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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제주작가 스크랩 제주작가 가을호의 특집
김창집 추천 2 조회 128 12.10.26 16:27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사단법인 제주작가회의가 발행하는

계간 ‘제주작가’ 가을호(38호)가 나왔다.

 

이번호의 특집은

올 여름에 우리 곁을 떠나버린 문우

고 정군칠 시인의 삶과 문학을 다루었다.

 

2편의 조시와 5편의 대표시, 3편의 유고시

따님의 회고 글과 친구, 제자의 글로 이루어졌다.

 

그 중 시 8편을 골라

어제 한대오름 다녀오면서 찍은 단풍 사진과 함께 올린다.

 

단풍은 세 번의 태풍에 찢기고 떨어지고

바이러스 때문에 상처나고

얼마 안 남은 것도 아직 제 색이 안 난다.  

 

 

[조시]

♧ 칸나 한 뿌리 슬쩍 해야겠네 - 김성주

     - 故 정군칠 시인 영전에

 

그대의 배경에선 늘

베릿내, 그 서늘한 청록빛 일렁이었지

 

오일장 할머니장터, 선흘리 동백동산, 모슬포 저잣거리, 가문동 포구…

그대 따라 타박타박 거닐던

그 청록빛 이파리들은 어김없이 선홍빛 꽃을 피웠지

 

지금 진실로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그대가 피워놓은 꽃 무더기 속에서

순한 두 눈을

베릿내의 맑고 서늘한 소리들을 그리고,

그리고 말일세

그대의 꽃송이 속 꿀물

땀방울 같은

눈물 같은

그마저 찾는 날들이 드문드문하다가

아주 뜸해지는 것이라네

하여, 그대의 작업실 앞 소공원에서 칸나 한 뿌리 슬쩍해야겠네

 

‘형, 다 썼으면 보자’

남의 꽃도 제 꽃인 양

진딧물 잡으려고

빨간 볼 펜 드는가

아, 못 말리는

그대

 

먼저 서천으로 가 있게나

칸나 꽃 지면 칸나 꽃 보러

그대 찾아 가겠네   

 

 

♧  동박새 - 문복주

 

친구가 하늘나라에 간다

내가 가리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선수 친다

하늘길은 찾았어?

링거에 있던 그가

별거 아니야 가다 보면 하늘에 닿아

너한테만 말해 줄게

이정표대로만 가야만 되는 줄 알았어

내가 걸은 길 모두가 하늘로 가는 길이었어

숲의 끝이 아니었을까

하늘 당당히 맞서 비상하여 맞닿은 선

어디서 그 당당한 선을 놈은 발견했을까

선을 알고 수직으로 한끝 긋더니

알 수 없는 곳으로

높고 깊이 꽂히어 하늘 끝으로 날아간다

동박새 울음 창가에 즐거웁다  

 

 

[대표시]

♧ 가문동 편지 - 정군칠

 

낮게 엎드린 집들을 지나 품을 옹송그린 포구에

닻을 내린 배들이 젖은 몸을 말린다

누런 바다가 물결져 올 때마다

헐거워진 몸은 부딪쳐 휘청거리지만

오래된 편지봉투처럼 뜯겨진 배들은

어디론가 귀를 열어둔다

 

저렇게 우리는,

너무 멀지 않은 간격이 필요한 것인지

모른다 우리가 살을 맞대고 사는 동안

배의 밑창으로 스며든 붉은 녹처럼

더께진 아픔들이 왜 없었겠나

빛이 다 빠져나간 바다 위에서

생이 더욱 빛나는 집어등처럼

마르며 다시 젖는 슬픔 또한 왜 없었겠나

 

우리는 어디가 아프기 때문일까

꽃이 되었다가 혹은 짐승의 비명으로 와서는

가슴 언저리를 쓰다듬는 간절함만으로

우리는 또 철벅철벅 물소리를 낼 수 있을까

 

사람으로 다닌 길 위의 흔적들이 흠집이 되는 날

저 밀려나간 방파제가 바다와 내통하듯

나는 등대 아래 한 척의 배가 된다

이제사 너에게 귀를 연다  

 

 

♧ 달의 난간

   --涯月애월

 

  파도는 부드러운 혀를 가졌으나 이 거친 절벽을 만들었습니다

 

  열이레 가을 달로 해안은 마모되어 갑니다 지워지다 이어지고 이어졌다 끊어지는 신엄의 오르막길, 바다와 가장 가까운 벼랑에 이르자 누군가 벗어놓은 운동화 한 켤레 가지런히 놓여 있습니다

 

  생의 난간에 이르면 달빛 한 줌의 가벼운 스침에도 긁힌 자국은 선연할 터인데 내 안의 빗금 같은 한 무더기 억새, 바싹 다가온 입술이 마릅니다

 

  生涯생애의 끝에 이르러 멈추었을 걸음 망설임의 흔적인 듯 바위틈에 간신히 붙은 뿌리, 뿌리와는 달리 땅 쪽으로 뻗은 가지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습니다

 

  누군가 온몸으로 지나간 길, 마음 한번 비틀어 曲을 만들고 마음 다시 비틀어 折을 만들었으나 길 밖을 디뎠을 자의 흔적은 허공뿐입니다

 

  자주 바람 불어 달이 잠시 흔들렸으나 죽음마저 품어버린 바다는 고요합니다  

 

 

♧ 바다의 물집

 

환한 빛을 따라 나섰네

지금은 달이 문질러 놓은 바다가 부풀어 오르는 시간

여에 부딪치는 포말들을

바다의 물집이라 생각했네

부푸는 바다처럼 내 안의 물집도 부풀고

누군가 오래 서성이는 해변의 밤

온통 흰 꽃 핀 화엄의 바다 한켠?

애기 업은 돌을 보았네

그 형상 더욱 또렷하였네

 

제 몸을 밀어내고 다른 몸을 품고서야 바다는

해변에 닿는다지

버릴 것 다 버린 바다의 화엄이

저 돌로 굳은 것일까

걸러내야 할 것들이 내게도 참 많았네

목이 쉬도록 섬을 돌았네

단지 섬을 돌았을 뿐인데 목이 쉬었네

파도의 청징淸澄한 칭얼거림이 자꾸만 들려왔네

깍지 낀 손 풀어 그 울음 잠재우고 싶었으나

달빛은 바다 위에서만 출렁거리고

나는 서늘한 어둠의 한켠에 오래

오래 머물지 못했네   

 

 

♧ 베릿내의 숨비기꽃

 

물총새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는다. 베릿내에는

고향 뜨며 거둘 새 없던 숨비기꽃 겨우 몇 포기

바다마을을 지킨다.

이 척박한 바위틈에 어머니의 숨비소리

꽃으로 타오른다.

제기랄.

지금은 어머니 산소 다녀오는 길

어깨 늘어진 숨비기꽃도 함께 다녀오는 길

봉분의 흙 한줌 가져와 꽃부리 덮어주면

어느새 내 등에 얹혀오는 따뜻한 손이 있다.

 

사라호 태풍이 일던 아침

물이 불어난 내를 거슬러 오르던 은어떼로

갈대들의 사타구니는 오싹오싹 긴장을 하고

마을을 에워싼 숨비기꽃은 바람을 잘도 막아 주었다.

다시 태풍이 불었다.

그 이름 없는 태풍에는 희한하게도 물이 줄어들었다.

은어떼는 흙탕물에 방향을 잃고

갈대들은 몸 추스릴 새도 없이 흙더미에 묻혀버렸다

숨비기꽃은 이파리 찢기며 나팔을 불어댔지만

자갈을 퍼 올리는 중장비의 굉음에 묻히고 말았다.

바삐 도망치는 게 한 마리

게 한 마리처럼 집을 빠져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그게 칭원하여 바다는 거품을 물었다.

 

아득도 하여라

강산은 일 년만에도 변하여

그 일 년이 스무 번을 넘겼고

누이의 젖살 같은 베릿내에는

방황의 냇둑을 굽이 안고 돌아

숨비기꽃의 낭자한 상처를 아물리고 있다. 

 

 

♧ 칸나

 

날마다 철공소에서는

시퍼런 정신이 튀어 오르네

 

굽어 있던 철근들이 몸 피는

소리 들려오네

 

팅,

 

팽팽히 조율하며 살의 결을 타고

튀어 오르는 저 징한 소리들

 

오늘 한 송이 붉은 칸나로 피어올랐네  

 

 

♧ 입체화 한 장

 

앓아누운 아버지 등이 허물어졌다

욕창이 아물던 자리마다 살비늘은

시든 꽃잎으로 떨어져

강력세제로도 지워낼 수 없었다

구겨질 대로 구겨진 요 껍데기 위

늙은 육신이 피워내던 꽃송이들은

아버지의 허물이었다

 

소나무 등피에 달라붙은

매미의 허물을 본다

몸을 바꾸는 순간

등짝이 갈라지던 고통

손톱과 발톱은 또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을까

탈피각을 부여잡는 매미의 울음이

소나무 가지 위에서 쏟아진다

 

네가 내 곡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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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2.10.27 06:57

    첫댓글 선생님께서 들려주셨던 시작노트의 배경들이 되살아납니다. 겉으로는 냉정했지만 속에서 들끓던 열정과 다정다감.
    만나서 좋았던 인연입니다. 가문동 편지, 고내리, 베릿내의 숨비기꽃...선생님의 눈매가 떠오르게 하는 시편들입니다.
    ...... 편히 쉬고 계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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