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이황 선생의 개관
모습
1. 관료와 공직자로서의 모습
퇴계는 32세 때 문과의 초시에 2등으로 합격하고, 34세 봄에 문과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가게 되었다.이 때 고향 선배인 농암 이현보는 그의 급제 소식을 듣고, "지금 인망있는 사람 중에 이 사람을 뛰어넘을 사람이 없으니 나라의 복이고 우리 고을의 경사이다."라 하여 그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그후 예문관 검열과 춘추관 기사관에 올랐는데, 당시에 권력의 실세인 김안로가 만나고자 하였으나 선비로서의 지조를 지켜 권력자를 찾아가 만나지 않았다. 이에 김안로는 앙심을 품고 그의 승진을 가로막아 첫 출발에서 시련을 맞아야 했다. 이듬해 호송관으로 왜인을 동래까지 보내주었으며, 36세 때 성균관 전적을 거쳐 호조좌랑에 올랐다. 39세부터 44세까지 순탄하게 승진하였다. 이 무렵 경연에 나가 가뭄이 심할 때는 임금에게 식사 때 반찬가지수를 줄일 것과 죄인을 사면하는 일을 삼갈 것을 요청하였다. 그는 왕도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임금의 덕을 닦도록 정성껏 간언하였다.또 왕명을 받아 어사로 나가 충청도 지역을 돌아보고 흉년으로 인한 백성들의 기근을 구제하고 탐관오리를 적발하는 임무를 수행하였고 다시 어사로 강원도 지역의 재해를 시찰하였다. 44세 때 사헌부 장령, 홍문관 응교 등을 지냈으나 이 시기에 병으로 못 나가는 일이 잦았으며, 중종이 승하하자 중국에 부고를 전하고 시호를 청하였는데 두 표문을 지어 중국 예부관원이 표문의 문장과 필법을 칭찬하였다 한다. 그 당시 왜구의 사량진 침입 이후 정부는 대마도와 교류를 단절하였는데, 왜인이 다시 사신을 보내와 교류를 요청하자 그는 왜인의 사신을 물리치지 말고 일본과 강화를 허가하도록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 때 그는 대마도주에 보내는 답서와 일본군 장군에게 보내는 답서 등을 지었으며, 외교문제를 원칙과 현실의 조화로서 해결하려는 탁월한 외교적 역량을 발휘하였다. 이 무렵 을사사화가 일어나 권력을 잡고 있던 간신 이기의 상소로 한 때 관직이 삭탈되었으나 죄없는 사람을 벌 줄 수 없다는 여론이 일어나 곧 복직되었다. 48세, 49세 사이의 2년은 단양군수와 풍기군수로 외직에 나가 있었다. 단양군수로 부임하여 다스리는 일이 말고 간결하였으며 아전이나 백성들을 모두 편안하게 해주었다. 형이 충청감사로 부임하자 그는 풍기군수로 전임되었다. 이 때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 서원의 편액과 서적을 청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만들었다. 이를 계기로 서원이 융성하게 되었다. 그후 감사에게 세 번 사표를 내었으나 회답이 없자 해임되기를 기다리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가 관직에서 파직 삭탈당하였다. 52세 때 다시 조정에 나와 홍문관 교리로 경연시독관을 겸하여 경연에서 임금을 모시고 강의를 하였으며,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사학의 선생과 학생들에게 통문을 돌려 학풍이 퇴락함을 지적하고 예의를 바로잡도록 타일렀는데 무너진 학풍을 회복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당시 명종이 21세가 되자 수렴청정하고 있는 대왕대비에게 임금이 친정하도록 정권을 돌려줄 것을 요구하는 교서를 지어 올렸다. 또한 여러 제문을 지었으며 새로 중수한 경복궁의 전각과 편액을 쓰는 등 당시 국가의 중요문서와 궁중의 기록이나 글씨가 모두 그의 손에서 이루어졌다. 55세 때 병으로 거듭 사퇴를 청하여 허락받고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58세 때 임금의 간곡한 부름을 받고 다시 조정에 대사성으로 나갔다. 59세 때 휴가를 받아 귀향한 후 벼슬에 나가지 않다가 임금의 재촉으로 67세 때 서울에 다시 올라왔다. 며칠 뒤 명종이 승하하여 명종의 행장을 지었다. 예조판서에 임명되자 거듭 사표를 올려 두 달 만에 다시 병으로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68세 여름 또다시 서울에 올라왔다. 이때 임금은 퇴계를 깊이 신임하여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 의 중책을 겸임시켰지만 병으로 거듭 사퇴를 청하였으며, 임금은 휴가를 내리고 내의원을 보내어 문병하며 음식물을 하사함으로써 세심하게 공경하였다. 이 때 새로 등극한 17세의 선조임금에게 무진육조소를 지어 올렸다. 이것은 정치의 기본원리와 당면과제를 제시한 것이다. 경연에서 임금의 도리를 진언하고, 선조를 위하여 자신의 평생 학문을 응축하여 성인이 되기위한 수양의 원리와 방법을 집약한 성학십도를 올렸으며, 선조는 성학십도를 병풍으로 만들어 항상 음미할 수 있게 하였다. 69세 때 판중추부사로서 재상들과 문소전의례와 법도를 고증한 일이 조정에서 활동한 마지막 사업이었다.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에 임금은 남길 말을 요구하였고, 이에 그는"태평한 세상을 걱정하고 밝은 임금을 위태로이 여긴다."는 옛말을 인용하여, 나라는 항상 위난에 방비함이 있어야 하고, 임금은 겸허하여야 할 것을 역설하였다. 이 자리에서 그는 성학십도에 관한 임금의 질문에 대답하고, 임금의 요청에 따라 이응경과 기대승을 천거하고 돌아갔다. 69세 때 이조판서, 의정부 우찬성에 제수되었으나 끝내 사퇴하고 판중추부사로 옮겼다. 귀향한 이후로도 모든 벼슬을 벗고 은퇴하기를 거듭 상소하였으나 끝내 허락을 얻지 못하였다. 강직한 퇴계는 실제로 부임하지 않는 벼슬을 사양하였고, 퇴계를 아끼고 공경하는 임금은 그의 벼슬을 거둘 수가 없었다. 70세 겨울 그의 병이 위중하자 임금은 내의를 보내 약을 가지고 가게 하였지만 도착하기 전에 그는 세상을 떠났다. 부고가 조정에 올라가자 임금은 애통해하며 영의정으로 증직을 명하였고, 승지를 보내 조문하고 제사를 드리게 하는 특별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퇴계는 34세에 벼슬을 시작하여 70세에 사망할 때까지 140여 직종에 임명되었으나 79번을 사퇴하였다. 30회는 수리되었지만 49회는 뜻에 없는 근무를 하였다. 질병 때문이기도 하지만 원래 벼슬보다 학문과 교육에 뜻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물러나기만 한 것은 아니고 일단 직책을 얻으면 책임을 다하고 소신껏 일을 하였다. 관직에 있으면서 행한 일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문무를 겸비한 국방책, 침범한 왜적을 용서하고 수교를 해야 한다는 외교정책인 걸물절왜사소(乞勿絶倭使疏), 왕도를 깨우친 무진육조소, 파면을 당하면서도 궁중의 기강을 바로 세운 진언, 성학십도를 올려 나라의 교학을 개혁한 일, 군수로 나가서는 수리시설을 하여 농업을 진흥시켰고, 단양에서는 팔경을 지정하여 자연을 가꾸었으며, 우리나라 처음으로 산수를 기록하여 치산과 등산하는 법도 등을 남겼다. 충청, 경기, 강원에 어사로 나가서는 탐관오리를 잡아내고, 흉년으로 굶주리는 백성을 구제하였다. 중국 사신을 맞아서는 행패를 막았고, 문장과 글씨로 중국 예부 관원들을 감탄시켰다. 궁궐의 기문과 상량문, 현판 글씨, 외교문서 작성 등 많은 글과 글씨를 남겼다.
2. 학자 및 사상가로서의 모습
1) 뛰어난 재질 연보에 따르면 어릴 때 논어 등을 그에게 가르쳐준 그의 숙부 송재공 우는 그의 이해력이 뛰어남에 항상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예를 들면 논어를 읽던 중에 퇴계는 이(理)자를 가리키며 그 뜻을 '무릇 일의 옳음'이라고 스스로 깨달아 말하였다는 것이고, 그리하여 그의 숙부는 그를 가리켜 "가문을 유지할 사람은 이 아이임에 틀림없다."고 하였다고 한다. 자라서 향시를 비롯한 대과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험에 수석 아니면 차석의 성적을 올린 것만 보더라도 그의 재질이 우수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태학(성균관)에서 함께 생활한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 1510~1560)가 그를 가리켜 "영남의 수재"라 한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닌 듯하다.
2) 열성적인 학구열 퇴계는 14세 때부터 "비록 많은 사람이 모인 자리일지라도 반드시 벽을 향하여 조용히 생각할 정도"로 학문을 좋아하였고, 그것이 20세 경에는 "침식을 거의 잊어 가며 독서와 사색"에 잠길 정도여서 마침내 일생 동안 그를 괴롭히던 몸이 야위는 일종의 소화불량증을 일으키게 되었다. 심지어 안질로 오랫동안 고생할 경우에도 독서하기를 쉬지 않았다는 제자의 기록이 있는가 하면, 군수직을 버리고 귀향할 때에도 그의 짐꾸러미는 오직 몇 상자의 책뿐이었다고 한다. 59세 때에도 산림에 들어가 30여년의 연구에 매진하지 못하였음을 한탄하였다. 고봉 기대승과의 편지를 통한 토론은 죽기 얼마 전까지 계속되었다. 이렇게 보면 초년에서 말년에 이르도록 그의 학구열은 변함이 없었다. 학구열에 불타는 진지한 학자의 모습, 이것이 퇴계를 논하면서 빠뜨릴 수 없는 모습이다.
3) 겸허한 학문 태도 퇴계의 학문 태도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고봉 기대승과 나누던 "사단 칠정에 관한 논변"이다. 그 당시는 장유유서의 수직적인 인간관계가 지배하던 때였으므로 사대부들은 학문을 하는데도 권위주의적 방식으로 일방적인 전수만을 강조하던 형편이었다. 따라서 선배의 이론에 의문을 제기하고 비판을 가하는 자유로운 토론이 어려운 풍토였다. 이러한 풍토를 깬 것이 사단 칠정 논변이다. 선배의 이론에 반기를 든 고봉도 비범하지만, 그것을 넓은 아량으로 받아들인 퇴계의 태도에 더욱 감탄하게 된다. 8년 동안의 논변이 진행되는 동안에 퇴계는 고봉의 이론을 신중하게 검토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발견할 때마다 개정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논변이 시작될 무렵 퇴계는 대사성까지 지낸 59세의 대가였던 데 비하여 고봉은 갓 과거에 급제한 33세의 소장학자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장장 8년 동안의 논변이 가능하였고 그것이 드디어 당시의 정체된 학문 풍토에 새바람을 불러 일으켜 우리 나라 성리학의 발전을 가져왔는데 이것은 퇴계의 겸허한 학문태도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러한 그의 태도를 그의 제자는 "선생은 겸허로써 덕을 삼아 털끝만큼도 교만하여 잘난 체 하는 마음이 없었다."라고 평하였다.
. 교육자로서의 모습
1) 교육관 오늘날의 국립대학총장에 비견되는 성균관 대사성의 책무를 맡으면서 퇴계는 그의 교육관을 밝힌 적이 있다. "선비란 예의의 원천이며 원기의 본거이다......지금부터 제군들은 모든 일상생활이 예의 가운데서 행하여지도록 하라. 서로 채찍질하여 구습을 벗도록 힘쓰고, 집에서 부형 모시는 마음을 미루어 밖에서 어른과 웃사람을 섬기는 예를 삼을 것이다. 안으로 충신(忠信)에 주력하고 밖으로 손제(遜悌)를 행함으로써 국가가 문예를 장려하고 학교를 세워 선비를 기르는 뜻에 부응하라." 요컨대 올바른 선비를 길러 국가의 교육 목적에 부응하는 것이 퇴계가 지향했던 교육자상이었다.
2) 학문의 방법 학문하는 방법을 물었을 때 "다만 부지런하고 수고스럽게 하며 독실하게 하는데 있으니, 이렇게 하여 중단됨이 없으면 입지가 날로 강해지고 학업이 날로 넓어질 것이다."라고 타일러 노력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독서하는 방법을 물었을 때 "그저 익숙하게 읽는 것 뿐이다. 글을 읽는 사람이 비록 글의 뜻은 알았으나 만약 익숙하지 못하면 읽자마자 곧 잊어 버리게 되어 마음에 간직할 수 없을 것은 틀림없다. 이미 읽고 난 뒤에 또 거기에 자세하고 익숙해질 공부를 더한 뒤라야 비로소 마음에 간직할 수 있으며 또 흐믓한 맛도 있을 것이다."라 하여 겉만 핥고 지나치는 것을 경계하며, 익숙하게 하여 깊이 체득하는 공부를 강조하였다.
3) 교육의 방법 퇴계는 제자들을 가르칠 때 "맨 먼저 '소학'으로부터 시작하여 '대학', '심경', '논어', '맹자' 및 '주자서'를 가르친 다음 모든 경서를 가르쳤다."고 한다. 또한 처음 배움에 나아가는 제자가 읽어야할 고전으로서 특히 '심경'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소학'은 체와 용을 함께 갖추었고, '근사록'은 의리의 정밀한 것은 비록 상세하나 학자들을 깨우치고 감동시켜 분발하게 하는 것이 부족한 듯하다. 초학자가 처음 시작하는 데는 '심경'보다 절실한 것이 없다."고 하여'소학'을 넘어서 처음 읽을 책으로 '심경'을 제시하고 '근사록'을 한 단계 더 높은 단계의 연구서로 제시하였다. 그는 제자들에게 '주자전서'를 통해 학문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학문이 심화되면 경험할 수 있는 기쁨을 소개하였다. "'주자전서'를 읽을 수 있으면 학문하는 방법을 알 수 있을 것이요, 이미 그 방법을 알 게 되면 반드시 느끼게 되어 떨치고 일어날 것이다. 여기서 공부를 시작하여 오랫동안 익숙한 뒤에 사서를 다시 보면 성현의 말씀이 마디마디 맛이 있어서 비로소 자기에게 쓰이는 바가 있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정주의 학문을 한결같이 표준으로 삼아서 지행병진함을 가르쳤다.
4) 다산 정약용이 퇴계의 교육을 평한 글 "일일이 실행을 통해서 많은 인재를 길렀으며 누구든 어떤 부문이든 가르쳐 모두 대도에 이르게 하였다.중도에 폐하는 사람이 없이 끝까지 가르쳤으며 학문을 닦아 선생의 뒤를 잇게 했다. 퇴계선생의 가르침을 읽으면 손뼉치고 춤추고 싶으며 감격해서 눈물이 나온다. 도가 천지간에 가득차 있으니 선생의 덕은 높고 크기만 하다."
4. 문학자 및 서예가로서의 모습
1) 퇴계는 당시까지 가장 많은 저술을 한 분이다. 전문적 저서는 별도로 하더라도 일기는 손수 쓴 것 4년분 외에 이름이 전하는 것만도 9종이 된다. 시는 제목을 아는 것이 3560수(퇴계의 시는 '도산전서' 중에 실린 것이 2천여편을 넘칠만큼 풍성하여 종전의 학자 문집 중에서 보기 어려웠을 뿐아니라, 전문작가의 시집 중에서도 보기 드믄 존재였다.), 편지는 3천 수 백편이 문집에 전하고, 그밖에 여러 종류의 긴 글이 문집에 298편 실려 있다. 퇴계학을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이 오랜 세월 동안 열심히 연구하고 있지만 퇴계의 저술을 다 읽은 이는 없을 것이다. 워낙 방대하여 읽기도 힘들지만 아직 다 찾아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일기와 한글 편지는 거의 행방을 알 수 없고 그의 수학에 관한 글과 '계몽전의'는 어려워서 잘 해득하지 못한다.
2) 퇴계는 早年부터 終年까지 사이에 중국문단의 명시인들의 시의 영향을 받았다. 곧 도연명·두보·한유·유종지·백락천·유우석·구양수·소동파·소옹·주희 등의 시를 읽고, 次韻·用韻·和韻했다는 것은 문집 도처에 보인다.그 중에도 陶·杜·歐·蘇·朱의 시를 가장 사랑하였다. 초년엔 陶·杜詩를 중년엔 蘇詩를 만년엔 朱·邵詩를 사랑하였다. 그러나, 가장 陶杜朱詩를 즐겨 읽고 인간서정을 승화시켰다. 퇴계의 제자 문봉 정유일은 "선생이 시를 좋아하되 도연명과 두보의 시를 즐겨 보았으나, 만년엔 주자의 시를 더욱 즐겨 읽었다"고 하였다.
3) 퇴계는 문장과 글씨로 중국 예부 관원들을 감탄하게 하였으며, 경복궁의 기문과 상량문, 현판 글씨, 외교 문서 등을 작성하여 명성을 떨쳤다.
5. 생활인으로서의 모습
1) 합리성의 존중 성호 이익은 퇴계의 예는 예의 지침이며 상례에 있어서는 가장 합리적인 제일인자라 받들고 정리해서 예설유편을 엮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어느 시대든지 통용될 수 있는 법이라야 예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제도에 얽매이기 보다는 인간 위주여야 하고, 때와 재물과 분수와 처지에 맞아야 하고, 검소하고 원칙에 맞게 시행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중국 예법이 여자를 낮추어 죽은 아내를 망실(亡室)이라 한 것을 고실(故室)로 바로 잡았고, 계모를 홀대한 예법을 버리고 아들에게 적모(嫡母-서자가 아버지의 정실을 일컫는 말)상을 치른 후 산소 아래서 시묘도 살게 했다. 죽은 남편을 따라 죽으려는 질부(조카의 아내)를 말려서 열녀가 되기보다는 살아 어버이에게 효도하도록 했고, 상중에 병든 아들과 조카를 종권(일시적으로 상주하는 일을 중지시켜 건강을 회복하는 것)시켜 고기를 먹게 했다. 생일 제사를 지내면 힘에 벅차 기제사도 못 지내게 된다고 당시의 풍속을 바꾸었다. 제물을 많이 담으면 비용이 많이 든다고 쌓지 못하게 하였으며, 부모 합설 제사는 가례에 어긋난다며 단설(제삿날 그 분 제물만 차림)하게 하였다. 초상에는 문상객에게 술 대신 차를 내놓게 하였으며, 제사 음식의 음복은 남과 나누어 먹지 않고 제관만 먹게 하였다. 아무리 죽은 부모가 좋아한 음식이라도 살아있을 때 지위의 높고 낮음에 따라 아들이 따르기 어려우므로 일정한 제물만을 쓰게 하였으며, 진설도에 있더라도 철이 아니면 다 구해 쓰지 못하므로 세 가지 철에 맞는 과일로써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2) 뛰어난 인격자 퇴계의 제자인 학봉 김성일은 '학봉집'의 '퇴계선생 언행록'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쉽고 명백한 것은 선생의 학문이요, 정대하여 빛나는 것은 선생의 도(道)요, 따스하고 봄 바람 같고 상서로운 구름 같은 것은 선생의 덕(德)이요, 무명이나 명주처럼 질박하고 콩이나 조처럼 담담한 것은 선생의 글이었다. 가슴 속은 맑게 트이어 가을 달과 얼음을 담은 옥병처럼 밝고 결백하며, 기상은 온화하고 순수해서 순수한 금과 아름다운 옥 같았다. 무겁기는 산악과 같고 깊이는 깊은 샘과 같았으니, 바라보면 덕을 이룬 군자임을 알 수 있었다." 퇴계는 아랫사람이나 제자들에게도 항상 공손한 말씨를 사용하고 예의를 지켰으며,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다고 한다. 퇴계가 벼슬에서 물러나고자 한 까닭은 사화로 어지럽던 시대적 상황과 학문에 대한 열정도 있었지만 한 고을을 다스릴 만한 벼슬에 머무르라는 어머니의 뜻을 지키고자 한 것이기도 하다. 퇴계의 일상생활은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말과 행동을 진지하고 신중하게 하여 우아하고 경건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한평생 경(敬)을 실천한 그의 모습과 태도는 한결같이 단아하고 차분하여, 수양에 의해 절제된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보여 주었다.
3) 멋과 풍류를 즐기는 생활 퇴계는 자연을 지극히 사랑하여 자연 풍경과 철따라 피는 꽃나무에까지 세심한 관심을 기울여 많은 시를 남겼다. 퇴계가 살던 집에는 항상 솔·대나무·매화·국화 등을 심어 벗삼고 즐겼다. 50세 때 한서암을 짓고 뜰에다 소나무·대나무·매화·국화·오이를 심어 지조의 표상으로 삼았다. 이듬해는 계상서당으로 옮겨서도 방당을 만들고 연을 심고, 솔·대·매화·국화·연(송·죽·매·국·연)을 다섯 벗으로 삼아, 자신을 포함하여 여섯 벗이 한 뜰에 모인 육우원(六友園)을 이루어 어울리는 흥취를 즐겼다. 61세 봄에는 도산서당 동쪽에 절우사의 단을 쌓고, 솔·대·매화·국화를 심어 즐겼다. 특히 매화에 대한 사랑이 남달라 서울에 두고 온 매화분을 손자 안도편에 부쳐 배에 싣고 왔을 때 이를 기뻐하여 시를 읊기도 하는 등 매화는 그의 가장 가까운 벗이었다. 매화분 하나를 마주하고 주고 받으며 화답하는 시를 읊조리는 모습은 매화와 퇴계가 하나가 되어가는 경지를 느끼게 한다. 또한 퇴계는 산림에 묻혀 사는 선비로서 산사를 찾아 독서하거나 산을 찾아 노닐기를 즐겨 했다. 그는 독서하는 것과 산에서 노니는 것이 서로 같은 점을 들어 독서와 산놀이를 일치시키기도 했다. 가장 즐겨 찾아 노닐었던 산은 청량산으로 도산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그는 아름다운 경치를 만나면 그 이름이 경관과 어울리지 않으면 이름을 새로 짓기도 하고, 그 자신 소백산을 돌아보고 유산록(遊山錄)을 지었지만 다른 사람의 유산록에도 깊은 관심을 가져 서문이나 발문을 지어 주면서, 산수의 유람이 갖는 의미를 깊이 음미하고 있다.(퇴계는 풍기군수로 있으면서 소백산을 유람하고 봉우리와 대의 이름을 고쳐지었으며, 돌아와 '소백산유산록'을 지었으며, 홍응길의 '금강산유산록'에 서문을 지었고, 남명 조식의'두류산유산록'에 후식을 지었다. 단양군수로 있으면서 단양팔경을 정했으며 죽계구곡도 정했다고 전해진다. 산놀이뿐만 아니라 물놀이도 그의 운치있는 생활의 중요한 부분이다.고향 선배인 농암 이현보을 모시고 분천에 가서 뱃놀이를 하였고, 단양군수로 있으면서 제자 황준량과 함께 귀담에서 뱃놀이하였다. 퇴계가 가장 즐겨 뱃놀이하던 곳은 도산서원 앞에 있는 탁영담이다. 62세 때에는소동파가 적벽에서 뱃놀이를 한 해로부터 8갑주(480년) 되는 날이기에 퇴계도 여러 제자들과 풍월담에서 뱃놀이를 하려고 준비하였으나 전날 큰 비가 내려 이루지 못하여 못내 아쉬워했다. 47세 무렵에는 7대(臺)와 하동(霞洞)에서부터 청량산까지 낙동강을 따라 올라가면서 11승경을 명명하고 시를 짓는 풍류를 즐겼다.
업적,배울점
1. 공직자 |
① 깨끗한 청백리로서의 모습을 보여줌 ② 백운동서원을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으로 만들었음 ③ 79번이나 벼슬을 사퇴하여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 의연한 모습을 보여줌 ④ 경복궁의 기문과 상량문, 현판 글씨, 외교 문서 등을 작성하여 명성을 떨침 |
2. 교육자 |
① 서원건립에 힘써서 많은 서원의 기초를 마련하고 많은 제자를 양성함 ② 과거시험준비나 출세를 하기 위한 학문 풍토를 개선함 ③ 올바른 교육을 위하여 손수 교과서를 만들고 새로운 교육과정을 수립함 ④ 학문하는 태도의 모범을 보이고 바람직한 선비상을 확립함 ⑤ 제자를 사랑하는 올바른 스승상을 정립함 |
3. 문학자 |
① 2000편이 넘는 많은 시를 남김 |
4. 사상가 |
① 고봉 기대승과의 4단 7정에 관한 논쟁을 통하여 학문적 논쟁의 모범을 보여주고, 성리학의 심성론을 크게 발전시킴 ② 수양론의 실천방법을 정밀하게 규명하여 조선시대 도학의 기본틀과 독자성을 정립함 ③ 일본에 많은 영향을 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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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생활인 |
① 예안향약 곧 향약입조 28조를 정하여 향촌의 풍속을 교화함 ② 합리성을 존중하여 현실에 맞는 예법을 시행함 ③ 한 평생 '경'의 태도를 실천하여 인격자의 모범을 보여줌 ④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극진함 |
사상의 개관 퇴계는 16세기 중반에 주리적 이기이원론의 토대 위에서 기대승과의 4단7정론을 통하여 한국 성리학의 특징인 심성론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수양론의 실천방법을 정밀하게 규명함으로써, 조선시대 성리학의 기본 틀을 정립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1. 이기론 퇴계의 사상은 정자, 주자의 입장을 바탕에 둔 정주학의 토대 위에서 세워졌다. 그리하여 정주 계통의 성리학설을 기본 입장으로 하여 퇴계는 이와 다른 이론이나 학설을 배척한다. 불교나 도교와 같은 다른 사상은 말할 것도 없고, 같은 성리학이라 하더라도 심학이라 불려지는 양명학이라든지, 서화담 계통의 기일원론, 나정암(나순흠이라고도 함, 명의 성리학자)의 주기설 및 오초려(오징이라고도 함, 원의 학자)의 주륙 절충적 견해 등을 배척한다. 그 중에서도 양명학과 화담계의 기일원론에 대한 배척이 가장 강력하다. 퇴계는 양명학의 심즉리설과 지행합일설을 거경궁리론과 지행병진설로 조목 조목 반박하고, 화담의 기일원론을 이기이원론으로 반박한다. 결국 퇴계는 정주의 이기이원론만을 인정한다.
2. 심성론(인성론) 이처럼 퇴계는 정주의 입장을 자신의 학문적 토대로 하여 출발하였지만 깊이를 더하여 감에 따라 독자성을 띠게 되었고, 마침내 정주의 차원을 넘어서게 되었는데 그 좋은 예가 심성론 특히 사단칠정론이다. 퇴계는 기대승과의 4단7정론을 통하여 이기론의 이론을 심성 개념의 분석과 해명에 적용하여 한국 유학의 중요한 특징인 심성론(인성론)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와 같은 퇴계의 사상으로 인하여 한국 성리학은 강한 독자성을 지니고 발전하게 된다.
3. 수양론 퇴계의 학문정신은 이론적 정밀성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 완성을 추구하는 수양론으로 열려 있기 때문에, 인간의 심성을 살아 움직이는 현실 속에서 이해한다는데 중요한 특징이 있다. 퇴계의 수양론은 심(心)과 경(敬)의 두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심은 수양이 이루어지는 바탕이요, 경은 수양을 실천하는 방법이다. 퇴계의 학문적 관심은 항상 인간의 도덕적 자기완성을 추구하는 수양론으로 귀결되고 있으므로 이 '경'이야말로 퇴계 사상의 핵심이며, 퇴계가 존경받는 이유도 이러한 경의 태도를 한 평생 몸소 실천한 인격자이기 때문이다.
문인 정유일은 퇴계의 이러한 학문과 사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선생의 학문은 오로지 정주를 표준으로 한다. 경과 의가 같이 지탱하고(경의협지, 敬義夾持), 지와 행이 함께 나아가며(지행병진, 知行幷進), 밖과 안이 한결 같고(표리여일, 表裏如一), 본과 말을 함께 하며(본말병거, 本末幷擧), 대원을 뚫어보고 대본을 심어 세운다(식립대본 植立大本), 그 이른 경지를 논한다면 우리 동방에는 오직 그 한 분 뿐이다.
자 료 실 》일화
1. 합리적인 관혼상제의 시행 |
성호 이익은 퇴계의 예는 예의 지침이며 상례에 있어서는 가장 합리적인 제일인자라 받들고 정리해서 예설유편을 엮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어느 시대든지 통용될 수 있는 법이라야 예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제도에 얽매이기 보다는 인간 위주여야 하고, 때와 재물과 분수와 처지에 맞아야 하고, 검소하고 원칙에 맞게 시행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중국 예법이 여자를 낮추어 죽은 아내를 망실(亡室)이라 한 것을 고실(故室)로 바로 잡았고, 계모를 홀대한 예법을 버리고 아들에게 적모(嫡母-서자가 아버지의 정실을 일컫는 말)상을 치른 후 산소 아래서 시묘도 살게 했다. 죽은 남편을 따라 죽으려는 질부(조카의 아내)를 말려서 열녀가 되기보다는 살아 어버이에게 효도하도록 했고, 상중에 병든 아들과 조카를 종권(일시적으로 상주하는 일을 중지시켜 건강을 회복하는 것)시켜 고기를 먹게 했다. 생일 제사를 지내면 힘에 벅차 기제사도 못 지내게 된다고 당시의 풍속을 바꾸었다. 제물을 많이 담으면 비용이 많이 든다고 쌓지 못하게 하였으며, 부모 합설 제사는 가례에 어긋난다며 단설(제삿날 그 분 제물만 차림)하게 하였다. 초상에는 문상객에게 술 대신 차를 내놓게 하였으며, 제사 음식의 음복은 남과 나누어 먹지 않고 제관만 먹게 하였다. 아무리 죽은 부모가 좋아한 음식이라도 살아있을 때 지위의 높고 낮음에 따라 아들이 따르기 어려우므로 일정한 제물만을 쓰게 하였으며, 진설도에 있더라도 철이 아니면 다 구해 쓰지 못하므로 세 가지 철에 맞는 과일로써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손녀를 출가시킬 때 세속을 따르지 않고 그 철에 입을 옷만을 베와 무명으로 짓게 하고, 중국의 혼례법을 우리 실정에 맞게 고쳐서 시행하였다. 오늘날 전통혼례라 부르는 예식은 퇴계가 개정한 법인데, 조정 중신들이 들고 일어나 말이 많았으나 국왕이 퇴계의 예가 우리 실정에 맞는다며 어명으로 시행케 했다. 혼수함을 종이나 남을 시켜 보내면 불결하고 세도를 부리는 나쁜 예절이라 하여 신랑의 형제들을 시켜보내되 양가 부모가 의논해서 하라고 하였다.
퇴계는 흔히 있는 일이 아닌 까다로운 의례절차에 대해 물어오면 자기 뜻대로 판단하지 않고 옛 성현의 말을 찾고 연구한 후에 그 근거에 따라 시행케 했다. 선경후중(부자를 매장할 때는 아들을 먼저 묻고 아버지는 나중에 묻음)과 후우경(제사는 아버지를 먼저 지내고 아들은 나중에 지냄)의 절차는 증자가 공자에게 물어 시행한 것인데 퇴계가 찾아내어 보급하였다.
퇴계가 벼슬 때문에 객지에 가 있을 때는 제삿날 지방을 써 붙여 놓고 배례하였으며, 귀한 음식이 생기면 변하는 것은 부모님의 지방을 써 붙이고 배례한 후에 먹었고, 마른 것은 두었다가 제사에 쓰도록 큰 댁에 보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을 남에게는 절대로 권하지 않았다. 자기가 선생으로 사숙하는 주자가 그리 했으므로 자기는 따르지만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하도록 권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사람에 따라 성의와 경우가 다르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퇴계는 유가의 예를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제정한 선구자였으나 제자 김취려가 예서를 편찬하도록 부탁했을 때에는 학문과 덕이 없는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라고 거절하였다. |
2. 학문의 기쁨 |
19세 때 '성리대전'의 첫권'태극도설'과 마지막권 '시찬함명부'의 두 권을 구해 읽고 나서는,"모르는 사이에 기쁨이 솟아나고 눈이 열렸는데, 오래 두고 익숙하게 읽으니 점차 의미를 알 게 되어 마치 들어가는 길을 얻은 것 같았다. 이 때부터 비로소 성리학의 체계를 친숙하게 알 게 되었다."고 하였다.
43세 때 왕명으로 '주자대전'을 교정하면서 처음 구해 읽고 주자학의 이해를 본격적으로 심화시켰다. 이 때 그는 한 여름의 무더위 속에서도 문을 닫아 걸고 '주자대저'의 독서에 열중하였다 한다. 당시 주위 사람들이 그가 건강을 상할 까 염려하자, "이 책을 읽으면 문득 가슴 속에서 시원한 기운이 일어나서 더운 줄을 모르게 된다."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그는 '주자대전' 가운데서도 특히 주자의 편지를 통해 도학의 학문 방법을 깨닫고, 학문방법에서 편지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편지는 사람의 자질이 높고 낮음과 학문의 깊고 옅음에 따라 병에 맞추어 약을 주고 물건에 상응하여 저울추를 올려 놓는 방법을 쓴다. 혹은 누르고 혹은 부추키며 혹은 인도하고 혹은 구조하며, 혹은 결려하여 나아가게 하고 혹은 물리쳐 경고해 주기도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퇴계의 학문과 방법이 추상적인 관념의 지식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인격의 만남 속에서 개개인의 절실한 상황에 따라 감동과 분발을 시킴으로써 학문을 심화시키고 진리로 나아가게 하는 진리의 인격적인 실현임을 확인할 수 있다. |
3. 어린 시절의 성품 |
어머니 박씨 부인이 퇴계 선생을 낳을 때 공자가 방문 안에 들어오시는 꿈을 꾸었던 까닭에 그 집 문을 성림문이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그 문은 지금도 태실에 그대로 남아 있다. 생후 일곱 달만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박씨 부인은 농사와 길쌈으로 가난한 살림을 꾸려나가며, 여러 자녀들을 학업에 정진하게 하였다. 그리고 기회 있을 때마다 여러 자식들을 앞에 불러놓고,"너희들은 아버지가 계시지 아니하므로 남의 집 아이들과는 달라서 공부만 잘해도 안된다. 공부를 남보다 잘해야 할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행실을 각별히 삼가지 않으면 안된다.만약 행실이 방정하지 못하면 과부의 자식인 까닭에 옳게 가르치지 못해 그렇다고 남들이 손가락질을 할 터인즉, 너희들은 그 점에 각별히 명심하여 훌륭하신 조상들에게 욕을 돌리지 않게 하여라." 하고 수 없이 타일렀던 것이다. 그런 관계로 퇴계는 어릴 때부터 어른을 공경할 줄 알았고 동무들을 항상 온순하고 겸손하게 대해왔다.
그는 여섯 살 때 처음으로 이웃 노인에게서 천자문을 배우게 되었는데, 아침이면 반드시 세수하고, 머리를 깨끗이 빗고 울타리 밖에서 전날 배운 글을 두어 번 외워본 후에야 선생 집에 들어갔고, 선생 집 앞에서는 공손히 엎드려 스승에게 대한 인사를 엄격하게 올렸다. 이처럼 퇴계는 글을 배우기 시작한 시초부터 성실했던 까닭에 그의 학력은 날이 갈수록 착실해 갔다.
퇴계가 8살 때 이런 일이 있었다. 바로 위의 형인 해가 칼에 손을 다쳐 피가 흐르는 것을 보자 퇴계는 얼른 달려와 상처난 형의 손을 붙잡고 소리를 내어 울었다. 어머니 박씨가 그 광경을 보고 기이하게 여겨서, "정작 손을 다친 형은 울지 않는데 네가 왜 우느냐?"하고 물었다. 그래도 퇴계는 여전히 울면서 이렇게 대답하였다. "형은 나보다 나이가 많아서 울지는 아니하나,피가 이렇게 흐르느데 어찌 아프지 아니하겠습니까?" 그 대답 하나만 들어보아도 퇴계의 성품이 어려서부터 얼마나 인자한가를 가히 알고도 남음이 있다 하겠다. |
4. 독서법 |
퇴계는 어릴 때부터 글읽기를 무척 좋아하여 신변에서 책을 멀리한 적이 하루도 없었다. 그리고 책을 읽을 때면 자세를 바르게 하고 앉아서 온갖 정성을 모두 기우렸었다. 몸이 아무리 피로해도 책을 누워서 읽거나 혹은 흐트러진 자세로 읽는 일이 한번도 없었다. 그처럼 근엄한 독서자세는 어려서부터 70세에 세상을 떠날 때 까지추호도 변함이 없었다. 게다가 퇴계는 책을 남달리 정독하는 편이어서 무슨 책이나 한 번 읽기 시작하면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연거푸 읽어 그 속에 담겨 있는 참된 뜻을 완전히터득하기 전에는 그 책을 결코 내놓지 않았다. 일찍이 퇴계가 서울에 유학하는 중에 '주자전서'를 처음으로 읽게 되었을 때의 일이다. 그는 방문을 굳게 닫고 방안에 조용히 들어 앉아 그 책을 읽기 시작하자 하루에 세 번씩 끼니때 이외에는 일체 외출을 안하고 그 책 한질 만을 수 없이 되풀이 하여 읽었다. 때 마침 그 해 여름은 몹시 무더워서 보통 사람들은 독서는커녕 서늘한 나무그늘을 찾아다니기에 바쁠 지경이었건만 퇴계는 그와 같은 포서도 아랑곳 안하고 방문을 굳게 닫은채 독서만 줄곧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 무더운 한해 여름을 꼬박 '주자전서' 읽는 일로 보냈던 것이다. 어느 친구가 퇴계의 건강을 걱정한 나머지 한번은 퇴계를 찾아 와서 "이 사람아! 독서가 아무리 중요하기로 건강도 생각해야 할 게 아닌가. 요새 같은 무더위에 방문을 닫고 앉아 독서만 전념하다가는 반드시 건강을 해치게 될걸세. 독서는 생량후에 하기로 하고 이 여름에는 산수좋은 곳으로 척서라도 다녀오도록 하세!" 하고 충고 한 말이 있었다. 그러자 퇴계는 조용히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가슴속에 시원한 기운이 감도는 것같은 깨달음이 느껴져서 더위를 모르게 되는데, 무슨 병이 생기겠는가. 이 책에는 무한한 진리가 담겨져 있어서 읽으면 읽을수록 정신이 상쾌해 지며 마음에 기쁨이 솟아 오를 뿐이네!" 그리고 그는 이어서 이렇게도 말하였다. "이 책의 원주를 읽어보고 나는 학문하는 방법을 알 수 있게 되었고, 그 방법을 알고 나니 이 책을 읽는데 더욱 흥이 일어나네, 이 책을 충분히 터득하고 나서 사서를 다시 읽어보니 성현들의 한말씀 한말씀에 새로운 깨달음이 느껴져서 나는 이제야 학문하는 길을 제대로 알 게 된 것 같으이. 퇴게는 주자학에 그만큼 심취했었고, 주자학을 연구하므로써 새로운 경지를 크게 발전시켰다. 그리하여 광범하고 산만하기만 하던 주자학을 근본적으로 발전시키고 체계화하여 마침내는 퇴계학 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수립하는데 성공한 것이 었다. 퇴계는 책을 읽는 방법에 있어서 남달리 정밀하게 읽었으니, 그것은 퇴계 자신의 다음과 같은 말을 들어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어느 제자 한 사람이 글을 올바르게 읽는 방법을 물었더니, 그는 즉석에서 이렇게 대답하였다. "글이란 정신을 차려서 수없이 반복해 읽어야 하는 것이다. 한두 번 읽어보고 뜻을 대충 알았다고 해서 그 책을 그냥 내 버리면 그것이 자기 몸에 충분히 배지 못해서 마음에 간직할 수 가 없게 된다. 이미 알고 난 뒤에도 그것을 자기몸에 배도록 공부를 더 해야만 비로소 마음 속에 길이 간직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야만 학문의 참된 뜻을 체험하여 마음에 흐뭇한 맛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는 또 독서에 대해 이렇게도 말했다. "글을 읽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반드시 성현들의 말씀과 행동을 본받아서 그것을 자기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경지에 까지 도달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서둘러 읽어서 그냥 넘겨 버리면 그 책을 읽기는 했어도 별로 소득은 없게 되는 것이다." 실로 독서의 진수를 정확하게 지적한 금언이라 하겠다. |
5. 가정 교육 |
1) 생후 일곱 달만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박씨 부인은 농사와 길쌈으로 가난한 살림을 꾸려나가며, 여러 자녀들을 학업에 정진하게 하였다. 그리고 기회 있을 때마다 여러 자식들을 앞에 불러놓고,"너희들은 아버지가 계시지 아니하므로 남의 집 아이들과는 달라서 공부만 잘해도 안된다. 공부를 남보다 잘해야 할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행실을 각별히 삼가지 않으면 안된다.만약 행실이 방정하지 못하면 과부의 자식인 까닭에 옳게 가르치지 못해 그렇다고 남들이 손가락질을 할 터인즉, 너희들은 그 점에 각별히 명심하여 훌륭하신 조상들에게 욕을 돌리지 않게 하여라." 하고 수 없이 타일렀던 것이다.
2) 숙부 송재공께서 진주 목사로 있었는데 둘째 형과 넷째 형이 그를 따라갔다. 선생은 형제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가끔 말하곤 하였다. 이를 듣고 모부인이 말씀하기를, "자식된 도리는 마땅히 글공부에 힘써야 하는 법이다. 너희 형들은 그러기 위해 갔는데, 어찌하여 형제 간에 떨어져 있는 괴로움만 생각하느냐?'하였다.
3)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숙부께서는 과정을 엄하게 세워서 나로 하여금 조금도 느긋하거나 예사로이 하지 못하도록 하셨다. 나는 가르침을 받들어 조심하고 힘쓰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숙부께서는 가르치고 독려하시는 일에 엄격하여 잘했다고 칭찬하는 일이 적었다. 한 번은 '논어'와 그 '집주'를 초장으로부터 종편에 이르기까지 한 글자도 틀리지 않게 배송(背誦-책을 덮고 외움)하였으되 크게 칭찬하는 말씀이 없었다. 내가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게 된 것은 모두 숙부께서 가르치고 독려한 힘 때문이다."하셨다. |
6. 명종과 퇴계 |
퇴계는 65세 12월에 명종으로부터 특별 부름을 받았다.
'왕의 전교'
내가 총명하지 못하고 어진 이를 좋아하는 정성이 모자라 전부터 여러 번 불렀으나 매양 늙고 병들었다 하여 사양하므로 내 마음이 편하지 못하노라. 경은 나의 지극한 심회를 알고 빨리 올라오라.
이 특별소명을 거역할 수 없어 퇴계는 66세가 된 정월에 서행 길에 올랐으나 병환은 가볍지 않았다. 영주에 도착해서 사면장을 올리고 풍기에 가서 왕명을 기다렸으나 허락하지 않는다는 유지가 내리고 각읍 수령에게는 잘 호송하라 하였다.
'왕의 유지'
경의 사직하고자 하는 글을 보니 짐의 마음이 쪼개지는 듯하다. 사퇴하려고만 말라. 여러 번 부르는 정성을 저 버리지 말고 잘 조리해서 올라오라.
내의에게 약을 가지고 가서 문병하라고 명하였다. 퇴계는 유지를 받고도 나갈 몸이 못됨을 아뢰고, 눈 쌓인 죽령을 피해 조령으로 방향을 바꾸어 예천에 이른 후 또 다시 부디 병든 몸을 놓아달라고 장계를 올렸다. 그래도 국왕은 윤허를 내리지 않고 공조판서와 예문관대제학으로 승진시켜 소명을 내렸다. 퇴계는 이번에도 사장을 올려 나아가지 아니하고 절간에서 기다렸다. 왕은 윤허는 커녕 홍문관·예문관 대제학과 성균관 지사에다가 경연과 춘추관 동지사까지 겸임시켜 상경하도록 독촉하였다. 그 뒤 4월에 올린 퇴계의 장계를 대신들이 보고, 6경의 자리를 오래 비워 두어서는 안된다고 윤허를 주청하여 중추부지사로 체직하게 되었다. 7월에 가서 퇴계는 자헌대부와 중추직도 해직하여 달라는 사장을 올렸으나 허락치 아니하고 병이 낫는대로 상경하라는 명을 받았다. 그런 후에도 명종은 퇴계를 잊지 못하여 '초현부지탄(招賢不至嘆)-현인을 불러도 오지 않음'이란 제목으로 신하들에게 시를 짓게 하였고, 송인을 도산에 보내어 도산도를 그려오게 하여 그림 위에 도산기와 도산잡영을 써서 병풍을 만들어 두고 보았다고 한다.
참고도서 : 이퇴계의 실행유학 / 권오봉 저 / 1997년 학사원 p407~408 |
7. 대장장이 배순과 퇴계 |
1548년 1월 단양군수로 부임한 퇴계는 10월에 풍기군수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당시에는 아우가 형의 부하로 근무할 수 없는 제도가 있었는데 대사헌으로 있던 넷째 형 온계가 충청감사로 부임해 왔기 때문이다. 주세붕이 백운동 서원을 창건하고 떠난 지 4년 뒤에 퇴계가 풍기군수로 온 것이다. 퇴계는 풍기군수로 1년 동안 있으면서 백운동 서원을 우리나라의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만들고, 청탁을 일절 배제하는 등 공직기강을 확립하였으며, 서원에서 많은 제자들을 받아들여 가르쳤다. 그 중에서 계급의 귀천을 차별하지 않고 천민인 배순을 교육한 것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생각할 때 퇴계의 인간됨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다. 배순이 살았던 곳은 소수서원에 가까운 배점리였으며, 직업은 야공(冶工 : 대장장이)이었다.그는 신분이 비천함에도 학문을 좋아하였고, 퇴계가 백운동서원에서 가르칠 때 자주 뜰아래에 와서 돌아갈 줄 모르고 즐겨 청강하기에 아는 정도를 시험해 보았더니 능히 이해하므로 기특하게 여긴 퇴계가 함께 가르쳤다고 한다. 퇴계가 풍기군수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간 뒤에는 선생의 철상을 주조하여 아침 저녁으로 분향하면서 경모하였다. 22년후 선생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퇴계가 풍기를 떠난 것은 1549년 11월이고 돌아가신 것은 1570년 12월 8일이다) 삼년복을 입었으며, 철상을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그가 죽은 뒷날 배순의 손자가 조부의 묘에 비석을 세웠는데, 창석 이준 군수가 지은 시가 비문으로 전해졌다
그 후 전 포항공대교수인 권오봉 교수를 비롯한 여러분들의 노력으로 매몰되어가던 배순의 정려비와 무덤을 찾아 말끔히 보수하여 1992년 11월 21일 준공 낙성하였으며 1993년 2월 25일자로 도문화재 279호로 지정되었다. 안내판은 권오봉 교수가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배순 정려비
배순은 조선 명종·선조 때 사람으로 본관은 흥해이다. 그는 천성과 효성이 지극히 순근(淳謹)하였다. 순흥부의 철공인이지만 학문에 힘쓰므로 퇴계선생이 서원에서 유생과 함께 가르쳤다. 선생이 떠나자 철상을 만들어 모시고 공부하다가 죽은 후는 3년복을 입었다. 배순이 죽은 뒤 이준 군수는 시를 짓고 군민이 기려 정려각을 세웠다. 손자 종이 묘표(墓表)를 세울 때 비를 세웠더니 먼 훗날 7대 외손 임만유가 충신백성이라 새겨 다시 세웠다. 소수서원의 퇴계선생 평민교육과 배공이 스승을 받든 이 정려비는 국내 유일의 소중한 보물이며 교육자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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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증손자와 퇴계 |
손자인 안도(安道)가 아들 창양을 데리고 성균관에 유학하고 있을 때다. 창양이 출생한지 6개월만에 손자 며느리가 딸을 잉태하여 젖이 끊기게 되었다. 오늘과 같이 우유로 아이를 키우는 시대가 아니었으므로 아기를 키우기가 매우 힘들었고, 창양은 영양실조로 별별 병을 다 앓았다. 그래서 도산 본댁에 유모를 구해 보도록 부탁하였다. 마침 딸 낳은 여자 종이 있어서 아기를 떼어놓고 서울로 올라오도록 일을 추진하고 있을 때 퇴계가 그 낌새를 알 게 되었다. 시어른의 엄한 법도를 알면서도 미리 아뢰지 않은 것은, 창양을 출산했을 때 '우리 집에 이 보다 더한 경사가 없다.'라고 기뻐하였으므로 증손자를 위한다면 어떤 일이든 묵인해 주리라 믿고 나중에 알리려고 하였던 것이다. 퇴계는 이 일을 알고 엄히 꾸짖고 중지시키고 '근사록'의 말을 인용하면서 편지를 썼다.
"몇 달 동안만 밥물로 키운다면 이 아이도 키우고 서울 아이도 구할 수 있다. 어린 아이를 떼어놓고 가는 그 어미의 마음은 오죽하겠으며 서울까지 가는 동안에 이 아이는 죽고 말 것이고 젖도 막히게 될 것이다. 내 자식을 키우기 위해 남의 자식을 죽일 수는 없다. 어미가 자식 키우는 정은 짐승도 마찬가지인데 학문을 한다는 유가의 체통으로 차마 어찌 이런 일을 할 수 있더냐! 몇 달을 참으면 두 아이를 다 구할 수 있으니 여기 아이가 좀더 자랄 때까지 참고 기다려라. 그 때 가서 데리고 가도록 하마."
하고 손자를 타일렀다. 그 후 겨울과 봄은 어렵게 넘겼지만 창양은 증조부를 보지도 못한 채 1570년 5월 23일 죽고 말았다. 퇴계는 그 아픔을 가족들에게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으나, 여러 문인들에게 아픈 심정을 여러 번 토로하였다. 퇴계의 인간 평등사상은 당신의 증손자를 잃으면서까지 하인의 딸을 살렸고, 어미가 자식을 키우는 사랑과 천륜은 사람의 귀천에 차별이 없음을 행동으로 가르쳐 주었다. |
9. 퇴계의 자기 반성 |
퇴계는 매일 일기를 썼던 것 같은데 전해지는 일기는 극히 일부분 뿐이다. 그러한 가운데 퇴계언행록에는 일기를 보충할 만한 자기반성의 고백이 기록되어 있다. 1) 내가 한번은 금문원의 집에 갔는데, 산 기슭이 매우 가파라서 갈 때는 고삐를 꽉잡고 조심조심 하였으나, 돌아올 때는 얼큰히 취하여 길이 험한 것을 깜빡잊고 탄탄대로인양 안심하고 왔다. 마음을 채근하고 버림이 이와 같으니 두렵지 아니한가. 2) 나는 과거에 여러번 응시하였으나 처음에는 합격 불합격에 그다지 마음을 쓰지 않았다. 스물 네 살 때에 연거푸 세 번을 낙방하였으나 역시 큰 상심은 아니 하였는데, 하루는 집에 있자니까 누군가 "이서방, 이서방"하고 부르는데 가만히 보니 늙은 종이었다. 그리하여 문득 탄식하기를 내가 아직도 이름 밑에 아무런 호칭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욕을 보는구나 생각하고 갑자기 과거 시험에 합격하여야 되겠다고 생각하였다. 사람의 마음이 이렇듯 바뀌니 두렵지 아니한가. 3) 내가 처음 과거에 합격하던 해에 여러 사람에게 이끌려 날마다 술마시고 놀러 다니느라 조금도 겨를이 없었다. 밤에 돌아와서 생각하니 부끄러운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즈음에 와서는 다시 이런 마음이 생기지 않게 되어 그러한 부끄러움을 면할 수 있게 되었다. 4) 번잡하고 흥겨운데서 사람의 성정이 바뀐다. 내가 사인으로 있을 때, 어느 잔치 자리에서 기생들이 눈 앞에 가득이 있어서 문득 기쁘고 즐거운 마음이 생겼다. 비록 힘써 욕망을 억제하여 구렁텅이로 빠지는 지경은 면하였으나 이러한 기회가 바로 살고 죽는 갈림실인 것이다. 어찌 조심하지 않을손가. |
10. 과거 공부와 서원 교육 |
이황은 관학인 향교와 국학은 나라의 제도와 규정에 얽매이고 과거 공부에 주력하여 옳은 학문을 이룰 수 없는 반면, 서원에서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출세주의와 공리주의를 떠나 순수한 학문 연구에 몰두할 수 있다고 보았다. 사림들의 출세 방법이 과거를 통한 벼슬밖에 없었던 당시에 개인의 수양을 위한 학문을 위주로 하는 성리학의 학문관을 토착화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실제로 이황의 아들 손자조차도 과거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황이 도산서당에서 강학하던 당시에 영주에는 과거 공부를 전문으로 지도하는 사설 학원이 있었다. 이 학원은 인격 함양이나 학문이 목적이 아니라 과거에 대비하는 교육이 주목적이었다. 오늘날의 진학지도 학원 같은 성격을 띤 사설 학원이었던 것이다. 이황의 손자 안도도 이곳을 찾아간 적이 있어서 이황은 문장 수련에 힘을 쓰는 손자를 나무라기까지 하였다. 이황이 유교 경전과 성리학 서적을 중심 교재로 삼아 강의하는데 반해서 영주의 사설 학원에서는 과거 위주의 암키와 작문을 주로 가르쳤다. 손자가 조부의 교육을 이해하지 못하자 이황은 하도 딱해서 "가까이 있는 단 복숭아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쓴 돌배 따러 온 산천을 헤매고 있구나."라는 시를 보여 주며 손자를 일깨워 주었다고 한다. 아들 준도 부친의 강학보다 영주의 학원에 가서 공부하는 것을 원했다. 이황은 내심 못마땅해 하면서도 허락했는데, 준은 곧 아버지의 가르침이 옳다는 것을 깨닫고 되돌아왔다. 이황의 실천중심의 학문, 배운 것을 그대로 실천하는 도덕 교육, 즉 앎과 실천을 함께하는(지행병진 : 知行竝進)의 학문을 집안 사람들도 처음에는 납득하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과거를 앞두고 이황에게 과거 시험을 위한 수업을 받으러 왔다가 그가 과거와는 상관없는 경학을 중심으로 가르치자 되돌아간 생도가 많았다고 한다. |
11. 도산서당에서의 생활 |
나는 항상 오래된 병고에 사로잡혀 있으니, 비록 산에 있다 해도 마음대로 글을 읽지 못한다. 깊은 아픔을 견디며 오래 숨을 고르고 나면, 때로는 육신이 날아갈 듯이 가볍고 편하여지며, 몸과 마음이 맑게 깨어나서, 세상을 돌아봄에 감개무량하기 이를 데 없어지기도 한다. 그럴 때면 책을 덮고 지팡이를 이끌고 방을 나서서 '헌'(암서헌)에 이르고, '당'(정우당)을 구경하고, '단'을 거닐고 '사'(절우사)'를 찾고, 밭에 나아가 약초를 심고, 숲을 헤쳐 꽃도 따고, 혹은 돌 위에 앉아 샘물도 만져보고, '대'(천연대, 운영대)에 올라 구름도 바라보고, 혹은 물가 바위(반타석)에 기대 고기 노는 것도 구경하고, 물 위에 배를 띄우고 앉아 갈매기도 희롱하여 보기도 한다. 이렇게 마음이 끌리는 대로 이리 저리 돌아다니고, 눈길 가 닿는 것마다 살펴보고, 좋은 경치를 만나 흥에 취하여 노닐다가 돌아오면, 집은 적막하게 가라앉아 있고, 책은 벽에 가득하여, 책상을 마주하고 앉아 이미 알아낸 것은 따르고 새로 찾은 것은 닦아서 마음으로 깨우치기를 기다리다가 어떤 때는 밥 먹는 것까지 잊을 정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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