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계간 『시평』 여름호에 시 「서른여섯 살 꽃」과 일곱 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한 김사이 시인이 첫 시집을 펴냈다. 이 시집의 현장은 1980년대 노동운동의 상징적인 공간이었으나 이제는 잊혀버린 역사를 간직한 첨단 아울렛몰이자, 소비문화와 재개발 정책으로부터 소외된 이주노동자들의 노동현장, 가리봉동이다. 그곳은 이제 과거의 활력을 잃어버리고 찬란한 거품 아래 침전물처럼, 체제적 메커니즘의 막다른 배수구가 되어가고 있다. 그 한가운데에서 시인이 펼쳐 보이는 삶은 육체의 의지가 선과 악의 윤리적 구분을 넘어선다. 그러나 탈출하다 멈춰 선 광산 막장 같은 공간 가리봉에서, 해설을 쓴 방민호가 명명한바, ‘가리봉의 시인’ 김사이는 윤리적 개념의 원조를 받지 않고도 성립하는 삶의 형식들을 발견한다. “그래, 이곳도 서울/아직 뱉어내지 못한 징그러운 삶이 있는”(「가리봉엘레지」)이라고 간단히 요약해버릴 만큼 가리봉에 밀착되어 있는 삶을 살아온 시인은 이제 그간 정주해왔던 ‘징그러운 삶’을 딛고 일어서 먼 항해를 시작하려 한다.
가리봉, 그 생존의 방식
표제작 「반성하다 그만둔 날」에는 과거와 현재가 교차된 시대얼굴이 인화되어 있다. “노동자도 자본가도” 없이 “조금씩 젖어가며 너나없이 한 덩어리가 되어 출렁”이는 불편한 얼굴. 그럼에도 시인은 마지막 행에 “도처에 흔들리는 일상들/등급 매기지 않기로 했다”고 쓴다. 반성을 그만둔 시인은 정치적 구호 대신 “서울이라는 찬란한 이름의 배수구가 보여주는 기이한 삶의 국면들을 가능한 한 폭넓게 포착”해 드러낸다. “김사이 씨의 시에서 소위 노동 해방 문제나 노동문학의 소재지로서의 가리봉의 기억은 희미하다. 노동자들의 모습이 노동해방 따위의 개념어로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김사이의 시는 현재적이다. 그녀의 시에서 가리봉은 즉물적인 삶의 처소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그녀의 시는 정치적 구호보다도, 삶 자체가 더 정치적이라고 역설하고 있는 듯하다.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방민호는 또한 “이 시집이 보여주는 중요한 국면 가운데 하나는 자기 자신의 모습, 존재 방식이나 현재 상태 같은 것에 대한 질문을 버리지 않고 성찰을 해나가는 화자의 모습”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초점 없는 하얀 눈”(「문」)의 소녀가 유년을 고백하는 2부의 시들과 1부, 3부, 4부에서의 가리봉의 현재 시공은 서로 교류하며 “여성으로서의 자신, 한 개체로서의 자신, 그리고 하나의 생명을 품은 존재로서의 자신”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
『반성하다 그만둔 날』은 마치 시인이 자신을 오랫동안 붙박아두었던 가리봉을 떠나기 위한 통과의례와 같은 시집이다. “도망가다 멈춰선 그곳”(「사랑은 어디에서 우는가」), “내 시가 시작된 곳/젊음의 덫이기도 했던/이 거리 구석구석”(「머물기 위해 떠나다」), “삶의 늪구덩이 속에서 나를 향해 가슴을 여는 그것들” ― 가리봉. “이 나라의 남쪽 땅 끝에서 태어나 서울의 마지막 비상구에서 숙성기를 보낸” 시인의 첫 시집은, 그렇게 “중심을 돌아 돌아” “먼 곳도 가까운 곳도 아닌/중심으로 와”(「꽃」 부분) 떠나기 직전, 서울과 여성과 노동, 그 삶의 그늘진 풍경 속에서 꽃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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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이의 시는 산업화 시대에서 디지털화 시대로의 이행기에 놓이는 간주곡이다. 이 간주곡은 그의 고향 해남과 구로동 사이, 그가 처음 서울살이를 하던 가리봉시장의 닭장촌 자취방과 가리봉 패션몰의 광고판 사이, 물질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것 사이, 눈물과 웃음 사이에서 삐져나온다. 이행기 특유의 도저한 불협화음에서 삐져나오는 파열음들로 빚어내는 이 간주곡은 그래서 듣기 거북하지만 외면할 수 없다는 데 문제가 있다. 주의 깊게 경청을 하면 도움이 될 그러나 간과한다면 어떤 위험을 감수해야만 할 이 시대의 경고들로 들려오기 때문이다. 조기조(시인)
내가 감독이라면 이 여자의 생애를 ‘소외된 귀’의 영상에 담겠다. 해남을 떠나 가리봉오거리에 박스 하나의 짐과 청춘을 푼 여자. 어느 늦은 저녁, ‘이 시인 보게?’ 나는 자리를 고쳐 앉았다. 어느 삶의 미지에 눈이 내려 쌓였고 그리로 귀가 열려 있었다. 언제나 친소(親疎)가 사라질 즈음 한 시야는 열리기 마련이다. 한 여자의 얼굴이 눈에서 황홀했다. 그 황홀함은 한 여자의 실존적 수척함이다. 한국 여성시인 가운데 김사이의 독존(獨存)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사회적 실재와 경험의 냉담이 교차하는 심적 통섭(統攝)이 슬프다. 김사이의 고차적(高次的) 시편들 내면의 울음이 동천(冬天)에서 떨어지는 아릿한 햇살 같다. 고형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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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호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구로노동자문학회’에서 시 공부를 했다. 2002년 계간 『시평』 여름호에 시 「서른여섯 살 꽃」 외 7편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
제1부 초록눈/가리봉엘레지/숨어 있기 좋은 방/사랑은 어디에서 우는가/이방인의 도시/고양이 두 마리/경고/민경이/가리봉1동에 살아요/세다가 새는/카타콤베/어떤 오후/달의 여자들/출구/머물기 위해 떠나다/가리봉 성자
제2부 가끔 다녀오다/화려한 나들이/애첩의 품에서/그녀를 만나다/돼지고기 이야기/문/바람의 딸/기다리는 게 뭔지도 모르고 기다리는/낮잠/물오른 길/나무형제/관계/여자
제3부 출근/여름날의 고요/반성하다 그만둔 날/서른여섯 살 꽃/꽃/살갗으로부터 오는 긴장/기름때와 계급/여일(餘日)/목숨값은 얼마일까/이력서를 쓰다/무엇을 위하여 종은 울리나/목련
제4부 뒤엔 무엇이 웅크리고 있을까/몸말/봄이 불러 돌아보니/곰팡이꽃/얼굴/해질 무렵 집 앞에 앉아/한낮의 꿈/幻影/늙은 부처들/쉼표를 못 찍는 이유/개심사/가이아/나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