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회고록 1막5장(1부)
5막 1장 이면 다섯살이 되는해이다.
기억나는 일들이 조금씩 생생 하게 느껴지는 나이였다.
판별력이나 이상주의 개념은 아닐지언정 자신을 표현하고 남의 표정에 관심을 가지는 나이였으니 할말도 점점 많아질 것이다.
네살까지는 개구리로 치면 올챙이처럼 동물적인 보호아래 진화하는 시기였다면 다섯살부터는 언어소통이 가능하고 도보로 공간 이동도 가능하며. 웃음과 슬픔을 판별하게 되는 나이로 향상 된것이다.
다섯살때 우리집은 서대문구 현저동 지금으로 말하면 서대문구 독립문 옆 언덕위로 이사하였다.
집으로 가는 길은 넓다란 시멘트포장으로 이여졌고
구부러진 언덕을 오를시면 세탁소,연탄가게, 담배파는 구멍가게, 푸줏간, 솜트는 이불집과 방아간이나열되고 있었으며 , 우리집은 큰길가에서 돌계단 세개를 올라가 나무대문을 열어야 마당으로 들어갈수 있는 한옥집으로 기억한다.
그당시 나는 몰랐지만 한옥집에 살면 상당한 부촌에 속하였나보다.
물론 우리집은 전세방으로 추정되였어도 종종 일가친척이 놀러와도 불편함이 없었다.
그리고 나는 다섯살때 영천의 한옥집에서 흑백TV를 보게 되였다.
그당시 흑백TV가지고 있는집이 1%도 않되였으니
저녁이면 우리집으로 티브이 시청하려 이웃분들이나 친척들이 거실에 걸터앉아 티브이 시청에 몰두하였고 "박치기의 왕 김일" 레슬링이 방송될시는 우리집은 방청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김일 레슬링 선수의 박치기는 일품이였다.
코너에 몰려 피범벅이 된(그당시는 흑백이라 피가 검게 보였음) 글로기상태에서 상대방 머리를 한손으로 잡고 앞이마로 상대방 이마를 가격하면 상대방은 십중팔구 넉다운 되는 통쾌한 역전의 레슬러 였으니
그당시 우리들의 영웅 이였던 것이다.
나도 흑백TV를 다섯살때 접하며 우리집에 흑백TV있다고 온동네 자랑하고 다니곤 하였다.
지금은 TV가 흔한 세상이나 그당시에는 방송국도 한두개밖에 없었고, 전파사(라디오,TV 판매하고 수리하는 곳)에서 라디오라도 틀을시면 온 동네사람들 귀가 송긋하고 전파사로 몰린 문명 초기의 시국이였다.
내 동생 기수도 두살이 되여 나하고 눈맞춤도 하고 싱긋 웃기도 하였다.
기수는 참 귀여 웠다
이목구비가 뚜렷하였고 하얀피부를 가지고 싱끗 눈웃음을 칠시면 온가족이 같이 웃고 하였으니 말이다.
기수는 할머니와 온 가족의 사랑을 독차지하다 일년후 세째 기준이가 태어나자 동생 한테 밀려 나하고 똑같이 찬밥 신세가 되고 만다
그후 기준이는 할머니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할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하였고 하루종일
기준이만 부둥켜 안고 다니셨다. 내 둘째 동생 기준이에 대한 감정이 나중에는 질투와 선망의 대상이 되고 만다.
그런 할머니는 아버지의 효심에 다른 자식들은 거들떠도 안보고 아버지옆에서 평생을 지내시다 돌아가셨다.
우리 아버님이 과연 효자는 효자셨나 보다.
그당시만 하여도 맏아들이 부모님 모시고 제사지내는 것이 관례이거늘. 둘째 며느리인 어머님과 둘째 아들인 아버님이 홀어머님을 지극정성 모셔서인지 그은덕으로 오늘날 구순 고령임에도 건강하게 장수 부부로 백년해로 하시는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