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향(丁香) 한 가닥 꺾어 안장에 꽂다
남효온(南孝溫,1454∼1492)은 인물됨이 영욕을 초탈하고 지향이 고상하여 세상의 사물에 얽매이지 않았다고 한다. 산수를 좋아하여 국내의 명승지에 그의 발자취가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당시의 금기에 속한 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하위지(河緯地)·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유응부(兪應孚) 등 6인이 단종을 위하여 사절(死節)한 사실을 「육신전 六臣傳」이라는 이름으로 저술하였다. 세상에서는 원호(元昊)·이맹전(李孟專)·김시습·조려(趙旅)·성담수(成聃壽) 등과 함께 생육신으로 불렀다.
1485년(성종 16년) 4월 15일부터 윤4월 21일까지, 그는 금강산을 여행하고 「유금강산기(遊金剛山記)」를 남긴다. 금강산을 여행하고 귀가하는 길에 한계령을 넘는다.
고개 위에서 동해 바다를 하직하고, 고개를 내려와서 서남쪽으로 나무 밑을 가니, 길이 매우 험하며 골짜기가 그윽하고 깊다. 정향(丁香)꽃을 꺾어 말안장에 꽂고 향기를 맡았다.
이 부분에서 갑자기 긴장이 풀리면서 슬며시 웃음이 나오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잠시 상상해본다. 지금보다 훨씬 더 험했을 한계령을 내려오는데 꽃향기가 바람을 타고 온다. 주변을 보니 정향꽃이 저만치 있다. 한참동안 냄새에 취해 여행길을 멈췄을 것이다. 그러나 갈 길은 멀고, 향기와 이별하기는 싫고.....해서 미안하지만 한 가닥 꺾어 안장에 꽂고 다시 여행을 시작한다. 정향냄새를 계속 맡으면서....조선시대의 선비를 떠올리면 단정하고 엄숙한 이미지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이런 감성적인 면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17세기에 활약한 노론의 정치가이며 유학자인 김수항(金壽恒)의 넷째 아들은 김창업(金昌業, 1658〜1721)이다. 어려서부터 김창협(金昌協), 김창흡(金昌翕) 등 형들과 함께 학문을 익혔다. 특히 시에 뛰어나 후에 김만중(金萬重)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그림에도 재주가 있어 젊어서도 그림 그리기를 즐겼으므로, 아버지로부터 그림에 마음을 빼앗겨 학업에 방해가 될까 걱정이니 손을 떼라는 충고를 받았다고도 한다.
그가 지은 시가 『노가재집(老稼齋集)』에 실려 있다. 제목은 「서향화(瑞香花)」인데, 옆에 세속에서는 정향(丁香)이라 부른다고 설명하고 있으니, 라일락을 소재로 한 시이다.
가루처럼 꽃이 피니 자줏빛 정(丁)자처럼 모여서 / 瑣瑣花開簇紫丁
이어진 한 줄기가 아름다운 이름 떨치네 / 攣枝一種擅香名
누가 십리 밖에 향나무 있다 했나 / 誰知十里沈檀氣
바로 뜰 앞에 라일락꽃 몇 개 있는데 / 却在庭前數朶英
정향의 유래에 대해서 설이 많다. 김창업은 꽃 모양이 한자의 정(丁)자와 비슷한 것을 눈여겨봤다. 그러고 보니 ‘정(丁)’자처럼 생겼다. ‘정(丁)’자처럼 생긴 꽃에서 향기를 내는 나무인 셈이다.
정향을 찾아봤다. “한자로는 향이 좋은 나무라는 뜻에서 정향(丁香)이라 하고, 영어로는 라일락(lilac), 프랑스어로는 리라(lilas)라고 한다. 조선정향, 개똥나무, 해이라크, 개회나무라고도 한다. 또 ‘미스킴라일락’이라는 이름도 있는데 이것은 1947년 미국 농무성의 식물채집가 미더란 미국인이 북한산 백운대 바위 옆에서 채집한 개회나무(수수꽃다리) 종자 12알을 가지고 미국으로 가져가 서양 라일락과 교배해 만든 향내 짙은 원예종인데 자신의 한국인 타자수 성을 따서 '미스킴라일락'이라 명명하였다.”
아파트 단지 안에 라일락이, 아니 수수꽃다리가 피기 시작한다. 차에 시동을 걸어놓고 한참동안 냄새를 맡았다. 한 가지 꺾어 핸들 앞에 놓아볼까?
첫댓글 생물자원은 한나라의 중요한 자원입니다. 다른나라로 유출돼 오히려 수입해 오는 실정입니다. 안타깝죠.
그러게요. 동감!
그런 사연을 안고 있는 꽃이군요. 잘 보고 갑니다.
우리 것을 우리 것으로 알지 못하고 살아 온 날들이 부끄럽습니다^^
이놈도 5월이면 백담사에서 영시암 오르는 계곡가에 많지요.
백담사에서 영시암쪽으로 가다가 첫번째 귀퉁이에서 냄새를 맡던 기억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