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항상 기뻐하라
데살로니가전서 5:16
체부동교회(體府 1929.8.25)
保羅此言, 自信仰經歷中出也. 久久經歷而知喜樂之所由出. 此下感謝及祈禱, 與此言互相聯絡. 凡事成功不勝感謝又有喜樂, 此由何而得也? 非知非行非力也. 皆由祈禱而得, 保羅之成功可謂絶便也. 世人視之失敗無餘地, 然保羅之心內不勝喜樂者何也? 成功之秘訣皆由祈禱而成也. 人皆笑以迂遠, 然保羅則得其眞諦萬全不誤也. 山海之危險亦成功之一堦段也. 盜賊之危險亦一段也. 被捉羅兵亦一段也. 主則合同此諸事而使有益於保羅也. 被捉于羅兵, 而或立于希律前, 或立于監司前, 或立船中, 或立獄中, 似無傳道之期, 然此皆保羅傳道之期也. 層一層進于成功之堦, 豈不喜樂哉? 保羅爲萬代信之模楷也. 今日吾等心中亦有此樂乎? 無食無衣無文漸入瞽盲皆死滅而已也. 有何可樂乎? 可悲者雖有如此之多矣. 亦有可樂者多矣. 人不能知之, 我獨知之. 今有可喜有數者, 一, 喜其重生也. 自母胎而出所學甚多, 學于父母, 學于先生, 學于朋友, 學于家庭, 學于社會, 是可爲喜人. 然至救援之道則未也. 故靑年經濟家至主前問訓嚬憾而歸, 勤勤做工可謂學者也. 然猶不勝煩悶者何也? 未重生故也. 重生甚難知, 尼哥提摩猶不了解, 肉生者只肉而已也. 由神而生後可重生也. 洗禮以後, 我之生涯可一變乎. 由水而變, 由神而變, 變則有喜, 居獄而出世, 奴隸爲自由, 貧者爲富者, 皆變也. 此皆在世之事, 非天國之事. 皆用力而得之, 無力者見奪. 盖事後有喜, 舊恩已無窮, 新恩且無窮, 若不謝舊恩則新恩不降, 故彼不平家, 終生無感謝之日矣. 安樂皆從患難而得, 患難之時, 不勝苦楚, 而經難之後, 則有喜樂也. 欲爲貧者而救濟, 則神先使我爲餓飢之人, 欲爲國家獻身, 則神先使國人驅我爲逆賊, 欲爲社會改良, 則神先使俗人敗我事業, 然種種經歷之後, 反爲感謝, 其喜無窮也. 故衆生者之事業, 經無限嶮巘而後有喜樂, 故吾人當喜其重生也. 二, 喜其勝利, 勝者喜敗者悲, 人間之常態也. 勝者誰? 卽信耶蘇, 요一, 五章五절, 非但勝世爲然也. 主在十架上, 人以爲失敗, 然主則勝利. 姜邯贊勝敵歸國, 王親自郊迎, 頭揷月桂花, 其榮不可言也. 主入京時民以棕櫚布于道上, 此勝利之票, 柔者常勝舊約多其人, 大圍以石擊골이앗, 基田以土器擊弗利斯, 摩西以祈禱勝摩押(모압). 吾信者之在世也, 宛如戰場, 着神之甲冑, 護其全身可也. 此甲冑卽護身用也. 信者以何爲護身也? 信于義鏡, 福音履, 聖神劍等皆護身用也. 具此護身之器, 到處勝利, 然吾人忍耐爲無上利器也. 不忍則不勝, 越王破吳之事, 足證其忍之力也. 稱讚不足喜, 毁敗不足怒, 惟忍之奮鬪然後可勝也. 日前美國某大學敎授, 對朝鮮人讚頌云, 此亦不足喜, 敎會亦然, 朝鮮人以善信名, 然此亦不足喜也. 以勝利爲目的, 以他人之舞不可喜. 彼古木蔦蘿作葉, 指古木爲有生乎? 他人之毁譽吾不關焉. 信者知此常勝故喜也. 三,喜其進就, 進就有眞理, 漑根食實理也. 違農理而能得穀者未之有. 違良理而能得財者未之有也. 幼兒初生日日漸長, 父母解頤, 其喜不可勝言, 宋人揠苗喜反爲悲也. 朝鮮之人違理甚多, 吾家殺鷄爲饌, 隣家有訪責之, 人順産三七日內, 殺鷄不可云. 全南地方亢旱, 人民掘去人墓云. 此皆違理. 朝鮮人亦有進就之心, 而皆違理故不得. 吾人之進就不可欲速, 又不可强制, 古人云速成不堅牢, 急走多顚躓. 行千里者始一步, 合抱之木生于毫末. 凡事自少至大, 自近至遠. 吾當順序而進, 如入氷山之窟, 所目的之地可知可望, 穿過之時. 雖有困難, 穿過之後卽有喜樂, 吾當從眞理而往, 如車從線終日平安而往矣. 故喜其進就也. 四, 喜其成功, 吾人之成功未知在何日, 非但吾信者也. 朝鮮人全體成功杳然, 成功不在後日在今日, 今日之事業, 果有成功之望乎, 果有失敗之兆乎? 此不難知矣. 主曰善樹結善果, 惡樹結惡果, 荊棘未有葡萄, 蒺藜未有無花果矣. 願僉位當從眞理做去成功可期也. 以上所言重生勝利進就成功等, 皆從眞理而得也. 主曰爾等守我誡, 然則爾喜充溢. 요한十五章十,十一節.
바울의 이 말은 신앙의 경력에서 나온 것입니다. 오랜 경력으로 기쁨과 즐거움이 나오는 바를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와 기도는 기쁨의 말과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일의 성공은 감사와 기쁨을 이길 수 없게 합니다. 기쁨은 무엇으로 인하여 얻게 됩니까? 기쁨은 지식과 행동과 힘에 의해서 얻는 것이 아니고, 오직 기도로 말미암아 얻는 것입니다. 바울의 성공은 편안하지 못하였습니다. 바울의 이러한 행적은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여지없이 실패한 것이라고 하지마는, 바울의 마음이 기쁨으로 가득했던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성공의 비결은 모두 기도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생각과는 거리가 먼 일이었다고 비웃었지만, 바울은 진정한 원리를 얻어 조금도 그릇되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산과 바다에서 겪은 위험도 성공의 한 단계였고, 도적을 만난 위험도 한 단계였으며, 로마 병사에게 붙잡힌 것도 역시 한 단계이었습니다. 주님은 이 모든 일을 바울에게 유익하도록 하셨습니다. 로마 병사에게 잡혀가서, 헤롯왕의 앞에 서기도 하고, 때로는 감사(監司)의 앞에 서기도 했고, 혹은 배안에도 섰고, 혹은 감옥에 들어가서 전도할 기회가 없었을 듯하지만, 이게 모두 바울에게는 전도할 기회가 되었습니다. 한 단계 한 단계 성공의 단계를 향하여 나갔으니 어찌 기쁘고 즐겁지 않았겠습니까? 바울에게는 만대에 신앙의 본보기가 된 것입니다.
오늘 날 우리들의 마음속에 또한 이런 기쁨이 있습니까?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배울 것도 없어 점점 소경이 되었다가 죽어 멸망하는 곳으로 들어가게 되니, 무슨 기쁨이 있겠습니까? 슬퍼해야 할 일들이 많지만, 한편 즐거울 일도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능히 알 수가 없어도 나는 홀로 알 수 있습니다.
여기 기뻐할 일이 두어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다시 거듭 태어나는 기쁨입니다.
우리가 어머니의 태속에서 태어나 배울 바가 매우 많이 있습니다. 부모에게 배우고, 선생에게 배우고, 친구에게 배우고, 가정에서 배우고, 사회에서 배우니 이것이 사람을 기쁘게 할 만한 것들입니다. 그렇지만, 구원하는 도리에 이르러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청년 경제가가 주님 앞에 이르러 질문을 던지고는 얼굴을 찡그리고 돌아갔습니다. 부지런히 힘써 배워야 가히 학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번민을 이기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거듭 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다시 태어나는 일은 알기에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니고데모도 역시 그러 했습니다. 육신이 태어나는 것은 다만 육신일 따름입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태어나야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다. 세례를 받은 후에 우리의 생명은 변할 수가 있습니다. 물로 변하게 되고, 또한 정신에 의하여 변하게 됩니다. 변하면 기쁨이 있습니다.
감옥에서 살다가 세상에 나오게 되고, 노예로 있다가 자유를 얻고, 가난한 자가 부자로 되는 것이 다 변한 것입니다. 이 모두 이 세상에서 있는 일이오, 천국의 일이 아닙니다. 다 힘을 써서 얻는 것입니다. 힘이 없는 자는 빼앗기게 됩니다. 대개 일이 끝난 뒤에 기쁨이 있게 됩니다. 지나간 은혜도 무궁하고, 새로운 은혜도 또한 무궁한 것이니 만일 옛 은혜에 감사하지 않으면 새 은혜도 내려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불평하는 사람들은 한 평생 동안 감사할 날이 없습니다.
안락은 환란이 있은 뒤에 얻게 됩니다. 환란이 있을 때 그 고초를 이기지 못하지만, 그 환란을 겪고 나면 기쁨이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위하여 구제하려고 하면, 하나님은 먼저 나를 굶주린 사람으로 만들어 주고, 국가를 위하여 헌신하려고 하면, 하나님은 먼저 국민들을 시켜 나를 역적으로 몰아붙이게 하고, 사회를 위하여 개량하려고 하면, 하나님은 속된 사람들을 시켜 나의 사업을 실패하게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을 겪고 난 뒤에는 오히려 감사함이 생기게 되어 그 기쁨이 무궁합니다. 그래서 백성들에게는 험준함을 겪고 나서야 많은 기쁨과 즐거움이 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다시 태어남을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승리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승리한 자는 기뻐하고, 실패한 자는 슬퍼하게 됩니다. 그러면 승리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예수를 믿는 사람입니다. 요한1서 5:5. 다만 세상을 이기어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십자가 위에 달리실 때, 사람들은 실패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승리하였습니다. 강감찬(姜邯贊)이 적국을 이기고 돌아오자, 임금은 친히 교외에까지 나가 맞이하고 머리에 월계화(月桂花)를 꽂아 주었습니다. 그 영광을 말로써 다할 수 없습니다.
주께서 예루살렘에 입경(入京)하실 때, 백성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길 위에 깔아 주었습니다. 이는 승리의 표시였습니다. 부드러운 자가 승리합니다. <구약성경>에 그런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다윗이 돌로 골리앗을 쳤고, 기드온은 토기로 블레셋을 쳤으며, 모세는 기도로써 모압을 이겼습니다. 우리 신자가 살아가는 세상은 전쟁터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갑옷을 입어 온 몸을 보호하여야 합니다. 여기 갑옷과 투구는 호신용입니다.
신자는 무엇으로 호신을 합니까? 의로운 거울, 복음의 신발, 성신의 검은 모두 호신용입니다. 이 호신용으로 무장하면 가는 곳마다 승리하게 됩니다. 또한, 우리 인간에게는 인내가 더할 수 없이 좋은 도구입니다. 인내하지 않으면 승리할 수 없습니다. 월왕(越王) 구천이 오(吳) 나라를 파멸시킨 것이 인내의 힘이었으니, 이를 증거로 하는 데 충분합니다.
칭찬 받는 것은 기뻐할 것이 못됩니다. 그리고 실패했다고 헐뜯는 일도 성낼 일이 못 됩니다. 오직 인내로써 분투한 연후에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일전에 미국의 어느 대학 교수가 조선 사람에 대하여 칭찬을 하였다고 하는데, 이것도 기뻐할 것이 못 됩니다. 교회도 역시 그러합니다. 조선인이 믿음 생활을 잘 한다고 소문이 났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기뻐할 것이 못 됩니다. 승리를 목적으로 삼아야 합니다.
남이 추는 춤을 보고 기뻐할 수가 없습니다. 저 고목나무에 새삼 넝쿨이 잎을 피운 것을 보고 고목이 살아있다고 하겠습니까? 다른 사람이 헐뜯든지 기리는 것은 나와 관계가 없습니다. 신자는 승리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진취(進就)를 기뻐해야 합니다.
나무뿌리에 물을 주고 열매를 따 먹는 것이 이치입니다. 농사짓는 이치를 거스르고 곡식을 많이 거두는 자는 없습니다. 참된 이치를 거스르고 재물을 얻을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어린 아이가 태어나서 나날이 점점 자라나면 부모는 만족하여 그 기쁨을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맹자>에 송(宋)나라 사람이 곡식 싹을 빨리 자라게 하기 위하여 뽑아 올려놓고 기뻐하다가, 그것이 시드니까 슬퍼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조선 사람은 이치에 어긋나는 짓을 많이 합니다. 우리 집에서 닭을 잡아 반찬으로 먹었는데, 이웃에 사는 사람이 와서 자기 집에 아이를 낳은 지 세이레 곧 스무하루가 되지 않았는데 닭을 잡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하였습니다. 전라남도 지방에 가뭄이 심하였는데 죽은 사람의 묘를 잘 못 써서 그렇다고 하면서 그 묘를 파냈다고 합니다. 이게 모두 이치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조선 사람에게도 진취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 이치에 어긋나는 일을 하므로 진취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진취는 억지로 빨리해서도 안 되고, 강제로 해서도 아니 됩니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속히 이룬 것은 단단하지 못하고, 급히 달리면 잘 자빠진다. 고 하였습니다. 천리를 가는 자도 한 걸음부터 시작하고, 아름드리나무도 작은 싹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모든 일은 작은 데서 시작해서 크게 되고, 가까운 데서부터 먼 곳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는 마땅히 순서대로 차례를 밟아 나아가야 합니다.
마치 빙산(氷山)의 굴에 들어가게 되면 목적한 곳을 알 수 있고 바라볼 수가 있습니다. 그 곳을 뚫고 나가는 동안 비록 곤란은 있지만 뚫고 나간 뒤에는 바로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진리를 따라 가야 합니다. 마치 차가 선로를 따라 가듯이 하면 하루 종일 가더라도 편안 합니다. 그러므로 진취한 일을 기뻐하게 됩니다.
넷째는 성공을 기뻐해야 합니다.
우리의 성공은 어느 날에 될지 모릅니다. 우리 신자뿐만 아니라 조선인 전체가 성공이 아득합니다. 성공은 뒷날에 있지 않고 오늘에 있습니다. 오늘의 사업은 과연 성공할 희망이 있습니까, 과연 실패의 징조가 있습니까? 이는 알기 어렵지 않습니다.
주께서 이르시기를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가시떨기에 포도가 달리지 않고, 찔레넝쿨에 무화과가 열리지 않는다. 고 하였습니다. 바라건대 여러분들은 마땅히 진리를 따라 일을 해 나가야 성공을 기약할 수가 있습니다.
이상 말한 바는 ‘중생(重生)과 승리와 진취와 성공 등은 모두 진리를 따라야 얻는다.’는 말씀입니다. 주께서 ‘너희는 내 계명을 지켜라. 그러면 너의 기쁨이 충만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5: 10,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