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은?
조선의 마지막 선비 '심산 김창숙'선생
조국 독립운동하다 두 아들잃고, 모진 고문으로 불구자된 심산 선생
뉴민주.com
심산 김창숙 인간 스토리
▲ 병문안 온 박정희를 외면 해버린 심산 김창숙 선생은 평생을 청렴결백한 삶을 살았다. ⓒ뉴민주.com
(1962년 5월8일 , 독립운동가 심산 김창숙 선생의 병상을 찾은 박정희( 일본명:오카모토 미노루) 를 보기싫다고 돌아누어 눈을 감아버려 박정희를 무안하게한 김창숙 선생)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없는 철두철미한 항일지사로 흔히 단재 신채호와 백범 김구 , 그리고 심산 '김창숙'을 꼽는다.그러나 심산은 단재나 백범에 비해 덜 알려져 있다. 그는 '이 땅의 마지막 선비'로 불리운다.
1879년 경상북도 성주군 사월리 의성 김씨 집성촌에서 영남 유림의 후손으로 태어나1962년 84세의나이로 세상을 뜰 때까지 격동의 한국현대사를 고스란히 겪으며 한순간도 흐트러짐없이 지조와 절개를 지켰던 심산 '김창숙'.
그는 독립운동을 하다 일제의 모진 고문으로 두 다리를 쓸 수 없는 불구의 몸으로 평생을 앉은뱅이로 살았다. 일본의 식민통치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기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을때도그들의 법을 무시했고, 항소도 변호사도 거부했다.
죽을 지언정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겠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그런 신념은 해방후에도 이어져 '민족통일운동'과 '반독재운동'을 거치면서 이승만정권을 비롯한 독재정권에 꼿꼿이 맞섰고 이로 인해 심한 고초를 겪었다.
두 아들마저 독립운동에 바친 그는 만년에 지독한 가난으로 병원비 조차 없이 서울 변두리 허름한 여관과 병원을 전전하다, 62년 한 병원에서 파란만장한 생애를 접었다.
살아 있을 때 어떠한 불의와도 타협하지 않는 '선비정신'으로 살았고,이로 인해 고난의 길을 걸었던 심산 '김창숙'.해방전후사 속의 민족정신 그리고 우리 시대에 절실히 요구되는 실천하는 지성으로서의 '마지막 선비'이다.
反歸去來辭(반귀거래사) ; ' 심산 김창숙 ' 선생
김창숙 선생은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된 후 일본 경찰의 고문으로 앉은뱅이가 되신 분이다.그 분이 아무에게도 보살핌도 받지 못한채 (아들들과 가족들이 모두 독립운동/
반독재운동하다가 경찰들에게 잡혀 죽었다.) 병원 골방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하는 자리인데, 1962년이니 5.16 쿠데타가 일어나고 박정희(일본명 : 오카모토 미노루)가 정권을 잡은 후이다.
그 병실에 일본 관동군 출신에, 사이비 민족주의자였으며, 공산주의 동조자였고,쿠데타 주동자였던 박정희(오카모토 미노루)가 나타났다.그러자 당시 김창숙 선생은 오카모토 미노루를 쳐다보지도 않고 돌아누웠다고 한다
反歸去來辭(반귀거래사) 중 일부 '심산 김창숙'
“......앉은뱅이 되어서야 옥문 나서니쑥밭된 집안 남은 거란 없어.
.....음험하기 짝이 없는 못된 무리들고향에도 날뜀을 봐야 했어라해방되어 삼팔선
나라의 허리 끊고그 더욱 슬펐기는 동족을 죽인 무덤!
......남북을 가르는 흑풍 회오리화평을 이룩할 기약은 없고저기 저 사이비
군자들 맹세코 이 땅에서 쓸어 버리리.길에서 죽기로니 무슨 한이랴.......”
▲상해 임시정부시절 백범 김구선생과 심산 김창숙 선생 ⓒ 뉴민주.com
우리나라 마지막 선비인 '심산 김창숙'선생은 평생 조국광복과 인재양성에 한몸을 바쳤으며, 불의와 타협 하지않는 대쪽같은 성격으로 일제에 항쟁한 진정한 애국자다. 검소하고 청령결백한 성격으로 젊은 인재양성 교육에 힘을 쏟았던 김창숙 선생은 우리나라의 진정한 교육자 이기도 하다.
뉴 민 주 닷 컴 사회부
http://newminjoo.com/sub_read.html?uid=5142§ion=section16
(이하 생략)
http://blog.daum.net/rhekaeorn/707
첫댓글 마지막 선비 심산, 그의 기개가 돗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