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수가 되기까지 차이코프스키의 아버지는 광산업에 종사했고, 어머니는 프랑스계의 귀족 집안의 딸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차이코프스키는 음악적 재능을 드러냈지만, 그의 부모님은 차이코프스키가 예술가가 아닌 법학자가 되기를 원했다. 부모님의 의도대로 1855년에 법률학교에 들어가 1859년에 졸업하고, 1등서기관으로 법무성에 근무하게 되었으나, 2년후에 사직하고 평소부터 열망해오던 음악공부를 위해 1863년(23세)에 안톤 루빈슈타인이 설립한 명문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음악원에 입학하고 2년 반만인 1865년(25세)에 졸업하면서, <환희의 송가에 의한 칸타타>로 은메달을 획득한다. 그리고 곧 바로 이 학교의 교수가 된다.
■ 동성애자 차이코프스키의 결혼과 파국 그가 28세 때 벨기에 가수인 데지레 아르토와 갑자기 약혼한 후,6개월 만에 약혼을 일방적으로 파기한 일이 있었다. 1877년(37세)에 그의 열렬한 팬이었던 안토니나 미류코바라는 여성과 갑자기 결혼식을 올렸는데, 서로 충돌하는 일이 잦다가 견디지 못한 차이코프스키가 모스코바강에 투신자살을 시도하는 일이 벌어졌으나, 결국 1881년에 그녀가 부정을 자질러 자식을 낳게 되자 이혼하게 되었다. 이런 사건들은 모두 차이코프스키가 동성애자임을 숨기려는 의도로 알려졌다.
■ 강력한 후원자 폰 메크(N.F.von Meck,1831~1894년) 부인 철도 경영자 미망인, 6남 6녀 1876년 36세의 차이코프스키는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의 소개로 부유한 철도사업가의 미망인으로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의 열렬한 팬이었던 아홉 살 연상의 폰 메크부인과 편지를 주고 받는 교제를 시작하게 되고, 년 6,000루불이라는 어마어마한 년금을 받게 되었고, 2년 후에 교수직에 사표를 내고 작곡에만 전념하게 되었다. 사임 이유는 동성애의 성벽이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이들의 서로 만나지 않고 편지(2,3일마다)만을 교환하는 정신적인 사랑은 무려 14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이어진다. 그런데 차이코프스키의 명성이 갈수록 하늘을 찌르자 메크 부인이 보내는 편지 내용도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 ‘나는 누구보다도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든지, 친구에게 ‘차이코프스키가 다른 여인과 함께 있다는 상상만 해도 미치겠다’고 털어놓기도 하였는데, 친구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녀는 원래 질투가 많은 여자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차이코프스키의 동성애 문제가 널리 알려지자 1890년 메크부인은 갑자기 지원을 중단하고 그동안 왕래한 서신 일체(1200여통)를 반송하였고,심지어 차이코프스키가 자살한 후에도 아무 연락이 없었다. 역사학자들은 차이코프스키를 진정으로 사랑했던 그녀가 오랜 시간 동안 차이코프스키가 자신에게 그토록 중요한 사실을 숨겼다는 사실에 크나큰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 조카와의 동성애와 자살 차이코프스키가 연하의 조카뻘 귀족과 사랑에 빠졌다는 소문이 은밀히 퍼지기 시작했고, 어느 귀족이 이 사실을 비난하는 편지를 써서 그것을 차이코프스키 자신의 법률학교의 옛 제자에게 보냈고, 편지를 받은 그 제자는 동창생들을 소집해서 이 문제를 토론했다. 당시 동생애자는 법으로 처형하게 되어있음에 비추어 차이코프스키는 동창들로 부터 견딜 수 없는 몰매를 맞았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사망 원인은 스스로 마신 비소에 의한 중독 이었던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동성애 문제가 알려지자, 러시아 비밀경찰이 찾아와 바로 동성연애자로서 사형에 처해질 것인지, 아니면 조금 씩 비소를 마시며 콜레라로 위장한 죽음을 선택할 것인지 선택하라는 제안을 하였다. 그날부터 매일 비소를 조금씩 마시며 자신의 진혼곡이기도한 교향곡 <비창>의 창작에 착수하였, 1893년 53세의 차이코프스키는 교향곡 6번 <비창>의 초연을 직접 지휘하고, 연주 몇 일 후 갑작스런 발열과 구토로 사망한다.
<출처 : 중앙일보사, "음악의 유산" 제7권,pp.35-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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