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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iritual Bankruptcy(영적인 파산)
A Prophetic Call to Action(행동을 요청하는 예언자적 외침)
by John B. Cobb, Jr.
8장. 세속주의에 대한 반발
4. 초심리학(parapsychology)
정신적이거나 주관적인 사건들이 원인적 효과를 가져온다고 함으로써 유물론적인 형이상학에 직접 도전하고 있는 학문 분야의 하나로 초심리학을 들 수 있다. 이 분야는 세속주의자들이 다른 학문들에 사용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방법론을 사용하여 그 연구 결과를 인정받고자 한다. 하지만 실싱은 별로 인정받고 있지 않다. 그러나 만일 심령 현상에 대한 학문적 연구 결과를 받아들인다면 물질세계는 폐쇄 체계라는 교리를 거부해야 한다. 세속주의자들은 증거가 있다면 언제든지 자기들의 입장을 바꿀 준비가 되어 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자신들의 형이상학에 깊이 헌신하고 있다.
세속주의가 점차 승리를 거둠에 따라 초심리학에 대한 편견 역시 강화되어왔다. 한 세기 전에 존경받는 많은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이 이 문제들을 열린 마음으로 조사했다. 영국의 헨리 시드윅과 프랑스의 앙리 베르그송, 그리고 미국의 윌리엄 제임스 같은 탁월한 학자들 역시 초심리학적인 현상들이 있음을 확신했다.
이 장에서 나는 세속주의에 대한 반발을 기술하고 있다. 대학 밖의 세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초심리학적인 방법 외에는 설명할 수 없는 경험들을 했다는 보고를 하고 있다. 이런 경험을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들리고 또 기록되어 읽히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마음이 그들의 몸의 반응에 영향을 주고 있음을 확신한다. 그들은 위약효과(placebo effect)가 분명히 있기 때문에 신약을 테스트할 때 이 부분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대중 잡지들이나 텔레비젼이 이런 증거들을 때로는 무책임하게 보여줌으로써 혼선이 오기도 하지만, 이쨌든 대학이 이런 현실을 그저 무시만 하고 있는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물론 초심리학과 그 해석을 지지하는 것들의 많은 부분은 검증되지 않은 일회적인 이야기들에 근거해 있고, 그 중 어떤 것들은 무책임한 결론들을 산출하기도 한다. 분명히 근본주의적인 종교에 참여하고 싶지는 않으나, 대학이 제공하는 것보다는 더 많은 것에 목말라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놀라운 사건들로 가득 차 있고, 다양한 여러 실재의 층들이 존재하며, 다른 세계에 부합되는 계속되는 세계에서는 죽음까지도 그저 사소한 사건이 될 수 있다.
이 세계는 많은 면에서 아주 종교적인 곳이며, 위대한 길들과 서로 중첩되는 부분들이 있다. 그 모든 것들을 세속주의자들은 불가능하다고 여기지만, 이 세계와는 부합되는 사건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지만 초심리학의 세계와 위대한 길들이 말해온 세계를 같은 것이라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 그 위대한 길들 안에는 이런 문제들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는 경고가 나온다. 가령 개신교인들은 대부분의 경우 성경 본문이 확정된 다음에는 기적도 멈추었다고 주장한다. 불교인들 역시 참선 과정 중에는 엄청난 능력을 얻을 수도 있으나, 그것들이 해탈에 이르는 것을 방해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전통적인 위대한 길들과 초심리학이 말하는 세계 사이의 모호한 관계를 말해주는 재미있는 예가 구약성경에 나온다(사무엘상 28장).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고대 이스라엘에도 직업적인 영매(접신하는 자)가 있었다. 사울 왕은 규범이 된 히브리 종교와 경합 중에 있는 그들을 보았고, 이스라엘로부터 쫓아냈다. 하지만 이런 추방은 그들이 가짜라서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다. 이미 죽은 사무엘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게 되었을 때 사울은 아직 이스라엘에 영매가 있는지 부하들에게 물었고, 부하들의 말을 따라 엔돌에 있는 한 여인을 찾아갔으며, 이 여인의 중재를 통해 사무엘을 만났다. 하지만 이 사건이 사울로 하여금 그 땅에서 접신하는 자들을 금하는 것을 멈추게 하지는 않았다.
이 이야기는 사울이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런 형태의 대화가 가능하며, 죽음 이후에도 어떤 종류의 삶이 있다고 믿었음을 보여준다. 다른 한편 이 이야기는 죽은 자와의 소통이 그렇게 바람직하지 않음도 말하고 있다. 죽음 이후에도 어떤 종류의 삶이 있다는 믿음의 근거로 구태여 이런 것들을 거론할 필요는 없다.
초심리학적 현상에 대한 관심은 세속주의 때문에 일어난 것은 분명히 아니다. 하지만 세속주의적 대학들이 이런 경험들을 획일적으로 거부함에 따라, 이런 것에 대한 관심과 생각, 이론들이 뒤죽박죽 튀어 나오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주관적인 경험이 효과를 미치는 원인이 될 수 있음에 대해 열려 있는 세계관을 가지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런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한계를 생각하는 방식으로 여러 증거들을 진지하게 검토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5. 세속주의와 비합리주의
과학적 세속주의는 세계를 폐쇄된 물질 덩어리로 보기 때문에, 인간의 경험들 같은 주관적 것들이 어떤 사건들의 원인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이런 판단을 선험적으로 하지 않고, 편견없이 증거들을 보게 하는 세계관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제 나는 주관적 경험이 어떤 효력을 가져올 수 있음을 부인하는 것은 애당초 비합리적임을 주장하고자 한다. 과학자들은 이렇게 판단하는 증거가 있다고 선언하지만, 그것은 극히 역설적이다. 만약 이런 선언이 믿어지게 하려면, 그것을 표현하는 일련의 소리들의 발성은 물리적 법칙들에만 종속되는, 철저한 물질적 운동들의 산물이어야 하고 인간 이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야 한다. 근대과학과의 긴밀한 관계속에서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 세속주의적 세계관을 확언하는 것은 사실상 우스꽝스럽다. 어떤 과학 이론이 다른 의견들보다 원리상 우월하다는 확언은 과학적 세속주의의 기본적 세계관이 틀렸을 경우에만 의미가 있다.
현대 물리학은 세계가 정녕 어떻게 만들어져 있으며,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기술하는 노력 가운데 시작되었다. 그런데 과학에 대한 유물론적인 범주들로서는 양자 문제를 설명할 수 없기에 이제는 많은 물리학자들이 이런 설명이 자신들의 목표라는 점을 부인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목표는 그저 검증 가능한 예측들을 구성하는 정도라고 말한다. 그렇게 하면 새로운 이론들과 옛날 이론들을 통합할 필요가 없고, 그 예측이 이루어지는 실체들에 대해 어떤 설명들도 할 필요가 없으며, 물리학의 다양한 가지들 사이를 통합하려고 애써야 할 이유 역시 없다. 물리학의 과업은 더 이상 세계를 의미있게 설명하는 것이 아니게 된다.
여전히 엄청나게 많은 것들을 이루어내고 있는 과학이 비합리적인 전제들 위에 건립되어 있으며, 세계에 대해 일관되거나 이성적인 관점을 제공하고자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은 특히 20세기 중반 이후 지성인들에게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오늘날은 합리성이나 이해는 얻어질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며, 여전히 그런 것들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들은 최선의 사고에 무감각한 사람들로 간주된다.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한 영역은 오늘날의 종교철학이다. 철학의 한 분야로서의 종교철학은 다른 철학 분야들과 마찬가지로 세계에 대한 일관된 이해를 제공하는 노력을 포기하고 있다. 이전의 종교철학은 여러 전통적인 길들이 제시하는 사상들의 타당성과 합리적 정당성을 성찰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이런 사상들을 연구하는 철학자들은 실재의 본성에 대한 그들의 넓은 성찰에 근거하여 자신들의 사상을 발전시켜 나갔으며, 세속화하는 기독교는 이러한 철학 작업에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이런 접근법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간주된다. 인간 정신이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지금은 기독교적 사고를 이런 더 넓은 맥락에 맞추어보려는 것은 무의미하다. 어떤 사람들은 오늘날 철학은 오직 한 가지 역할, 곧 의미있는 문장들과 의미없는 문장들 사이를 구별하는 것만 할 수 있다고 단언한다. 그들은 종교철학자들은 우연히 그들의 흥미를 끌게 된 전통적 선언들을 검토할 수 있고, 그것들이 의미있는 지의 여부만 결정할 수 있으며, 만일 그것들이 의미가 있다면 그 자체로 옳은 것이고, 그것들이 진리라고 주장할 이유를 제시할 필요는 구태여 없다고 말한다.
신학자들은 그들의 철학 동료들보다 더 오랫동안 타당성과 합리성에 대한 탐구를 해왔다. 하지만 신학의 세속화를 계속해서 추구하는 사람들은 큰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이것은 진리 및 연관성을 목적으로 하는 것에 근거한 지적인 과업이다. 하지만 현대 사상 중 가장 존경받는 형태들은 이런 탐구를 계속 좌절시키고 있다.
세속화하는 신학자들, 즉 세상의 변혁을 위해 신앙 전통을 재구성하는 신학자들 대다수는 성찰보다 실천을 더 중요시한다. 이것은 그들의 신앙 때문에 인류의 고통과 환경을 위협하는 것에 민감하게 응답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많은 방식들에 대해 민감하다. 그들은 이런 악들을 지원하는 것을 멈추도록 사람들이 신앙을 형성하는 것을 자신들의 과업으로 삼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런 역할이 동료 신앙인들에게 중요하다고 본다. 이것은 세속화에 대한 중요한 공헌이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전통이 더 넓은 현실적 연관성을 갖는 지혜를 제공한다는 주장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철저한 세속주의자들은 과학이 이전에 가졌던 목적들을 거부했고, 이는 곧 종교철학과 신학에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또한 학문 분과들의 파편화를 수용하도록 촉진했고, 대학들로 하여금 일관성 있는 전망을 발전시키는 노력을 더 이상 하지 않도록 만들었다. 그것은 경제지상주의의 실제적 지배를 뒷받침했으며, 또한 세계에 대한 합리적 설명을 할 수 없다는 관점을 가진 사람들에게 위로를 제공했다.
6. 세속주의와 민족주의
철저한 세속주의는 인생의 마지막에 대해 아무런 안내도 해주지 않는다. 그것은 다양한 헌신들에 대해 서술할 수 있으나, 그 무엇도 추천하지 않는다. 물론 일반적으로 볼 때 세속주의적 사고를 확언하는 사람들도 어디엔가 헌신하기도 한다.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은 과학적 세계관에, 어떤 사람들은 특정한 학문 분야에,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의 사고방식을 선전하는 기관에 헌신한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세계를 구원하는 데 헌신하기도 한다.
이런 헌신들을 볼 때 우리는 경제이론에 의해서만 구성되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우리'와 '그들'을 구별한 다음, 자신들이 동일시하는 공동체에 어느 정도의 헌신을 보인다. 세속주의자들의 공동체들 역시 이와 같아서, 그 공동체들은 세속주의가 위협을 받을 때면 그 참여자들로부터 상당한 지원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세속적 인본주의자들은 적절한 행동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강력한 관점들을 가지고 있지만, 순수한 세속주의자들은 그렇지 않다. 자신의 학문적 작업에서는 세속주의자인 과학자일지라도 여가 시간에는 다른 헌신들을 표현할 것이다. 예를 들어 그녀는 구성원들에게 더 많은 헌신을 요구하는 근본주의적 교회에 속해 있을 수 있다. 세속주의적 공동체에 참여하는 것은 의미있는 삶에 거의 공헌하지 못하기 때문에 세속주의적 기관들의 요구에 매여 있는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을 동일시할 수 있는 다른 공동체들을 찾는다. 세속주의가 어떤 공동체에 속해야 하는 지 결정하는 데 대한 아무런 합리적 근거를 제공하지 않기에 세속주의는 근본주의 교회를 선택하는 것을 반대할 수 없다.
기독교는 17세기 중반부터 서구 사회에 대한 주도성을 상실했다. 그런 주도성은 언제나 인종적이며 민족적 감정과 맞서 싸워왔다. 웨스트팔리아 조약(1648년)1)을 통해 정치적 권위가 우선권을 갖게 되었다. 그 때 이후로 서구인들이 우선적으로 헌신한 것은 대부분 인종적이거나 정치적으로 형성되어 있는 공동체들에 대한 헌신이었다.
세속주의는 더 높은 어떤 가치도 옹호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민족주의를 지지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다시 말해 대항하는 사회화가 없다면, 우리/그들의 구별은 더욱 강화하며, 그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주장은 부족적 혹은 인종적 집단이나 국가이기 때문에, 그것들은 절대적인 충성을 요구한다. 세속주의가 강력하게 나타나는 세계의 지역들에서는 국가가 대부분 '우리'가 누구인지를 규정한다.
대부분의 국가들에서 대부분의 기독교인들 역시 민족주의자들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는 차이점이 있다. 세속주의는 민족주의에 대해 그 어떤 반대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전통에는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가르침이 있기 때문에 국가에 대한 헌신은 더 큰 전체에 대한 헌신에 종속되어야 한다. 세속화하는 기독교인들에게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7. 세속주의와 도덕적 삶
이 장을 마치면서, 앞에서 한 말들을 다른 방식으로 말할 필요가 있다. 앞에서 나는 세속주의가 부정적인 결과들을 가져온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사실 아닌 비판도 여기에 개입될 수 있다. 가령 사람들은 곧잘 세속주의자들을 무신론자들과 동일시하면서 이런 점에서 그들은 개인적 도덕성에서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하나님을 부인하기 때문에 그들은 모든 종류의 비도덕성을 추구하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예상이나 단언에 대한 사실적 근거는 없다. 오히려 이런 판단은 기독교 왕국의 도덕적 가르침이 많은 부분에서 문제가 있음을 반영한다. 교회는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하여 오랜 세기 동안 그 가르침을 어기는 사람들은 처벌을 받게 된다고 경고해왔다. 이런 처벌은 이 땅에서 항상 이루어지지는 않았기 때문에 연옥과 지옥이 기독교의 가르침에 중요한 것이 되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런 전망으로 인해 두려움에 사로잡혔고, 교회의 지배에 마지못해 순종했다. 곧 그들은 믿기를 멈추면 그들이 갈망했던 쾌락을 즐기게 될 것이고, 결국 죽음 이후 규칙을 깨뜨린 것에 대해 처벌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규칙들은 곧잘 성(sex)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젊은이들, 특히 처녀들은 결혼 전의 성 행위는 안 된다고 배웠고, 성인들, 특히 여성들은 간음에 대해 경고를 받았다. 하지만 이런 모든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음행과 간음은 자주 일어났다. 하지만 두려움을 가진 사람들은 처벌에 대한 위협을 제거한다면 더 많은 '죄짓기'가 이루어지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무신론자가 된다는 것은 이런 두려움에서 풀려나는 것을 의미했고, 이 점에서 많은 종교적인 사람들은 무신론을 비도덕과 동일시했다.
하지만 무신론자들이 종교적인 신앙인들보다 성적으로 더 방탕한 지의 여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들 대부분은 하나님뿐 아니라 기독교의 가르침으로 인한 율법주의의 속박을 거부한다. 또한 생각해 보면 무신론자들은 이런 속박에서 벗어나 있기에 설혹 그들이 더 방탕하다고 해도 그것이 그들에게 큰 심리적인 해악을 끼치지는 않을 것이다.
실제로는 죄인들을 위해서 영원한 형벌들이 준비되어 있다고 믿는 사람들만이 성적인 정결을 지킨다고 믿을 이유는 없다. 비유신론적인 문화들 역시 그 나름의 성 행위의 규범들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아주 잘 지킨다. 그 대부분은 여성의 자손은 생물학적으로 볼 때 아버지의 후손이라고 확신시키는 가부장적 문화의 필요에 근거하고 있다. 그 문화들은 남자들이 성관계에서 여성의 역할을 하는 데 대해 가부장적인 공포를 표현한다. 이런 염려에 근거한 규칙들을 깨트리는 것은 대부분의 문화에서 위험한 것이었다. 더 나아가 많은 장소와 시기에서 방탕한 성은 곧잘 질병을 유발했다. 즉 두려움을 갖기 위해서 반드시 죽음 이후의 처벌을 믿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가부장 제도의 쇠락과 질병에 대한 두려움이 감소되면서 성 행위에 대한 사회의 관심은 점점 느슨해지고 다양해졌다. 이것은 더 넓은 사회의 사람들뿐 아니라 교회 안의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우리 사회의 어떤 부분에서는 새로운 규칙들이 적용되고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권력을 가진 자와 그 권력의 지배를 받는 사람 사이의 성 관계나 어른과 아이 사이의 성 관계는 정죄하지만, 당사자들이 자발적으로 동의하고 두 사람이 함께 즐거움을 추구하는 성행위는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서로에게 신실하려는 두 사람 사이의 결정은 새로운 도덕적 결과를 가져오는 새로운 상황을 창조한다. 비록 어떤 종교적 공동체들 속에는 여전히 성도덕들을 고수하려는 강력한 움직임이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런 공동체들에 속해 있는 사람들과 세속주의적 공동체들에 속해 있는 사람들의 성과 연관된 행위들은 크게 다른 것 같지 않다.
도덕성의 또 다른 중요한 영역은 정직성이다. 모든 사회는 죄 없는 거짓말은 상당히 너그럽게 받아들이지만, 동시에 사회의 건강한 기능을 위해서 사람들이 진실을 말하기를 요구한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다고 믿는 신앙인들은 거짓말에 대한 사회적 결과가 심각하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진실할 것이라고 기대하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내적 압력은 신학적 믿음보다 어린 시절의 훈련과 더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을 말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중요한 경우들에서는 큰 차이가 있다고 기대할 이유는 없다. 세속주의자와 종교적 신앙인들 사이에 연말 소득보고에서 정직성의 정도에 차이가 있을까? 아마도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만일 정직하지 않다면 그 이유는 두 경우 모두 별로 알려지지 않은 요인들과 더 많이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도덕성의 세 번째 영역은 곤궁한 사람들에 대한 자선의 영역이다. 여기서는 틀림없이 어느 정도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의 공동체 안에 있는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일을 사회 전체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잘 감당했다. 몰몬 교인들은 지금도 이렇게 하고 있다. 세속주의자들 역시 개인적으로는 신앙인들이 하듯이 그들의 친구나 아는 사람들을 돕겠지만, 신앙인들의 공동체들과 비슷한 세속주의자들의 공동체들은 존재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하지만 그 차이는 아마도 그들의 믿음의 차이보다 자선 행위를 하기 위한 조직을 가지고 있지 못한 데서 나올 것이다.
세속주의자들의 이런 조직이 없다는 것은 또한 그들이 살고 있는 공동체들 안에서 활발하게 자선 행위를 하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뜻한다. 대부분의 교회들은 교인들에게 헐벗고 집없는 사람들의 필요에 응답하라고 촉구한다. 그들은 태풍이나 사고로 인해 특별한 도움이 필요한 경우 반복해서 헌금을 모으기도 한다. 이런 점이 아마도 그 구성원들의 자선의 정도에 차이를 만들어낼 것이다.
하지만 세속주의자들이 어려운 형편에 있는 사람들을 적게 동정하고 또 적게 돕는지의 여부는 대답하기 어렵다. 유신론적 전통은 동정과 공감을 아주 중요하게 여기지만, 그것은 또한 모든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감정이기도 하다. 여기에서도 아이일 때 얼마나 사랑을 받았으냐가 그들이 성인이 되어서 무엇을 믿으라고 교육받았는지보다 더 중요할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교회에서 자란 사람들은 계속해서 동정하는 마음을 갖도록 격려받아왔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보아 이런 방식의 꾸준한 헌신을 하지 않는 부모 밑에서 자란 사람들보다 동정하는 마음을 더 많이 표현할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정말 그런지는 아무도 모른다. 대부분의 종교 공동체들 속에 여전히 계속되는 율법주의가 이것을 막고 있기 때문이다.
8. 결론들
이 책은 세속화, 즉 세상의 변혁을 위해 전통을 재구성하는 것을 옹호한다. 하지만 오늘날 널리 이해되는 형태의 종교에 대한 세속주의자의 비판이 대부분 정당하다는 사실도 인정한다. 이런 비판을 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세속주의에서 종교에 대한 충분히 발전된 대안을 본다. 앞의 장들에서 나는 세속주의가 서구 사회, 특히 미국에서 취했던 중요한 형태들에 대해 살펴보았다. 내가 계속 주장해온 것은 종교에서 세속주의로의 전이는 사람들을 몇 가지 악에서 풀려나게 했으나 동시에 다른 종류의 문제들에 빠지게 했다는 점이다.
세속주의로의 전이가 세속적 인본주의에서 끝난다면, 앞에서 내가 한 비판의 많은 부분은 해당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문화 전체를 볼 때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늘날의 철학은 인간을 존중하지 않으며 근대의 대학교들 역시 인간을 존중하지 않고 있다. 경제이론은 인간중심적이기는 하지만 여기에서 인간들은 아무런 인간적 가치를 가지지 못하는 것으로 서술된다. 다행스럽게도 세속주의를 따라 먼 길을 걸어온 사람들 중에도 여전히 인간을 존중하는 가치들을 고수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세속적 인본주의는 우리 사회의 안정적인 선택권은 아니다. 오히려 유사 종교적인 지구중심주의가 더 전망이 밝다.
이 장에서 나는 세속주의를 비판하는 가운데 그것이 더 넓은 사회에 가진 역사적 결과들을 살펴보았다. 대체적으로 보아 세속주의는 사회에서 광범위한 승리를 거두었지만, 그 결과들은 대부분의 세속주의자들이 개탄하는 것이 되었다. 나는 오직 세속주의 때문에 이런 결과들이 나왔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런 결과들은 상당부분 세속주의의 이상이나 실천에 대한 역작용이나 그 확장이었다. 세속주의로 인해 그 결과들에 대한 저항이 약화된 것이 사실이다.
아브라함 종교의 길들을 믿는 사람들은 개인적인 도덕에 대한 질문들에 특별히 큰 비중을 두어 왔다. 그들은 그들의 신학적 신념들과 거의 관계가 없는 행동 규범들을 상당히 받아들였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신적인 형벌에 대한 두려움에 근거한 복종을 강요해왔다. 하지만 이렇게 이해된 도덕성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켰다고 생각하는 세속주의자들 역시 신앙인들만큼이나 사회적 규범들에 계속해서 동조할 가능성이 많다. 신적인 제재가 있을 때만 개인적인 도덕성이 유지된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이 장에서 내가 전개한 논증은 아마도 이 책 전체에서 제일 논란의 여지가 많은 부분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위대한 길들 속에 현존해 있는 종교가 가진 악들에 분개하는 세속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제시하는 대안 역시 문제투성이임을 인식해야 한다. 이 요약에서 나는 세속주의에 대해 이 책이 말하는 비난과 그렇지 않는 비난을 최대한 명확하게 구별하여 지적하기를 원한다. 나는 거기에 대한 비판적 응답을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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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베스트팔렌 조약(독일어: Westfälischer Friede, 영어: Peace of Westphalia)이란 오스나브뤼크와 뮌스터(각각 1648년 5월 15일과 10월 24일)에서 체결되어 프랑스어로 조문이 쓰인 평화 조약을 일컫는다. 웨스트팔리아 조약이라고도 한다. 웨스트팔리아 평화회의를 "국제법의 출발점"이라고 말한다. 이 조약의 원인이었던 30년 전쟁을 "최초의 국제전쟁"이라고 부른다. "국제법의 아버지" 네덜란드 그로티우스가 사망한 지 3년 후의 시점이다.
이로써 신성로마제국에서 일어난 30년 전쟁(1618~48년)과 에스파냐와 네덜란드 공화국간의 80년 전쟁이 끝났다. 이 조약에는 에스파냐, 프랑스, 스웨덴, 네덜란드의 신성로마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3세(합스부르크 가)와 각 동맹국 제후들과 신성로마제국내 자유도시(Freie Reichsstadt)들이 참여했다.
베스트팔렌 조약은 최초의 근대적인 외교 회의를 통해 나온 것으로, 국가 주권 개념에 기반을 둔 새로운 질서를 중부 유럽에 세웠다. 1806년까지 이 규정은 신성로마제국의 헌법에 일부였다. 프랑스와 에스파냐의 전쟁을 종식한 1659년 피레네 조약도 종종 여기에 포함하기도 한다.
외교사가들은 근대 외교조약의 효시를 이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인정하고 있다. 30년 전쟁이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1]간의 대립이라는 종교문제를 명분으로 발발했지만, 이후 전개 과정에서는 종교보다는 왕조와 국익을 앞세워 길어진 유럽 국가들의 전쟁이기 때문이다. 로마 가톨릭 국가인 부르봉 왕가의 프랑스가 개신교 국가인 네덜란드를 지원하다가 후반기에는 직접 합스부르크 왕조의 오스트리아 및 에스파냐 등과 전쟁을 했다는 사실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이 조약을 통해서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면서 개신교 국가들이 생존의 발판을 마련했으며, 역사에서 처음으로 프로이센이 왕국으로 등장하였다. 네덜란드와 스위스는 독립을 인정받았으며, 프랑스는 이 전쟁을 통해서 영토를 확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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