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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재경옥천군향우회 원문보기 글쓴이: 곽봉호
새벽부터 기차를 타고 ‘출향인 여행’을 떠났다. 인물섭외는 재경옥천향우회 총무를 맡고 있고, 출향인들 모임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는 곽봉호 총무가 맡았다. 옥천중 34회 김대훈 회장과 이태주 부회장이 동반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번 여행은 오는 5월2일 열리는 옥천중 총동창회를 주관하는 34회에서 동창 선배들에게 협조를 구하는 차원의 나들이였고, 기자는 같이 동행했다.
이권훈(옥천중 21회) 삼일회계법인 금융3본부장을 시작으로 김홍헌(옥천중 11회) 변호사, 오항균(옥천중 15회) 정보사령관, 정구용(옥천중 10회) 인지콘트롤스 회장, 박덕흠(옥천중 18회) 원하건설 대표 등이 그들이다.
2시간 남짓 이어지는 빡빡한 일정 속에서도 그들이 보여준 고향에 대한 따뜻한 관심은 발품을 팔며 돌아다닌 피로를 싹 가시게 했다. 그냥 웃었다. 그리고 손을 잡아주었고, 안부를 물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이야기는 고향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삼엄한 경비도 고향사람에겐 부드러웠다 철통같은 경비, 요새같은 정보사령부에는 아무나 접근할 수 없었다. 곽봉호 총무가 오래 전에 약속을 잡아놓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 신분증을 맡기고 들어갔다. 별자리와 사령관이라는 권위적인 이미지는 고향사람 앞에서 여지없이 풀렸다. 마치 친근한 이웃 사촌처럼 그가 반갑게 맞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육사(29기)에 들어간 그는 74년 4월 수경사 발칸 포병대대 소대장을 시작으로 30년이 넘는 군생활을 했다. 1986년에는 이탈리아 국방무관으로 잠시 해외 무관생활도 했고, 2001년 8사단장과 정보학교장, 그리고 현재 정보사령관까지 승승장구하면서 오른 입지전적인 무관이었다. 그는 바쁜 시간에도 오랜 시간동안 고향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군인이라는 특수한 직업 때문에 ‘고향’을 많이 찾지 못한 ‘미안함’과 또, 몹시 보고픈 고향에 대한 ‘그리움’때문일 것이다. 그는 얼마 전에 만난 오천균 변호사의 큰 형이기도 했다.
기회되면 후배들 만나고 싶어 어렴풋하게 기억난다고 했다. 육군사관학교 다닐 적에 모교인 죽향초에 와서 선생님께 인사드린다고 간 것이 후배들앞에서 1시간동안 이야기하는 것으로 이어졌다고. 지금도 그와 같은 기회가 주어진다면 시간이 허락하는 한 마다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래요. 내가 잘 나서 후배들에게 강의를 한다는 것 보다는 군인으로서의 이상과 현실을 제대로 알려줄 필요가 있고, 아이들에게 많은 꿈을 심어줄 것 같아서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죠. 사실 저도 그 당시에는 왜 대전고등학교에 가고, 육군사관학교에 진학을 했는지 뚜렷한 이유가 없었고, 사회적인 분위기와 여러 주위 사람들의 권유에 선택을 하게 된거에요. 그래서 어려서부터 아이들이 다양한 삶을 접하고 자신의 적성에 맞는 길을 선택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어요.”
어머니와 아들, 그리고 고향
오항균 사령관에게는 삶의 이정표였고, 꼭 지켜야 할 가치였다. 그래서 지금도 월전리에 계신 어머니 말씀이라면 거역을 못 한다고.
“어머니는 엄하고 자부심이 강했어요. 잔칫집 일을 도와주러 가더라도 자식들은 잔칫집에 얼씬도 못하게 했고, 또, 잔칫집 음식도 싸오지 않았어요. 만일에 몰래 들어와서 먹는 걸 들켰다간 종아리를 맞기도 했어요. 스스로 자식들이 일어서게 교육을 시켰어요. 그래서 모두 이를 악물고 공부했는지도 모릅니다.”
자신도 지금 자식을 낳아 기르지만, 정작 어머니처럼 엄하게 하지는 못한다고 했다. 아직 군인이라는 신분 때문에 자주 찾아뵙지 못하지만, 동생들을 시켜서 자주 들러보게 한다고. 그는 어머니와 아울러 고향에 대해 얘기했다.
“수구초심이에요. 나이 들면 들수록 고향생각이 간절해요. 지역감정이라는 말도 긍정적으로 말하면 바로 ‘애향심’이에요. 나중에 저도 자식들에게 유산을 물려주지 않을 작정입니다. 그것은 아이들을 망치는 길이죠. 빌 게이츠처럼 아이들이 더 좋은 환경에서 자랄 수 있도록 ‘사회 환원’을 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나이 들면 고향가까이 가서 고향을 위해 살 작정입니다.”
군복 속에 감춰진 그의 애향심이 그 안에서 얼마나 그리움에 절어 있었는지 예감할 수 있었다. -2004년 04월 24일 옥천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