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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내 마음의 불순물 중 최다함량>의 줄거리:
지혜와 어리석음이 무엇일까요? 판단과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할 때, 마음의 불순물이 제거된 상태에서 하는 것이 지혜요, 반대로 불순물을 포함한 상태로 하는 것이 어리석음 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도가니로 은을 연단하듯이, 풀무로 금을 연단하듯이, 그렇게 우리 마음을 연단하시어 불순물을 제거하시려 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에 올바로 응답하려 할 때 꼭 알아야 할 사실이 바로 내 마음의 불순물 중에서 최다 함유량이 어떤 성분인줄 아는 것이지요.
내 마음의 불순물 중 최다함량
(잠언 17:1~28)
1.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2. 슬기로운 종은 부끄러운 짓을 하는 주인의 아들을 다스리겠고 또 형제들 중에서 유업을 나누어 얻으리라
3.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내 마음의 불순물 중 최다 함량>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내 마음의 불순물 중 최다함량’
저는 군복무를 카투사로 미군부대에서 했습니다. 두 곳에서 있었는데 먼저 있었던 부대는 미2사단 비행대대였고 B중대에 소속이 되어서 헬기를 정비했습니다. 그런데 A, B, C로 구성된 비행대대가 발칵 뒤집힌 일이 있었습니다.
A중대는 전투중대였고 제가 있던 B중대는 지원중대였습니다. 그리고 C중대는 공급중대입니다. A중대에서 헬기를 정비하기 위해서 꼬리날개 부분의 뚜껑을 열었는데 펜치가 들어있었던 것입니다. 그곳에는 엔진과 연결된 축이 있어서 꼬리 날개를 움직이게 합니다. 그런데 펜치의 뾰족한 부분에 의해서 축이 갈려서 끊어지기 직전의 상태가 되었던 것입니다. 정비사가 상사에게 알리고 대대장 귀에까지 들어가서 비행대대 전체에 난리가 났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 사건이었냐면 예를 들어 의사가 수술을 하다가 메스를 환자의 몸 안에 넣어둔 채로 봉합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불순물은 순수한 물질에 섞여있는 이물질을 뜻합니다. 그런데 특별한 목적에 의해서 첨가된 것이라면 불순물이 아니지만 결코 첨가되거나 공존이 허락될 수 없는 이물질이 섞여있으면 불순물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우리 마음에 불순물이 들어올 수 있음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이러한 불순물이 마음에 들어옴으로써 나타나는 증상이 있는데 모든 인간관계가 깨져버리게 됩니다.
헬기의 꼬리날개에 펜치가 들어감으로써 추락할 뻔했던 것과 같습니다. 비행기는 불시착의 가능성이라도 있지만 헬기는 공중에서 고장 나는 순간 추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관계를 헬기에 비유하자면 마음에 이물질이 들어오는 순간 모든 인간관계는 추락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마음에 이물질이 들어올 때에 다툼과 불화와 갈등이 생겨나서 인간관계가 파괴될 것이라고 합니다.
3절을 보면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도가니나 풀무’는 광석을 통째로 집어넣고 끓여서 은과 금 등을 정제해내는 도구입니다. 불순물과 섞여있는 은과 금에서 이물질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연단하시는데 마치 그 모습이 광석을 용광로에 넣고 정제하시듯이 하십니다. 왜냐하면 마음의 연단의 과제가 불순물을 제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17장 9절을 보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이라고 했습니다. 인간관계를 깨뜨리는 불순물이 마음에 섞인 것을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10절을 보면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도 모르지만 하나님만 아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하나님의 지식을 우리에게도 가르쳐주고 있는데, 마음에 불순물이 섞인 증상을 드러냄으로써 깨닫게 합니다. 깨달았다면 하나님이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해 준비하신 용광로의 역할을 하는 십자가를 붙잡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도에 바르게 응답하는 믿음입니다.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십자가 용광로를 통해 불순물을 제거하십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마음에 불순물이 있을 때에 나타나는 증상이 어떤지 본문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1절을 보면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불순물이 포함되었을 때에 나타나는 증상입니다. 가족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가족은 혈연으로 이루어진 관계입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 손은 안으로 굽는다.”라는 말처럼 혈연은 엄청난 구속력을 가진 관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불순물이 있다면 가족이 화목할 수 없습니다.
이와 상통하는 말씀이 잠언 15장 17절에도 나타납니다.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라고 했습니다. 가정이라는 관계에서 최고의 상태는 화목함입니다. 그런데 이 화목함을 재물의 풍족함이 보장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거꾸로 말하면 가난하다고 해서 화목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부유함이 화목을 보장하지도 않으며 가난함이 불화를 일으키지도 않습니다.
모든 사람은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인간관계를 맺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인간관계가 처음으로 시작되는 곳이 바로 가정입니다. 그러나 가정을 성립하게 하는 혈연도 결코 화목함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혈연의 구속력조차 화목함을 보장하지 못한다면 대체 가정의 화목은 무엇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일까요?
성경이 말하는 해답은 바로 지혜입니다.
다시 말해 가정에 불화가 생기는 이유는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본문 10절을 보면 “한 마디 말로 총명한 자에게 충고하는 것이 매 백 대로 미련한 자를 때리는 것보다 더욱 깊이 박히느니라”라고 하였고 12절을 보면 “차라리 새끼 빼앗긴 암곰을 만날지언정 미련한 일을 행하는 미련한 자를 만나지 말 것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가족 혹은 직장이나 친구 중에라도 미련한 일을 행하는 미련한 자를 만나는 것은 차라리 새끼를 빼앗겨서 분기탱천한 암곰을 만나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미련한 자의 어리석음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본문 2절을 보면 ‘슬기로운 종은 부끄러운 짓을 하는 주인의 아들을 다스리겠고 또 형제들 중에서 유업을 나누어 얻으리라’라고 하였습니다.
한마디로 혈연으로 구성된 가정에서조차 혈연보다 더 중시되어야 할 것은 바로 지혜라는 것입니다. 지혜가 얼마나 중요한지, 종이 지혜롭다면 그를 아들의 상전으로 삼아서라도 지혜를 따르게 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그를 자식으로 여겨 재산을 나누어주라고까지 합니다. 가장이라면 이처럼 혈연에 앞서 지혜를 중시해야만 가정에 화목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우리 중에 어리석음이 생겨나게 된 것일까요?
바로 마음의 불순물 때문입니다. 앞서 보았던 예레미야 17장 9절의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라는 말씀처럼 사람들이 이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이것을 모른 채 나타나는 결과가 인간관계의 파괴입니다.
만약 내가 지혜롭고 내가 상대하고 있는 사람이 어리석은 경우에는 어떨까요? 그 관계는 깨지지 않습니다. 내가 그 어리석은 사람에게 합당한 지혜로움으로 대처해 나가기 때문입니다. 관계가 깨지는 것은 내가 좋다고 여기는 것이 원대로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게 지혜가 있다면 어리석은 상대에게 기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 관계가 깨질 일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가족 관계에서는 어떨까요? 앞서 마음에 불순물이 섞인 상태가 어떠함을 이야기하며 가정의 화목이 깨어짐을 증상으로 언급했습니다. 마음에 불순물이 섞인 상태에서 하는 말과 판단과 생각은 모두 어리석음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불화가 생겨납니다. 가정의 화목은 재물의 유무 등의 외부의 원인에 기인하지 않습니다. 마음에 불순물이 섞여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인간관계는 가정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이 가정을 예로 든 이유는 무엇일까요?
본문을 읽어보면 다툼이나 이간질 등의 표현이 반복되는 것을 볼 때에 증상을 통해서 마음의 불순물이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 남자가 아름다운 여인에게 콩깍지가 씌워서 결혼을 했습니다. 그 여인이 전부라고 생각했습니다. 여인도 마찬가지로 남자에게 반해서 그와 결혼하면 행복하리라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부부관계를 깨지게 하는 불순물이 드러납니다. 상대에게서 기쁨과 만족을 기대하고 행복함의 이유를 찾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상식선에서 생각해보면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습니다. 행복하려고 결혼하지 불행하려고 결혼하려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행복과 기쁨을 기대하지 않으려면 왜 결혼을 한단 말입니까? 그러나 오늘 본문은 분명히 그보다 지혜가 우선되어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녀와 부모의 관계가 깨지는 이유도 다르지 않습니다. 재물의 유무 등의 문제가 아닙니다. 지혜가 있다면 마른 떡 한 조각을 놓고도 화목할 수 있지만, 지혜가 없다면 고기가 집에 가득해도 화목할 수 없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통해 행복과 기쁨을 누리려 한다면 그것은 마음의 불순물이 됩니다.
사람을 관계하고 만날 때마다 상대에 대해 갖는 기대감이 인간관계를 파괴합니다. 심지어는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들 사이에서조차 서로에게 갖는 기대감이 불순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얼핏 당연하게 여겨지는 이러한 기대감은 실제로는 결코 마음에 허용될 수 없는 불순물입니다. 예레미야서의 말씀대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를 깨닫지 못한 채 부패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서로에게 기대하는 마음이야 말로 부패하고 불순물이 섞인 마음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에게 기대할 때에 그것이 불순물이 됩니다. 부모가 자녀를 통해 기쁨을 얻고자 하는 마음을 가질 때에 부패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기가 막히는 노릇인데, 인간 입장에서 보면 이것을 이상하다 여기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인간관계를 맺는 상대를 통해 기쁨을 얻고자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그런데 이것이 실상은 불순물이 되어서 헬기를 추락시키는 펜치처럼 인간관계를 추락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대화를 해라, 상대방을 용납하라, 상대방의 입장에 서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상대를 통해 기쁨을 얻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데 어떻게 상대의 입장에 서서 그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불가능합니다.
영화 속에서 그려내는 해피엔딩은 정작 삶에서는 한 순간에 불과할 뿐입니다. 저는 그런 의미에서 해피엔딩 이후의 장면을 더 보고 싶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두 남녀가 결혼하며 행복하게 끝나는 영화가 있다고 해봅시다. 그런데 3년 뒤에는 어떻게 살고 있을지가 궁금합니다. 결혼을 행복의 조건으로 여긴 것 자체가 이미 마음의 불순물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불순물 제거 작업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0장 34~35절을 보면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가정의 불화를 경계하였던 것 같은데 예수님께서는 가정에 불화를 일으키기 위해서 오셨다고 하니 어찌된 일입니까? 그런데 바로 이해해야 할 것은 오늘 잠언서가 경계하고 있는 것은 그 불화의 원인입니다. 혈연은 지혜와 비교할 때에 우선 될 수가 없는 가치입니다. 지혜는 곧 누구를 대하든 번제단에서 내 판단을 죽이고 하나님의 판단을 구하는 태도이고, 그렇게 해서 주어진 하나님의 판단이 지혜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판단을 구하는 것은 곧 선악과를 따먹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않을 때에 생명나무의 의미도 충족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기쁨이 되어주신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허락된 유일한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비유적으로 말해서 내 마음에 첨가와 공존이 허락된 유일한 대상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마음을 세상으로 향하게 해서 하나님이 아닌 대상들로 기쁨과 만족을 얻으려 할 때에 그것들은 마음에 불순물이 됩니다. 그리고 불순물로 인해서 관계는 깨어져나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부부관계가 안 좋다고 여기면 전문가에게 상담을 받고 무엇인가를 고치려 애를 씁니다. 그러나 결국 이혼하고 맙니다. 부부간에 불화가 있다면 먼저 서로를 버려야합니다. 자녀와의 관계가 힘들다면 자녀와의 관계를 잘해보려 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십자가에서 자녀에 대해 죽어야 합니다. 문제가 생긴 이유는 자녀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3장 17절을 보면 예수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납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사랑의 정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기쁨으로 귀결되는 것이 사랑입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17장 21절에서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라고 말씀하신 것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을 담아야 될 마음에 자녀를 담아서 기뻐하려 했으니 자녀가 불순물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마귀에게 속아서 원죄가 체질이 되어버린 사람들은 만나는 사람들마다 기쁨으로 삼으려 합니다. 원수에 대해서는 원수를 제거함으로써 기뻐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원수가 자꾸만 늘어만 갑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 44절에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원수를 위함이 아니라 바로 우리를 위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원수를 마음에 붙잡고 미워하는 것도 기쁨을 얻기 위한 불순물이기 때문입니다. 미워서 없애고 싶은 것들은 사랑함으로써 마음에서 물리치고, 마음에 붙들고자 하는 것들은 미워함으로써 물리치라는 것입니다.
마음에 불순물이 있으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증상이 인간관계의 깨어짐입니다.
인간관계로부터 마음의 불순물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상대에게 기쁨과 만족을 기대하는 마음이 바로 마음의 불순물이 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모든 인간관계에 대해서 죽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마음에서 불순물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십자가에서 모든 관계에 대해 죽을 때에 우리 마음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관계의 성격은 변합니다. 기쁨과 만족을 구하려는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으로 생겨난 기쁨과 만족을 드러내고 표현하는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가족은 기쁨을 얻기 위한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 인해 생겨난 기쁨을 드러내는 대상입니다. 가족뿐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가 그렇습니다. 우리가 설령 하나님을 모르는 어리석을 자들과 관계할 때에도, 그들에게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과 만족을 표현함으로써 나의 책임은 끝나는 것입니다. 어제 말씀인 16장 7절을 보면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와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이 세상의 인간관계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관계에 대해서 십자가에서 죽을 때에 우리 마음에서 불순물은 빠져나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상대에게서 기쁨과 만족을 기대함이 마음에 가장 큰 불순물입니다. 십자가로 이 불순물을 제거하여 하나님으로 채워진 순수한 마음이 유지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 생겨난 기쁨과 만족을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표현하며 오늘 하루도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결코 마음에 허락되지 않은 기대감으로 불순물을 안고 살아가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인간관계에 대해 죽음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하여 주시고, 인간관계는 하나님의 은총과 기쁨을 표현하는 계기로 삼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