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빠데샤 사하스리>는
인도의 대표적 철학자인 샹까라의 저서로,
베단따 철학의 진수를 평이하게 전달하고 있다는 점에서
'샹까라 철학의 입문서', 더 나아가서 '인도철학의 백미'로 손꼽힌다.
샹까라의 철학은
불교나 그 이외의 다른 학파의 인도철학체계가 그러하듯이
윤회로부터의 해탈을 지향한다.
우주의 근본원리인 브라흐만에 관한 지식을 얻을 때
비로소 해탈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
샹까라의 되풀이 되는 주장이다.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자기의 본체 즉 아뜨만이
바로 브라흐만과 동일한 것이라는 진리를 깨닫는 것이
해탈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이다.
샹까라는 가르침을 받으러 오는 제자에게 먼저
"당신은 누구십니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샹까라의 가르침에 따르면
결국 윤회란 무명을 말하며
무명을 멸하는 것이 해탈이다.
1
순수정신이여!
만물에 두루 계시는 이여!
만물의 근원으로서 만물 그 자체이신 이여!
일체 만유의 저 깊숙한 곳에 깃들어 계신 이여!
뭇 사유의 대상을 뛰어넘는 이시여!
바로 그러한 전지자께 귀의합니다.
브라흐만에 관한 무지가 그 윤회의 뿌리이기 때문에
그 무지를 없애는 게 바람직하다.
이런 까닭에 브라흐만에 관한 올바른 지식이
우빠니샤드를 통해서 설해지기 시작했으니
이 브라흐만에 관한 올바른 지식에 의거해서
완전한 행복(무지로부터 벗어남, 곧 해탈)이 이루어질 것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차별없는 아뜨만에 관해서 알 수 있도록
"(아뜨만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라는 구절을 통해서
육체등을 배제하고난 뒤 아뜨만 만을 남겨 놓았다.
이러한 올바른 지식에 따라 무지가 제거된다.
"나는 순수존재(브라흐만)이다."라는 인식이 자리 잡을 때
무지가 또다시 생겨나는 일이 없다면,
"나는 행위주체이다."
"나는 행위의 과보를 누리는 자이다."와 같은 관념이
어떻게 생길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브라흐만에 관한 올바른 지식은
해탈을 이루기 위해서 선업과 같은 조력자를 필요로하지 않는다.
수태, 노쇠, 질병, 죽음 등 뭇 윤회생존의 괴로움을
미약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윤회생존의 원인인 무지를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에,
브라흐만 근처에 확실하게 가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브라흐만에 관한 올바른 지식은 '우빠니샤드'라고 불린다.
2
아뜨만은 "나는 이것이 아니다. 나는 저것도 아니다."라는
식의 부정을 통해서 참으로 명확하게 이해된다.
새끼줄을 뱀으로 보는 착각의 경우,
뱀이라는 생각을 지운 연후에야 새끼줄이라는 생각이 자리잡을 수 있듯이
그릇된 앞생각을 부정하지 않고는
올바른 뒷생각이 생겨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슬픔과 어리석음 등이 엄습하는 육체들의
'이것'이라는 숲을 지나야(곧 '이것'의 부정을 통해서)
비로소 자기 자신의 아뜨만에 도달할 수 있다.
3
만약 자재신(브라흐만)은 아뜨만이 아니라고 한다면
아뜨만을 알고 싶어하는 자는
"나는 그 브라흐만이다"라는 생각을 견지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자재신이 곧 아뜨만이라고 한다면
아뜨만을 알고 싶어하는 자에게는
"나는 브라흐만이다"라고 생각하는 올바른 지식이 성취되고
그 올바른 지식은 아뜨만과 브라흐만의 동일성을 부정하는
여타의 그릇된 지식 곧 무지를 없앨 것이다.
4
아뜨만을 육체와 같다고 생각하는 '자아의식'이란 씨앗에서 자라나고,
자아의식의 담지자 곧 지성 속에 축적되어 있는 것이 업인데,
그 업을 "나는 행위주체도 아니며 행위의 과보를 누리는 자도 아니다"라는
인식 곧 아뜨만에 관한 올바른 지식의 불로 태워버리면
이미 불에 타서 없어져버린 업이 어떻게 과보를 낳을 수 있겠는가?
일반사람들이 육체가 곧 아뜨만이라는 그릇된 지식에 집착하듯이
그렇게 굳게 다름아닌 아뜨만에 대해서 올바른 지식을 익혀,
육체가 곧 아뜨만이라는 그릇된 지식을 파괴하는 사람은
원치 않아도 해탈하게 된다.
5
배에 타고있는 사람의 눈에는 강변에 우뚝 서있는 나무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듯이, 그와 마찬가지로
윤회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윤회하는 일이 없는 아뜨만이
윤회하고 있다는 잘못된 생각이 생긴다.
자아의식은 순수정신인 것처럼 현현하며,
또한 그 (순수정신)을 위해서 존재한다.
(자아의식에서) '이것'이라는 부분 (곧 에고등 자아의식의 대상,
또는 아뜨만이 아닌 것)을 제거하고 나면,
그러한 (순수정신인 것처럼 현현하며 순수정신을 위해서
존재하는) 자아의식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한 순수경험(순수정신)이 곧 지고의 아뜨만이다.
6
아뜨만에 관한 수식은 그 모두가
아뜨만 자체가 아니기 때문에 잘라서 내버린 손과 같다.
그러므로 아는 자(아뜨만)는 모든 수식에서 벗어나 있다.
7
나(아뜨만)는 언제나 (꿈속에서든 깨어있을 때든,
이 세상에서든 저 세상에서든) 그 어떤 경우이든
지성에 의해 포착된 그 모든 대상을 본다.
그러므로 나는 지고의 브라흐만이자 일체지자이며
일체 만물속에 그득 차 있는 자이다.
아뜨만에는 변화하는 일이 없고, 부정한 것이 없으며
그 어떠한 물질적인 것도 없다.
지성 안에 있는 경험대상은 지성이 있을 때는 존재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예를 들어 혼수상태에 빠졌을때처럼
지성이 없을 때)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보는 자(아뜨만)는 어떤 경우이건, (변함없이)
보는 자이기 때문에 아뜨만에는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는 것과 같은) 이원적인 속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성은 지고의 브라흐만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심지어는 지성 자신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8
나는 지고의 브라흐만이며,
해탈한 자가 그렇듯이 언제나 불생자이고 유일자이며,
이원성이 없는 자이기 때문에,
(너 정신은) 마야에서 생겨나는 활동을 버리고
여기 순수정신인 내 안에서
헛된 노력을 멈추고 편히 쉬어라.
나는 일체만물 속에서 언제나 평등한 독존자이며
허공과 같이 일체만물에 편재하며
소멸하는 일이 없고 길상하며
끊어지는 일이 없고 나눠지는 일이 없으며
행위가 없는 자로,
곧 지고의 브라흐만이다.
네가 행한 행위의 결과는 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으며
너 또한 너와 나는 둘이 아니기 때문에
네가 행한 행위의 결과와 아무런 관계도 없다.
이 (정신과 아뜨만의) 대화를 숙고한다면, 사람들은
(윤회생존이라는) 커다란 공포의 원인인 무지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마찬가지로 그러한 사람들은 애욕에서 해방되어
아뜨만을 알고 있는 자로서
언제나 슬픔이 없는 자로서
일체만물 속에서 평등한 자로서
행복한 자로서 생활하게 된다.
9
올바른 지식에 근거하면 외계의 땅은
몸을 구성하고 있는 땅과 같으며
외계의 물 등 여러 원소 또한 모두
몸을 구성하고 있는 원소와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허공이 바람이나 다른 원소가 일어나기 전에는
일체만물에 편만해 있는 것처럼
나는 항상 유일자이고 일체만물이며,
오직 순수정신이고 일체만물에 편만해 있으며,
불이(不二)이다.
브라흐마신(범천)을 비롯해서 식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물은 '내 몸'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이 몸 이외에 무엇으로부터 욕망, 노여움 등의
여러 결점이 나에게 생기는 것일까?
뭇 생물의 지성은 항상 나의 순수정신이 비출 대상이기 때문에
만물은 언제나 일체지자이며 악에 물들지 않은 나의 몸이다.
무한자는 색깔, 형태 등의 속성이 없어서
시각 등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무한자(아뜨만)는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