질이 바뀐 게 아니거든요.
원죄를 마음에 유전적으로 담고 있는 상태는 계속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원형적 관계, 하나님만을 대상으로 삼고 모든 대상이 물에 묻혀서 없는 것처럼 돼버린 그 상태, 이 상태가 아니면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갈 수가 없습니다.
근데 이게 삶을 살다보면 이 상태를 유지할 수가 없으니까,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세상의 일들이 하나님보다 더 강하게 현실적으로 쇄도해 들어오니까, 지켜나갈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삶을 살아가면서 홍수 패턴 속에서 이루어졌던 하나님과의 관계의 원형을 어떻게 삶 속에서 끊임없이 회복하고 회복해낼 수 있겠느냐?
끊임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이 삶을 다시 시작해 들어갈 수가 있겠느냐?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로 가고 하나님이 나를 등 떠밀어서 삶으로 내보내시고, 이 관계가 어떻게 반복돼서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그게 바로 제사라는 겁니다. 제사 패턴을 통해서 가능해진다는 얘기에요.
예를 들어 광산에서 철광석을 캐냈다, 철광석은 온갖 불순물이 다 섞여있습니다.
그것을 용광로에 집어넣어서 다 녹여서 불순물 따로 빼내고 철을 따로 빼내서 순수한 철을 만들어냅니다. 그런 것과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오늘 노아가 번제를 드립니다, 번제.
이 번제라는 단어가 ‘올라’라고 하는 히브리어 단어입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이 ‘올라’라는 말이 한국말의 ‘올라가다’라는 뜻이에요.
번제란 제물을 드리는 자가 제물과 자신을 동일시해서 ‘내가 타죽습니다’ 하며 태우는 거예요.
그럴 때 연기가 올라가는데, 이 연기가 상징하고 뜻하는 바가 뭐겠습니까?
바로 순수한 마음입니다.
광산에서 캐낸 철광석이 철성분과 다른 성분이 섞여있는 것처럼 삶을 살다보면 직장문제, 돈 문제, 가정문제, 자녀문제, 배우자문제… 여러 가지 문제들이 마음에 들어와서, 광산에서 캐낸 철광석처럼 돼버립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원형으로 회복할 수가 있겠습니까?
번제를 드리는 거예요. 제사를 드려서 태워버립니다.
그렇게 온갖 불순물들이 다 섞여있는 내 마음을 태워버리는 거예요.
태워버리면 연기가 올라가는데, 그 연기가 바로 마음인 거예요.
연기처럼 순수해진 마음이 올라가는 겁니다.
그래서 홍수 패턴 때 보였던 대로, 모든 대상이 수면 아래로 깔려버린 상태에서 수면 위에서 유일한 대상이 하나님인 상태를 회복하는 거예요.
어디서? 삶의 현장에서. 땅 위에서 삶을 진행하는 동안에.
그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약속해주신 가나안 땅에 발을 딛고 제일 먼저 한 일이 뭐냐 하면 제단을 쌓는 겁니다.
이 일이 발전돼가지고 결국 선민들에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이 성전 중심의 삶입니다.
제사 패턴을 반복하라는 거예요.
그리고 이것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습니까?
사실을 노아가 번제를 드리지만, 그 전에 아벨의 제사로부터 시작되는데,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나올 때 제사가 언급된 의미가 뭐였겠어요?
타락 이후에 인간의 삶에 대해서 성경이 첫 번째로 묘사한 인간의 활동이 바로 제사입니다.
아벨은 양 치는 사람이니까 양 친다고 하는 삶의 내역을 소개할 수도 있고, 또 가인은 농사짓는 사람이니까 농사짓는 삶의 내역을 소개할 수도 있었겠지만, 아벨이 양 치고 가인이 농사짓는다는 얘기를 하게 된 이유는 제사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필요해서 동원이 된 겁니다.
왜냐하면 제물이 자신의 생업으로부터 나오게 되니까.
그래서 첫 번째로 성경이 관심을 두고 언급한 인간의 활동은 제사였다는 거예요.
이 제사가 노아가 땅에 발을 딛고 이제 인류의 역사가 새롭게 시작할 때 한 첫 번째 행동이었다는 거예요.
또,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에 첫 발을 딛고 첫 번째 한 행동이 제단을 쌓았고.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첫 번째로 명하신 것이 바로 회막과 제사였습니다.
그리고 그 제사가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 완성됐다고 히브리서가 또 사도바울이 누누이 우리들에게 전하고 있는 겁니다.
이 제사 패턴이 어떤 의미인가를 위해서 오늘 본문에 까마귀얘기와 비둘기 얘기로 등장하는 거예요.
8장 전체가 할애하고 있는 것이 제사에 관한 얘기고, 제사란 마음의 순결함을 회복해서 하나님께 드려서 홍수 패턴 때의 하나님과의 원형의 관계를 이 땅을 살면서 어떻게 유지하느냐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다는 겁니다.
까마귀는 내보내자마자 안 돌아왔어요.
그래서 성경학자들이 추측하기를 물에 떠다니는 시체들이 있지 않았겠느냐, 그 시체들에 올라타고 앉아서 그걸 쪼아 먹느라고 그랬을 것이다. 일리가 있잖아요.
그리고 비둘기는 세 번째 내보냈을 때라야 돌아오지 않게 됩니다.
비둘기로서는 그런 시체가 둥둥 떠다니는 물 위에서는 발붙일 곳이 없었겠죠. 비둘기는 순결함을 말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고 말씀하셨잖아요.
결국 하나님과 홍수 패턴에서 보여 진 원형의 관계로 우리가 들어가기 위해서는 방주에만 남아있을 수 없습니다. 기도원에만 있을 수도 없고, 수도사들처럼 영성에 매진할 수도 없고.
그러면 땅을 살고 있는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우리가 홍수 패턴 때 보여 진 하나님과의 원형적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날마다 하나님으로부터 삶을 시작할 수 있겠는가?
제사를 통해서 가능해진다는 얘깁니다.
어제까지 이 세상을 살면서 모든 세상문제가 다 들어와 있는 내 마음이, 제단에 올려 져서 모든 세상적인 관심사들이 다 불에 타고, 순수해진 마음이 홍수 패턴 때 수면 위로 올라간 방주처럼 하나님만이 대상인 그 위치로 올라가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 되고, 그렇게 관계를 맺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내보내지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교회가 이렇게 맥없이 모든 생명력을 잃게 되고, 영적 생명력은 상실되고 이 땅에서 프로그램 하고 사업하고 예배당 짓는 생명력만 왕성해지는 이유가 뭡니까?
여러분 잘 살펴보시면, 우리나라에 목회 성장학이 유행되기 시작하면서부터 교회의 성장이 멈췄습니다. 그거 아주 명심해야 돼요.
교회 성장학이 온 대한민국 교회 목회자들의 관심을 다 사로잡았을 그때부터 교회는 성장을 멈췄다는 거예요.
왜 그렇습니까?
다시 시작하는 걸 다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예배당 건축이 진행되고 있다고 해도, 목사님과 교인들 당회가 다시 시작해야 돼요.
언제나 새롭게 시작해야 합니다.
어떻게 새롭게 시작합니까?
어제까지 교회 건축에 관한 계획이 있었다, 그러면 번제를 통해서 내 마음속에 들어와 있는 건축에 대한 관심, 거기에 묶여있는 이 마음을 다 태워버려야 됩니다.
그래서 비둘기처럼 순결한 마음을 되찾아가지고 홍수 패턴 때 이루어진 하나님과의 원형적인 관계로 마음이 들어가야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원형적인 관계를 맺게 되면, 목사님부터 교인들까지 모두 그렇게 된다면, 첫 번째 나타나는 증거가 예배당이 새로 지어지지 않아도 아무 부족함이 없다는 걸 느끼게 됩니다. 마음이 하나님으로 가득 차게 되면서 느끼는 만족감이에요.
그렇게 만족하고 평강하고 예배당에 대한 필요가 내 마음에는 없어요. 근데 그전에는 목사님과 당회원들이 예배당에 대한 열망이 부글부글 타오르잖아요, 정열이 끓어오르고.
그래서 목사님이 광고하시고 설교할 때 계속 건축 얘기를 해댑니다.
근데 제단에서 번제가 돼버리고 사업이나 예배당 건축에 대한 마음이 타버리면, 이 세상에 올라타서 썩은 고기를 뜯어먹던 까마귀 같은 현실에서 비둘기 같은 현실로 바뀌어버리면서 하나님과 원형적인 관계가 이루어지면, 사업하는 장로님은 사업이 잘되고 못되고 하는 이런 것에 아무런 소원이 없어집니다, 하나님으로 채워지기 때문에, 그게 증거에요.
이렇게 아무런 소원이 없어요, 예배당 건축에 대한 소원도 없어지고 사업을 확장시키겠다는 소원도 없어지고, 온전히 하나님으로부터 평강해지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예배당을 지으시겠다는 당신의 계획이 나타납니다, 사업을 확장하시겠다는 당신의 계획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하셔야 돼요.
하나님이 하시느냐, 내가 하느냐의 기준은 뭡니까?
악할 뿐인 내 마음의 계획으로부터 출발하느냐,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느냐의 기준점을 어떻게 설정할 수 있습니까?
번제를 통해서 내가 지금 목말라하고 이루고 싶은 것들에 대해서 죽어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홍수 패턴 때의 하나님 관계에 몰입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만으로 만족해서 이 땅에서 그렇게 이루고 싶었던 모든 것들에 대해서 망각해서 아무것도 이루고 싶은 것이 없는 상태가 됩니다.
그러고 나서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면 하나님의 생각이고 하나님의 계획이라 이겁니다.
그리고 오늘 이뤘으면, 내일 시작할 때 또 어제까지 이룬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게 아니라, 오늘 또 홍수 패턴에서 보여 진 원형적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제사를 통하여 내 마음에 얽혀있는 모든 걸 다 태워버리고, 다시 또 새롭게 시작하는 겁니다.
시즌 1에서 창세기를 다 다뤘습니다.
그러나 시즌 1에서 다룬 창세기의 내용들 위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일어난 사건에 발을 딛고 오늘 또 그 위에 쌓는 게 아니라, 다시 창세기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창세기에 대해 선지식을 갖고 있는 내 마음이 번제를 통해서 타버립니다.
그러고 나면 내 마음이 하나님께로 올라갑니다.
하나님 한분과 만난 그 시점에서부터 창세기를 다시금 하나님께서 마음에 넣어주실 때, 그 말씀을 전하는 겁니다.
모두가 다 이 방법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방주 패턴, 홍수 패턴, 제사 패턴을 가지고 날마다 새롭게, 날마다 하나님과의 원형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이 땅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세 가지 패턴이 완벽하게 반복됨을 통해서 온전한 동행이 이루어지고, 당대에 완전한 자라는 노아에 대한 하나님의 이름 하심이 우리들의 사건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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