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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는 자오싱을 떠나 청양(程陽)으로 간다. 자오싱에서 청양 마안짜이로 바로 가는 버스는 없고 산지앙(三江)이라는 곳으로 버스를 갈아타고 들어가야 한다고 한다. 9시 20분에 산지앙으로 가는 버스를 탄다. 자오싱에서는 버스터미널이 없어 아침 일찍 출발하는 버스 편이 없고 다른 곳에서 자오싱을 거쳐 가는 버스를 타야 해 이 차가 첫 차인 셈이다. 40원/1인을 냈지만, 버스에 따라 금액이 다른 나라다.
버스는 동쪽 산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간다. 산에는 무수한 다랑논이 펼쳐져 있어 볼거리를 제공한다. 정상부근에 다른 동족마을 탕안동짜이(堂安侗寨)라는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다. 카메라를 든 한 중국 사내가 탕안 입구에서 내려 마을로 걸어 들어간다. 이곳 정보가 없어, 그냥 지나쳤는데 혹시 자오싱을 방문하면 지저분한 자오싱보다 이곳을 방문하는 것은 어떨까? 위치는 자오싱에서 산지앙 방면으로 산길을 올라 정상부근에 마을 입구가 있다.
9시20분에 출발한 버스는 3시간 만인 12시20분에 산지앙 하동터미널에 도착한다. 산지앙은 큰 강이 도시를 동서로 나누었는데 한곳은 하동(河東)이라 부르고 다른 곳은 당연히 하서(河西)라고 한다. 터미널 앞에는 청양마안짜이라는 푯말을 든 사람이 많아 물어보니 미니버스를 타란다. 시외버스는 이곳 하동 터미널에는 없고 강을 건너 하서 터미널에서만 출발한단다.
우선 다음에 이동할 롱성으로 가는 버스 편을 확인하고 천천히 걸어 다리를 건넌다. 다리 이름이 고의교(古宜橋)라고 되어 있는데 워낙 다리가 오래되어 노후화가 무척 심하다. 다리를 건너면 끝에 삼거리가 있고 그 앞에 하서터미널이 있다. 터미널을 확인하고 그 부근에서 밥을 먹는다.
배낭을 멘 우리를 보고 미니버스 대부분은 청양치아오(程陽橋)라고 쓴 간판을 보이며 타라고 한다. 어찌 알았을까? 등산복만 입으면 모두 청양 풍우교를 간다고 생각하나 보다. 식사를 마친 후 터미널에 들어가 보니 방금 버스가 출발해버려 한참을 기다려야 해 큰길로 나와 6원/1인에 미니버스를 타고 마안짜이로 간다. 마안짜이까지 요금은 시외버스나 미니버스나 같다.
버스를 타려면, 린시(林溪)로 가는 버스를 타면 청양마안짜이를 거쳐 가기 때문에 린시행 버스를 타야 한다. 시간표에 보니까 7시30분부터 17시30분까지 30분에 한 대씩 출발한다.
우선 청양이 어디에 있으며 산지앙에서 어느 방향인가부터 알아본다. 우리는 대부분은 구이저우 성을 돌아다녔는데 청양은 구이저우 성이 아니고 광시성이다. 처음 출발을 광동성 광저우에서 출발해 광시의 난닝으로 넘어가며 시작된 여행이 이제 한 바퀴를 돌아 다시 광시성으로 온 것이다.
미니버스는 청양치아오(程陽橋) 경구라는 현판이 걸린 대문 입구에 세우고 사진을 찍으라고 한다. 사진 한 장 찍고 들어오니 자기 집이 마안짜이인데 마을로 들어가는 입장료가 60원이며 자기가 가지고 있는 문표를 두 장에 30원에 팔겠다고 한다. 반에 반값이라 당장 OK한다. 여기서 잘 알아두어야 하는 게 바로 두 장에 30원이라는 말이다. 미리 수첩에 적어서 확인을 받아둔다.
우리를 태운 미니버스는 세계 제일의 풍우교라는 청양 영제교를 조금 못미처 차가 다니는 풍우교처럼 생긴 다리를 건너 마을 안으로 들어간다. 아마도 이 길은 마을 사람만 이용하기에 지키는 사람이 없나 보다. 버스는 마을 안까지 들어와 내리는데 말이 조금 전과는 바뀐다. 두 장에 30원이 마을 안에 들어와서는 한 장에 30원이란다. 처음 약속대로 두 장에 30원에 주려면 주고 아니면 우리는 풍우교를 보았으니 그냥 산지앙으로 돌아가겠다고 한다. 한국인에게 이기지도 못할 싸움을 중국인이 까불고 걸어온다. 사실 이곳에 오는 사람 대부분이 풍우교를 보러 오는 것이고 풍우교는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기에 그냥 무료로 본다.
두 장에 30원 주고 표를 받아 살펴보니 날짜가 하루 지난 표다. 동네사람들이 관리자와 짜고 하루 지난 표를 조직적으로 돌리는 것 같은데 표는 2일간 유효하기에 별 문제가 없었고 나중에 마을을 돌아다니다 보면 불심검문처럼 표 검사를 받는다. 그러기에 마을 안에 들어왔다고 표를 안 받아도 된다는 생각은 하지 말아야한다. 볼 게 더 많고 규모도 큰 시지앙도 60원이인데 이곳의 문표가 60원이면 무척 비싼 편이다.
산지앙에서 1시20분에 출발해 30분 걸린 1시50분에 마을 안에 도착한다. 청양 마안짜이는 자오싱과 같은 동족의 마을로 세상에서 가장 볼만한 풍우교가 있는 곳이다. 1916년에 건설된 청양 영제교라는 풍우교는 길이가 64.4m에 너비가 3.4m이고 높이가 10.6m의 대단한 건축물이다.
청양 마안짜이(程陽馬鞍寨)는 린시(林溪)로 이어지는 골짜기에 살아가는 여러 개의 동족 마을 중 한 곳으로 지도에서 보면 제일 아래에 있는 마을이 마안짜이다. 마을에 대한 첫 느낌은 무척 편안하다는 생각이 든다. 강이 마을을 한 번 감싸 안아주고 돌아 나간다. 마안(馬鞍)이라는 말은 말의 안장이란 뜻이다. 마을 모양이 마치 말의 안장처럼 생겼다고 하여 마안짜이라고 이름 지었다고 하는데 높은 곳에 올라가 보면 정말 말의 안장처럼 생겼다.
관광객 대부분은 청양을 갈 때 중국에서 가장 큰 풍우교를 보기 위함이다. 제일 볼만한 풍우교는 규모가 대단히 위압적이고 모양도 멋지다. 1916년에 만들었다고 하니 이제 100년이 넘었는데 100년 전에 이런 건축물을 못을 사용하지 않고 돌을 쌓고 그 위에 만들었다고 하니 동족의 건축술은 인정해야 할 것 같다. 과연 동족이 자랑할 만한 최고의 건축물이 청양 영제교라는 풍우교다.
마안짜이부터 7개의 동족마을이 뒤로 더 있지만, 대부분 관광객은 숙소가 마안짜이 마을에만 있어 마안짜이에 머문다. 그러나, 대부분 관광객은 풍우교만 바라보고 돌아서거나 매일 마을에서 공연하는 순박한 학예회 수준의 율동만 보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난다고 한다. 마안짜이에서 핑짜이로 건너가는 다리 위에는 동족이 자랑하는 큰 북이 풍우교 오른쪽 끝에 있다.
허롱치아오(合龍橋)라는 풍우교 안에는 사당이 마련되어 있다. 지금까지 보았던 풍우교 안에서는 이런 모습을 보지 못했다. 풍우교는 그냥 건너다니는 다리 역할만 하는 게 아니라 마을과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 안녕과 행복을 위해 빌고 싶은 곳을 마련해 놓고 지나다니며 언제나 빌 수 있게 해놓았다.
우리가 묵었던 숙소 건너편은 엔짜이라는 마을인데 마을 가운데 고루가 마을을 굽어보고 있어 동족의 마을임을 멀리서도 바로 알 수 있다. 옌짜이 마을로 간다. 우리는 마을을 산책하면서 그냥 기웃거리고 눈이라도 마주치면, "니하오, 안녕하세요."로 인사를 하고 다닌다.
골목길을 걷는다는 일은 전혀 돈이 들지 않고 사람 사는 안으로 들어갈 수 있어 좋다. 마안짜이 마을을 출발해 옌짜이로 건너가 핑짜이를 거쳐 돌아오는 코스가 일반적인 트레킹 코스라고 한다. 마을길에는 곳곳에 이정표가 있어 길을 잃을 염려가 없어 무척 산책하기 좋은 곳이다.
엔짜이에 있는 고루는 마안짜이 고루보다 더 크고 웅장하다. 지금까지 보고 온 고루 중 최고다. 비록 풍우교가 마안짜이에 비하여 작은데 마을로 들어가는 강의 크기가 작으니 풍우교가 작을 수밖에 없지만 고루 만큼은 마안짜이보다 더 높고 크게 만들었다.
조상이 처음 마을을 세울 때 만든 우물이 이곳에도 있는데 이 우물은 아직도 중요하게 사용 중인지 지붕까지 만들어 놓아 무척 정겨운 모습이다. 지나가는 나그네도 물을 마실 수 있게 표주박도 있고 플라스틱 바가지도 있다.
아주 오래된 골목길도 들어가 보니 집 모양이 금방 허물어질 것 같은 모습이지만, 이렇게 조상 대대로 살아가고 있다. 이제 다음 세대가 물려받아 또 이렇게 살아갈 것이다.
마을 잔치라도 하는지 마을 사람이 둘러앉아 식사를 하고 있다. 원래 동족의 잔치 모습을 백가연(百家宴)이라고 부르는데 백가연(百家宴)이란 집집이 음식을 장만해 마을 가운데 긴 식탁을 놓아 그 위에 가져온 음식을 모두 올려놓고 함께 즐기는 일을 말한다. 동족뿐 아니라 이 근방에 사는 모든 소수민족이 마을 자체가 연대감이 강해 그렇게 먹고 마신다. 그 이유는 워낙 교통이 불편하고 서로 간 왕래가 없어 마을 자체가 하나의 성씨로 이루어졌기에 그렇게 함으로 가족뿐 아니라 마을 사람들 간에 더욱 결속을 단단히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을을 돌아보다 보면 대부분의 여자들은 결혼 여부를 떠나 모두 손에 슬리퍼를 들고 수를 놓고 있다.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사랑하는 연인에게, 결혼한 사람은 가족에게 신기려고 모두 예쁜 수를 놓고 있다. 비단 이곳만 아니라 중국을 다니다 보면 여자 대부분은 여행 중에도, 공연장에 앉아 공연을 기다리면서도, 여행 중에 버스 안에서도 손에서 뜨개질을 멈추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또 그보다 많은 남녀가 아무 곳에서나 마작이나 즈파이라는 놀음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루가 동족이고 동족이 고루인 동족이 사는 마을엔 어김없이 고루가 있다. 고루란 말 그대로 북을 보관하는 누각을 말하는데 마안짜이에서 핑짜이(平寨)로 가는 풍우교 끝에 보관된 동족고왕(侗族鼓王)이라고 이름 지어진 대형 북은 고루 위에 올라가 있지 않다. 아마 동족이 만든 북 중에 제일 큰 북인 것 같은데 북에다 두 마리의 용 문양을 그려 구름 사이를 날아다니게 했다.
오후 3시30분에 마을 고루 앞에 있는 마당에서 동족의 공연이 있다고 해 숙소에 무거운 배낭을 내려놓고 마을을 산책하다 시간을 맞추어 공연장으로 가는데 완장 찬 사람이 문표를 보자고 한다. 마을을 돌아다닐 때 문표는 꼭 지니고 다녀야한다.
재미있는 것은 동족의 마을에는 고루 옆에 연못을 꼭 만들어 화재를 예방하고 나무가 건조해져 고루가 틀어지는 것도 예방한다고 하는데 마안짜이에는 연못이 없다.
결혼 풍습에 결혼해도 아이를 낳기 전에는 함께 살 수 없고 친정집에서 기거하다가 명절이나 기념일에만 남편의 집에 다녀오다 아이를 생기면 비로소 부부가 한집에 산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남자의 힘이 강하고 재산의 상속은 남자에게만 이루어지고 상대적으로 여자의 지위가 낮았다고 한다.
동족의 역사는 진(秦)나라로 거슬러 올라가 당시에 백월(百越)이라 불리면서 하나의 민족으로 자리 잡았고 그 후 명, 청 시기에는 이들 거주지가 주로 깊은 산 속에 산다고 山+同을 써 동(峒)족이라 했으나 중화인민공화국 때부터 人+同을 쓰는 동(侗)족으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중국에서 동(侗)의 의미는 '무지하고 미련하다.'라는 의미라서 동족은 예전 이름인 동(峒)을 그대로 사용하기를 원한다고 한다.
동족이 가장 좋아하는 나무는 삼나무로 우리나라에서 딸아이를 낳으면 오동나무를 심듯이 아이를 낳으면 집을 지어주기 위해 삼나무를 심는다고 한다. 그러니 동족은 "벽오동 심은 뜻은~"이 아니고 "삼나무 심은 뜻은 봉황을 보잤더니~"였다.
공연은 30분 남짓 계속되는데 출연 인원도 시지앙처럼 많지 않다. 마안짜이 마을은 관광객이 많은 시기에는 야간공연까지 있지만, 우리가 방문한 시기에는 낮 공연만 1회 만 한다. 시지앙의 먀오족 공연을 보았기에 동족의 공연은 어떨까 기대를 많이 했지만 이곳 공연이야말로 그냥 동네 아줌마 아저씨가 출연하여 순수하고 꾸밈없이 즐기는 모습이다. 그러나 보는 사람에 따라 이게 순수예술이고 그들의 살아있는 동네놀이라 할 수 있다. 출연자 모두는 정말 즐거운 마음으로 마음의 웃음을 띄고 노래하고 춤을 춘다.
공연 내용도 먀오족과 대동소이하다. 루성이라는 악기를 부는데 그리 신통치 않고 술은 중간에 꼭 먹인다. 술잔을 들고 추는 춤을 춘다. 이번에는 잔이 모자라 항아리 째 들고 나와 술을 잔으로 권하다가 항아리 째 권한다. 술에 한이 많은 민족인 것 같다.
동족은 그들이 입는 옷을 리앙부(亮布)라고 부르는데 양(亮)이란 말은 빛난다, 또는 밝다라는 의미인데 옷감을 만드는 것을 자오싱에서 보았듯이 자연에서 채취한 염료성분의 잎을 우려내 그 안에 옷감을 담가뒀다가 건조하고 다시 물에다 빨고를 한 달에서 두 달 동안 여러 번 반복하는 과정을 거치면 옷감은 흰색에서 점차 푸른색으로 변하고 결국 짙은 청색으로 변한다. 이렇게 만든 옷감을 다듬잇돌 같은 곳에 올려놓고 나무 방망이로 두드리면 옷감은 부드럽게 변하고 질겨진다.
동족의 풍습 중 비파 송(Pipa song)이라고 하는 행가좌야(行歌坐夜)가 있는데 해질 무렵 젊은 처자는 가족이 함께하는 집안에 앉아 연인을 기다리면 저녁 식사 후 한 무리의 젊은 남자가 비파라는 악기를 들고 여자의 집을 방문해 모두 둥그렇게 거실에 둘러앉아 어른들의 감시 아래 사랑의 노래도 부르고 대화도 하는 동족 특유의 구혼행위다. 자기들끼리 연애질하는 행위는 원천 봉쇄했지만, 사랑이란 게 어찌 어른들 생각대로만 되면 세상에 춘향전도 없고 로미오와 줄리엣은 물론 중국이 자랑하는 양축이라는 양산백과 축영대의 사랑이야기도 없을 것이다.
동족의 음악 중 동족대가(侗族大歌)라고 부르는 게 있는데 어떤 악기도 사용하지 않고 순전히 사람의 목소리로만 노래를 부른다. 이것을 하늘의 소리라는 의미로 티엔라이지인(천뢰지음:天籁之音)이라고 한다고 한다. 원래 공기 좋은 산골짜기에 살다 보면, 목청이 틔어 무척 맑고 높은음도 잘 내는 법이다.
공연이 막바지에 이르면 관객에게 술을 붓는다. 젊은이 뿐만아니라 나이든 사람에게도, 남자에게도 여자에게도 부어준다. 옆에서 여자는 권주가를 부르고 남자는 루성연주를 하며 술을 권하는데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술을 먹인다. 마시고 나면 뒤이어 쟁반을 들고 따라오는데 그 위에 성의 표시 하라는 의미로 술을 먹은 사람은 소정의 답례를 하게 된다. 내지 않아도 쫓아내지는 않지만, 그냥 모른 체 하기가 그렇다. 여기에 출연하는 사람의 얼굴과 예전에 다른 분의 여행기 속에 나온 사진의 얼굴과 비교해 보면, 거의 변함이 없다. 바로 마안짜이의 공연은 마을 사람이 직접 출연하는 순수한 공연이기 때문이다.
술 먹이는 일이 끝나면 마지막으로 관객과 출연자가 함께하는 합동 춤을 춘다. 동족야무(侗族耶舞)라는 동족의 춤은 아주 단순해서 손에 손을 잡고 원을 그리고 함께 건들거리며 흔들기만 하면 된다. 주로 추수가 끝나고 고루 앞에 있는 마을 큰 마당에서 마을 사람 모두 모여 서로 손을 잡고 건들거리고 추던 게 진화하여 지금은 마을 입장료를 받고 그것만 받으면 뻘쭘하기에 공연이라는 이름으로 고루 앞에서 건들거리며 춤을 춘다. 이곳의 공연은 시지앙의 먀오족 공연처럼 젊고 예쁜 처자가 아니고 동네 아저씨 아주머니 위주로 꾸민 순수한 모습이다.
공연이 끝나면 관객까지 모두 함께한다. 술도 먹었기에 술김에 모두 나와 함께 한다. 기차놀이도 함께하며 즐기는데 주로 함께 즐기는 사람은 서양인이고 중국인을 포함한 동양인은 대부분 관객석에서 째려보기만 한다.
흥겨운 춤판이 끝나고 출연자도 관객도 갑자기 무슨 할 일이 생각난 듯 뿔뿔이 흩어진다. 공연이 끝난 후 고루 앞의 공연장은 갑자기 썰렁해진다.
우리 부부도 다시 마을 산책을 나선다. 작은 마을에서 할 일이 뭐가 있겠나? 그렇다고 숙소에 들어갈 수야 없지 않은가? 아직 마을은 추수를 끝내지 않았다. 공연을 보았던 관객의 대부분은 풍우교를 지나 마을을 떠나고 있다.
목화밭이다. 우리가 어렸을 때 배운 문익점 선생이 붓 뚜껑에 씨앗을 몰래 숨겨왔다고 하는 목화가 눈송이보다 탐스럽고 아름답다. 문선생 덕분에 우리 민족에게는 겨울을 따뜻하게 지낼 수 있는 솜이불이 생겼으며 cotton이라고 하는 천연옷감으로 말미암아 겨울에도 삼베옷으로 지내던 우리 선조가 겨울을 행복하게 지날 수 있게 되었다. 마안짜이라는 마을의 밭에는 수확하고 남은 목화송이가 아직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마을에는 목화농사를 여태 짓고 있다.
아직 추수를 끝내지 않은 논에는 벼가 익어 일렁이고 그 건너로는 조각루라고 하는 3층 형태의 집이 보이는데 집의 규모가 상상외로 크다.
보탑의 모양 중 한가운데 보탑은 나머지 탑과 다른 모습이다. 고루의 모습을 탑의 정상부에다 만들었는데 이 다리는 1962년 중국 우표로도 발행되었다고 한다. 3개의 교각으로 양쪽 끝 부분에 축대를 쌓아 만든 청양 풍우교는 아름다움에서도 최고다.
마을 건너 산 정상에는 누각을 만들어 전망대를 꾸며놓았다. 저곳을 올라가면, 마안짜이가 한눈에 들어올 것이다.
감나무의 감이 우리 시골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듯해 더 정감이 가고 친근하게 느껴진다.
저녁에 다시 마을로 나와 보니 마을이 무척 어둡고 갑자기 소나기까지 내리지만 나온 김에 풍우교까지 가 밤의 풍우교를 바라본다. 청양 풍우교는 다른 곳과는 다르게 조명을 건물에 직접 부착하지 않고 풍우교 밖에서 비추는 간접조명 방식을 택하였는데 전기누전이나 다른 화재요인을 줄이기 위한 방편인 것 같다. 밤에 바라보는 청양 영제교는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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