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마음」
결국 올 가을에도 가곡의 밤에 가지 못했다. 해마다 이맘때쯤에 세종문화회관에서는 「가을맞이 가곡의 밤」이 열린다. 그러면 나는 물론 어김없이 우리 가곡의 선율이 못 견디게 그리워지고, 그러면 또한 차가운 가을밤의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오래된 가곡집의 테이프를 틀어가며 가슴 속을 휘젓고 지나는 전율을 느끼곤 하는 것이다.
가을하늘보다 더 맑고 아름다운 선율과 그 섬세한 언어로 다듬어진 우리 가곡만의 시어(詩語)를 듣고 있으면 왜 눈시울이 젖는지, 왜 괜히 가슴이 뛰는지 알 수 있다. 세상 어떤 노래가 우리 가곡처럼 아름답고 우리말처럼 어여쁠 수 있는가.
내가 굳이 ‘우리’ 가곡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그 어떤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우리 민족만의 정서와 인생과 사랑이 우리 가곡 속에 녹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주였던가, 저녁 무렵 우연히 TV를 보다가 나는 벌떡 일어났다. 그 화면 속에서는 가을이 한창 무르익는 지리산의 풍경을 담아내고 있었다. 작열하는 태양의 여름이 지나고 성숙해 가는 붉은 빛의 나뭇잎들, 단지 “누렇게 익어가는 벼들” 이라고 표현하기에는 한참 부족한 들판의 그 오묘한 색감, 이슬이 내리고 엷은 안개가 서린 오솔길과 구불구불 정겨운 논둑길에 수줍게 핀 코스모스들, 오다가다 만나는 주름진 농부들의 소박한 얼굴들.
아, 정말 아름다웠다. 당장이라도 그 들길에, 그 숲길에, 그 산과 강변길에 가고 싶었다. 이윽고 초저녁 어스름한 가을밤, 하나 둘 별빛이 아련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나무들의 실루엣이 그림처럼 빛나던 바로 그때였다. 그 노래가 들린 것은. 낯익은 선율, 넉넉한 몸집의 테너가 부르던 우리 가곡 「그리운 마음」이었다. 그 순간 어김없이 내 가슴은 설레고 있었다.
바람은 불어 불어 청산을 가고
냇물은 흘러 흘러 천리를 가네
냇물 따라 가고 싶은 나의 마음은
추억의 꽃잎을 따며 가는 내 마음
아, 엷은 손수건에 얼룩이 지고
찌들은 내 마음을 옷깃에 감추고 가는 삼월
발길마다 밟히는 너의 그림자
(이기철 詩 김동환 곡)
바로 그 노래였다. 내가 늘 가을이면 서툰 목소리로 읊조리곤 했던 노래. 그 노래를 듣고 있으면 온갖 추억들이 떠오른다.
찬이슬 내리는 가을밤에도 별이 보이는 언덕이 좋아 마냥 서 있던 고향의 언덕과 학창시절 우리 가곡이 좋아 유관순기념관으로 숭의음악당으로 가곡의 밤에 갔다가 돌아오던 버스 맨 뒷좌석에서 보던 황홀한 첫눈송이들, 최전방 철책선 아래 서늘한 참호 속에서 밤하늘을 보며 수도 없이 불렀던 그 노래.
그랬다. 지금은 마른풀 같이 메말라 버렸지만 그때는 그랬다. 온 세상을 다 적시고도 남을 것 같은 사랑과 그리움이 차고 넘쳐 주체할 수 없었던 때가 있었다.
그리워 그리워 목마른 가슴을 더 이상 어쩌란 말이냐, 언제나 강물 따라 가고 싶은 내 마음은, 아무리 추억의 꽃잎을 따며 가더라도, 발길마다 밟히는 것은 늘 너의 그림자뿐인 것을.
그리운 것이 어찌 사람뿐이겠는가, 어린 시절이 그립고, 어머니가 그립고, 친구들이 그립고, 내 나라 내 강산의 생명이 숨 쉬는 온 구석이 다 그리운 것을.
그 날 밤 나는 가족들이 잠든 후에도 혼자 숨죽이며 우리 가곡을 들었다. 조수미의 고음이 빛나는 「동심초」와 「기다리는 마음」, 「추억」, 「비가」, 「목련화」 등. 특히 내가 가장 좋아했던 박화목 시 채동선 곡의 「망향」. 4월이면 눈부시게 빛나는 봄에 가장 먼저 다가오던 그 노래를.
올해에는 특히 우리나라 쓰리테너라고 불리는 원로성악가 박인수, 엄정행, 신영조님이 함께 나온다고 해서 더욱 가고 싶었는데... 그러나 그 뿐, 이윽고 날이 밝자 다시 사무실로 가서 정신없이 일하다보니 하루 이틀이 지나가고, 무엇이 그리 바쁜지 어영부영하다 결국 표를 예매하지도 못했다. 아니 어쩌면 이제 나도 표를 예매해야 한다는 열정도 순발력도 다 늙어버렸다는 변명이 더 옳은 것이리라.
하지만 그래도 나는 나 혼자만의 음악회에 다녀왔다. 아파트 창문으로나마 가을하늘을 바라보며 혼자서 「그리운 마음」을 불러보았으니까. 테너 신영조님이 “바람은 뿔어 뿔어~” 하며 노래를 시작하는 그 곳에 굳이 가지 않았어도 나는 늘 우리 가곡을 마음에 품으며 이 가을에도 혼자 추억을 되새기고 있으니 행복하다.
(2008. 10. 21.)
https://youtu.be/8OCG3C9PnSo?si=jU9bP4dbrKtCMGEf
첫댓글
그러셨군요
살다 보면 하는 생각입니다
하시는 가곡의 음악의 삶에
늘...
축하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