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 잡는 특무대장 김창룡 제14회》
14. 남로당의 잔인한 복수
합동수사본부장 김창룡에 의해 수많은 남로당 푸락치들이 체포되고 와해 직전까지 이르자 박헌영은 김창룡, 오제도, 서울시경 김호익 총경, 남로당 푸락치로 활동하다 전향한 박일원 경위 등을 암살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암살지령을 받은 김삼룡은 김창룡을 먼저 암살하려고 김창룡의 동선에 암살조를 매복시키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으나, 김창룡은 불규칙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암살의 기회를 매번 놓쳤다. 오제도 검사 암살도 실패 하였다.
그러다 표적을 바꾸어 남로당에서 전향한 박일원(朴馹遠) 경위를 먼저 암살하였다.
*전향자 박일원 암살
박일원은 경성제국대학 재학중 학병으로 징집되었다가 해방 후 귀국하여 "조선공산청년동맹"을 조직하고 그 위원장이 되었으며 이 조직을 다시 민주청년동맹(민청)으로 바꾸고 박헌영 조선공산당의 전위대로 활동하였다.
말하자면 행동대 역할을 한 것이다.
1946년 5월 "위조지폐사건"이 터졌을 때 수사당국에 의해 체포되었다.
박일원의 민청은 위조지폐 사건과 관련이 없었지만 공안당국의 일제 검거령에 의해 민청조직이 걸려든 것이다.
공안당국은 박일원의 이용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그를 전향시켜 푸락치로 활용하였다.
박일원은 46년 9월 이승만 박사 저격사건의 주모자 제보, 46년 9월의 전국철도파업 주동자들의 정보 제공으로 파업관련자 3천7백여명을 검거하였으며, 47년 8월 15일 공산당의 대규모 폭동계획을 사전 제보하여 1천3백여명의 가담자들을 일망타진하는 전과를 올리는데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그래서 장택상 수도 경찰청장은 그를 경위로 특채하여 정식 경찰로 근무토록 하였다.
박일원은 근무를 잘 하여 장택상 청장의 총애를 받게되었으며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장택상 청장이 외무부 장관으로 자리를 옮길 때 데리고 가서 외무부 정보과장에 보직시켰다.
박일원은 장택상 외무장관을 열심히 보필하던중 49년 3월 29일 남로당 암살조에 의해 백주에 권총 세레를 받고 살해되었다.
*김호익 총경 암살
김호익 총경은 1915년 함경남도 함흥 출신으로 일본대학을 나와 경찰에 투신하여 1937년경 평양 경찰서 정보과에서 출발하여 해방후에는 서울시경 사찰과에서 근무하면서 남로당 좌익세력 척결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특히 49년 국회 푸락치 사건에 가담한 이문원 등 국회의원 13명을 검거하는데 크게 공헌을 하였으며, 합동수사본부에서 김창룡 본부장과 오제도 검사와 손발이 잘 맞았다고 한다.
김호익 총경은 국회푸락치 사건 처리로 피곤에 쩔어 49년 8월 12일 중앙청 앞 서울시경 대공분실장실에서 쉬고 있는데 치안국 이성주의 소개로 찾아왔다는 이용운(36세)이라는 사람이 내미는 명함을 들여다 보는 순간 이용운이 쏜 권총 여섯발을 맞고 현장에서 절명하였다.
범인 이용운은 그자리에서 체포되었으며 그는 남로당 특수부 암살조였다.
8월 16일 김호익 총경의 영결식은 경찰장으로 거행되었으며 장례위원장에 김태선 서울시경국장이 맡고 김효석 내무장관 장경근 차관, 국회부의장 등 각계인사들이 참석하였다.
김태선 국장은 조사(弔辭)에서 김호익 총경의 유지를받들어 "이 기회에 적개심을 백배로 하여 적구(敵狗)들을 최후의 1인까지 박멸하자고 결의]" 하였다.
신문을 통해 이 조사(弔辭)를 본 남로당은 그 뒤부터 몸을 움추리고 지상에 잘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경찰의 검거활동이 강력해졌기 때문에 소나기는 피해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 것 같다.
-月 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