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新羅(今 慶州) 1
新羅(今 慶州)
三国史에 新羅 始祖의 姓은 朴氏오 諱는 赫居世니 支那 漢宣帝 五鳳 元年 四月 丙辰에 任에 나아가 号를 居西干이라 하니 時年이 十三이다.
是에 先하여 朝鮮遺民이 山谷間에 分居하여 六村이 되니 是가 辰韓 六部라. 高墟村長 蘇伐公이 楊山麓을 바라보니 蘿井의 것 수풀사이에 馬가 有하여 우니 가보니 홀연히 馬는 보이지 않고 다만 大卵이 있거늘 剖하니 嬰児가 있었다.
蘇伐公이 収養하였더니 차차 나이 十余歲가 되매 岐嶷하여 凤成하였다. 六部사람이 그의 生이 神異하다 하여 推尊하여 君을 삼으니 辰人이 瓠를 朴이라 하였다.
大卵이 瓠와 같으므로 朴으로써 姓하다 居西干은 辰言에 王이란 말이다. 文獻備考에 新羅를 或은 徐那伐이라도하고 或은 斯盧라도 하고 或은 斯羅라도 하였으며 東京雑記에 慶州는 근본 新羅의
古都이었다.
辰韓六部澹秋烟
徐苑繁華想可憐
万々波々加号笛
横吹三姓一千年
辰韓 六部에 澹한 秋烟이여
徐苑繁華는 想할수록 可憐하도다.
万々波々로 号笛을 더 하였으니
三姓 一千年을 横吹하리로다.
辰韓 六部는 三国史에 一日 閼川 楊山村이고, 二日 突山 高墟村이고, 三日 山珍 支村이고, 四日 茂山大樹村이고, 五日 金山加利村이고, 六日 明活山高 耶村等이었다.
徐苑은 徐那伐의 変한 音이니 徐那伐은 新羅의 国号다. 後人이 무릇 京都를 称하여 徐苑이라 하였다.
万々波々는 東京雑記에 神文王 時에 東蘅 가운데 少山이 있어 波를 따라 往来하니 王이 이상히 여겨 海에 泛하여 가보니 山上에 竹一竿이 있으니 命하여 笛을 만들어 부니 兵이 물러가고 病이 낫고 가뭄에 비가오고 비가 개이고 바람이 定하고 물결이 平하였다.
이름을 万波息笛이라 하다. 歴代에 伝하여 宝로 여기더니 孝昭王때에 至하여 号를 加하되 万々波々 息笛이라 하다.
三姓은 三国史에 新羅始祖의 姓은 朴氏고 脱解尼斯今의 姓은 昔氏고 味鄒尼斯今의 姓은 金氏니 是가 三姓이이다. 芝峯類說에 新羅享国이 거의 一千年이오 三韓을 統合하여 時和歲豊하니 이르되 新羅聖代라 하였다.
- 한글
삼국사기에 신라 시조의 성은 박씨이고, 이름은 혁거세라고 했다. 중국 한나라 선제 오봉 원년(기원전 56년) 4월 병진일에 임에 나아가 호를 거서간이라 했는데, 그때 나이 13세였다.
그 이전에 고조선 유민들이 산곡 사이에 흩어져 살며 6개 촌락을 이루었는데, 이것이 바로 진한 6부족이었다. 고허촌장 소벌공이 양산기슭을 바라보니 나무덤불 사이에서 말 한 마리가 윽윽대는 것이 보였다. 가까이 가보니 홀연히 말은 사라지고 단지 큰 알 하나만 있었는데, 그 알을 가르니 갓난아기가 있었다.
소벌공이 그 아기를 기르자 점차 나이 10여 세가 되어 어여쁘고 잘 생겼다. 6부족 사람들이 그의 출생이 신이로웠다고 하며 받들어 군주로 삼았는데, 진한인들이 박을 '호리병'이라 불렀다.
그 큰 알이 호리병과 같아서 박씨 성을 가졌고, 거서간은 진한말로 왕이란 뜻이다. 문헌비고에는 신라를 서라벌, 시로, 시라 등으로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동경잡기에는 경주가 본래 신라의 古都였다고 했다.
진한 6부족에 가을 안개 자욱한데
서원의 화려함 생각하면 가련하구나.
만파석기를 더 불어
삼성 천년을 가로 불어대리라.
진한 6부족은 삼국사기에 하늘에 첫째 날 내촌양산촌, 둘째 날 돌산고허촌, 셋째 날 산진지촌, 넷째 날 무산대수촌, 다섯째 날 금산가리촌, 여섯째 날 명활산고야촌 등이었다고 했다.
서원은 서라벌의 소리를 바꾼 것으로, 서라벌은 신라의 국호였다. 후인들이 모두 수도를 서원이라 불렀다.
만파석기는 동경잡기에 신문왕 때 동악 가운데 소산이 있어 파도를 따라 왕래하니, 왕이 의아해하여 바다에 띄워 보내 그 산 위에 대나무 한 가닥이 있기에 명하여 피리를 만들어 불자 병이 낫고 가뭄에 비가 오고 바람이 잔잔해지고 물결이 잠잠해졌다고 한다.
이름을 만파석기라 하였는데, 대대로 전해져 보배로 여겼고, 효소왕 때 이르러 만만파파석기라고 불렀다.
삼성은 삼국사기에 신라 시조의 성은 박씨, 탈해왕자의 성은 석씨, 미주왕자의 성은 김씨라고 했으니 이것이 바로 삼성이라는 말이다. 지봉류설에는 신라가 나라를 1천년 가까이 누렸고 삼한을 통합하여 태평성대를 이뤘다고 하여 '신라성대'라 일컫는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