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한복음 3장 31-36절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시라
예수님께서 살렘이라는 곳에서 그의 제자들을 통해 세례를 베푸실 때는 세례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한 때입니다. 그때 살렘 가까운 애논이라는 곳에서 세례 요한도 세례를 베풀고 있었는데, 이때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과 정결예식에 대한 변론이 있었습니다. 변론의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지 않지만 정결예식과 관련해서 변론이 있었다고 말하기 때문에 모세의 율법 혹은 장로의 유전과 함께 세례 요한이 베푸는 세례와 예수께서 베푸는 세례도 변론의 내용으로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는 세례 요한과 예수에 대한 비교로까지 진전되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변론 이후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세례 요한에게 와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선생이 아니라 예수께로 가서 세례 받는 것에 대하여 시기 혹은 질투 혹은 경쟁심을 나타냈던 것입니다.
이런 저들에 대하여 세례 요한은 하늘에서 주신 바가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마치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세례 요한의 증언으로 말미암아 예수가 증거 된 것처럼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주신 바가 아니면 사람은 하늘에 속한 내용을 결코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경은 세례 요한의 증언도 말하고, 그의 증언을 통해 예수께로 나아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사실이지만 더 분명한 사실은 그의 증언 때문이 아니라 하늘에서 그의 증언을 통해 주신 바가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바로 그 사실을 제자들에게 알렸던 것입니다.
이어 세례 요한은 이전부터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것, 오히려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일뿐이라는 것을 말해왔다는 것을 다시금 강조하면서 그 사실을 증언해야 할 자가 너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신랑이 아니라 신랑의 친구로서 신랑의 결혼식에 참여하여 그가 기뻐하는 것을 기뻐하는 자에 불과하다고 말했습니다. 한 마디로 자신의 소명은 자신이 흥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만을 흥하도록 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쇠할지언정 예수 그리스도만 흥할 수 있다면 자신의 쇠함에 대해서조차 기뻐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자신의 소명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신과는 달리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 세례 요한은 오늘 본문을 통해 증언합니다. 먼저 31절을 보시면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자신은 땅에서 난 자입니다. 자신만이 아니라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아담의 본성을 타고 난 자들은 다 땅에서 난 자들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통한 일반적인 출생으로 태어났고, 그러하기에 아담 안에서 함께 타락한 자요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 자들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예수님은 그런 분이 아니라고 소개합니다. 땅에서 나신 분이 아니라 ‘위로부터 오시는 이’라고 표현합니다.
물론 예수님도 참 사람이십니다. 위로부터 오신 분으로 표현하기 때문에 참 사람이 아니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어머니를 통한 일반적인 출생으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성령의 권능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어서 태어나셨습니다. 우리와 같은 참된 몸을 취하셨고, 지각 있는 영혼도 취하셨습니다. 그래서 참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와 다른 점 한 가지가 있는데, 죄는 없으시다는 사실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위로부터 오시는 분으로서 모든 인류처럼 아담 안에서 함께 타락하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부패성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죄는 일체 없으시지만 그 외에는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참 사람이십니다. 하지만 사람으로 오셨다고 해서 땅에서 나신 분이신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좀 더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세례 요한은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다고 표현합니다. 모든 것보다 위에 계신 분, 모든 것보다 초월해 계신 분,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지금 세례 요한은 자신과 비교해서 좀 더 나은 분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자신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그런 초월성을 지니고 계신 분으로 언급합니다. 땅에서 난 자들과는 절대적으로 비교 불가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사도 요한은 복음서 처음부터 다음과 같이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1:1-3) 태초부터 계신 분, 이 분을 말씀이라 칭할 때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분, 바로 그분이 모든 만물을 친히 만드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복음서 맨 처음 말한 것을 세례 요한은 만물 위에 계시는 분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다시 보시면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한다고 하면서 자신과 예수 그리스도를 비교하고 있는데, “세례 요한은 하늘에 속한 것을 말하지 않았는가? 그의 가르침은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땅에 속한 것만 말한 것인가?” 라는 물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세례 요한은 자신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비교하고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비교하되 자신보다 좀 낫다는 정도가 아니라 절대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을 여기서 언급하고자 합니다. 바로 그런 측면에서 자신은 땅에서 난 자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 자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은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 자에 불과하다는 것이 진리와 상관없는 가르침으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다고 말씀하기도 하십니다(눅7:28). 또한 성경은 세례 요한에 대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요1:6). 그의 세례에 대해서도 예수님은 넌지시 하늘로부터 온 것임을 말씀하기도 하십니다(마21:25). 이런 점에서 세례 요한의 가르침이 진리와 상관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하늘에 속한 것을 분명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위로부터 오시는 분인 반면 자신은 땅에서 난 자요 땅에 속한 자로서 그분과 비교하자면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 자로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지난주에 누가복음 16장 16절을 언급하면서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는 그런 과도기의 한 면으로 지난주 본문과 오늘 본문이 있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그런 부분을 염두 해 둔다면 이것은 세례 요한에게만 속한 것이 아니라 세례 요한에 앞서 구약의 모든 율법과 선지자의 때까지가 이러한 면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참된 선지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진리에 증언하지만 오실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비교하자면 그들은 땅에서 난 자요 땅에 속한 자로서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 자로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을 그림자로 표현하는 겁니다. 정결예식에 대하여 논쟁하였다고 했지만 짐승을 잡아 제물로 드린 율법의 제사도 그러하고, 물로 씻는 예식 또한 그러한 것입니다.
그럼 신약 시대는 다른가? 구약 시대보다는 분명한 실체를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낫다고 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와 비교하면 신약 시대의 모든 사역자들 역시 땅에서 난 자요 땅에 속하여 땅의 것을 말하는 자로 있을 뿐입니다. 그만큼 우리와 그리스도의 차이는 땅과 하늘만큼의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조명을 따라 그리고 역사적 정통 해석에 따라 주의 말씀을 올바르게 잘 가르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의 가르침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만큼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항상 겸손한 자로 있어야 합니다. 혹 하나님께서 그런 가르침을 통해 좋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면 땅의 것을 말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씀을 사용하신다는 것으로 감사하는 것이 우리의 자세로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세례 요한이 말한 바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말씀의 자세라 할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본문을 보시면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신 분으로서 32절에서는 “그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되 그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도다”고 말합니다. 일단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보고 들었다고 할 때는 구약 선지자들 그리고 세례 요한, 나아가 신약에서 사도와 목사가 보고 들은 것과 차이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사도 요한의 경우 요한일서 1장 1절에서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는 표현도 하지만 사람이 보고 들은 것은 어떤 형태든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직접 보고 들은 것이 아니라 계시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드러내주신 바에 의해서 보고 들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고 들은 것은 그런 계시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오시는 분이시지만 사도 요한이 복음서 맨 처음부터 밝힌 것처럼 태초부터 계신 분이시요, 하나님과 함께 계신 분이십니다.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친히 보고 들은 분으로 계십니다.
이런 차이는 부분적으로 아는 것과 전체를 아는 차이도 있습니다. 계시에 의존한다는 것은 계시된 만큼만 알 수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계시된 만큼이라고 할 때도 계시된 만큼 다 아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알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의 형태로 가지고 있지만 기록된 모든 말씀의 뜻을 다 알지 못한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친히 보고 들은 분으로서 알지 못하는 것이 없습니다. 전체를 아십니다. 모르는 것이 전혀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그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한다고 할 때 그의 증언보다 더 분명한 증언은 없습니다. 그의 증언에 의심스러운 것이 있는가? 틀린 것이 있는가? 전혀 없습니다. 그의 증언은 너무나도 확실한 것들이어서 누구나 안심하고 다 받아들일 수 있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들입니다(매튜 풀 주석).
그런데 오늘 본문을 통해 세례 요한은 이런 분명하고도 확실한 증언에 대하여 사람들이 받아들였는가 할 때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설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보다 더 분명하고 확실한 증언이 없지만 그의 증언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말한 것처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였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고(요1:5), 하나님이신 분이 사람의 몸을 취하여 자기 백성이 거하는 땅에 오셨지만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요1:11).
이런 사실은 예수님께서도 친히 니고데모와의 대화 속에서 말씀하기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 11절을 보시면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 자신만이 아니라 구약의 선지자들을 염두 해 둔 표현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로부터 지금 예수님에게 이르기까지 아는 것과 본 것을 항상 증언하였다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내용을 염두 해 둔다면 구약 선지자의 경우는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아 알고 본 바를 증언한 것이고, 예수님의 경우는 계시를 받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알고 본 바를 증언하였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동일한 것은 거짓이 아닌 참된 진리를 증언하였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너희 조상들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 증언들을 받아 들였는가?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12절의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오늘 본문으로 하자면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오시는 분이십니다. 세례 요한의 경우 땅에서 난 자로서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 자이지만, 예수님은 하늘에서 난 자로서 하늘에 속한 자요 하늘에 속한 것을 말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니고데모에게 이르신 것은 땅의 일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한다면 더더욱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해당 본문을 통해서도 말씀드린 바가 있지만 땅의 일이나 하늘의 일이나 그 핵심은 같습니다. 땅의 일을 말하지만 그 안에 무엇을 담고 있느냐? 하늘의 일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 선지자든 세례 요한이든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한다고 할 때 그것이 진리와 상관없는 가르침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고 하실 때 땅의 일은 인간 스스로가 믿을 수 있는 것이고 하늘의 일은 인간 스스로가 믿을 수 없다는 차원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땅의 일이든 하늘의 일이든 그것이 진리에 속한 것이라면 사람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성령의 깨닫게 하시는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거듭남이 무엇인가를 설명하셨던 겁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예수님께서는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고 말씀하시는가? 저들이 믿지 않는다고 할 때 그 책임이 저들에게 있다는 것을 더욱 분명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비교하자면 하늘의 일보다는 땅의 일로 말하는 것이 너희에게는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신 배려이지만 그것조차 믿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믿지 않는 책임은 너희에게 있다는 강조를 하기 위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32절에서 그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되 그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다는 말씀은 세례 요한 자신보다 더 분명한 말씀으로 증언하시는 분이 예수님이지만, 그리고 그 분명한 말씀을 하늘의 일이 아니라 땅의 일로 말하고 있지만, 그것을 믿지 않고 있는 것은 너희들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만큼 복음의 말씀에 대하여 완악한 심령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들만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믿는 자들도 있습니다. 본문 33절을 보시면 “그의 증언을 받는 자는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것을 인쳤느니라” 그의 증언을 받는다는 것은 그의 증언에 대하여 믿는다는 것입니다. 본래 사람은 누구도 예외 없이 하나님에 대하여 완악한 심령을 가지고 있어서 그 스스로는 믿을 수 없지만, 요한복음 1장에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이신 분이 사람의 모양으로 자기 백성의 땅에 오셨지만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않지만(요1:11),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요1:12). 그럼 그들이 어떻게 해서 믿게 되는가? 믿음의 원인은 어디 있는가? 사도 요한은 혈통에 의해 믿는 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믿는 것게 아니라고도 말합니다.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만이 믿을 수 있습니다(요1:13).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사도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실 때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 그런데 이 고백이 사람으로부터 나온 것이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16:17) 즉 믿음은, 믿음에 합당한 고백은 사람으로부터 출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주셔야지 만 믿을 수 있고 믿음에 합당한 고백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증언을 받는 사람들, 그의 증언을 통해 믿는 사람들은 결국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에 결코 거짓됨이 없다는 것도 확인하게 됩니다. 물론 우리가 믿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참되십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그 사실을 부정하고 부인하더라도 결국 하나님은 자신의 참되심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참되심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결국 그들 스스로가 거짓되다는 것이 결국에는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확증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의 성취를 보면서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고, 그 참되심이 결국 아직까지 성취하지 않은 것도 성취하게 될 것이라는 믿음 위에 서게 만듭니다. 그러나 믿음이 주어지지 않으면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고백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는 것을 보더라도 그것으로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고백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을 통해서만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세례 요한은 계속해서 증언하기를 34절에서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고 설명합니다. 31절에서는 위로부터 오시는 분으로 표현했다면 여기서는 ‘하나님이 보내신 이’로 표현합니다. 구약의 선지자나 세례 요한 자신도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세례 요한에 대하여 요한복음 1장 6절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럼 왜 하나님께서는 보내시는가? 7절에 의하면 빛에 대하여 증언하기 위해서입니다. 빛에 대하여 증언하여 그를 믿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좀 더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고 할 때 그리스도를 보내신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삼중직의 내용으로 하자면 선지자 직분을 감당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나 세례 요한의 경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지만 그의 모든 말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있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앞서도 말했지만 사람이 보고 들은 것은 어떤 형태로든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에 의존한 것인데, 그들이 항상 계시를 받는 자로 있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좀 더 쉽게 말하면 선지자들은 성령이 자신들에게 임하였을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였지만, 성령이 임하지 않았을 때도 하나님의 말씀을 하였다고 할 수 있는가? 모든 말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있었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 18절에서 사도 바울은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말하는데,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아 전달하는 선지자의 경우 누구도 이 말씀에서 예외일 수 없습니다. 물론 모든 성경의 기록된 예언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기록된 성경은 오류가 없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기록하지 않는 순간에도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있었다고 할 수 있는가? 성령의 충만함이 계속적으로 유지 되었는가? 그렇게 보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한 예로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때 사도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행2:4). 그래서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복음의 소식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그들 안에 있는 부패가 전혀 나타나지 않았는가? 그렇지 않았습니다.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있었던 적도 있지만 항상 그런 모습으로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모든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인성을 취하셨지만 그런 인성 가운데 하나님께서 성령을 한량없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 역시 비교하자면 고린도전서 12장 7절이나 에베소서 4장 7절의 말씀처럼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이 있지만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이 주어지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실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한량없이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방금 언급한 에베소서 4장 7절의 말씀처럼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선물을 그 분량대로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는 성령의 원천이요 샘인 것입니다. 그 그리스도께서 각 사람에게 성령의 선물을 분량에 따라 주시기 위해 성령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런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단지 사람의 말일 수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의 말이 섞일 수 있는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요한복음 12장에서는 말씀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모든 말씀은 자의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그리스도께서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신 말씀입니다(요12:49).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르는 모든 것은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에게 말씀하신 그대로일 뿐입니다(요12:50).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만을 증거 하시는 예수님에 대하여 세례 요한은 31절에서 만물 위에 계신 분으로 표현했지만 35절에서는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으니”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만물 위에 계신 분으로서 모든 만물이 다 그의 손에 있지만 인성을 취하심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만물에 대하여 받은 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 우리는 그가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난 뒤 승천하시기에 앞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라는 말씀을 기준으로 그가 공생애를 통해 모든 일을 다 이루시고 난 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도 하나님께서는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모든 만물에 대한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가지고 계셨지만 그가 이루신 모든 성취를 통해 부정할 수 없도록 하신다는 차원에서 승천하기에 앞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만물에 대한 권세를 가졌다고 해서 예수님 마음대로, 다시 말해 아버지의 뜻과 상관없이, 아버지의 뜻과 충돌되게 만물에 대한 권세를 행하시는 바는 없습니다. 조금 전에 말한 것처럼 그는 자의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가 말하는 것, 그가 이르는 것은 다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당연히 모든 만물에 대한 권세도 아버지의 뜻을 따라 행하실 뿐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그의 손에 주셨다고 할 때 요한복음 17장 2절의 말씀처럼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의 주된 목적은 무엇인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는 데 있습니다. 반면 성경은 아들에게 주시지 않는 사람도 있다고 말씀합니다. 요한복음의 표현으로 하자면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요13:10)라고 말하는 대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정론의 내용으로 하자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가 있는가 하면 유기하신 자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 모두에 대해 예수님은 자신의 권세를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자들에게는 영생을,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는 이어지는 말씀을 통해 확인 할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진노를 내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누가 선택 받은 자이고 누가 유기 받은 자인가? 누가 영생에 들어갈 자이고 누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자인가?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누구는 선택하시고 누구는 유기하셨다고 할 때 누가 택자인지 누가 유기자인지 알 수도 없고 알려주시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방식으로 나타내신 바가 무엇인가 할 때 세례 요한은 36절과 같이 가르칩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영생은 어떻게 하면 소유할 수 있는가? 지금 세례 요한이 증언하고 있는 것처럼 ‘위로부터 오시는 이’,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 ‘하나님이 보내신 이’, 다시 말해 만물 위에 계시면서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반면 아들을 믿지 않으면 영생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우리말 번역에서는 순종하지 아니한 자로 표현하고 있지만 순종하지 않는다는 의미와 함께 믿지 않는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불신은 곧 불순종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자들에게 영생이 주어질 수 있는가?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을 뿐입니다.
결국 지난주 본문으로부터 시작되는 내용을 통해 세례 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임을 증언하고 있습니다(요3:28).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아 그를 증언하는 자가 자신이라는 것이고, 자신의 제자들에게도 이것을 증언해야 할 것을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과는 비교할 수 없는 분으로 계시다는 것을 말하면서 너희도 그를 믿어야지만 영생을 소유할 수 있다고 증거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가 아니라, 나를 믿고 따라야 할 것이 아니라, 너희가 믿고 따라야 할 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영생은 어느 누구도 아닌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있습니다. 그분은 위로부터 오신 분이시고 하늘로부터 오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보내신 분으로 본래 그분은 만물 위에 계신 분이십니다. 그런 분이 낮고 낮은 이 땅에 우리와 같은 육신을 취하셔서 내려오셨습니다. 무엇을 위해 오셨는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그 일을 위하여 만민을 다스릴 권세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으셨던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서 믿음을 선물로 받았다면 지난주 말씀을 드린 것처럼 세례 요한의 자세를 견지해야 합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이것은 단지 허울 좋은 말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세례 요한이 오늘 본문을 통해 증언한 것처럼 그리스도를 안다면 믿음을 선물로 받은 자들의 마땅한 바가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를 오늘 본문과 같이 알고 있기 때문에 세례 요한은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진실 된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겁니다. 동일하게 우리에게도 그런 믿음이 주어졌다면, 그리고 그 믿음이 참된 믿음의 내용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 평생을 통해 위로부터 오신 분, 하늘로부터 오신 분을 높여드리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분을 통해 영생을 소유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본래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들이었지만, 그로 말미암아 중생하게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영생을 소유하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모든 생을 통해, 나아가 영원토록 우리를 위하여 낮아지신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높아지신 그리스도만을 높이는 자로 있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의 말처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그러나 조금 전에 말한 것처럼 그가 우리를 높이시기 위하여 친히 낮아지시고 높아지신 것처럼 우리 역시 그리스도와 함께 높아질 것은 분명합니다. 그 사실이 이루어질 때까지 우리는 스스로 높아져서는 안 되고 오히려 이 땅에서 그분만을 높이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