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글 본문내용
|
|
다음검색
| 1. 미국의 시대: 자유주의의 재해석과 20세기 미국 지성사 "미국의 세기(American Century)란 무엇보다 미국이 전 세계의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1941년 2월, 「타임(Time)』지의 편집인 헨리 루스(Henry Luce, 1898~1967)는 이렇게 선언했다.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 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지 한 해 반이 지났으며, 일본의 진주만 폭격 으로 미국이 참전하기까지 열 달을 앞둔 시점이었다. 전황은 여전히 한 치 앞을 알 수 없었다. 대서양 건너편에서는 순식간에 프랑스를 정복한 독일이 동부 전 선에서 소련과 일진일퇴의 혈전을 벌이고 있었고, 태평양 반대편에서는 일본이 한반도와 만주를 넘어 중국과 아시아 전체를 향한 본격적인 침략을 개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스는 전쟁의 결과가 아니라 그것이 가지고 올 더 깊은 합의"에 주목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미국의 새로운 힘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 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힘에 걸맞은 국제적 역할에 대한 자각이었다. 17세 기 이래 "세계는 유럽이 주도했다. 지금까지 유럽의 사상, 유럽의 문화, 유럽의 정치와 군사 제도, 사회체제가 세계를 움직였다." 루스가 말했다. "이제 미국의 시대가 도래했다. 우리가 문명을 세계만방에 전파하는 중심이 되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며 등장한 '미국의 시대'는 서양 지성사 서술에 하 나의 도전을 제기한다. 이 시기 미국이라는 존재는 누구도 감히 부정할 수 없 는, 그래서 반드시 설명해야만 하는 지성사의 핵심 주제로 자리매김했다. 미국 의 군사력은 소련을 포함한 다른 모든 강대국을 압도했으며, 북대서양조약기구 System)로 대표되는 전후 국제질서'는 서양 세계 전체를 미국의 경제적이고 외교적인 영향력 아래 결속했다. (p.331) |
| 청바지에서 캐딜락까지, 재즈에서 로큰롤까지. 할리우드에서 디즈니와 슈퍼맨까지, 코카콜라와 맥도널드에서 말보로까지, 미국의 문화는 세계 모든 곳에서 열망의 대상이 되었다. 가장 놀라운 것은 생산력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의 GDP는 타의 추종을 불허해 세계 전체의 절반을 차지했다. 어떤 사상과 이념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미국의 시대를 만들었는가? 미국인은 변화한 세계와 그들 자신을 어떻게 이해했는가? 미국의 시대에 대한 성찰과 비판, 대안적 전망은 무엇이 있었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당대 지식인들이 절박하게 물었던 문제인 동시에, 오늘날 지성사 연구자들이 진지하게 검토해야 할 사안이다. 그러나 미국의 시대에 대한 지성사를 쓰는 작업은 쉽지 않은 과제이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상당수의 미국인을 포함하여 당대 지식인과 후대 지성사 연구자들이 광범위하게 공유했던 미국에 관한 끈질긴 편견 때문이다. 오랜 기간 미국은 사상과 이념의 불모지로 여겨졌다. 풍요와 물신주의, 노예제와 인종주의, 이민과 배외주의, 포드주의와 대량생산, 월스트리트와 금융의 지배, 시장과 재산권에 대한 집착, 속물적 대중문화, 기독교 근본주의, 이데올로기가 제거된 양당제, 깊이 없는 실용주의, 프런티어에서 탄생한 거친 개인주의 등. 소위 미국의 본질에 대해서는 수많은 사람이 수많은 특징을 제시했으나, 이 모든 '미국적인 것'은 '지적인 것'의 반명제로 인식되었다. 그람시(Antonio Gramsci, 18911937)와 애틀리(Clement Attlee, 18831967) 같은 사회주의자들부터 오르테가 이 가세트(José Ortega y Gasset, 18831955)와 드골(Charles de Gaulle, 18901970) 같은 보수주의자에 이르기까지, 당시 미국에 관해 중요한 분석을 남겼던 유럽의 관찰자들은 좌우와 관계없이 대부분 비슷한 편견을 보였다. 미국의 시대는경제와 문화, 리더십, 사회적 활력, 심지어 역사적 우연이나 지리적 운명의 산 (p.332) |
| 물일지언정 지적인 과정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장에서는 양차 세계대전부터 베트남전쟁에 이르는 미국의 시대형 재생사의 관점에서 조망하면서, 자유주의라는 이념의 재배색화 국내외의 책품이 고시대의 형성과 전개, 몰락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었는지 분석한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자유주의란 다른 무엇보다 개인의 자유를 출시하는 이념으로, 일반적으로 권리와 법치, 시장 그리고 국가권력의 재판을 강조한다. 그러나 20세기 미국에서 나타난 현대적 자유주의(modern liberalism)는 똑같이 자유를 중시하면서도 개개인이 그것을 실질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조건화 그 조건을 형성하는 데 요구되는 국가의 역할을 더욱 강조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이념적 강조점은 정치와 정책의 영역에서 혼합경제, 복지국가, 부의 재분배, 노동자의 권익 신장, 여성과 유색인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의 보호 등의 형태로 나타났다. 큰 틀에서 볼 때, 미국의 현대적 자유주의는 19세기식 고전적 자유주의와 유럽식 사회민주주의 결합이었다. 이러한 자유주의의 지혜석은 미국의 시대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주제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20세기 전반 미국 지성사가 보여 주는 가장 독창적인 현상 가운데 하나였다. 2 혁신주의: 국가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인식 초강대국 미국이 국제 무대에서 본격적으로 그 힘과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 지적이고 정치적인 과정의 결과물이었다. 이 과정의 중심에는 개인의 자유와 한 시점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이지만, 지성사의 관점에서 미국의 시대는 오랜 국가의 역할 사이의 상호작용이 있었다. 이러한 상호작용의 뿌리는 로마 공화주의, 중세 유럽의 봉건제, 근대 초기의 계몽사상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미국의 독립 이후만 놓고 보더라도, 국가의 필요성에 대한 논의는 항상 자유의 신성함과 함께 미국 지성사의 핵심을 이루었다. 미국 헌법 전문의 유명한 선전처럼. 미국은 "자유의 축복을 확보하는 것뿐만 아니라 '보다 완벽한 연합을 형성하고, 정의를 확립하고, 국내의 평안을 보장하며, 공동방위를 도모하고, 국민복지를 증진하기 위해 수립된 정치적 결사체였다. (p.333) |
| 서부로 자유를 확산하면서 원주민의 생명을 앗아 가고, 노예를 해방하면서 유색인의 자유를 제한하며, 일부 이민자에게는 투표권을 부여하면서 다른 이민자를 추방하는 역사적 과정에서, 국가가 국민에게 무엇을 해야 하고, 또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은 미국 지성사의 중요한 문제의식으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긴 역사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개인과 국가의 관계에 관한 미국인들의 인식이 근본적으로 변화한 시점은 20세기에 들어오면서였다. 그 결정적인 전환점은 19세기 말에 등장한 혁신주의 운동(progressive movement)이었다. 혁신주의는 단일한 목적을 가진 동질적 운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산업자본주의가 초래한 다양한 사회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비슷한 시기에 동시다발적으로 폭발한 여러 형태의 개혁 운동들을 느슨하게 연결하여 총칭하는 개념이다. 다만, 서로 다른 사회경제적 배경과 정책적 지향점에도 불구하고, 이 운동들은 모두 하나의 핵심 특징을 공유했는데, 그것은 한 역사가의 표현처럼 당대 미국 사회에 대한 "격렬한 불만을 표출했다는 점이었다. 도금시대(Gilded Age)라고 불렸던 19세기 후반 미국은 록펠러(John D. Rockefeller, 1839~1937)와 카네기(Andrew Carnegie, 1835~1919), 포드(Henry Ford, 1863~1947)로 대표되는 거대 기업들이 등장해 전례 없는 경제성장을 이끌었다. 하지만 새롭게 등장한 산업자본주의는 빈곤, 독점, 정경유착, 경제적 불평등, 인종차별, 폭력과 범죄 등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사회문제들을 야기했다. 혁신주의 시대는 미국 지성사에서 가장 역동적인 시기 중 하나였다. 산업자본주의라는 새로운 현상은 새로운 가능성과 문제를 동시에 낳았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수많은 지식인이 다양한 대안을 탐색했다. 이러한 지적 탐색은 철학부터 사회학과 경제학, 역사학을 망라했으며, 언론인과 정치인. 연구자, 그리고 사회운동가들까지 다양한 유형의 인물이 참여했다. 이들은 명시적으로 혹은 은 연중에 미국 자유주의의 변화를 이끌었다. 산업자본주의의 성장과 그로 인해 나타난 사회문제들은 여성과 유색인, 이민자 등 약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노동자와 농민을 비롯하여 원래 주류에 속했던 백인 남성들의 자유까지 위협했다. (p.334) |
| 만약 미국인 개개인이 그들의 자유를 충분히 실현할 수 없게 되었다면, 원자와 흰개인을 전제로 작동했던 19세기식 자유방임주의 또한 정당성을 잃을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른바 '혁신주의 지식인'들은 개인과 국가 권리와 자유와 공공성 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제시했다. 그들의 목소리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Theodore Roosevelt. 1858~1919)와 우드로 윌슨(Woodrone Wilson, 1856~1924) 같은 혁신주의 정치가들을 통해 정책에 반영되었다. 기층에서 혁신주의 운동을 주도했던 개혁가들은 그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유주의의 범위를 확장하기 위한 주장을 펼쳤다. 제인 애덤스(Jane Addams, 1880~1935)는 여성 참정권과 노동자 권리 증진, 평화운동 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혁신주의 지식인으로, 특히 시카고에 미국 최초의 사회복지관인 힐하우스(Hull House)를 설립해 대도시의 빈곤과 범죄, 착취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그녀의 이러한 노력은 『혈하우스에서의 20년(Twenty Years at Hill-House)』(1910)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그녀는 경제적 불평등과 사회적 부정의를 개선하고, 약자에게 적절한 도움을 주기 위해 정부의 적극적인 역할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애덤스의 활동과 주장은 이후 뉴딜을 거치면서 등장하게 될 사회복지 프로그램의 지적인 근간을 제공했다. 혁신주의 시대에 활발하게 전개된 또 다른 운동은 흑인의 자유를 위한 투쟁이었다. 이 운동의 중심에는 흑인 지식인이자 사회학자인 듀보이스(WE DuBois, 1868~1963)가 있었다. 그는 흑인에 대한 미국 사회의 억압을 비판하면서 동료들과 함께 전미유색인지위향상협회(National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Colored People, NAACP)를 설립했다. 미국 민권운동에 큰 발동했다. 듀보이스의 명저 흑인의 영혼(The Souls of Black Folk (1903)은 인종 자취를 남기게 되는 NAACP는 혁신주의 시대 듀보이스의 사상을 반영하여 활과 계급의 교차, 즉 피부색에 따른 차별과 노동자를 착취하는 자본주의가 경합 조적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그는 흑인에 대한 교육기회의 확대와 정치참여 해 미국 흑인들을 이러한 구조적 불평등의 악순환에 가두었다고 분석했다. 정치참여의 보장, 그리고 법적·제도적 지원을 요구했다. 다시 말해, 인종차별과 노동착취를 막기 위한 국가의 개입은 흑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필수적인 수단이라는 것이 보이스의 주장이었다.(p.335) |
| 이러한 기층의 개혁 운동들은 당대 미국 학계의 지적 분위기와 맞물려 있었다. 혁신주의 시대의 대학들에서는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소스타인 베블런 (Thorstein Veblen, 1857~1929)은 1899년에 출판한 「유한계급론(The Theory of the Leisure Class)」을 통해 혁신주의를 상징하는 경제학자이자 사회학자로 자리매김했다. 이 책에서 그는 '과시적 소비(conspicuous consumption)'라는 신조어를 제안했는데, 이는 부유층이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기 위해 사치와 과소비를 일삼는 현상을 설명하는 개념이었다. 이를 통해 그는 자본주의가 기존의 인식처럼 합리적 개인과 효율적 시장에 의해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합리적인 재화의 낭비와 사회적 비효율성을 초래하는 체제라고 주장했다. 베블런의 주장은 더욱 공정하고 효율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국가의 개입을 통한 자본주의 개혁이 필요하다는 혁신주의 운동의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학계에서 혁신주의의 영향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 학문 분야는 역사학이었다. 칼 베커(Carl Becker, 1873~1945)와 프레더릭 잭슨 터너(Frederick Jackson Turner, 1861~1932) 등 혁신주의학파(Progressive School)로 묶인 학자들은 당대개혁 운동에 영향을 받아 미국사를 특권층 엘리트와 일반 인민(people) 간의 지속적인 갈등의 과정으로 해석했다. 이들은 특히 독점 대기업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자유와 민주주의 원칙을 침해했다고 비판하며, 국가가 인민의 편에 서서 경제 권력의 횡포를 제어하기 위해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표적인 혁신주의 역사가 찰스 비어드(Charles Beard, 1874~1948)는 1913년에 출판한 대작 「미국 헌법의 경제적 해석(An Economic Interpretation of the Constitution of the United States)」에서 미국 헌법을 자유와 권리라는 추상적 원칙이 아닌, 혁명기 엘리트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반영한 문서로 분석했다. 이러한 해석은 국가가 자본주의를 개혁하고, 사익 추구에 맞서 국민 전체의 공익을 대변해야 한다는 혁신주의의 주장과 결을 같이했다. 언론계 역시 혁신주의 시대 자유주의의 변화를 관찰하기에 좋은 장소였다. 19세기 후반에 등장한 인쇄 기술의 발전, 유통망 형성, 광고의 탄생 등 기술적·(p.336) |
| 사회적 혁신들은 20세기 초반 신문과 잡지의 전성기를 열었다. 추문 폭로자(muckraker)로 불렸던 언론인들은 폭력과 범죄, 부정부패와 같은 사회의 어두운 측면을 심층적이면서도 다소 선정적으로 보도하는데 주력했다. 아이다 타벨(Ida Tarbell. 1857~1944)의 대기업의 독점과 횡포에 대한 기사나 링컨 스티븐(lincoln Steffens, 1866~1936)의 정경유착 관련 글들은 큰 대중적 관심을 끝이 없다. 제이콥 리스(Jacob Riis. 1849~1914)의 나머지 절반은 어떻게 사는가 How the Other Half Lives)』(1890)는 뉴욕시 이민자와 하층민의 비참한 삶을 수많은 사진과 함께 생생하게 묘사했다. 업턴 싱클레어(Upton Sinclait. 1878~1968)는 유명한 논픽션 「정글(The Jungle) (1906)에서 도축업의 가혹한 노동 환경과 불결한 위생 상태를 폭로하며 기업 규제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아이다 B. 웰스(Ida B. Wells, 1862~1931)는 남부 전역에서 흑인을 대상으로 밀어 났던 린치와 다른 끔찍한 폭력을 고발했다. 미국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 준 이러한 폭로들은 무소불위의 자본주의가 개인의 자유에 얼마나 위협적인지. 그리고국가의 적절한 보호 없이 자유가 얼마나 허약할 수 있는지를 명확히 보여 주었다. 지성사의 관점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언론은 이른바 '혁신주의의 주간 성경으로 불렸던 『뉴리퍼블릭(New Republic)」이었다. 1914년 대선에서 진보당(Progressive Party) 후보로 출마한 전직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산국민주(New Nationalism)를 표방하며 기업 규제, 노동권 보호, 여성 참정권, 복제프로그램, 그리고 공익의 대변자로서 정부의 역할을 강조했다. 루스벨트의 매선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창간된 『뉴리퍼블릭」은 시작부터 자유주의의 재해석을 명확히 내세웠다. 『뉴리퍼블릭」의 창간자이자 루스벨트의 조언자였던 허버트 크롤리 (Herbert Croly, 1869~1930)는 "제퍼슨의 목적을 위한 해밀턴의 수단 즉 개인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도구로서 강력한 국가의 역할을 요구했다.그는 1909년에 출간한 『미국적 삶의 약속(The Promise of American Life)에서 산업자본주의 시대에 거대 기업의 등장으로 19세기의 자유방임주의는 이제 설 자리를 잃었다고 진단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는 대기업의 힘을 적절히 견제하고, 모든 미국인이 진정한 자유를 실현할 수 있도록 사회와 경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p.337) |
| 「뉴리퍼블릭」이 배출한 또 한 명의 걸출한 지식인은 월터 리프먼(Walter Lippmann, 1889~1974)이었다. 그는 불과 스물넷의 나이에 「뉴리퍼블릭」의 편집장으로 합류한 이후, 뉴딜을 거쳐 냉전기까지 다양한 저술을 통해 '미국의 시대'를 대표하는 지식인으로 자리 잡았다. '혁신주의의 신동'으로 출발한 그는 '뉴딜의 대변인'과 '케인스주의의 수입상을 지나 '냉전의 현실주의자'로 거듭났는데, 이러한 사상적 궤적은 미국 자유주의의 변화와 밀접한 연관을 보여 준다. 이 길고 역동적인 과정에서 일관되게 흐르는 하나의 메시지는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국가의 역할에 대한 강조였다. 초기의 대표작 표류와 주도(Drift and Mastery)」(1914)에서 리프먼은 자유방임주의가 산업자본주의의 망망대해에서 개인을 표류하게 만드는 이념이라고 비판하며, 개인이 주도적으로 자유를 실현할 수 있도록 국가의 개입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민주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담긴 문제작 '여론(The Public Opinion)』(1922)에서는 개인이 거대하고 복잡한 현대사회를 제대로 이해하거나 통치할 수 없으므로, 전문 지식으로 무장한 관료 집단이 현명한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혁신주의 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지식인은 '미국 민주주의의 수호성인'으로 불렸던 철학자 존 듀이(John Dewey, 1859~1952)였다. 그의 학문적 저술과 사회적 활동은 교육, 도시화, 자본주의, 복지, 정치개혁 등 혁신주의의 다양한 의제를 포괄했고, 당대 개혁가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그는 민주주의와 교육(Democracy and Education)』(1916)과 「공중과 그 문제(The Public and Its Problem)』(1927)를 비롯한 많은 글을 통해 민주주의의 의미를 헌법, 선거, 권력분립 같은 정치제도를 넘어, 모든 시민이 자유를 실천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이라는 뜻으로 확장했다. 이때 현대 산업자본주의의 조건 속에서 그러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적극적 역할이 필수적이었다. 따라서 듀이의 철학에서 개인의 자유와 국가의 책임성은 상호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호 보완적인 개념이었다. 다시 말해, 건강한 민주주의는 지적이고 능동적인 시민을 필요로 하며, 그러한 시민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교육과 언론, 정치참여의 수단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듀이의 주장은 미국 자유주의가 했다. (p.338) |
| 기존의 자유방임주의에서 현대적 자유주의로 진화하는 데 철학적 기반을 제공했다. 하지만 미국 자유주의의 진화는 단선적인 과정이 아니었다. 그 진화에서 충 요한 분기점은 바로 제1차 세계대전이었다. 전쟁이 처음 발발했을 때 듀이, 리프먼, 듀보이스 등 주요 혁신주의 지식인들은 미국의 참전에 적극 찬성했다. 그들에게 전쟁은 자본주의 개혁이라는 의제를 실현할 절호의 기회로 보였다. 특히 전시 경제계획과 집단주의의 실험은 자유방임주의를 종식하고 국가의 역할을 확장함으로써 자유주의의 새로운 장을 열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러나 이들 기대와는 달리, 제1차 세계대전은 혁신주의 운동의 종말을 가져왔다. 전쟁은 실제로 국가의 역할을 강화했지만, 강력해진 국가는 전례 없는 애국주의 열풍속에서 언론 검열과 빨갱이 사냥을 통해 개인의 자유를 억압했다. 이는 혁신주의자들이 추구했던 새로운 자유주의의 비전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미국에서는 사회적 불안과 계급 및 인종 갈등이 더욱 극심해졌고 그에 따라 보수적 정치인들이 세를 얻었다. 결국 전쟁 동안 정부의 개입은 확대되었지만, 그로 인해 발생한 심각한 부작용 속에서 미국 자유주의는 다시 개인의 자유를 배타적으로 강조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비록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쇠퇴하기는 했지만, 혁신주의 시대는 미국 자유주의의 진화에서 결정적인 기원을 이루었다. 이 시기 미국의 지식인들은 산입자본주의의 도래라는 전례 없는 현상에 직면하여 개인의 자유와 국가의 역할을 새로운 각도에서 사고하기 시작했다. 지성사의 관점에서 이는 자유주의를 19세기식 자유방임주의 전통에서 떼어 내 국가의 책임성과 접목하는 과정이 있다. 혁신주의 지식인들은 구속받지 않는 자본주의가 여러 심각한 사회경제적 문제점을 일으키며, 이는 궁극적으로 진정한 개인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이들은 노동자와 소비자, 사회적 약자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국가가 더욱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렇게 등장한 현대적 자유주의는 시간이 흐른 뒤 국내에서는 경제와 사회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정당화하며 이른바 큰 정부의 시대를 열었고, 해외에서는 미국의 전통적 고립주의를 넘어서는 미국 패권의 부상을 이끌었다. 따라서 20세기 초반의 혁신주의 운동은 담론과 정책 두 영역 모두에서 미국 자유주의의 범위를 확장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시대를 여는 데 중요한 지적·정치적 기반이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p.339) |
| 3. 대공황과 뉴딜 : 현대적 자유주의의 흥기 뉴딜(New Deal)은 미국 사회에 거대한 변화를 불러온 역사적 전환점이었지만, 지성사적 관점에서 그 사상적 동인과 이념적 함의를 분석한 연구는 많지 않다. 미국사 연구자들은 흔히 뉴딜을 사상과 이념이 없는 정치개혁으로 묘사했다. 그 이유는 몇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뉴딜은 여러 정책적·제도적 혁신을 이루었음에도, 미국 지성사를 새로 쓸 만큼 강력하고 일관된 이데올로기를 형성하지 못했다. 따라서 뉴딜은 특정한 지적 흐름의 산물이라기보다는 1929년 경제 대공황(Great Depression)이 낳은 경제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일련의 즉흥적인 대책으로 인식되었다. 둘째, 뉴딜의 초점은 경제 위기 극복이라는 절대적 목표에 고정되어 있었다. 정치, 경제, 문화, 인종, 젠더 등 미국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새로운 사상과 운동이 전방위적으로 폭발했던 혁신주의와 비교했을 때, 뉴딜은 정부가 주도한 위로부터의 개혁으로서 경제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실용적인 접근에 집중했다. 마지막으로, 뉴딜에는 상징적인 지식인이 부재했다. 혁신주의 시대 존 듀이와 제인 애덤스, 듀보이스 등 많은 저명한 지식인이 활약했던 것에 비해, 뉴딜을 대표하는 지식인은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다. 그러나 미국 자유주의의 진화라는 장기적 흐름에서 볼 때, 뉴딜은 단순한 정책과 법안들의 조합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뉴딜은 개인의 자유와 국가의 역할을 재해석한 혁신주의 전통에 기반을 두고 있었으며, 이 전통을 국내적으로는 자본주의 개혁을 통해, 대외적으로는 제2차 세계대전 참전을 통해 현실 정치에서 실천했다. 1929년 대공황부터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사회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생각이 미국인들 사이에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p.340) |
| 실제로 이 시기에 정부의 규모와 활동 내지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단적인 예로, 미국이 1961년 제2차세계대전에 참전한 후 종전까지 4년 동안 사용한 정부 예산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대전 이후 등장할 복지국가와 미국 패권의 지적 토대를 마련했다. 북한 이래 뉴딜 전까지 사용한 모든 예산을 합한 것보다 두 배가량 더 쉽다. 한 회예산보다 열 배나 많았으며, 놀랍게도 이 수치는 미국 정부가 1780년대 중하디로 뉴딜은 현대적 자유주의를 정치적 현실로 확립했으며, 이는 제2차 세계대공황이 가져온 엄청난 충격이 이러한 변화를 가능하게 한 배경이었다. 매용황은 그 이름처럼 거대한 재난이었다. 1929년 10월 주식시장의 폭력으로 시작된 경기 침체는 미국을 깊은 수렁으로 몰아넣었다. 주식시장은 1년 동안 큰폭으로 하락하며 전체 가치를 절반 가까이 잃었고, 그 여파로 수많은 기업이 도산했다. 1933년까지 실업률은 약 25퍼센트에 달했으며, 시카고, 디트로이트,클리블랜드 같은 중서부 산업도시들에서는 실업률이 50퍼센트를 넘기도 했다.이 위기는 미국의 인종 문제를 더욱 악화시켰다. 경영난에 빠진 기업과 공장들온 흑인 노동자들을 먼저 해고했고, 이에 전체 흑인 노동자의 절반이 실직 상대로 정부에 구호를 신청하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경기 침체와 함께 가뭄과 홈년이 중부 농업지대를 강타했다. 이로 인해 2년 내에 농촌 가구의 평균 소득이 60퍼센트 가까이 감소했고, 땅을 떠나 유랑하던 농민들은 정부의 도움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주식시장 폭락 후 3년 동안 미국의 GDP는 약 30퍼센트나 급락했다. 이는 역대 두 번째로 큰 경기 침체였던 2007~2009년 당시 GDP가 4.3퍼센트 하락했던 것과 비교하면, 1930년대 대공황의 심각성을 잘 보여 준다. 대공황은 오랫동안 미국 자유주의의 핵심을 이루었던 자유방임주의의 최종적인 종말을 확증했다. 거대한 위기는 경제에 대한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을 요구했다. 문제는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계속해서 집권해 온 공화당 행정부가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대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1920년에 당선된 하딩(Warren Harding, 1865~1923)은 전형적인 부패 정치인이었고,|그 뒤를 이은 대통령 쿨리지(Calvin Coolidge, 1872~1933)는 작은 정부를 신봉했다. 대공황 당시 대통령이었던 허버트 후버(Herbert Hoover. 1874~1964)는 (p.341) |
| 한때 혁신주의 운동에 참여했던 인물로 나름대로 위기 극복을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 미국의 오랜 자유방임주의적 전통과 결별하지는 못했다. 주식시장 붕괴 1년 후, 그는 "경제공황은 의회나 행정부의 활동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자유방임주의가 낳은 재난에 다시 자유방임주의를 해법으로 제시한 셈이었다. 전대미문의 위기 상황에서 재정 적자를 이유로 긴급 구호조차 거부하던 대통령이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 농지를 떠난 농민, 그리고 거리에 내몰린웠다. 가족들에게 이러한 말을 했으니, 국민들이 그를 신뢰하고 따르기란 매우 어려이러한 상황에서 1932년 대통령에 당선된 프랭클린 루스벨트(Pranklin D. Roosevelt, 1882~1945), 일명 FDR은 뉴딜을 시작했다. 뉴딜을 지성사적 관점에서 이해하려면 무엇보다 루스벨트라는 인물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 역사가가 "FDR이 곧 뉴딜이었다"고 표현했듯이, 루스벨트와 뉴딜은 불가분의 관계였다. 1882년 뉴욕주 하이드파크에서 대부호 가문의 아들로 태어난 루스벨트는 하버드대학교와 컬럼비아 로스쿨을 졸업한 후 정계에 입문해, 뉴욕주 상원의원과 해군부 차관을 거치는 등 출세 가도를 달렸다. 1920년 대선에서 38세의 젊은 나이로 민주당 부통령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으며, 이후 예상치 못한소아마비로 인해 지팡이와 주변의 도움 없이는 혼자 걸을 수 없는 장애를 안게 되었다. 역사가들은 이 경험이 루스벨트의 뉴딜, 특히 약자에 대한 공감과 정부의 역할에 대한 인식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한다. 이후 8년간의 재활을 거쳐 정계에 복귀한 그는 뉴욕주 주지사를 역임한 후, 대공황이 절정에 달했던 1932년 마침내 백악관에 입성했다. 루스벨트라는 인물을 통해 뉴딜의 지성사를 살펴보면,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12년 이상 이어진 그 긴 대통령 재임기 동안 뉴딜의 초점이 다양한 정치 경제적 대안에 대한 실험에서 출발하여, 시간이 흐름에 따라 케인스주의와 제2차 세계대전 참전이라는 특정한 사안으로 수렴해 나갔다는 점이다. 사실, 1932년 대선에서 루스벨트는 미국인들에게 뉴딜, 즉 새로운 약속을 제안하면서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이는 위기의 원인에 대한 진단이 불확실했기 때문이었다. 대공황의 원인에 대해서는 현재까지도 논쟁이 이어지고 있으며, 당시에는 명확한 답을 찾기가 더욱 어려웠다.(p.342) |
| 긴축재정과 주식시장 규제의 미비 같은 정책적 요인부터 과잉생산과 부의 불평등 같은 구조문제,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보호무역주의 같은 국제적 상황까지 다양한 원인 어지고 있으며, 당시에는 명확한 답을 찾기가 더욱 어려웠다. 지역개정과 주제이 제기되었으나, 어느 하나도 확실한 답을 주지 않았다. 위기의 원인을 정화의 할 수 없으니, 그에 따른 처방 역시 확정적일 수 없었다. 따라서 루스벨트는 1932년 대선 기간 내내 뉴딜을 강조하면서도, 구체 정책에 대한 질문을 받들 1932년 1해마다 특유의 수사로 모호한 답변만을 내놓았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명확한 정의의 부재야말로 오히려 초기 뉴딜의 본질을 이라기보다는 느슨하게 정의된 일종의 실험정신이었다. 물론, 전반적인 지향점 이루었다는 사실이다. 루스벨트 첫 임기 동안 뉴딜은 구체적인 정책들의 집합은 존재했다. 루스벨트의 유명한 선언처럼, 뉴딜은 "미국 경제의 피라미드 알바닥에 있는 잊힌 사람들(forgotten man)", 다시 말해 굶주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정치적 프로그램이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을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정책을 실행할 것인지는 루스벨트도 명확히 알지 못했다. 오히려 그는 대공황이 낳은 불확실성 속에서 다양한 정책적 대안에 대한 용감하고 끈질긴 실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어떤 방법이든 시도하고, 실패하면 솔직히 인정한 후 다른 방법을 시도하면 된다. 이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적어도 뭐라도 시도는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무엇이든 시도해 보자는 실험정신이 뉴달의 출발점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실험에 대한 강조는 제1차 세계대전 시기 개인의 자유에 대한 억압으로 인해 불신의 대상이 되었던 큰 정부의 가능성을 다시 열어 주었다. 많은 미국인이 보기에, 루스벨트가 뉴딜을 통해 만들려고 하는 정부는 특정한 이념을 강요하며 다른 생각들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지적 분위기 속에서 경제 위기 극복을 위한 다양한 대안을 역동적으로 실험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실험을 추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완벽한 계획이나 정교한 이론이 아니라 응기와 자신감, '할 수 있다(can-do)'는 낙관주의 같은 심성이었다. 1932년 대선 국가는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앞으로도 계속 견뎌 내고, 다시 일어서서 번영할에서 압승을 거둔 후 루스벨트는 그 심성을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의 위대한 국가는 지금가지 그래 왔듯이, 앞으로도 계속 견뎌 내고, 다시 일어나서서 번영할 것이다.(p.343) |
|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오직 두려움 그 자체뿐이다(The only thing we have to fear is fear itself)." 아마도 루스벨트의 명언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이 한마디는 경제 대공황 속에서 걱정과 공포에 시달리던 미국인들에게 다시금 용기와 자신감을 불어넣는 외침이 되었다.'무엇이든 시도하자'는 실험정신과 '두려워할 것은 두려움뿐'이라는 낙관주의 이 두 가지 요소가 루스벨트의 첫 임기 동안 초기 뉴딜의 성격을 규정했다.흔히 이 시기 뉴딜의 핵심 과제를 3개의 R. 즉 구제(relief), 회복(recovery), 개혁(reform)으로 요약한다. 가장 시급했던 과제는 굶주리는 사람들과 위기에 처한 은행과 기업을 구제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무너진 경제를 회복하고, 대공황과 같은 위기가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시스템을 개혁하는 과제는 더욱 어려웠다. 이 과제를 위해 노동, 농업, 기업, 복지, 공공사업 등에 관한 다양한 정책들이 쏟아졌고, 수많은 기관이 새로 설립되었다. 이러한 정책과 기관들은 종종 AAA(Agricultural Adjustment Administration), CCC(Civilian Conservation Corps), NRA(National Recovery Administration)와 같은 알파벳 약자로 불렸다. 이들 중 일부는 완전히 실패했고, 대다수는 부분적인 성공에 그쳤으며, 심지어 상당수는 서로 충돌하기도 했다. 하는 일이 많았던 만큼 혼란도 컸다. 언론은 이를 '알파벳 수프(Alphabet Soup)'라고 비꼬았는데, 마치 암호처럼 보이는 알파벳 약자들로 이루어진 정책과 기관이 수없이 등장하는 상황을 풍자한 표현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많은 알파벳 조합 위에 모든 미국인이 아는 세 글자의 알파벳,FDR이 있었다. 사실 루스벨트의 임기 중에도 경제 침체는 지속되어, 제2차 세계대전 참전 이전까지 미국은 1929년 당시의 GDP를 회복하지 못했다. 수많은 정책과 기관 중 어떤 것이 경기 회복에 기여했는지, 또는 이처럼 혼란스럽게 진행된 뉴딜 자체가 과연 경제에 도움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도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점은, 1933년 루스벨트의 취임을 기점으로 경제가 회복세로 돌아섰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 미국인들은 국가에 대한 신뢰를 되찾았다. "이 나라가 요구하는 것은 행동, 지금 당장의 행동이다." 루스벨트는 취임식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뉴딜이 시작된 이후 미국인들은 신임 정부가 매일같이 정력적으로 무언가를 시도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p.344) |
| 이에 그 구해데 이것만큼 효과적인 것도 없었다. 비록 구체적인 경제적 효과는 불확실할지라도, 무너진 국가와 국민의 정신을 회복시키는 이것만큼 효과적인 것도 없었다. 루스벨트 외에도 여러 지식인이 뉴딜을 통해 정부에 참여하여 다양한 정책을입안하고 실행했다. 이때 루스벨트의 '브레인 트리스트(Braio. Truarr)로 불렀던 조언자들의 역할은 특히 중요했다. 컬럼비아대학교 출신 경제학과 배스포드 터그웰(Rexford Tugwell, 1891~1979)은 대공황을 초래한 자본주의 제재 시스템의 내재적 불안정성을 극복하기 위해 정부가 경제계획을 수립하고 시작을 통제하는 통제하여 농산물 가격을 안정시키기 위한 농업조정국(AAA)이다. 루스벨트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러한 신념에 따라 설립된 기구가 농업 생산을 정부에서 농무부장관과 부통령을 지낸 헨리 윌러스(Henry A. Wallace.1888~1965) 역시 농업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지식인이었다. 그는 농업생은 투자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산성을 증대하고, 식량 안보를 보장하기 위해 정부가 과학과 기술 혁신에 비를 티그웰과 월러스가 초기 뉴딜 정치경제학에서 계획경제의 측면을 대변했다면, 다른 지식인들은 복지국가의 비전을 제시했다. 루스벨트 또 다른 백성 조언자였던 해리 홉킨스(Harry Hopkins, 1890~1946)는 20세기 초 대표적인 혁신주의 지식인으로, 뉴딜에서 빈민과 실업자 구제 정책을 수립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연방긴급구제청(FERA)과 공공사업국(WPA)을 이끌며 수 백만 명의 미국인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대규모 공공사업을 감독했다. 노동부장관을 역임한 프랜시스 퍼킨스(Frances Perkins, 1880~1965)는 실업보험을 표함한 뉴딜의 주요 사회보장 프로그램을 설계한 인물이었다. 홉킨스와 마찬가지로, 그녀는 혁신주의 운동에 헌신하며 시카고, 필라델피아, 뉴욕 등지에서 노동자의 근로조건을 개선하고 취약 계층을 위한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하는 데 힘썼다. 특히 그녀가 주도한 1935년 사회보장법(Social Security Act)은 미국사회 정책의 역사에서 획기적인 성과로,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고 경제적 안정을 증진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뉴딜의 이상을 대변하는 정책이었다. 뉴딜 정책 가운데 계획경제와 복지국가의 구축만큼 중요했던 것은 시장과 기업에 대한 정부의 규제였다. (p.345) |
| 하버드 법대 교수이자 후에 대법관이 되는 펠릭스 프랑크퍼터(Felix Frankfurter. 1882~1965)는 계획경제나 시장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려는 동료들의 의견을 비판했다. 그 대신 그는 정부가 시장을 대체하기 보다는, 자본주의가 초래하는 불안정성과 부조리를 완화하기 위해 규제 기관을 설립하고, 이 기관들이 법적 근거를 바탕으로 경제활동을 감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뉴딜 시기 규제 기관의 설립을 촉진했다. 예를 들어 증권거래위원회(SEC)는 주식시장의 투기적 행위를 억제하고 기업의 재무 투명성을 보장하기 위해 설립된 기관이었으며, 전국노동관계위원회(NLRB)는 노동자들의 단결권과 단체교섭권을 보호하여 노동시장의 공정성을 증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처럼 프랑크퍼터는 뉴딜이 시장을 규제하고 공공의 이익을 증진시키기 위해 정부 권력을 사용하는 데 기여했다. 이러한 많은 혁신에도 불구하고, 뉴딜이 자유주의에 미친 영향에는 명확한 한계가 있었다. 무엇보다 뉴딜은 미국의 인종 관계, 특히 남부 지역에서 시행되던 공식적 인종 분리 체제인 짐 크로 시스템(Jim Crow system)에 도전하지 않았다. 공공사업국(WPA)과 민간자원보호단(CCC) 등의 프로그램은 흑인의 참여를 제한했으며, 농업조정법(Agricultural Adjustment Act) 또한 흑인 소작농보다는 백인 지주와 부농에게 더 많은 혜택을 제공했다. 이러한 한계는 남부가 민주당의 주요 지지 기반이었기 때문이다. 루스벨트는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남부 백인 유권자들의 표를 필요로 했고, 주요 법안의 통과를 위해서도 남부 출신 다선 의원들의 지지가 필수적이었다. 젠더 관계에서도 뉴딜은 보수적이었다. 뉴딜 정책은 가정의 생계 부양자를 남성으로 상정하고, 여성의 노동을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가부장제적 질서를 강화했다. 예를 들어 사회보장법은 가사 노동자나 간호사와 같은 여성이 주로 종사하는 직종을 수혜 대상에서 제외했으며, 뉴딜의 정책 입안자들은 결혼한 여성을 '용돈벌이 노동자(pin-money workers)'로 공공연하게 폄하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뉴딜은 전통적인 성 역할을 개혁하고 여성의 경제적 독립성을 강화하려는 자유주의의 과업에 분명한 한계를 노출했다. 지성사의 관점에서 인종과 젠더와 관련한 뉴딜의 한계를 고찰할 때, 종종 간 (p.346) |
| 의 영부인, 엘리너 루스벨트(Eleanor Roosevelt. 1884~1962)이다. 뉴딜이 인종가 되었던 한 인물을 새로운 시각에서 재조명할 수 있다. 그 인물은 바로 FDR은 다른 유권자 집단에 비해 루스벨트 대통령을 더욱 열정적으로 지지했다. 여가서 엘리너 루스벨트의 역할은 결정적이었다. 그녀는 뉴딜이 인종과 젠더의 측면에서 보다 포용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노력했다. 그리고 흑인의 권리 충진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쳤으며, 민권운동가들과 협력하여 흑인 커뮤니티의 목소리를 정부에 전달했다. 또한 엘리너 루스벨트는 비록 전형적 의미의 페미니스트는 아니었지만, 여성의 권익 신장을 위해서도 노력을 기울였다. 그녀는 여성이 공공부문에서 더 많은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지지했으며, 여성 노동자들이 뉴딜 프로그램에서 보다 평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압력을 가했다. 이러한 엘리너 루스벨트의 활동과 영부인으로서 그녀가 지닌 상징성은 흑인과 여성유권자가 뉴딜을 지지하게 만든 중요한 요인이었다. 과 젠더의 측면에서 뚜렷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흑인과 여성 이렇듯 뉴딜은 미국 자유주의가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국가의 책임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진화해 나가는 데 있어 전환점을 이루었다. 뉴딜은 흔히 대공황이라는 전례 없는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실용주의적 임시방편으로 뚜렷한 사상이나 이념을 찾을 수 없는 현상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뉴딜은 미국 지성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루스벨트는 뉴딜을 일종의 정책적 실험으로 제시했고, 그 결과 많은 지식인이 정부에 참여하여 계획경제, 복지국가 건설,시장 규제 등 다양한 정치경제적 대안을 활발하게 논의하고 실천했다. 이를 통해 뉴딜은 단순히 경제 위기 극복을 위한 즉흥적 정책들의 조합을 넘어, 국가가 경제와 사회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개인의 자유와 시장의 안정성을 보장하는 새로운 자유주의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이 현대적 자유주의는 미국 복지국가의 기틀을 마련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패권을 지탱하는 지적 기반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p.347) |
| 4. 제2차 세계대전과 자유주의의 진화: 케인스주의와 글로벌 패권 초기 뉴턴이 다양한 정치경제적 대안에 대한 정책적 실험의 시기였다면, 193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루스벨트 행정부의 초점은 국내 정책에서는 케인스주의와 대외 관계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참전으로 수렴해 갔다. 영국의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 1883~1946)는 뉴딜의 경제정책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지식인이었다. 대공황 당시부터 미국과 세계 각국의 개혁가들은 케인스에게 주목했는데, 이는 그의 경제이론과 그 정치적 합의가 전통적인 자유방임주의에 대한 설득력 있는 대안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자유방임주 의에 따르면, 시장은 스스로 균형을 이루고, 따라서 경기 침체 역시 일정한 조정기를 거치며 자동적으로 해결될 것이었다. 그러나 1929년 주식시장 붕괴 이후 미국과 세계경제를 강타했던 대공황은 자유방임주의의 대전제를 무너뜨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케인스는 국가의 적극적 개입을 통한 경제 안정화를 주장했다. 케인스의 거시경제학은 고전경제학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수정하면서도, 전기의 국제적 맥락에서 상대적으로 안전한 정치적 대안을 제시했다. 대공황이라는 전례 없는 위기 속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급진적 대안들이 세계 각지에서 대두되었다. 소련의 공산주의가 하나의 대안이었다면, 이탈리아의 파시즘과 독일의 나치즘은 또 다른 대안이었다. 이들 모두는 자본주의와 함께 (혹은 자본주의는 그대로 두고) 민주주의를 포기했다. 대공황과 전체주의가 한창이던 1936년, 케인스는 그의 대표작 '고용, 이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 이론(The) General Theory of Employment, Interest and Money)』을 출간했다. 이 책에서 그는 경기 침체의 주요 원인으로 수요 부족을 지목했다. 케인스는 민간 부문의 소비와 투자가 위축될 때, 정부가 적자 재정을 통해 유효 수요를 창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정부가 세금을 인하하고 공공 지출은 확대함으로써 경기를 부양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러한 이론은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면서도, 그로 인한 불안정성을 민주주의적 방식으로 극복할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p.348) |
| 루스벨트의 뉴딜은 케인스의 이론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루스벨트 행정부에 손혜리 홉킨스, 메리너 에클스(Marriner S. Eccles, 1890~1977), 앨빈 맨슨(Akin Hansen, 1887~1975) 등 미국의 케인스주의자들이 참여했으며, 사회보장법이나 계와 같은 프로그램들은 케인스 경제학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정치사상 교관점에서 볼 때, 이들의 연관성은 더욱 명확해진다. 뉴딜은 케인스가 제안한 근법, 즉 좌우파 전체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 민주적 방식으로 자본주의를 복하는 방식을 구현했다. 1933년 뉴딜이 시작되었을 때, 케인스는 루스벨트 세계 보낸 공개서한에서 신임 미국 대통령의 역사적 과제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당신은 사회체제 내에서 이성적인 실험을 통해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을 개선하라는 세계 모든 사람을 위한 수탁자가 되셨습니다. 만약 당신이 실패한다면, 세계적 전체에서 합리적 변화의 길은 심각하게 훼손되어 보수주의와 혁명만이 남아 서로 맞서 싸우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성공한다면, 당신의 대통령 집권기는 새로운 경제 시대의 신기원으로 기록될 것이며, 세계적으로 더욱 새롭고 대담한 방법들이 시도될 것입니다. - 존 메이너드 케인스, 루스벨트에게 보내는 편지. 이러한 연관성에도 불구하고, 케인스주의가 뉴딜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것은 1990년 대 후반에 들어서면서부터였다. 경제계획과 시장 규제, 금융 시스템 안정화, 농업과 산업의 회복, 빈민과 실업자 구제 등 초기 뉴딜의 정책들은 아직 케인스주의가 본격적으로 반영된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1930년대 중반까지 루스벨트를 비롯한 대다수 미국의 정책 결정권자들은 대규모 적자 지출에 대해 비전히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결정적인 전환점은 이른바 '루스벨트 불황 (p.349) |
| (Roosevelt Recession)'으로 불렸던 1937~1938년의 경기 침체였다. 1937년 루스벨트는 재정 적자를 우려해 연방 지출을 감축했는데, 이는 일시적이지만 급격한 경제 수축을 초래했다. 산업 생산이 감소하고, 실업률이 다시 상승했으며, 주식시장도 급락했다. 몇 년간 회복세를 보이던 경제가 다시 침체에 빠지자, 뉴딜의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이 상황에서 루스벨트 행정부는 정책적 방향성을 재고하게 되었고, 그 결과 케인스의 거시경제 이론이 뉴딜에 더욱 큰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뉴딜이 케인스주의 경제학을 채택한 것은 미국 자유주의의 근원적인 전환을 의미했다. 초기 뉴딜이 자본주의의 구조적 문제를 개혁하기 위한 다양한 정책적 실험에 집중했던 반면, 루스벨트 집권 후반기부터는 재정정책을 통한 고용 창출과 경제성장에 초점을 맞추었다. 케인스주의의 영향으로 미국 정부의 재정 지출은 대폭 증가했고, 균형 예산이라는 개념은 정책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 이러한 변화는 경제 회복과 실업률 감소에 기여했다. 정부가 경제를 관리하고 완전 고용을 보장해야 한다는 케인스주의의 생각은 뉴딜을 넘어 향후 미국 국내 정책의 초석이 되었으며, 전후 복지국가 형성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다. 실제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20여 년간 미국은 경제성장과 함께 안정적인 번영을 누렸다. 결국 케인스주의의 영향 아래 미국 자유주의는 자본주의 체제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려는 목표를 버리고, 경기 순환을 관리하고 고용을 창출하며 복지국가를 구축하는 데 주력하게 되었다. 루스벨트 집권 후반기에 국내 정책에서 일어난 중요한 변화가 케인스주의의 승리였다면, 대외 정책의 영역에서는 미국이 고립주의적 태도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세계적 패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이러한 전환에는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역사상 최대의 전쟁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937년 일본의 중국 침략으로 중일전쟁이 발발했고, 1940년에는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비롯한 서유럽 전체를 정복했다. 당시까지 많은 미국인은 해외의 분쟁, 특히 유럽의 대규모 전쟁에 개입을 피하려는 고립주의 전통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러나 독일과 일본의 급격한 확장으로 인해 미국은 오랜 고립주의적 전통을 재고할 수밖에 없었다. 1940년 대선에서 루스벨트는 미국이 이제 "뉴딜 의사님 (p.350) |
| (Dr. New Deal)"이 아니라 "전쟁 승리 의사님(Dr. Win-the-War)"을 만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국내 개혁을 대신해 독일과 일본을 비롯한 전체주의 세력의 확장을 저지하기 위한 국제적 개입주의가 루스벨트 정책의 최우선 순위에 올랐음을 보여 주었다. 얼핏 보기에 필연적인 과정으로 보이는 미국의 글로벌 패권으로의 전환은 지정사적으로 세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미국사에서 고립주의 전통은 언제나 강력했으나, 그렇다고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19세기 후반 에스파냐와의 전하는 경우 유럽 국가들과의 전쟁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이 전쟁을 일책에서부터 불과 20년 전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까지, 미국은 필요하다고 판단으키거나 해외의 분쟁에 개입했던 경우, 예외 없이 국내의 거센 반발이 있었으 며, 일정한 시간이 흐른 뒤 고립주의가 다시 외교의 주류로 복귀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미국 지성사에서 지니는 특별한 의미는 미국의 참전에 대한 전 국민적인 합의가 존재했고, 더 나아가 개입주의적 대외 정책이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글로벌 패권의 형태로 지속되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제2차 세계대전과 냉전을 거치며 나타난 미국의 대외 개입주의는 시대적 상황이 낳은 필연적 결과가 아니라, 당시 외교정책에 영향을 미친 정치가, 지식인, 전략가가 미국의 세계적 역할에 대한 새로운 사고와 치열한 논쟁을 통해 의도적으로 선택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 루스벨트 행정부의 대외 정책 담당자들은 미국의 번영이 미국에 우호적인 국제질서를 수립하고, 적대적 세력의 등장을 막는 능력에 달려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루스벨트는 처음에는 유럽의 전쟁에 참전하는 것에 신중했지만, 점차 미국이 민주적 가치를 기반으로 한 세계질서를 보장할 책임이 있다고 믿고 대외 개입주의를 받아들였다. 루스벨트의 비전은 단순히 전쟁에서 이기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전후 세계를 형성하는 것이었다. 특히 그가 주도적으로 설립한 국제연합(United Nations, UN)은 국가 간 협력을 촉진하고 미래의 또 다른 갈등을 예방하기 위한 조직이었다. 미래의 또 다른 갈등을 예방하기 위한 조직이었다. 루스벨트의 국무장관 코델 헐(Cordell Hull. 1871~1955) 역시 미국 외교의 초점을 고립주의에서 대외 개입 주의와 글로벌 패권으로 전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p.351) |
| 자유무역의 강력한 옹호자였던 그는 경제적 상호의존이 평화와 번영에 필수적이라고 믿었다. 관세인하와 무역 활성화를 위한 그의 노력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후 국제 경제 질서를 위한 토대를 닦으며, 미국이 그 전후 질서의 주도자로 거듭나는 데 영감을 주었다. 이 과정에서 정부 밖의 국제주의적 지식인들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시기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인이었던 월터 리프먼은 국제주의의 대변인을 자임했다. 1943년에 출간된 논쟁적인 저서 「미국 대외 정책(U.S. Foreign Policy)」에서 리프먼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안보가 유럽과 아시아 두 지역에서 힘의 균형을 유지하는 데 달려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미국은 더 이상 과거의 고립주의로 후퇴할 여유가 없었다. 이러한 주장은 미국 대중과 정책 결정자들에게 글로벌 리더십이 안보에 필수적이라는 점을 설득했다. 비슷한 맥락에서 헨리 루스는 그의 유명한 사설 「미국의 세기(The American Century)」(1941)를 통해 미국이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새로운 세계질서를 수립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루스의 글은 여론과 정책 결정자들에게 미국의 국제적 역할에 대한 설득력 있는 비전을 제공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승진을 정당성을 획득한 국제주의적 개인 정책은 냉전기에 들어 미국의 글로벌 패권의 형태로 지속되었다. 해리 트루먼(Harry Truman, 1884~1972) 행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지낸 딘 애치슨(Dean Acheson, 1893~1971)은 전후 미국 패권 형성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 그는 미국이 공산주의의 위협에 맞서 소위 자유세계'를 방어할 책임이 있다고 믿었으며, 이 과제를 위해 마실 플랜과 NATO 창설 뉴 전후 새로운 국제질서를 만드는 데 깊이 관여했다. 애치슨의 동료였던 조지 게년(George F. Kennan, 1904~2005)은 공산주의 팽창을 막기 위한 봉쇄정책의 설계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전시에 나타난 글로벌 패권 개념을 이어받아 그것을 냉전의 상황 속에서 실제 전략으로 구현한 인물이었다. 다시 말해, 케넌은 미국의 리더십에 대한 광범위한 비전을 봉쇄정책이라는 구체적인 전략으로 전환함으로써 미국이 공산주의의 확산을 두고 매권을 유지하기 위해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방향을 제시했다. (p.352) |
| 이렇듯 제2차 세계대전과 냉전 초기는 미국의 글로벌 패권이 형성되던 시기였다. 이는 미국 자유주의의 변화에서 중요한 합의를 지닌다. 고립주의자들은 미국이 외국의 분쟁에 개입하는 것이 불필요한 얽힘으로 이어지고 국내 자유를 위험할 것이라고 주장한 반면, 국제주의자들은 변화하는 세계질서 속에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새로운 대전략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그들은 미국이 광대한 경제적·군사적 자원을 바탕으로 세계를 이끌고 민주적인 국제질서를 촉진할 수 있는 독특한 위치에 있다고 역설했다. 이러한 지적 변혁은 독일과 소련. 이탈리아, 일본 등 전체주의 정권들이 초래한 위험성에 대한 인식의 확산에 의해 촉진되었다. 전체주의의 부상은 미국이 적극적인 대외 정책을 채택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 시기 대외 정책 담당자들과 국제주의 성향의 지식인들이 전개했던 주장은 미국의 세계적 역할을 재해석하는 데 기여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글로벌 초강대국으로 떠오르는 계기를 마련했다. 5. 냉전 자유주의: 현대적 자유주의와 미국의 세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자유주의는 또 한 번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했다. 그 전환점은 바로 냉전 자유주의(Cold War liberalism)의 탄생이었다. 이는 20세기 초 진보주의와 전기 뉴딜의 지적 전통이 냉전이라는 새로운 국제관계를 맞아 반공이라는 이념적 요구와 결합함으로써 나타난 현상이었다. 냉전 자유주의는 기본적으로 세계적인 공산주의 위협에 맞서기 위한 정치사상 또는 지적 운동이었다. 동시에, 이는 혁신주의와 뉴딜을 계승해 민주주의와 개인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정부의 개입을 지지했다. 이러한 냉전 자유주의는 미국의 세기'를 떠받친 지적 기반이 되었다. 초기 냉전 시기, 즉 흔히 전후(postwar) 라고 불리는 기간 동안 미국은 국내적으로는 안정적인 경제성장을 이루고 복지국가를 건설해 나갔으며, 대외적으로는 단순한 강대국을 넘어 세계적 패권국으로 자리 잡았다.(p.353) |
| 본질적으로 냉전 자유주의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등장한 현대적 자유주의의 한 형태였다. 이는 연방정부가 국내에서 경제 정의를 보장하고, 국외에서는 민주주의적 가치를 방어하는 데 있어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신념에 기반했다. 그러나 냉전이 진행됨에 따라 냉전 자유주의의 모순과 한계, 특히 시민의 자유, 노동, 외교 정책에 대한 접근방식에서 그 한계가 점차 분명해졌다. 이번 절에서는 냉전 자유주의의 의미를 지성사적 관점에서 고찰하며, 그 기원과 발전, 한계, 그리고 궁극적인 쇠퇴 과정을 살펴볼 것이다. 냉전 자유주의는 지적 진공 상태에서 탄생한 것이 아니었다. 그 기원은 20세기초 혁신주의와 1930년대 뉴딜로 거슬러 올라 갈 수 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혁신주의 시대에 시어도어 루스벨트 같은 정치인들과 제인 애덤스, 허버트롤리, W. E. B. 듀보이스, 존 듀이와 같은 지식인들은 산업자본주의가 초래한 사회적·경제적·정치적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들은 시장과 기업을 규제하고, 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하며, 보다 공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정부가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뉴딜은 최신주의의 비전을 현실 정치에서 실현한 사례였다. 이 시기에 정부의 규모와 권한이 전례 없이 확대되었고 사회 안전망과 규제기관이 설립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정부가 경제와 개인의 권리를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을 더욱 강화시켰다. 결과적으로, 혁신주의와 뉴딤의 전통은 냉전 자유주의의 철학적 기초를 제공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국제정치의 지형은 극적으로 변화했다. 미국과 소련, 전쟁의 두 승자는 전후 시대에 초강대국으로 부상했다. 냉전기의 이념 대팀은 단순하지 않았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경제체제 간의 충돌은 민주주의와 독재라는 정치체제의 갈등과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남한과 에스파냐 다이완, 그리고 중동의 여러 왕국과 라틴아메리카의 독재 국가들의 사례처럼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소위 자유 진영'의 국가들이 반드시 민주주의를 수용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소련부터 동유럽 위성국가들까지, 중국과 북한부터 쿠바까지 사실상 모든 공산권 국가가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명목 아래 정치적 권위주의를 채택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p.354) |
| 이러한 국제질서는 미국의 냉전 자유주의가 해외에서는 공산주의 확산을 저지하는 한편, 국내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냉전 자유주의를 가장 선명하게 대변한 인물은 베드대학교의 역사학자이자 민주당 성향의 진보적 지식인인 아서 슐레진저(The Vital Center)』은 냉전 자유주의의 두 핵심 특징인 반공주의와 진보적 정책의 결합을 보여 주는 대표적 예시였다. 책의 제목에 등장하는 '중심'Kerter)이란 곧 민주주의, 다시 말해 좌파의 공산주의 독재와 우파의 파시즘 폭력에 맞서 개인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정치를 의미했다. 따라서 슐레진저는 미국이 진정한 '자유 진영'의 지도자가 되려면, 공산주의와 파시즘 모두를 철저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단순히 좌우 독재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공산주의와 파시즘을 피하며 중간길을 걷는 것은 '죽은 중심(dead center)"으로 가는 것에 불과했다. 그 중심이 살아 있기 Hinal" 위해서는 반드시 자본주의를 개혁해야 했다. 오직 그렇게 함으로써 미국은 "무책임한 금권정치의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전체주의의 심연'과 자본주의의 정글", 이 두 죽음의 길 사이에 슐레진저가 말하는 냉전 자유주의의길이 놓여 있었다. hur Schlesinger Jr., 1917~2007)였다. 특히 그의 1949년 저서 '살아 있는 중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지성계의 동향은 전반적으로 냉전 자유주의의 기조와 맞닿아 있었다. 시드니 훅(Sidney Hook, 1902~1989), 라이오넬 트릴링(Lionel Trilling, 1905~1975), 알프레드 카진(Alfred Kazin, 1915~1998) 등 이른 뉴욕 지식인들(New York Intellectuals)로 불리는 세속적 유대인 출신 작가물과 사상가들은 미국 자유주의가 반공주의, 더 정확히는 반전체주의(anti-Walitarianism)를 수용하는 지적 전환의 대표적인 예시이다. 이들은 대개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마르크스주의자였으나, 1930년대 후반 스탈린의 대숙청(Great Purge)을 지켜보며 소련 공산주의에 대해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 결정적으로 소련과 나치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 직전에 체결한 독소불가침조약 (The Molotov-Ribbentrop Pact, 1939)을 계기로 이들은 강경한 반공주의자로 전향하게 되었다.(p.355) |
|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독일 출신 유대인이자 뉴욕 지식인 집단의 대표적 인물이었던 해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는 1951년 그녀의 대표작 「전체주의의 기원(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을 출판했다. 이 저서에서 아렌트는 소련 공산주의와 독일 파시즘을 전체주의라는 동일한 범주로 묶으면서, 그 본질로 반유대주의, 제국주의, 인종주의가 결합된 정치적 동원을 제시했다. 특히, 그녀는 전체주의 체제가 대중사회의 고립된 개인들을 동원하고 억압하는 방식에 주목하며, 이러한 메커니즘이 어떻게 자유의 파괴로 이어지는지를 분석했다. 아렌트의 이러한 논의는 전체주의를 개인의 자유에 대한 최악의 위협으로 규정하며, 냉전 자유주의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뉴욕 지식인 집단이 낳은 또 다른 걸출한 사상가는 사회학자 다니엘 벨(Daniel Bell, 1919~2011)이었다. 그의 1960년 작 「이데올로기의 종말(The End of Ideology)』은 냉전 자유주의의 지성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제시한 저서였다. 이 책에서 벨은 사회주의, 공산주의, 파시즘 등 거대 이데올로기가 냉전이라는 역사적 경험 속에서 도덕적으로 파산했으며, 더 이상 이러한 이념들이 현대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유효한 틀이 될 수 없다고 분석한다. 그는 이념적 대립보다는 복지국가의 확립, 경제성장, 기술 발전과 같은 실용적인 문제가 전후 미국 정치의 중심 쟁점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논의는 냉전 자유주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반전체주의와 실용주의적 정치철학이 결합된 새로운 지적 흐름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으며,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념적 유연성을 강조하는 냉전 자유주의의 핵심 사상으로 자리 잡았다. 냉전 자유주의는 미국의 역사학과도 깊은 관련을 맺었다. 합의사학파(Consensus School)로 불린 역사학자들은 미국사를 특권층과 민중 간의 지속적인 갈등으로 해석한 찰스 비어드 등의 혁신주의 역사학을 비판하며, 미국 정치 문화가 자유민주주의적 가치에 대한 광범위한 이념적 합의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주장했다. 하버드대학교의 정치학자 루이스 하츠(Louis Hartz, 1919~1986)의 1955년 저서 「미국에서 자유주의 전통(The Liberal Tradition in America)」을 통해 미국 지성사를 보수주의와 사회주의가 모두 부재한 상황에서 자유주의라는 단일 이데올로기가 형성한 과정으로 정의했다. 컬럼비아대학교의 역사학자 (p.356) |
| 리처드 홉스테터(Richard Hofstadter, 1916~1970)는 합의학과 역사학을 집대성 한 인물이었다. 그는 「미국의 정치적 전통(The American Political Traditionly (1948)과 「개혁의 시대(The Age of Reform)』(1955), 미국사에서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 in American Life)』(1963) 등 일련의 저작들을 통해 미국 지성사의 핵심을 자유방임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진보적 자유주의에 대한 합의에서 찾았다. 국내적으로 냉전 자유주의는 뉴딜의 경제적·사회적 성과를 확장하려는 목표를 지향했다. 이 과정에서 노동조합, 특히 산별조직회의(Congress of Industrial Organizations, CIO)와 전미자동차노조(United Auto Workers, UAW)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UAW의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 월터 루터(Walter Reuther, 1907~1970)는 노동운동을 단순한 임금인상과 노동조건 개선에 그치지 않고, 더 넓은 사회적 개혁을 위한 도구로 활용했다. 루터의 지도 아래 UAW를 비롯한 노동조합들은 민주당, 진보적 지식인, 민권운동 단체와 연대하여 전후 미국에서 개혁 정치의 중심축으로 자리 잡았다. 노동조합은 보편적 의료보험. 완전 고용, 사회 안전망 구축 등 경제적 성장과 복지 확장을 목표로 하는 진보적 정책들을 지지했다. 냉전 자유주의자들은 공산주의 확산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고 복지를 확대해야 한다고 보았으며, 이러한 목표를 실현하는 데 있어 노동조합을 중요한 파트너로 인식했다. 결과적으로 냉전 자유주의는 노동계와 협력하여 사회적 복지와 경제적 안정성을 확보하려 했고, 이는 냉전적 이념 대립 속에서 미국 민주주의의 우월성을 증명하려는 전략의 일환이었다. 냉전 자유주의가 미국의 국제관계에 미친 지적 영향은 근대화(modernization) 담론에서 잘 나타난다. MIT의 경제사학자인 W. W. 로스토(Walk W. Rostow 1916~2003)는 그의 1960년 작 「경제 성장의 단계들(The Stages of Economic Growth)』에서 저개발 국가들이 미국을 비롯한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모델을 모방함으로써 시행착오를 줄이고 빠른 경제성장과 사회적 근대화를 이룰 수 있다고 주장했다. 로스토의 근대화론은 경제발전을 제3세계에서 공산주의 확산을 막는 수단으로 정의함으로써 냉전 자유주의의 목표와 부합했다. (p.357) |
| 그러나 그의 이론은 각국의 고유한 역사적·문화적 맥락을 무시하고, 서구 중심적 발전 모델을 강요했으며, 경제성장 과정에서 나타나는 사회적 불평등과 정치적 갈등을 고려하지 못했다는 한계를 지녔다. 실제로 로스토는 존 F. 케네디(John F. Kennedy, 1917~1963)와 린든 존슨(Lyndon B. Johnson, 1908~1973) 대통령의 고문으로 활동하며 미국 외교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이 과정에서 그의 이론은 베트남전쟁이라는 미국 외교의 참사를 초래한 원인 중 하나로 비판받기도 했다. 냉전 자유주의는 전후 미국의 번영과 안정을 이끈 지적 흐름이었으나 동시에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그중 가장 두드러진 문제는 매카시즘과 같은 극단적인 반공주의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1940년대 후반부터 1950년대 초반까지. 중국의 공산화와 한국전쟁과 같은 국제적 맥락 속에서 공화당의 위스콘신 상원의원 조지프 매카시(Joseph McCarthy. 1908~1957)의 주도로 공산주의자 또는 공산주의 동조자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색출하고 탄압하는 적색 공포(Second Red Scare)가 벌어졌다. 이러한 매카시즘 광풍은 미국 사회 전반에 깊은 공포와 불안을 몰고 왔다. 시드니 훅이나 존 F. 케네디 등 자유주의를 표방했던 많은 지식인과 정치가가 매카시즘에 동조했고, 매카시에게 비판적이었던 자유주의자들도 반공을 명목으로 자행했던 빨갱이 사냥을 효과적으로 저지하지 못했다. 그 결과 냉전 자유주의는 표현과 양심의 자유라는 자유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가치를 방어하는 데 실패했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다. 냉전 자유주의의 한계를 가장 날카롭게 지적한 비판 중 하나는 내부에서 제기되었다. 냉전 자유주의의 대표적 지식인이자 진보적 경제사상가인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John Kenneth Galbraith, 1908~2006)는 그의 저서 「풍요의 사회(The Affluent Society)』(1958)에서 당시 미국이 누리고 있던 물질적 번영의 명암을 근본적으로 성찰했다. 갤브레이스는 미국이 전례 없는 경제성장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부의 분배는 불균등하며, 인종주의와 같은 사회적 불평등이 여전히 깊이 뿌리박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특히 전후 미국의 자유주의자들이 경제성장에 지나치게 집착한 결과, 사회적 복지와 공공재를 소홀히 했다고 (p.358) |
| 비판하며 교육, 보건, 환경, 사회 기반시설 등 공공재에 대한 투자를 강화할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러한 비판은 당시 미국 사회에서 빈부격차와 사회적 불평등 문제에 대한 논의를 촉발시키며, 냉전 자유주의가 제시한 경제성장 모델이 실제로 사회적 정의와 복지, 그리고 삶의 질 향상에 얼마나 기여했는지를 진지하게 재고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1960년대에 등장한 페미니즘 운동은 냉전 자유주의가 가진 또 다른 한계를 드러냈다. 베티 프리단(Betty Friedan, 1921~2006)은 그녀의 저서 「여성성의 신화(The Feminine Mystique)』(1963)에서 당시 미국 사회가 강요한 전통적인 성역할에 대한 강력한 도전을 제기했다. 그녀는 특히 중산층 여성들이 가정에 머물며 전통적인 아내와 어머니 역할을 강요받는 현실에 주목하면서, 그러한 여성들이 느끼는 내면적 갈등과 불만, 즉 이전까지 '이름 없는 문제로 취급되었던 감정을 사회적 문제로 공론화시켰다. 프리단의 비판은 단지 가정 내에서의 성역할에 그치지 않고, 사회 전반에 걸쳐 여성들이 공적 영역에서 배제되고, 정치와 경제적 의사결정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구조적 문제틀 지적했다. 페미니스트들은 뉴딜의 경제적 번영과 전후의 경제성장에서 여성들이 가정이라는 사적 영역에 갇혀 공적 자원의 혜택을 제대로 누리지 못한 점을 비판했으며, 이를 통해 냉전 자유주의의 성평등과 관련한 한계를 폭로했다. 프리단의 저서는 이후 페미니즘 운동이 미국 사회의 젠더 문제를 논의하는 주요담론으로 자리 잡게 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냉전 자유주의가 가장 근본적인, 그리고 동시에 복합적인 영향을 준 당대 미국사회의 사건은 바로 민권운동이었다. 냉전은 미국 민주주의의 모순을 드러내는 계기였다. 마틴 루서 킹(Martin Luther King Jr. 1929~1968)과 같은 민권운동의 지도자들이나 NAACP를 비롯한 흑인 단체들은 냉전 수사학을 전략적으로 활용하여, 미국이 해외에서 자유의 가치를 옹호하면서도 국내에서 유색인 시민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하지 않는 모순을 폭로했다. 이러한 이중성은 공산주의 진영과의 경쟁에서 미국의 약점으로 작용했으며, 특히 소련이 미국의 인종차별 문제를 집중적으로 비판함으로써 자유 진영의 도덕적 지도자로서의 미국의 권위가 손상되었다. 이에 미국의 자유주의자들은 인종 문제를 적절하게 해결할 필요성을 느꼈고, 민권 개혁에 나서게 되었다. (p.359) |
| 1948년 트루먼 대통령은 군대 내 인종차별을 철폐하는 행정명령 (Executive Order 9981)을 발표했고, 린 든 존슨 대통령은 1964년 민권법(Civil Rights Act)과 1965년 투표권법(Voting Rights Act)을 연이어 통과시키며 냉전적 이념 대립 속에서 자유주의의 가치를 확립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개혁들은 민권운동의 중요한 성과로 평가 되었으며, 미국이 인종차별을 극복하고 자유와 평등의 이상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커다란 이정표가 되었다. 그러나 냉전 자유주의가 민권운동에 미친 영향은 긍정적인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전후 미국 정부가 추진한 개혁들은 인종에 관한 법적 차별 철폐에는 기여했으나, 경제적 불평등과 구조적 인종차별 같은 뿌리 깊은 문제들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마틴 루서 킹은 냉전 자유주의가 공산주의와의 이념 대립을 최우선 과제로 삼은 탓에, 경제적 불평등 해소와 사회정의 실현에 소홀했다고 비판했다. 킹의 비판은 민권운동의 범위를 법적 차별 철폐로부터 사회 전반의 구조적 불평등과 경제적 소외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넓혔다. 1960년대 후반부터 등장한 블랙파워(Black Power)와 같은 급진적 흑인 운동은 냉전 자유주의에 대해 더욱 비판적이었다. 이들 운동은 법적 차별 철폐만으로는 미국 사회에 깊이 뿌리박힌 인종주의를 극복하는 데 충분하지 않으며, 진정한 자유와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재분배와 사회정의, 나아가 미국의 대외 군사개입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결국 냉전 자유주의는 법적 개혁을 통해 부분적인 성과를 거두었으나, 민권운동이 요구한 더 폭넓은 사회경제적 정의와 반(反)제국주의적 요구를 충족시키는 데에는 실패했다. 냉전 자유주의의 여러 한계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1960년대 후반 미국은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특히 베트남전쟁은 냉전 자유주의의 쇠퇴를 알리는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1965년을 기점으로 린든 존슨 대통령이 베트남전쟁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대규모로 확대하면서, 전후 미국 자유주의에 내재된 모순들이 더욱 명확해졌다. 냉전 자유주의자들은 민주주의와 인권을 옹호하는 입장을 고수했지만, 그들의 베트남전쟁 지지는 점차 제국주의적이고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행위로 인식되었다. 이는 냉전 자유주의의 외교정책이 가진 근본적 한계를 여실히 드러낸 사건이었다. (p.360) |
| 민주주의 확산을 표방하면서도, 냉전 자유주의는 반공주의를 이유로 독재 정권을 지원하는 모순적인 정책을 지속했으며, 이러한 이중적 태도는 베트남전쟁에 대한 국내외적 반대가거세지면서 더 이상 정당화될 수 없었다. 1960년대 후반에 들어 냉전 자유주의는 점차 도덕적 권위를 상실했다. 반전운동과 사회적 갈등이 고조됨에 따라 냉전 자유주의의 기반이었던 자유주의적 합의는 무너져 갔고, 이는 미국 사회 내 새로운 정치적 흐름과 사상적 전환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베트남 전쟁을 계기로 새로운 세대의 지식인과 사회운동가가 등장하면서 냉전 자유주의의 대안을 모색하는 흐름이 본격화되었다. 이들은 스스로 신좌파(New Left)라고 칭하며, 냉전 자유주의의 한계를 비판했다. 신좌파는 냉전 자유주의자들이 반공을 구실로 세계 각지의 우파 독재 정권을 지지하는 모순을 지적했다. 또한 경제성장을 최우선으로 삼는 정책들이 결국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근본적인 사회정의를 외면한다고 보았다. 신좌파의 대표적 조직인 민주사회를 위한 학생연합(Students for a Democratic Society, SDS)은 반공과 경제성장을 대신하여 '참여민주주의(participatory democracy)'를 새로운 정치적 패러다임으로 제시했다. SDS는 소수의 엘리트가 좌우하는 기존의 대의민주주의가 베트남전쟁과 같은 참사를 야기했다고 비판하며, 시민이 정치과정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베트남전쟁의 종식을 외치며, 미국의 제국주의적 개입을 중단하고 자국 내 자원을 경제적 불평등과 사회적 문제 해결에 집중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다른 모든 이데올로기와 마찬가지로 냉전 자유주의 역시 많은 문제점을 내포 자유주의의 중요한 전환점을 대표하는 지적 흐름이었다. 이 이론은 개인의 자 했고, 그로 인해 영원히 지속되지는 못했으나, 그것은 20세기 중반 미국 현대 경제적 안정과 사회복지를 목표로 정부의 역할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혁신 유와 민주주의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을 정당화했으며, 을 저지하고, 국내에서는 민주주의와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방향으로 나아 주의와 뉴딜의 전통을 계승한 냉전 자유주의는 국제적으로는 공산주의의 확산갔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냉전 자유주의는 미국이 세계적으로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하는 데 기여했으며, 미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p.361) |
| 그 한계에도 불구하고 냉전 자유주의의 지적 유산은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전후 미국은 공식적인 인종차별 철폐, 경제적 복지 확장, 공공재 투자와 같은 성과를 남겼으며, 오늘날에도 민주주의와 개인의 자유를 위한 국가의 역할을 고민하는 데 중요한 참고자료가 된다. 비록 냉전 자유주의는 내재된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사라졌지만, 현대 민주주의와 사회정의에 대해 성찰하는 과정에서 여전히 돌아볼 가치가 있다.(p.362) |

첫댓글
2-1 서구지성사입문
제13장 『세계대전 이후(미국의 시대)』
교재 본문을 스캔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