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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에르 불레즈, 파괴를 외치고 제국을 세우다.
2001년 11월 2일 새벽, 스위스의 한 호텔방에 경찰 세 명이 들이닥칩니다. 경찰들은 방의 주인에게서 여권을 압수하고 한동안 그를 붙잡아 두었습니다. 9.11 테러 직후의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 수상한 ‘폭파 발언’이 확인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붙잡힌 사람은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76세의 세계적인 지휘자이자 작곡가 ‘피에르 불레즈’였습니다. 문제의 발언도 무려 34년 전의 것이었습니다.
1967년 독일 잡지 <슈피겔>과의 인터뷰에서 불레즈는 침체된 오페라 시장을 어떻게 바꾸어야 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가장 비용이 많이 드는 해결책은 오페라 극장들을 폭파하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그것이 가장 우아한 해결책 아니겠습니까?”
엉뚱한 오해와 체포라는 웃지 못할 황당한 에피소드이긴 하지만, 사실 “오페라 극장을 폭파하라!”라는 이 선동적인 말은 불레즈를 평생 따라다닌 표제였습니다. 물론 그는 극장을 실제로 파괴하자는 테러리스트는 아니었습니다. 이 발언은 낡은 레퍼토리를 부실한 연습으로 되풀이하면서도 새로운 작품에는 문을 닫아건 오페라 극장의 시스템을 그만큼 혐오한다는 과장된 표현이었습니다.
이 인터뷰를 통해 우리는 불레즈라는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의 말은 실제 폭발물처럼 유럽 음악계를 휘저었고, 정작 그는 훗날 그 음악계의 가장 강력한 지휘자이자 시스템의 설계자가 되었습니다.
파괴를 외치던 ‘앙팡 테리블(Enfant Terrible, 무서운 아이)’이 어떻게 현대음악의 마왕으로 올라섰을까요.
◆ 수학도를 꿈꾸던 지방 소년, 파리에서 반역자가 되다.
불레즈는 1925년 프랑스 중부의 소도시 몽브리종에서 태어났습니다. 공장 기술 책임자였던 아버지는 아들이 엔지니어가 되기를 원했고, 불레즈 역시 리옹에서 고등수학을 공부하며 에콜 폴리테크니크(École Polytechnique, 프랑스 엘리트 양성 학교 시스템인 그랑제콜 중 명문 이공계열 학교) 진학을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1942년 그는 가족의 뜻을 거슬러 파리로 옮겨 음악을 택했습니다.
파리 음악원에서 만난 올리비에 메시앙(Olivier Messiaen)은 그에게 리듬과 음색, 비서구 음악을 바라보는 새로운 안목을 가르쳐 주었고 르네 레보비츠(René Leibowitz)에게서는 쇤베르크(Arnold Schönberg)의 12음 기법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불레즈는 스승에게 충실한 착한 제자가 될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메시앙에게서 배운 가능성을 메시앙보다 더 멀리 밀어붙였고, 레보비츠에게서 익힌 12음 기법으로 오히려 쇤베르크를 공격했습니다. 그에게 배움은 계승이라기보다 스승을 추월하고 배반하기 위한 준비였습니다.
◆ “제로에서 다시 시작하라” - 전후 세대의 분노
불레즈가 성년이 된 시기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였습니다. 유럽의 젊은 예술가들에게 전쟁 이전의 문화는 순진하게 이어받을 유산이 아니었습니다.
"이 거대한 파국을 겪고도 조성음악의 문법과 낭만주의적 몸짓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반복할 수 있는가..."
불레즈와 슈토크하우젠(Karlheinz Stockhausen), 노노(Luigi Nono) 등 이른바 다름슈타트 세대(Darmstadt Generation : 독일 다름슈타트 국제 현대음악 여름 강좌를 중심으로 등장하여 전위음악(아방가르드)과 총렬주의(Total Serialism)를 주도한 젊은 작곡가 집단)는 과거의 음악 언어를 조금 손보면서 개량하는 것을 거부하고 아예 작곡의 출발점 자체부터 다시 세우려 했습니다.
그 의도가 가장 직접적으로 터져 나온 작품이 《피아노 소나타 2번》(1947~48)입니다. 제목과 4악장 구조는 고전적 소나타를 연상시키지만, 이 음악은 전통적인 주제와 전개, 재현의 질서를 내부에서부터 산산조각냅니다. 피아노는 노래하는 악기라기보다 폭발하고 충돌하는 타악기처럼 들립니다. 불레즈에게 과거의 형식은 공손히 보존할 박물관 유물이 아니라, 해체해야만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는 장애물이었습니다.
이후 《구조 I》(Structures I, 1951~52)에서는 음높이뿐 아니라 음의 길이, 강약, 어택까지 음렬의 원리에 따라 조직하는 ‘총렬주의(total serialism)’를 극단까지 밀어붙였습니다. 쇤베르크가 12개의 음높이를 하나의 음렬로 배열했다면, 불레즈는 음악을 이루는 거의 모든 요소를 계열화하려 했습니다. 특히 《구조 Ia》는 작곡가 개인의 취향과 습관을 최대한 지우고, 미리 정한 체계가 음악을 산출하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듣기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한 공식이라기보다 기존의 작곡 습관을 소독하기 위한 ‘영도(零度)의 음악’이었습니다.
https://youtu.be/-ZpNlxoXpQg?si=SgX4eYPE1xUvOxaC
https://youtu.be/6sfGLoF5IUY?si=HsevWmO9w13pZL5p
◆ 불레즈식 ‘아방가르드 강령’
불레즈가 실제로 「아방가르드의 강령」이라는 한 편의 선언문을 쓴 것은 아니지만, 1940~50년대의 글과 발언을 모으면 거의 하나의 급진적 강령처럼 읽힙니다.
1948년 「명제들(Propositions)」에서 그는 “음악은 집단적 히스테리와 주술이어야 하며, 폭력적으로 현대적이어야 한다”고 썼고, 1952년의 글 「아마도…(Éventuellement…)」에서는 “12음 기법 언어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음악가는 무용하다(INUTILE). 그의 작품 전체가 시대의 요구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단언했습니다. 같은 해의 유명한 글 제목은 아예 「쇤베르크는 죽었다」였습니다. 이는 쇤베르크가 세상을 떠난 1951년의 이듬해에 발표된 글로, 12음 기법을 개척한 그의 업적을 인정하면서도 그 혁명적 발견을 고전·낭만주의의 전통적인 형식과 사고방식 안에 다시 가두었다고 비판한 글입니다.
즉 “쇤베르크는 너무 급진적이어서 죽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발견이 요구하는 혁명을 끝까지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죽었다는 선언이었습니다. 한편 불레즈가 진정한 선구자로 떠받든 인물은 더 짧고 압축된 음악 속에서 음색과 음의 배치를 새롭게 조직한 베베른(Anton Webern)이었습니다.
그의 여러 글과 실천을 다섯 문장으로 압축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과거의 음악언어는 더 이상 중립적인 재료가 아니다.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순간 그것은 시대착오가 된다.
2. 음렬은 음높이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리듬·강약·음색·아티큘레이션과 형식 전체로 확장되어야 한다.
3. 새로운 음악은 타협이 아니라 단절에서 출발한다. 전통을 존중한다는 말이 상상력의 결핍을 가리는 핑계가 되어서는 안 된다.
4. 우연도 작곡가가 설계해야 한다. 연주자에게 여러 길을 줄 수는 있지만, 결과를 무책임하게 운에 맡겨서는 안 된다.
5. 새로운 작품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것을 연주할 전문 연주자, 연구할 기술, 들려줄 공간과 교육 제도까지 새로 만들어야 한다.
앞의 항목들이 젊은 ‘악동’ 불레즈의 강령이라면, 마지막 항목은 훗날 ‘마왕’ 불레즈가 세운 제국의 설계도가 됩니다.
◆ 얼음처럼 차가운 수학? 그 안에 숨은 ‘조직된 광기’
불레즈의 음악에는 흔히 ‘수학적’, ‘차갑다’, ‘난해하다’라는 수식어가 붙는데,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립니다.
그는 음악의 모든 관계를 엄밀하게 조직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계산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습니다. 불레즈가 원한 것은 ‘조직된 광기(organised delirium)’였습니다.
체계는 광기를 억누르는 감옥이 아니라, 폭발적인 에너지가 상투적인 표현으로 흩어지지 않게 붙드는 구조물이었습니다.
《구조 Ia》의 극단적 실험 뒤에 나온 《주인 없는 망치》(Le Marteau sans maître, 1953~55)는 그 차이를 잘 들려줍니다. 르네 샤르(Rene Char)의 초현실주의 시를 콘트랄토와 알토 플루트, 비올라, 기타, 비브라폰, 실로폰, 마림바, 타악기의 기묘한 조합으로 엮은 이 작품에는 엄격한 음렬 질서가 숨어 있습니다. 그러나 귀에 먼저 닿는 것은 계산표가 아니라 금속성 울림, 섬세한 잔향, 갑작스러운 침묵과 폭발입니다. 가믈란(인도네시아의 전통 기악 합주곡, 철금, 실로폰, 북, 징 등의 다양한 악기를 포함)을 연상시키는 비서구적 색채와 프랑스 음악 특유의 감각적인 음색이 만나면서, 총렬주의도 ‘아름다운 소리의 세계’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던 그도 1950년대 후반부터 초기 총렬주의의 자동성을 스스로 경계하기 시작했습니다. 《피아노 소나타 3번》에서는 연주자가 정해진 여러 경로 가운데 순서와 진행을 선택하도록 하는 ‘통제된 우연성’을 실험했습니다. 이것은 우연의 절차에 작품의 결정권을 더 넓게 넘겨준 존 케이지(John Cage)의 방식과 달랐습니다. 불레즈는 우연마저 작곡의 구조 안에 흡수하려 했고, 그에게 자유는 무제한의 방임이 아니라 세심하게 설계된 갈림길이었습니다.
https://youtu.be/WpqYo5u3wII?si=c1FWOP6Pav19qv4_
◆ 지휘대 위의 ‘안티 번스타인’
그는 지휘할 때 지휘봉을 쓰지 않고 양손으로 박자와 음색의 층을 정밀하게 그립니다. 과장된 몸짓도, 영웅적인 표정도 없습니다. 그래서 1971년 레너드 번스타인의 뒤를 이어 뉴욕 필하모닉 음악감독이 되었을 때 ‘안티 번스타인’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뜨겁고 외향적인 번스타인 다음에 나타난 무표정한 프랑스 지식인은 일부 관객에게 냉담하고 건조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냉정함은 감정의 부재라기보다 악보에 덧칠된 관습적 감정을 걷어내려는 태도였습니다. 불레즈가 지휘한 드뷔시·라벨·스트라빈스키·바르토크·베베른에서는 복잡한 악기 층이 투명하게 갈라지고, 이전에는 소음처럼 뭉쳐 들리던 세부가 선명한 구조로 떠오릅니다. 훗날 말러와 바그너에서도 그는 중후한 감정의 안개를 걷어내고 리듬과 음색의 뼈대를 드러내도록 지휘했습니다. 그가 현대음악에 남긴 가장 큰 공헌 가운데 하나는 난해한 악보를 정확히 연주하는 방법 자체를 세계 정상급 오케스트라에 정착시킨 일입니다.
그렇다고 그가 청중을 무시한 엘리트주의자이기만 했던 것은 아닙니다. 뉴욕에서는 현대음악을 설명하고 관객과 대화하는 저가 공연 ‘프로스펙티브 인카운터스’를 만들었고, 1973년 시작한 ‘러그 콘서트’에서는 객석 1층의 의자를 치우고 붉은 카펫과 쿠션을 깔아 젊은 관객들이 연주자 가까이 앉거나 누워서 음악을 듣게 했습니다. 정장 차림으로 침묵해야 하는 전통적 음악회 의례를 무너뜨린 것입니다. 레퍼토리의 난도에는 타협하지 않았지만, 그것을 듣는 방식은 누구보다 과감하게 바꾸려 했습니다.
◆ 폭파하겠다던 오페라 극장에서 《반지》를 ‘혁명적’으로 지휘하다.
‘오페라 극장 폭파’ 발언의 아이러니는 불레즈가 이미 1966년 바이로이트에서 《파르지팔》을 지휘한 뒤에 그 발언을 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가 싫어한 것은 오페라라는 장르보다 스타 가수와 낡은 연출, 짧고 부실한 연습으로 굴러가는 레퍼토리 극장의 관행이었습니다. 충분한 준비와 새로운 해석이 가능하다면 그는 오히려 오페라에 누구보다 급진적으로 개입하고자 했습니다.
그 절정이 파트리스 셰로(Patrice Chéreau)와 함께 만든 1976년 바이로이트 100주년 《니벨룽의 반지》였습니다. 셰로는 신들의 신화를 19세기 산업자본주의의 세계로 옮겨 놓았고, 불레즈는 빠른 템포와 투명한 음향으로 바그너를 뒤덮고 있던 장중한 제의(祭衣)의 먼지를 털어냈습니다. 첫해에는 야유와 격렬한 항의가 쏟아졌지만, 1980년 마지막 공연은 한 시간 가까운 기립박수를 받았습니다. 오늘날 이 ‘세기의 반지’는 현대 오페라 연출사의 분기점으로 평가되기도 합니다.
1979년에는 프리드리히 체르하(Friedrich Cerha)가 완성한 베르크의 3막판 《룰루》를 셰로의 연출로 초연했습니다. 오페라 극장을 없애야 한다던 악동이 정작 20세기 오페라의 결정적 장면 두 편을 완성한 셈입니다. 불레즈에게 진정한 파괴는 폐허를 만드는 행위가 아니라, 낡은 작품이 다시 위험하게 살아 움직이도록 조건을 바꾸는 일이었습니다.
◆ 반역자가 국가 권력이 되다―현대음악계의 마왕
1966년 프랑스 문화부가 음악정책으로 불레즈가 아닌 비교적 보수적인 마르셀 랑도프스키를 채택하자 그는 프랑스의 공식 음악행정과 결별을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몇 년 뒤 상황은 완전히 뒤집혔고 1970년 조르주 퐁피두 대통령은 그를 다시 불러 새 음악연구기관의 설계를 맡겼습니다.
그 결과 1977년 퐁피두센터 옆에 음향·컴퓨터·작곡을 결합한 IRCAM(Institut de recherche et coordination acoustique/musique, 음향/음악 연구 및 조정 연구소)이 문을 열었습니다. 1976년에는 현대음악 전문 연주단체 앙상블 앵테르콩탱포랭(Ensemble Intercontemporain)이 창단되었고, 같은 시기 불레즈는 콜레주 드 프랑스의 ‘음악의 발명·기술·언어’ 교수로 선출되었습니다. 훗날 시테 드 라 뮈지크(Cité de la Musique, 프랑스 파리 19구 라빌레트 공원에 위치한 종합 음악 시설)와 파리 필하모니 건립에도 영향력을 행사했고, 2004년에는 젊은 음악가들을 위한 루체른 페스티벌 아카데미를 공동 창설했습니다.
여기서 불레즈는 보통의 작곡가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좋은 작품을 쓰는 데서 멈추지 않고, 새로운 음악이 살아갈 생태계 전체를 만들었고, 복잡한 신작을 전문적으로 연주할 악단, 전자음향을 연구할 과학자와 기술자, 작곡가를 교육할 기관, 작품을 소개할 공연장까지 하나의 체계로 묶었습니다.
청년 불레즈가 던진 선언을 노년의 불레즈는 예산과 건물, 인사와 교육과정으로 구현했습니다. 현대음악의 악동이 ‘마왕’이 되었다는 말은 단지 유명해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무엇이 미래의 음악인지 판정하고, 그것이 만들어지고 연주되는 조건까지 바꿀 현실의 권력을 손에 넣었다는 뜻입니다.
물론 그 권력에는 분명한 그늘도 있었습니다. 불레즈와 가까운 총렬주의 계열이 ‘진보’의 표준이 되면서, 조성적이거나 절충적인 작곡가들은 낡은 인물로 밀려난다는 비판이 나왔습니다. 국가의 후원을 받은 해방의 음악이 또 하나의 정통 교리로 굳어졌다는 역설이죠. 불레즈가 과거의 권위에 맞서 열어젖힌 문이 어느 순간부터는 그가 승인한 방향으로만 통한다는 불만도 생겼습니다. 그가 현대음악의 해방자인 동시에 문지기였다는 평가는 그래서 모두 타당합니다.
◆ 독설가의 가면과 끝없는 자기수정
공적인 불레즈의 언어는 단두대 같았습니다. 쇤베르크를 죽었다고 선언했고, 스승 메시앙의 작품에도 모욕적인 표현을 서슴지 않았으며, 헨체와 쇼스타코비치 같은 동시대 작곡가들을 노골적으로 깎아내렸습니다. 이 때문에 ‘로베스피에르 불레즈’라는 별명까지 얻었습니다. 그는 훗날 자신이 젊은 시절 ‘불리(bully)’였음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강한 적대에 맞서 새로운 음악의 자리를 만들려면 그 정도 공격성이 필요했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함께 연주한 음악가들이 회고하는 모습은 조금 다릅니다. 리허설에서는 명료하고 효율적이었으며, 고함보다 정확한 설명으로 원하는 소리를 얻었습니다. 장난기 어린 유머가 있었고 젊은 연주자와 작곡가에게는 의외로 세심했다고 합니다. 외부를 향해서는 독설가였지만, 실제 작업에서는 소리를 집요하게 듣는 장인이었던 것입니다.
그의 끝없는 개작도 이 단면을 보여줍니다. 바깥세상에는 이미 진리를 소유한 독재자처럼 말했지만, 자기 음악에는 완성된 진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젊은 시절의 총렬주의도 결국 완화했고, 우연성·음색·공간·전자음향을 받아들이며 자신의 체계를 계속 수정했습니다. 1980년대의 대표작 《레퐁》(Répons)은 객석을 둘러싼 여섯 독주자의 소리를 컴퓨터가 실시간으로 변형해 공간 속에 되돌려 보냅니다. 여기서 기술은 인간의 연주를 대체하지 않고, 연주자가 낸 소리에 응답하며 새로운 공간을 엽니다. 구조와 감각, 통제와 변형이라는 불레즈의 평생 과제가 하나로 합쳐진 작품입니다.
https://youtu.be/OQE5TYnD58k?si=C8JKR4i6dpaus2B_
◆ 파괴한 것이 아니라, 전통이 자신을 따라오게 한 사람
피에르 불레즈는 모순적인 인물입니다. 쇤베르크에게 사망선고를 내렸지만 누구보다 집요하게 그의 작품을 지휘하고 녹음했습니다. 오페라 극장을 폭파하자고 말했지만 《반지》와 《룰루》로 오페라 역사를 바꾸었고, 전통을 거부했지만 드뷔시·라벨·바르토크·스트라빈스키·말러·바그너를 새롭게 듣는 표준을 세웠습니다. 제도를 저주한 반역자였지만 마침내 누구보다 거대한 제도를 건설했습니다.
그가 원한 것은 과거를 단순히 없애는 일이 아니라 과거가 현재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고, 현재의 창조가 미래의 전통이 될 길을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레즈의 생애를 가장 잘 설명하는 말은 ‘파괴’보다 ‘강제된 갱신’일지도 모릅니다. 젊은 악동은 음악계의 문을 발로 걷어찼고, 노년의 마왕은 그 문 너머에 연구소와 악단, 공연장과 학교를 세웠던 것입니다.
물론 그의 독단은 오늘날 비판받을 부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독단이 없었다면 20세기의 수많은 음악은 여전히 악보 속에만 갇혀 있었을 것입니다.
불레즈는 사랑받기 쉬운 사람이 아니었고, 그의 음악 역시 쉽게 친해지는 음악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그를 지나치지 않고서는 전후 현대음악이 어떤 사상을 품고 있었고, 어떻게 만들어졌고 제도화되었는지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는 현대음악의 악동이었고, 교황이었으며, 마왕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무엇보다 음악의 미래가 저절로 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그 미래가 도착할 세계를 직접 만든 사람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