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훈이 말년휴가이다
안 올 것 같은 그 날이 바로 내일모레로 왔다
막상 이 날이 오니 또다른 걱정들이 쏟아진다
바람잘 날 없다는 것은 생명을 유지해야 하는 이 세상에 적을 두는 모든 생물에게 공통적인 고통일게다
내일 라식인지 라섹인지 수술을 한다 하여 오늘도 아들을 모시기 위해 미리 여행겸 출발한다
오늘은 파주 지역으로 정했다 먼저 파주 삼릉이다
매표소를 지나 입장하니 넓은 공간에 오른편으로 관리소만 보인다

파주 삼릉은 조선 제8대 예종(睿宗)의 원비(元妃) 장순왕후(章順王后·추 존) 한씨(韓氏)의 능인 공릉
조선 제9대 성종(成宗)의 원비(元妃)인 공혜왕후(恭惠王后) 한씨(韓氏)의 능인 순릉
조선 제21대 영조(英祖)의 맏아들인 효장세자(孝章世子) 진종(眞宗·추존)과 그 비(妃) 효순왕후(孝純王后) 조씨(趙氏)의 능인 영릉을 합해 이름한 능이다

한명회는 계유정난이라는 조선초 피비린내 나는 인간지옥을 만들고 자신도 그 꼴이 되지 않고 자자손손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자기의 딸 둘을 이상한 촌수가 되도록 예종과 성종에게 시집보낸다


언니 동생이 숙모와 질부로 되게 만든 한명회는 과연 자신의 소망을 성공했을까?
답은 통쾌하게도 그렇지 않았다 김종서, 황보인, 사육신 등 수많은 비극의 영혼들은 그를 그대로 두지 않았다

장순왕후는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의 딸로 1460년(세조6) 16세로 세자빈에 책봉되어 인성대군(仁城大君)을 낳고 이듬해 17세의 나이로 승하하였으며 1472년(성종 3)에 왕후로 추존되었다.
인성대군도 채 3년을 넘기지 못한채 풍질로 세상을 뜬다
한명회의 첫번째 계획은 이렇게 끝을 맺었다

공릉은 당초 예종이 아직 왕위에 오르지 않은 세자 신분일 때 그 세자빈이 죽은 것이므로 왕후릉이 아닌 세자빈묘로 조성되었다. 그래서 초석과 난간이 생략되고 봉분앞에 상석(床石)과 8각의 장명등을 세우고 좌우 양 쪽에 문인석 2기를 세웠다.

또, 봉분주위로 석마(石馬), 석양(石羊), 석호(石虎) 각각 2필씩을 두어 능 주변을 호위하고 있다. 문인석은 손에 홀(笏)을 쥔 양식으로 옷주름 등이 조선 전기 문인석양식을 따르고 있는데 조각 수법이 서툴러 전체적인 선이 유연하게 처리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결국 한명회는 예종의 뒤로 자신의 또 다른 사위 자산군을 왕위로 올린다
예종의 다섯 살 난 원자 제안대군과 자산군의 형 월산군을 제치고 말이다
그가 성종이다

그러나 공혜왕후는 1467년(세조13) 11세에 가례를 올렸고 성종즉위와 더불어 왕비가 되었으나 성종 즉위 5년(1474년) 4월 자식없이 춘추 18세로 승하하였다

한명회의 또 다른 카드는 그렇게 하늘이 도와주지 않았다
순릉은 조선전기의 능 형태를 따르고 있는데 소담한 돌기둥 난간(난간석주·欄干石柱)을 둘렀으며 봉분앞에 상석과 8각의 장명등을 배 치하고 양쪽으로 문인석과 망주석 2기를 두었다. 또 석양(石羊) 석호(石虎) 각각 2필씩을 두어 능을 호위케 하고 있다.

그렇지만 한명회는 자신의 생애동안 보란듯이 조선을 이씨의 나라가 아닌 한씨의 나라로 만들 듯 권세를 부렸다
그러나 세상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결국 한명회는 연산군에 의해 부관참시되는 운을 끝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숙명을 맞이한다
공릉에서 순릉을 거쳐 영릉으로 향하는 길은 겨울인데도 비교적 따스한 날씨, 미세먼지가 나쁨인데도 간혹 파란 하늘이 보일 정도로 산책길을 순조롭게 도왔다

영릉은 그렇게 돌아 나오는 길 가에 있다
효장세자는 영조의 맏으로 태어났는데 불행히도 10살에 죽는다
1719년(숙종 45)에 태어나 1724년 영조 즉위와 더불어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나 1728년 춘추 10세의 나이로 돌아가 시호를 효장이라 하였다.

그렇게 조용히 묻힐뻔한 인물이 행인지 불행인지 자신의 이복동생 사도세자의 폐위로 빛 아닌 빛을 본다
1762년 영조는 둘째아들인 사도세자(思悼世子)를 폐위한 뒤 사도세자의 아들인 왕세손(훗날 正祖)을 효장의 아들로 입적시켰다. 효장은 정조 즉위후 영조의 유언에 따라 진종으로 추존되었고 능호도 올려 영릉(永陵)이라 하였다.

영조는 조선 최장의 임금이자 성군으로 알려져있지만 어쩌면 불행한 인생이었다
무자비한 서인들의 들러리로 택군되어 왕위에 올랐으니 왕위 내내 노심초사 삶은 삶이 아니었을게다

서인 노론세력에게서만 그랬나 연잉군 때는 그 반대편 세력인 소론, 남인 세력에게도 염라대왕 코 앞까지 갔다오는 수모를 당한다
그러다 보니 살얼음판 걷는 인생에서 그 화와 설움을 풀을 곳은 본인 아들인 사도세자 밖에 없었던 듯 하다
결국 임오화변으로 하나뿐인 아들을 그렇게 스스로 잔인하게 죽이고 자신의 후위는 어쩔 수 없이 그의 아들인 손자 정조에게 넘겨야 했다

그러한 지경이니 역적죄로 죽은 사도세자 아들로 정조를 왕위로 올릴 수는 없어 결국 일찍 죽은 효장세자 아들로 입적하여 정조가 등극한다 그러나 정조는 등극하자마자 자신은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천명하니 효장세자에게는 허울뿐인 아버지이다

이런 우여곡절로 영릉에는 이렇게 세 비석이 존재한다 바로 위 비석이 최초의 비석인 효장세자로 새긴 비석이다
효순왕후 조씨는 풍릉부원군(豊陵府院君) 조문명(趙文命)의 딸로 1727년 13세에 세자빈에 책봉되었으나 다음해에 세자의 죽음으로 홀로 되었다가 1751년 춘추 37세로 돌아가 효장세자와 함께 왕후로 추존되었다.

그렇게 파주삼릉의 주인들도 참 씁쓸한 이야기가 영화로운 듯 하지만 한 많은 삶을 이끌고 간 이들이다

영릉에서 나오는 길 금천에는 물이 얼어 스케이트 장을 해도 무난할 빙상장이 조성되어 있었다
미끌미끌 언제 미끌어질지 모르는 위험천만한 인생들
그러다가 언제 어디에서 바삭 깨쳐 침몰할 지 모르는 인생사
그 위에도 언제나 따스한 햇빛이 비추인다는 파주 삼릉의 가르침을 뒤로 하고 다음 여정지인 윤관 장군 묘로 향했다

윤관 장군 묘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에 있다
파주 삼릉에서 윤관장군 묘로 가는 길가 한식부페 집은 주변 산업체 근로자들을 위해 저렴하면서도 맛깔나게 서비스를 해주어 우리도 한끼 잘 얻어먹고 왔다 특히 주인아저씨의 친절함이 인상에 깊다
처음에 묘소 주변 도착하니 먼저 보이는 사당문이 철통같이 닫혀있다

그래서 헛걸음했구나 했더니 그 옆으로 철문들이 다 활짝 열어젖혀 있어 나그네를 농락하고 있다

고려 예종(睿宗)때 여진정벌의 공을 세운 명장 윤관(尹瓘)의 묘는 묘역전체 규모가 상당히 크고 웅장하며 봉분과 석물이 단을 이루며 자리잡고 있다.

봉분 아래는 장대석 모양의 호석(護石)을 두르고 봉분뒤로 담장을 둘러 아늑한 느낌을 주고 있다. 봉분정면에 상석(床石)이 놓여있으며 왼쪽에 묘비가 서있다. 한계단 아래에 양쪽으로 망주석과 상석 전면에 사각의 장명등이 세워져 있다. 장명등을 중심으로 각각 양편에 동자석, 문인석, 무인석, 석양, 석마등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흡사 신하의 묘가 아닌 왕릉으로 해도 손색이 없을만큼 호화롭다

윤관(?∼1111)장군은 태조를 도운 삼한공신(三韓功臣) 신달(莘達)의 고손이며 검교소부소감(檢校小府少監)을 지낸 집형(執衡)의 아들이다.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자는 동현(同玄),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고려 문종(文宗)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숙종 9년(1104)에 동북면행 영병마도통(東北面行 營兵馬都統)이 되어 국경을 침범하는 여진정벌에 나섰으나 여진의 강한 기병에 패하고 임기응변으로 강화를 맺고 철수하였다.

그 후 특수부대인 별무반(別武班)을 창설 대원수(大元帥)가 되어 예종2년(1107) 부원수 오연총(吳延寵)과 함께 17만 대군을 이끌고 여진을 정벌하고 9성을 쌓아 국방을 수비케하였다. 윤관은 문무(文武)를 겸한 공신으로 예종6년(1111)에 돌아가자 1130년(인종 8) 예종의 묘정(廟廷)에 배향(配享)되었다.
바로 여기에 등장하는 문양공 오연총은 해주오씨로 나타나는데 오연총 선조 이후에 오씨가 해주, 동복, 보성으로 분파되었으니 우리 동복오씨의 선조도 된다

그러나 세상에 알려진 유명도로 보면 윤관장군은 누구나 알고있는 인물이 되었고 오연총 장군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 되었다 바로 1인자와 2인자의 차이, 별로 큰 차이가 아닌데 우리나라에선 그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로 만들고 있음을 말해주는 실례인 것이다
윤관 장군과 오연총 장군 사이는 그 관계도 각별하여 '사돈'이라는 어원을 만들 정도로 친밀했었다
묘지 오른쪽에는 윤관 장군을 기리거나 관련한 시비 공원이 있었다

남효온의 시비

정몽주의 시비

후손 윤황의 시비(윤선거, 윤문거의 아버지이며 윤증의 할아버지인 것 같다)

묘역 아래에는 윤관장군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는 여충사(麗忠祠)가 자리하고 있는데 매년 음력 3월 10일 제사를 지내고 있다.
그런데 그 앞 비석 중 재미있는 비석이 있다
바로 청송 심씨와 파평 윤씨들과의 관계를 이야기한 비석이다 두 가문사이 산송 문제로 400여 년이 넘게 싸움을 계속하다 최근에 화해를 이루었다는 내용이다 도지사 김문수 같은 이들도 이 화해를 매개했다 한다
친함이 있고 싸움이 있고 둘 사이에 나타나는 이런 일들이 과연 무어때문에 생기는 것인가?
그 둘 사이 나타나는 기의 흐름이 그렇게 되는 이유는 인간이 만들어내는 후천적인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선험적인 것에서 나오는 충돌일까? 참 아이러니한 인간사이다.

사당도 그렇고 그 옆 문화역사관도 그렇고 문이 잠긴 채 관리하지 않는 흔적이 보인다
이 또한 어느 시대땐 성역화로 시끌거리다가 후손중 어떤 인물이 있을땐 국가에서도 이렇게 관리를 홀대하는 것인지 정치하는 사람들 일이란 치사하기 그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