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죽음은 삶의 문
요한복음 4:47
삼청동(三淸洞)교회
1931. 4. 26.
人生而死理也, 人不可免, 故古詩曰, ‘去生漸漸遠, 去死漸漸近’, 死之戶口洞開于前, 人皆入此門口, 雖帝王將軍不可免, 才子佳人亦不能免, 勞動者,學者,詩人,宗敎家,政治家, 無論何人皆不可免也. 吾人進路有各方或東或西, 行路各異. 展世界地圖細看岐路, 錯難如蛛徊胸端, 層行各自, 掉臂爭先而往, 終日往之, 終歲往之, 或五十而往之, 或百歲往之, 行行重行行, 如是行之, 而其終點死亡也. 行到極點, 幻如泡沫, 形迹永消, 不復見其存在, 積金萬贏, 不能携去, 詩書數百亦不能携去, 朋友散盡無一人從者. ◇古人有妾有妻竝三人, 此人病幾沒, 召最愛之女而問曰, 爾可從往乎? 女答曰, 君最愛我感則感矣, 不能從往. 又召第二女問之, 女又答曰, 君愛我比第一女而稍逾然, 誠不勝感德, 然不能從往, 又召第三女而問之, 女答曰, 君平日薄我甚矣, 然吾與君結髮其爲死生, 吾可從往云. 此何設譬也? 第一女金錢也, 第二女名譽也, 第三女良心也. 人到此死之門口, 無從往之人, 又無携去之物也. 然則人皆到此門口, 當豫備而待之, 我之燈尙有油乎? 無則買油而待之, 人皆恐怖而不知所以豫備, 漢武之求仙, 秦皇之採藥, 皆虛矣. 惟基督之釘死代世人之死, 而呑之此理奧妙不能探索, 今暫以譬言之, ◇美南北戰時, 有一兵士名便子憫, 與一弱兵同行, 倍其勇而同行, 某日將官命便君把夜營之門, 身疲不覺立睡, 付于軍法, 某日當死刑. 便君將此事由上書于親父, 父見書落淚, 其姉從傍得書, 至華盛頓見大統領納書, 統領見書, 宥便君云. 基督呑萬人之死, 而以血贖人之罪, 今復生于天國矣. 故吾等學主釘肉, 情與慾皆釘殺可也. 갈五章二四節. 兵法陷之死地而後生, 非但兵法然也, 肉身亦然, 如麥粒落地而死後其苗生矣, 吾等信此眞理, 看死而後生, 然則當殺者何也? 最要者血氣也, 物慾也, 盖人稟血氣而生, 若不以眞理制之, 則其動作皆妄矣. 古以獸之血, 洒祭壇之四方, 示其精潔. 吾當以主之血洒于心壇, 人以罪幾至死, 如王臣之子垂死, 死線不遠矣. 莫可奈何. 吾人之死, 病在于血氣之罪, 此魔不易御服, 信主後雖一時制服, 然種種發作, 惟於發忿發怒時, 又思魔乘隙, 便復殺之, 不思發作, 故主曰吾道忍之道. 黙三章十. 此等血罪永而埋葬而後, 可入生之門口. ◇又物慾亦使我死亡者也, 古有亞干之罪, 約書亞記七章. 又有亞拿尼亞之罪, 使徒五章. 皆其證也. 物慾令人死亡, 彼中國地方, 携金甚危險. 今軍國互相殺傷人命如草芥, 亦皆證其死亡也. 敎友往往信死不能復起者, 亦皆其證也. 롯妻之鹽柱亦其證也. 物質所以扶持肉命, 故不可一日無之. 故主祈文求日用之粮, 主不賜之則鳥不能活地. 千紫萬紅皆主之賜物也. 不可用心求之, 違理求之而已也. 看鳥不農, 看花不紡, 主猶保護, 況人乎哉? 主已賜人知識, 賜人技能, 足可活動而求食, 反不愈於花鳥乎? 故安心求之, 求則賜之. 欲用以情欲者不賜, 雅各四章三節. 故殺死其物慾而後生, 今春風一到, 羣芳競綠, 萬物皆從死亡中復活, 欣欣有活氣, 而何獨至於朝鮮人猶在夢國, 而不知有復活之消息耶? 猶有不死者多矣, 情欲不死, 虛榮不死, 猜忌不死. 某敎人之家飾其子, 金齒油頭眼鏡, 作一等紳士之貌, 欲就職而無願者, 以其作紳士之貌也. 某女生入工場, 工錢日不過一二十錢, 而其服裝如淑女之服, 泥峴有舶來之洋襪, 一足價直七円也. 朝鮮女生先往買之云. 男女非人造絹不能爲衣. 虛榮如此, 安得不死乎? 今朝鮮人之將來, 只有死滅已耳, 言之寒心.
사람이 태어났다가 죽는 것은 이치이므로 사람들은 죽음을 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옛 시[古詩]에 이르기를 ‘태어난 때는 점점 멀어가고, 죽음은 점점 가까이 온다’(去生漸漸遠 去師漸漸近)라고했습니다. 죽음의 문은 앞에 활짝 열려 있으므로 사람들은 다 이 문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곳에 들어가는 일은 비록 제왕이나 장군도 면할 수 없고, 재자가인도 면할 수 없고, 노동자, 학자, 시인, 종교가, 정치가는 물론 어떤 사람도 다 면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들의 진로는 각각 방향이 달라 혹은 동으로 혹은 서로 갈리고, 가는 길도 각각 달라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갈라진 길을 자세히 살펴볼 때 어지럽고 복잡하기가 마치 거미줄이 얽힌 것 같습니다. 층층이 굵고 가는 길을 팔을 휘저으며 앞 다투어 달려가는데 하루 종일도 가기도 하고, 한 해 내내 가기도 하고, 혹은 오십 년을 달리고, 혹은 백 년을 달려서 가고 또 가지만 이렇게 달려간 결과 그 종점은 결국 사망입니다. 이렇게 극점인 죽음에 도달하고 보면 모든 것이 허무하기가 마치 물거품과 같아서 형적은 영원히 사라지고 그 존재는 다시 보이지 않습니다. 금덩이 만금을 쌓아놓았어도 가져갈 수가 없고, 서책이 수백 권이 되어도 역시 가져갈 수가 없습니다. 벗들도 다 흩어져서 한 사람도 따르는 이가 없습니다.
옛날 어떤 사람이 첩과 처 합하여 모두 세 사람을 데리고 살았는데 병들어 죽을 무렵에 이 사람은 평생에 가장 사랑하던 여인을 불러 자기와 함께 가겠느냐고 물었더니, 그녀의 대답이 ‘당신이 나를 가장 사랑하여 주시니 감사하기는 하지만 함께 따라갈 수는 없습니다’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두 번째 여인을 불러 물으니, 그 여인도 ‘당신이 나를 첫 번째 여인보다는 사랑하여 주어 진실로 감사한 마음을 이길 수 없지만 함께 따라갈 수는 없습니다’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세 번째 여인을 불러 물었더니 그녀가 답하기를 ‘당신이 평일에 나를 매우 박대하였으나 당신과 나는 처음으로 머리를 묶어 사생을 함께 하기로 맹세하였으니 내가 따라가겠소’라고 하였답니다. 이것은 무엇을 비유한 것입니까? 첫 번째 부른 여자는 금전 때문이었고, 두 번째는 명예였으며, 세 번째는 양심이었습니다.
사람이 죽음의 문 앞에 이르면 따라가는 사람도 없고, 또 가지고 갈 물건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누구나 이 문 앞에 이르는 일을 마땅히 미리 준비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곧 나의 등불에 아직 기름이 남았는가? 없으면 기름을 사서 붓고 기다려야 합니다. 사람들은 죽음의 공포 때문에 예비할 줄을 모릅니다. 저 한나라 무제는 신선이 되기를 구하였고, 진시황은 불사약을 캐러 보내었는데 다 헛된 일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못 박혀 죽으심으로 세상 모든 사람들의 죽음을 대신하였습니다. 이 죽음의 이치가 너무 오묘하여 탐색할 수가 없으므로 지금 잠시 비유로 들어 말한 것입니다.
미국 남북전쟁 때 벤자민[便子憫]이라는 이름을 가진 병사가 있었는데 몸이 약한 병사와 함께 행군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용맹을 북돋우며 행군하였는데 어느 날 상관이 벤자민에게 병영의 문을 지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너무 피로하여 서 있는 채 깜박 졸다가 들켜 군법에 회부되고 그는 사형언도를 받아 죽을 날짜를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사실을 편지로 적어 아버지에게 올렸는데 그 아버지는 편지를 보고 눈물만 흘렸습니다. 그 누이가 그 편지를 가지고 워싱턴에 가서 대통령에게 보였고 대통령은 벤자민을 특사로 풀어주게 하였답니다.
그리스도는 만인의 죽음을 피로써 죄를 대속하여 지금 천국에서 부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육체를 못 박히신 일을 배워 감정과 욕망은 못 박아 죽게 하는 것이 옳습니다(갈라디아서 5:24). 병법(兵法)에 이르기를 ‘죽을 땅에 가져다 놓아야 산다’라고 하였는데 병법뿐만 아닙니다. 육신도 역시 그러합니다. 마치 보리 낱알이 땅에 떨어져 죽은 뒤에 그 싹이 생기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들은 이 죽은 뒤에 생기는 진리를 믿는다면 마땅히 죽일 것은 무엇입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감정적인 행위를 유발하는 혈기(血氣)입니다.
대개 사람은 혈기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이것을 만일 진리로써 제압하지 않으면 사람의 동작은 다 망령되게 됩니다. 옛날에 짐승의 피로 제단의 사방에 뿌려 제단의 정결을 보여 주었는데 우리들은 마땅히 주님의 피를 마음속에 뿌려야 합니다. 사람이 죄로 말미암아 거의 죽게 된 것은 마치 왕의 신하 아들이 죽음이 멀지 않아 어쩔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과 같습니다.
우리 인간의 죽음은 그 병이 혈기의 죄에 있습니다. 이것이 마귀를 쉽게 제어하고 복종시킬 수 없게 합니다. 주님을 믿은 뒤에 비록 일시적으로 제어할 수 있으나 자주자주 발작하게 되는 것이니 오직 화를 내고 성을 내는 때 마귀가 틈을 노립니다. 그러니 문득 혈기를 죽이고 성내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께서 ‘나의 도는 참는 도이다’라고 하였습니다(요한계시록 3:10). 이러한 혈기로 얻는 죄를 영원히 매장한 뒤라야 새로 삶의 문 안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또 물욕은 역시 나를 사망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옛날에 아간의 죄가 있었고(여호수아기 7장), 또 아나니아의 죄가 있었습니다(사도행전 5장). 이것이 다 그 증거입니다.
물욕은 사람을 사망에 이르게 하나니, 저 중국의 지방에서는 돈을 가지고 다니는 것이 매우 위험합니다. 지금의 군국주의자들은 서로 살상하여 사람의 목숨을 지푸라기처럼 여기니 이 역시 사망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교우들이 가끔씩 죽으면 다시 일어날 수 없다고 믿는 것도 다 그 증거입니다. 롯의 아내가 소금 기둥으로 된 것도 역시 그 증거입니다.
물질은 육신의 목숨을 부지하게 하므로 하루도 없어서는 아니 됩니다. 그래서 주의 기도에도 ‘일용의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주께서 허락하지 않으면 새도 살 수 없습니다. 천자만홍(千紫萬紅)인 식물도 다 주님께서 주신 것들입니다. 마음을 쓴다고 얻을 수 없는 것이고 이치에 어긋나게 하여 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새가 농사를 짓지 않고 꽃이 베를 짜지 않더라도 주님께서 보호하여 주는데 하물며 사람이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이미 사람에게 지식을 주고 기능을 주어 활동함으로써 먹는 것을 구하도록 하였으니 반대로 꽃과 새만도 못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안심하고 구할 것이니 구한즉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정욕에 쓸려고 하는 자에게는 주시지 않습니다(야고보서 4:3). 그러므로 그 물욕을 죽여 없앤 뒤에야 살게 되는 것입니다. 봄바람이 한번 불어오자 모든 식물들이 다투어 푸르게 되고 만물이 죽음에서부터 부활하여 기쁜 듯이 활기가 넘칩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조선 사람만이 아직 꿈나라에 있으며 부활의 소식이 있는 것을 모릅니까? 오히려 죽지 않고 있는 것이 많으니 정욕이 죽지 않았고, 허영이 죽지 않았고, 시기가 죽지 않았습니다.
어느 교인의 집에서는 그 자식을 꾸며 놓기를 금니에 기름 바른 머리, 안경을 씌워서 신사의 모양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어느 여인은 공장에 들어가서 공전으로 불과 일이십 전을 받으면서도 그 복장은 숙녀의 옷을 착용하였습니다. 진고개에 선박으로 들어온 양말이 한 켤레 값이 칠 엔이나 되지만, 그 조선 여인이 먼저 가서 사 신었다고 합니다. 남녀를 막론하고 인조견 비단이 아니면 옷을 입지 않으니, 허영이 이렇게 하여가지고 어찌 죽지 않겠습니까? 지금 조선 사람의 장래는 다만 죽음과 멸망이 있을 뿐입니다. 말하고 보니 참으로 한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