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친절한 우진씨
그림책-형제설비 보맨.hwp
< 형제설비 보맨 을 읽고 >
글 조하연. 그림 카오리. 도서출판 곁애
2020.3 더불어
할머니는 전봇대 아래 버려진 것들을 모읍니다.
그렇게 주워 온 깡통, 신문지, 병들이
보일러실에 꽉 들어 차 있습니다.
할머니댁 보일러가 꿀렁꿀렁 꾸울렁 수상했습니다.
‘따뜻해지면 다 걷어내고 살펴 봐 드려야겠는데...’
보맨의 마음에 미뤄둔 숙제였습니다.
형제설비 보맨은 실제로 서울 구로시장 골목 귀퉁이에 있는 이명기씨의 실제 이야기를 '곁애'라는 서울 마을기업·문화예술 협동조합에서 그림책으로 만들었다.
보맨은 홀로 지내시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창문, 씽크대, 보일러를 손봐드리느라 쉴 틈이 없다. 마을을 돌며 고물 보일러들을 주워서 가게로 가져와 쓸 만한 부속품들을 모아 두었다가 생활이 어려운 어르신들의 보일러를 손보는데 쓴다. 보맨은 홀로 사시는 할머니 댁 보일러를 고쳐주고 일당으로 홍시 하나를 기분 좋게 받는 넉넉한 마음을 가지신 분이다. 자식들도 자주 찾아오지 않아 홀로 외롭게 사시는 어르신들의 집을 찾아가서 도움을 주고 있다. 보맨이 있어서 그 마을 어르신들의 마음은 따뜻해지고 환해지리라 생각된다.
이른 아침 ‘띵동! 띵동!’하는 초인종 소리가 울린다.
아침부터 누가 찾아왔는지 화면을 보니 모르는 아주머니의 얼굴이 비친다.
사람이 없는 척 돌아가기를 기다리는데 다시 한 번 초인종 소리가 들린다.
그제서야 ‘누구세요?’ 하고 물으니 옆집 할머니 댁에 일을 하고 있는 요양보호사라고 하신다. 요양보호사분이 우리 집에는 무슨 일인지 물어보니 옆집 할머니 댁에 화장실 변기가 고장이 났는데 옆집 아저씨에게 수리를 부탁하셨다고 하신다. 나는 변기가 고장났는데 관리아저씨나 수리 기사를 부르지 않고 남편에게 부탁을 하신 것이 의아스러웠다.
일단은 알겠다고 하고 아직 자고 있는 남편을 깨웠다. 남편은 좀 있다 출근하면서 가보겠다고 했다. 아침을 먹고 있는데 초인종 소리가 또 들리고 좀 빨리 와서 봐주실 수 없느냐고 한다. 나는 부탁을 받은 것인데 이건 우리가 해야 될 일을 안 해서 재촉을 받는 느낌이 들어서 언짢아졌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옆집 할머니께서 중풍으로 몸을 움직이시기 힘드셔서 안방 화장실만 사용을 하시는데 그 화장실이 고장이 나서 거실 끝에 있는 바깥 화장실 까지는 거동을 하기 힘드셔서 그렇게 재촉을 하셨던 모양이었다.
남편이 변기 수리를 할 줄 아는 건 어떻게 아셨는지 궁금했는데 우리가 이사 오고 이것저것 공구를 가지고 다니면서 현관문의 도어락을 직접 설치하는 모습을 보셨고 나는 모르고 있었지만 몇 해 전에 변기 부품이 하나 고장 난 것을 남편이 고쳐준 적이 있다고 했다.
그날도 가벼운 고장이어서 남편이 부품을 새로 사서 갈아주었다고 했다. 할머니께서는 돈을 주시겠다고 그러셨는데 남편은 괜찮다고 하고 부리나케 나왔다고 한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를 온지는 십년이 훨씬 넘었다. 그때 우리 둘째가 돌이 되기 전이었는데 지금 벌써 중학생이 되었다.
그 당시 옆집의 할머니는 정정하시고 우리 아이들을 만날 때마다 쑥쑥 커가는 모습이 보기 좋다고 환하게 웃으시고는 하셨다.
그러던 분이 잘 보이지 않으시더니 그동안 아프셨던 모양이었다. 작년에 걸음걸이가 불편한 모습이지만 지팡이를 짚고 아파트 1층을 운동 삼아서 걸어가는 모습을 종종 보았다. 올해는 몸이 더 안 좋아지셨는지 혼자서는 못 다니시고 요양보호사분의 부축을 받고 걸어 다니시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첫 돌이 될 무렵 걸음마를 떼기 시작했던 우리 둘째 아이는 이제 폭풍 성장하여 키도 나와 비슷해지고 나보다 몸무게는 더 나가는 건장한 청소년으로 자랐다.
지금, 이웃 집 할머니께서는 걸음마를 떼는 그때의 우리 아이처럼 그렇게 거의 매일 부축을 받으면서 걸음마를 연습하는 모습을 보면서 한 사람이 태어나 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하다가 나이 들어가면서 다시 아이처럼 그렇게 작아지는 장면들이 필름처럼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오늘 아침 출근 길.
옆집 할머니께서 요양보호사분과 함께 걷기 연습을 하고 계셨고 할머니께서 나에게 뭐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 같아 가까이 다가갔다. 요양보호사분이 전해주시기를
저번에 아침 일찍부터 남의 집에 찾아가서 변기를 고쳐달라고 했다고 딸들이 그 이야기를 듣고는 난리를 쳤다고 미안하다고 하신다. 나는 괜찮다고 하며 미소를 지었다. 내가 한 일은 아니지만 남편이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어서 나도 더불어 마음이 따뜻해졌다.
“ 오래된 친구, 오래된 식당, 오래된 노래, 오래 된 것을 떠올려 봅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견뎌내고 언제든 내가 찾아가면 반가이 맞아주는
오래된 것들.
오래되었다는 건 잘 참고 버티고 있어주었다는 의미라 생각됩니다.“
오래된 것들은 낡고 부서지기 쉽다. 물건이든 사람이든 서로 서로 부족한 부분들을 조금씩 채워주면서 그렇게 조금 더 참고 버텨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