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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성의 욕구와 전략성의 요구
- 『현대수필』 여름호를 읽고 -
권대근
essay88@hanmail.net
I.
수필은 '文樂'이 아니라, '文學'이 되어야 한다. 수필을 살리는 길은 수필을 고급문학화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수필은 독자의 기호에 맞게 끌려다닐 것이 아니라 시대의 변화와 관계없이 독자를 이끌 수 있도록 문학수필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해야 할 것이다. 수필이 '누구나‘ 쓸 수 있는 신변수필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쓰여지는 문학수필이 되기 위해서는 시급히 해야 할 일은 오직 한 길밖에 없다. 수필가들로 하여금 수필창작이 매우 체계적인 작업을 통해서만 성과와 연결된다는 것을 인식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수필가는 수필을 창작할 때 주제의식을 작품 속에 문학적으로 내면화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하고, 또한 수필가는 목표를 달성해 달라는 수필 내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려야 할 것이다. 고급수필의 창작에 필요한 지적 통찰력도 매우 체계적인 작업을 통해서만 성과와 연결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데서 수필은 질적 저하를 초래했다. 현대수필의 창작 과정 또한 이러한 내적 요구와 동떨어져 있지 않다. 전략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하겠다.
II.
디지털시대의 현대인을 인류학적으로 호모 나랜스라고 부른다. 호모 나랜스는 이야기 욕망을 가진 디지털시대의 인간을 지칭하는 말로써 그들은 원시시대부터 중세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작가가 기록한 ‘입과 말로 표현한 이야기’를 말하고 듣고 싶어한다. 문학은 진화한다. 수필도 전통주의라는 구심력과 현대성이라는 원심력 사이에서 왕복을 되풀이하면서 변하고 있다. 그것은 유기체로써 진화에 해당한다. 수필이 생존하려면 상호텍스트성이 필요하다. 상호텍스트성이란 크리스테바가 처음 사용한 용어로 작품은 작가의 특수한 능력으로 창작되는 것이 아니라 현존하는 모든 문화와 관습으로 구성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술성과 시장성 사이의 경계선을 넘나든다는 사고의 전환은 장르 차원의 생존전략인 셈이다.
김숙희의 <굼벵이의 노래, 황원교>는 '삶과 죽음'이란 인간사의 본질적 테마를 의미화한 수필이다. 이 수필은 문학의 영원한 테마인 삶과 죽음의 문제를 주제의식으로 내세우고 있는 데서 존재 가치를 담고 있다. 주제 지향성의 측면에서 보면, 삶과 죽음은 인류 공통의 문제이니까 보편성의 획득이 가장 용이하다할 것이다. 수필은 개인적 경험의 특수성이 문학의 보편성으로 승화되도록 체험을 변형하고 보수해서 탄생된다. 과연 이 작품은 그런 과정을 거쳐 전략화된 것일까? 주제와 제재와의 상관성에서 수필의 성공이 결정된다고 볼 때, 이 수필은 대상이 되는 생사의 의미를 상징할 수 있는 제재에서 적절한 유사성을 찾아 문학적으로 잘 형상화하였다. 유사성을 갖는 제재가 수필의 제목으로 나타날 때, 수필 쓰기는 전략화에 성공하는 것이다. 서술성의 요체는 제목으로 함축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문학성은 ‘굼벵이의 노래’라는 제목을 설정한 데서 출발한다. ‘굼벵이’는 교통사고로 하반신 마비 1급 장애인이 된 황원교 시인을 함축하는 의미로 상관화된 제재다. 이는 작가가 황원교 시인의 인간승리 스토리 속에서 얻은 최적의 객관적 상관물이다. 물론 ‘굼벵이의 노래’는 황원교 시인이 쓴 시집의 제목이다. 시인이 자신의 삶을 이미 ‘굼벵이의 노래’라고 의미화를 했지만, 이 이야기를 수필화하면서 김숙희는 다른 제목을 쓰지 않고 다시 그대로 인용했다. 이 이상 좋은 제목은 없기 때문이다.
“만일 내게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이 5분만 허락된다면 조금도 망설임없이 죽음을 택했을 것입니다.”
- 김숙희의 <굼벵이의 노래, 황원교> -
내용은 직접화하되, 주제는 간접화하는 것이 수필의 구성 전략이다. 결국 수필의 문학성은 제재와 주제의 상관화에 이르러 서술성으로 나타남으로써 완성된다. 인용 예문에서 볼 수 있듯이 작가는 20여 년 전 일흔이 넘은 아버지가 미는 휠체어에 앉아 청주교대 강의실로 들어선 황원교 시인을 본 장면을 묘사하면서, 그가 던진 처절하도록 아픈 ‘5분만’ 이라는 의미를 단번에 이해했다고 한다. 발단의 예술이기도 한 수필에서 어떤 이야기를 서두로 장식하느냐는 매우 중요하다. 가장 인상적인 경험의 한 대목을 놓을 때 가장 좋은 서두가 되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발단부 첫 문장을 죽고 싶다는 주인공의 비장한 의지로 수놓은 것을 보니, 김숙희의 감동구상 전략은 성공한 것이 아닐까싶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보고, 듣고, 말하는 것뿐, 한 모금의 물조차 타인의 손을 빌어야 하는 처지이고 보면 누구라도 그랬으리라.” 이 무기력한, 어쩔 수 없는 상황 앞에서 오랜 세월 손발이 되어준 시인의 어머니는 뇌출혈로 돌아가셨으니 황원교 시인의 심정은 오죽했으랴.
생과 사의 질서가 사라져 흐트러진 공간, 황원교 시인의 이야기를 옮기는 작가의 기술 또한 뛰어나다. “어머니의 신음소리는 수천 개의 대못이 되어 천형으로 남았다며, 다시 연신 눈물을 흘리는 사람, 시인 황원교”시조시인의 서사 전개 방식이 놀랍다. 궁극적으로 이 작품은 삶의 본질 문제를 환기시킨다. 완성된 시간 속에서 ‘나’라는 존재감을 가볍게 떨칠 수 있는 삶의 모양은 어떤 것일까라는 의문을 던지고, 살아있다는 것이 축복임을 알려주어야 할 할 시간임을 인식함으로써 작가는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려 한다. 살아가는 데 사랑이 없다면 삶의 완성을 위한 노력에 과연 가속도가 붙을 수 있을까. 성찰이란 생사의 경계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시인의 노래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라는 진술을 통해 생사의 경계를 분명히 함으로써 작가는 완성된 시간에의 추구로 나아가고자 한다. 상실 극복의 내적 욕구가 제대로 작용한 것이다.‘굼벵이의 노래’가 투지례로 구르고 굴러 마침내 미루나무 우듬지에 닿을 것으로 믿는 김숙희 작가의 건강한 사회성은 이 수필의 문학성과 함께 높이 칭송되어도 좋을 듯싶다.
황영경의 <안나푸르나로 가는 길>이란 작품은 ‘산다는 것은 떠나는 것이다’라는 명제를 다루고 있다. 자신의 인생관을 이해시키고 설득해야 할 대상은 아들과 아들의 선생님 그리고 독자다. 작가는 삶에 있어서 원심력과 구심력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다만 아직 가치관 정립이 덜된 어린 아들을 어떻게 설득하고 이해시킬 것인가가 문제가 될 수 있음을 이야기 속에 아들을 끌어들임으로써 말해준다. 그녀는 ‘떠남’을 완성된 삶의 향유를 위한 수단으로 설정하고 있다. 이 수필은 ‘집에 온 아이의 낯빛이 좋지 않다’라는 서두로 시작한다. 이 작품을 읽는 순간 독자들은 ‘왜 작가는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고 결석을 시키고, 그것도 시험점수가 영점이 나오게까지 하면서 떠남을 고집할까’를 생각하게 된다. ‘생각해 봐. 어른이 된 후에 열 살 성적이 기억나겠니? 히말리야 안나푸르나로 가는 길이 기억나겠니?’라는 명쾌한 이분법 질의로 작가는 아들의 고민을 한 방에 날려버린다. 아이의 환한 얼굴을 확인한 어머니 작가의 안나푸르나로 가는 길은 탄력을 받는다. 시험이란 장해가 가로 막아서려 하지만, ‘나에게 있어 인생은 다음이 아니라 언제나 지금이다’는 지론 하에 황영경 작가의 인생철학은 단호했다. “예전에는 떠날 수 없는 수십 가지 이유에 주저앉았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는다.”
그녀는 생애 첫 트레킹에 나서는 아이의 모자를 메만져주며 힘으로 걷지 말고 편안하게 걸어라. 앞만 보지 말고 주변을 둘러 보라는 말을 잊지 않는다. 트레킹을 왔지만 그녀에게 그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작가는 아들에게 올라가는 과정, 그 길에 대해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안나푸르나로 가는 길에서 경험한 것들이 아들이 인생을 잘 살아가는 데 좋은 마중물이 될 것이라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지점에서 수필의 문학성은 빛나기 시작한다. 작가는 안나푸르나 정상에 서서 아들과 대화를 나눈다. 중요한 인생의 의미를 아들에게 던진다. “아들, 세상은 넓고 다양한 모습으로 사람이 살아. 각자가 선택하는 거야. 이런 척박한 산 속에 살아도 소중한 인생이야. 그러니까 빵점이나 백점 인생은 없는 거야. 그냥 내 인생이지” 아들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을 때를 상상해 보시라. ‘그 아이가 어느새 스물세 살이다’라는 진술을 통해 이 이야기가 오래 전 경험이란 것을 말해준다. 액자 속에 담긴 그녀의 인생철학에 대한 귀한 이야기가 산다는 것의 의미를 새롭게 해준다. 아들은 결국 제대 후 아르바이트한 돈을 모아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났고, 그 아들은 멋진 인생이 무엇인지, 깨달음에 이른다. 마지막 결말부 문장 속,‘오로라 아래 홀로 단단히 서 있는 아들 사진’은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의식이 함축된 지배적 정황이다.
정정숙의 <초승달>에 주목한다. 다소 짧은 분량의 수필이지만, 전략화에 성공해서 문학적 성취가 빛나는 작품이다. 남편의 외도에 분노를 참지 못하고 이혼을 하고 20여 년이 지난 지점을 통과하고 있는 한 여인의 전화를 받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는 예상되는 바와 같이 우리 삶의 한 단면을 제시하고 있다. 유교적 가치관의 그림자가 구석구석 남아있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 배우자의 외도를 감수하면서 살아가는 것에 당위성을 찾기 힘든 건 사실이다. 작가가 초승달이 뜬 밤에 6년 전에 알게 된 50대 여인과 1시간 동안 나눈 대화는 작가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어준다. 초승달을 보고 감상에 잠겨 있던 작가에게 전화를 타고 온 여인은 이미 초승달이 앉았던 자리에 채송화 같은 모습으로 다가갔던 것이다. “요즘 같은 생각이었으면 이혼 안 했을 거예요.”라고 했다는 그녀의 이야기를 불러와서 지금 그녀의 심경을 예단하는 작가는 오래 산 인생의 선배 입장에서 인생을 비유적으로 나타낸다. 수필은 구성적 비유의 시적 형상화다.“달도 차면 기운다고 완벽한 동그라미가 이지러져 반달이 되고, 그것이 그믐달, 초승달이 된다. 시간이 흐르면 또 둥근 보름달로 돌아간다.”는 대목은 주제의식의 형상화에 앞선 적절한 구체화라 할 수 있겠다.
‘이것이 인생이다’고 자신있게 말하는 그녀가 만약에 이 여인의 이야기를 토대로 인생을 초승달에 비유해서 말하지 않았다면, 이야기는 이야기에서 끝났을 것이다. 이렇게 수필은 전략화 과정을 거쳐 문학적으로 재창조되어야 문학적 성취에 빛나는 것이다. 마지막의 “완벽한 달이 되기 위해 하늘에 자리 잡은 초승달은 그날의 그녀였다.”라는 수미상관에 입각한 결말부 지배적 정황 놓기 전략은 성공적이었다고 하겠다. 순간적인 판단으로 이혼을 선택했지만, 세월이 지나고 보니 옛사랑이 그립고, 어렵고 힘들게 살다보니, 잘못된 과거가 용서도 되는 그런 지점을 관통하기도 한다는 것, 그것이 인생이라는 경험적인 이야기를 들려주는 작가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생활의 여과를 통해 그리움을 되찾는 여인의 내면을 초승달을 제재로 잘 그려내고 있다. 삶에 대한 처절한 현실적 인식이 달의 순환에 닿음으로써 인생의 의미에 더욱 깊이를 더해 준다. 수필은 자신의 생각과 실제로 살아가는 모습을 언어를 통해 솔직하게 재현하여 그 가치와 의미를 구체적으로 규명할 때, 힘을 가지게 된다. 그녀는 무엇이 인간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가를 아는 작가다. 내 기분대로 살 수 없는 현실은 서글픈 것이다.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인간의 정신적 성장을 도와줄 하나의 통과의례로 ‘초승달’을 놓음으로써 작가는 문학성의 욕구, 전략성의 요구애 잘 대처했다.
우광미의 <시간의 깊이>는 무언가를 남기고 싶은 인간의 속성을 충족시켜주는 도구의 하나인 종이를 제재로 시간의 껍질을 벗겨내는 작가의 내면의식이 잘 형상화된 글이다. “세월을 견뎌낸 건 무엇이든 제 깊이를 더하는 법이다.”라는 발단부 한 대목은 이 글이 무엇을 말해줄지 잘 암시한다. ‘사람은 그 깊이를 존중하고, 사람의 사연이 들어있는 사물은 더 존중받는다.’는 그녀의 지론은 소창의 한지로부터 시작된다. 작가는 이런 진리를 ‘전통 한지 한 장을 뜨는 데 백 번의 손이 간다하여 백지라고도 하는 속설까지 있다’에 견주어 잘 살려내고 있다. ‘백지’라는 단어에는 사람과 우주의 생명이 값을 가지는 과정이 압축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작가는 한지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통해 옛것의 소중함을 알려주고, 장인의 한지를 통해 탁본을 완성하면서 옛것에 의미를 더한다. 작가가 ‘지금, 현재, 여기’를 지향하면서 ‘긴 시간의 때를 입은 것들’에 관심을 놓고 ‘한지’를 주제로 시간의 깊이를 재어보고자 한 것은 매우 바람직한 설정이 아닐 수 없다. 주목할 부분은 ‘겨울을 대비해 구멍났던 한지를 다시 바르며 우리는 마음의 상처를 어루만졌다.’는 대목이다.‘새날을 맞으며 고운 발자국을 남기고 싶은 염원이 담긴 하얀 도화지, 그때 발라둔 한지에는 가족의 체온이 스며있다’라는 작가의 지론은 이 수필의 쾌미다.
작가가 삶의 삭풍이 오면 저 문종이를 살며시 펼쳐보려 한다는 것은 시간의 깊이를 온전히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수필의 문학성은 결말부 주제의식의 의미화에서 결정된다. 결말부에 지배적 정황을 놓음으로써 문학성을 높일 수 있다. “무심코 보낸 시간들이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어딘가에 쌓여있을지 모른다. 열나흘 달빛이 문살 너머 스민다. 바스락, 닥나무에서 풍장된 별빛이 적막을 넘어 내 유년의 서표로 내려앉는다.”는 멋진 의미화다. 주제의식의 의미화를 위해 ‘시간’을 ‘서표’로 처리한 것도 매우 적절했고, 실제로 작품성을 드높이는 데 이것이 기여했다. 이 수필은 확실히 인식과 형상미학이 빛나는 작품이다. 시간의 깊이를 한지의 장점을 살려 설득력 있게 표현하는 데도 성공했다. 이 수필의 미점은 문학적인 속성이라고 할 수 있는 함축성도 있고, 참신성도 보이며, 탄력성과 형상성도 돋보인다는 점이다. 작가는 결말에 가서 우회적 표현으로 주제를 살짝 감출 줄도 안다. 이 수필의 주제문이기도 한 결말 문장 바로 앞에 주제정신을 담고 있는 예시 문장을 배치함으로써 글에 설득력을 준 점도 좋았다. 한지를 통해 가족의 체온을 복원하고, 전통적 한국의 정을 부각시키는 이 수필의 묘미는 아무래도 온고이지신의 인식이라 하겠다.
III.
위에서 다룬 네 편의 수필은 맛있는 에세이다. 수필이 고급문학이라는 위치에 오르기 위해서는 문학성만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미학성을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 미학성의 본질인 난해성을 어느 정도 소화할 수 있는 작가의 예술적 안목이 수필 작품 속에 투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위 수필은 현대수필의 전형을 보여주는 작품이라 하겠다. 무엇보다도 제재가 담고 있는 의미를 파악하면서 문장을 따라가는 그 자체가 즐거움이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들이 주는 가치는 미미한 제재를 미적으로 승화시켜낸 데 있다. 작가의 미적 감식안이 독자들의 지적 욕구를 충족시켜 준다고 하겠다. 삶의 가치, 상처의 가치, 시간의 가치 등 여러 다양한 가치를 읽어내는 작가의 안목은 인식 그 자체다. 위 수필들은 독자들이 발견해내지 못하는 이미지와 메시지를 예리하게 밝혀 자신의 삶 속의 느낌과 인식을 정서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수필은 '문악'이 아니라, '문학'이 되어야 한다. 일상의 주변에 흩어져 있는 의미 없는 잡다한 일들을 주제화 전략 없이 끄적거려 놓거나, 즉흥적인 생각을 표현하지 않고 문자로 표출하여 기술하는 글이 수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수필은 내면성의 요건인 동일성의 추구, 상실감의 회복만으로는 문학이 되지 않는다. 수필 구성의 특성이 유동에 있고, 유동성이란 무형식의 형식을 말하는 바, 그렇다고 문학적 전략화와 정서적 질서화가 무시되면 그것은 수필 이전에 문학으로서 자격을 상실하게 된다. '전략화'는 규범화된 유형이 아니고, 고정화된 사고도 아니다. 주제와 제재 중심의 수필을 수필답게 하는 것으로써 창작 과정에서 반드시 적용되어야 할 작법인 것이다. 위 작품들은 좋은 글을 쓰기 위해 깊이 고뇌한 작가의 흔적과 전략화의 노력이 보였다. 이 네 편 외에도 조문자의 <말뿐> 등 좋은 수필이 많았으나 지면 관계로 다루지 못한 점 아쉽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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