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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오네트
발레리나 인형은 줄에 몸을 지탱한 채 힘없이 진열장 벽에 기대어 있었다.
“내 몸을 지탱해 주는 이 줄이 끊어지면 나는 버려질 거야. 난
항상 아름다워야만 해 ”
그렇기에 발레리나 인형은 가끔 머리카락을 손질하고 화장을 손보는 순간을 제외하고는 제 몸을 지탱하고 있는 낡은 줄이 끊어지게 하지 않기 위해 움직이지 않았다. 발레리나 인형이 진열되어 있는 선반에는 예쁘고 멋진 인형들이 많았다.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게 구석에 앉아 있는 할아버지 인형은 예외였다. 그는 항상 머리 스타일, 화장 방법, 요즘 유행하는 옷들 따위로 떠들어대는 인형들 사이에서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의 수수한 옷차림을 인형들은 초라해 보인다며 비난을 쏟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묵묵히 앉아만 있었다. 그가 언제 이 진열장에 들어서게 됐는지도 까마득할 정도로 그는 이 진열장에서 많은 세월을 보냈다. 그렇지만 인형들은 그의 옷차림과 외모만을 가지고 그를 무시했다. 젊고 아름다운 인형들 중 할아버지 인형을 제대로 대우해 주는 인형은 발레리노 인형과 공주 인형, 기사 인형뿐이었다. 발레리나 인형은 그를 무시하거나 그의 옷차림을 가지고 그를 비난하지는 않았으나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에 그에게 갈 수 조차 없었다. 큰 손이 공주 인형과 왕자 인형을 꺼내간 다음날이었다. 공주 인형이 말했다.
“왜 모든 이들은 왕자와 공주를 결혼시키려 하는 거야?”
항상 이상적이고 차분한 그녀였지만 화가 단단히 났는지 격앙된 말투였다. 그러자 다른 인형들이 똑같이 외쳤다.
“왕자님이 성격은 좀 별로지만, 우리들 중에서 제일 잘생겼고 옷도 잘 입는걸, 성격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니야.”
공주 인형은 이런 인형들의 말에 화를 냈다. 공주 인형은 기사 인형과 연인 사이였다. 다들 말도 안 된다며 공주 인형과 기사 인형을 욕했다. 아무리 발버둥 쳐 봐도 인형들의 인식은 바뀌지 않았다. ‘공주와 왕자’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지 않냐며 지금이라도 마음을 바꿔 보라고 인형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왕자 인형은 거만했다. 모든 인형들이 자신을 따르고 존경하길 바랐고 항상 자신의 이야기만 했다. 외모지상주의에 완전히 사로잡혀 항상 자신을 꾸미고, 조금이라도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인형을 비난하고 따돌렸다. 또한 항상 공주 인형에게 들이대느라 아픈 인형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백성들을 돌보는 게 왕자의 역할이지만, 왕자 인형은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무책임한 사람이었다. 그에 비해 기사 인형은 성실하고 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왕자 인형과 정반대였다. 항상 거동이 힘든 아픈 인형들을 보살펴 주고, 아무도 상대하지 않으려고 하는 할아버지 인형에게도 예의바르게 대했다. 왕자 인형이 할 일들을 기사 인형이 다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이런 사실들을 하나도 모르는 그들은 왕자와 공주 인형을 서로 사랑에 빠지게 만들고, 결혼시킨다. 그들의 의사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입을 막아 버린 채로. 이런 나날이 지속되었다. 공주 인형은 가식적인 연기보다는 세상 끝을 택했다.
선반의 끝자락으로 가 뛰어내리면 자유가 찾아올 거라고 인형들은 믿었다.
“발레리나, 있잖아, 나는 외모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고 생각해.
왕자는 잘생기고 옷도 잘 입지만, 거만해서 아무도 좋아하지 않잖아? 겉으로만 좋아하는 척하지. 하지만 기사는 왕자보다 옷을 잘 입지 못하고, 빛나고 부드러운 금발이 아닌 뻗치는 머리지만, 모두가 좋아하는 것처럼 말이야. 진짜 중요한 것은 여기 아닐까?”
공주 인형이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이것이 공주 인형이 떠나기 전 발레리나 인형에게 한 마지막 말이었다. 공주 인형과 기사 인형이 떠날 때, 발레리나 인형은 움직일 수 없기에, 제일 친한 친구의 마지막을 배웅할 수 없었다. 그렇게 공주 인형과 기사 인형은 발레리나의 곁을 떠났다. 1년에 한 번 뿐인 인형들의 축제 날, 발레리노 인형은 발레리나 인형에게 같이 춤을 추자고 제안했다. 그에 발레리나 인형은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공주 인형이 없어지자 큰 손이 발레리노 인형을 꺼내갔다.
그의 선택은 아니었지만, 끝내 발레리노 인형도 그녀의 곁을 떠났다.
왕자 인형도 공주와 기사 인형이 없어지자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쉴 새 없이 눈을 깜빡이던 아기 인형과 항상 말을 따라하던 앵무새 인형은 버려졌다. 선반에 있던 인형들이 차츰 사라져갔다.
발레리나 인형은 다른 인형들이 하나 둘씩 없어져 갈 때마다 자신을 지탱하고 있는 줄이 하나씩 끊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난 버려지기 싫어. 이 선반을 떠나기도 싫어”
발레리나 인형은 그런 기분을 느낄 때마다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하지만 이 생각을 하는 것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발레리나 인형은 망가져갔다. 큰 손이 할아버지 인형을 집어 발레리나 인형이 있는 선반으로 할아버지 인형을 옮겼다. 인형들이 떠나서 발레리나 인형이 있는 선반이 비었기 때문이었다. 발레리나 인형이 할아버지 인형에게 물었다.
“할아버지, 제 줄들이 끊어졌나요?”
“아니란다. 네 줄들은 아주 멀쩡해.”
“그런데 왜 줄이 끊어진 느낌이 들죠? 오, 아니 그것보다 더 끔찍해요.
끝이 없는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것 같아요.”
“얘야. 살면서 꼭 외모가 중요한 것이 아니란다.
내가 보기엔 너의 차림새는 단정할지 몰라도 너의 내면은 망가져 있는 것 같구나. 왜 그런 것 같니?”
“모르겠어요. 차라리 진짜 줄이 끊어지고 화장이 지워지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요. 발레리노가 너무 보고 싶어요. 기사와 공주도요.”
“그래. 잘 알고 있구나. 너는 버려지지 않기 위해 너의 진짜 모습을 버린 거야. 그게 제일 나쁜 거란다.”
그 순간, 발레리나 인형의 머릿속에 그동안 발레리노 인형에게 해왔던 말들이 등불을 밝히듯 천천히 떠올랐다
“바보 같아. 이 줄이 끊어지면 난 버려진다고. 그런데 춤을 추자고? 아니. 난 절대 추지 않을 거야.”
“난 너랑 달라. 너같이 무모하지 않다고. 그러니까 제발 좀 그만해!”
발레리나 인형은 괴로워서 견딜 수 없었다. 줄이 끊어지는 고통보다 더, 아니 그 어떤 것으로도 표현할 수 없었다. 선반 끝자락으로 가 영원히 떨어지는 것 같았다. 무엇에 비교해도 그것보다 더 큰 괴로움이었다.
“아! 할아버지 어떡하면 좋아요? 난 너무 바보 같아요! 다시, 다시 한 번만이라도 발레리노를 볼 수 있다면...”
“그래. 이제야 비로소 너 자신을 찾은 것 같구나.”
발레리나의 눈에서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발레리나 인형이 흘린 눈물에 진하게 한 화장이 지워지기 시작했다. 발레리나 인형은 할아버지 인형이 건네주는 손수건으로 자신의 모든 화장을 지웠다. 그리고 발을 옳아 매는, 불편한 토슈즈를 벗어버렸다. 발레리나의 차림새는 전보다 화려하진 않았지만 그제야 발레리나의 본모습을 찾은 듯 했다. 그렇게 발레리나 인형은 한층 가벼운 발걸음으로 발레리노 인형을 찾으러 떠났다.
“나를 지탱해 주는 건 줄 뿐만이 아니야. 그건 내 육체를 지탱해 줄 뿐이지. 내면을 지탱해 주는 건 나의 소중한 사람들이야.”
발레리나 인형은 걷고 또 걸었다. 뜨겁게 내리쬐는 전등이 너무 눈이 부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아 버렸다. 발바닥이 다 까져 붉은 피가 흘렀다. 발레리나 인형은 중얼거렸다.
“토슈즈라도 가져 올걸 그랬나..”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으며 생각했다.
‘이정도 고통은 이겨 낼 수 있어. 난 발레리노를 꼭 찾을 거야.’
그리고는 다시 걸어갔다. 왕자 인형이 발레리나에게 절벽에서 뛰어내리지 않고 선반을 나갈 수 있는 법을 알려주어서, 발레리나 인형은 비교적 쉽게 선반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발레리나 인형이 떠나기 전, 왜인지 어깨가 축 늘어져서 나타난 왕자 인형은 전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빛나고 부드럽던 머리는 왁스를 바르지 않아 조금 헝클어진 형태로 차분하게 내려왔고, 옷도 평소에 비해 수수했다. 왕자 인형은 잔뜩 소심해져서 말했다.
“기사가 떠나가고 나서, 그제서야 알게 됐어. 기사가 내가 해야 할 일을 전부 대신 해주고 있다는 거.”
발레리나 인형은 전과는 다른 왕자 인형의 모습에 깜짝 놀라 왕자 인형을 돌아봤다. 그러자 왕자 인형이 말했다.
“사과할게. 지금까지 내가 저질렀던 어리석은 실수 전부 다. 지금 발레리노를 찾으러 가는 거지? 내가 길을 알아. 알려 줄게.”
그리고는 옆에 있던 할아버지 인형에게도 사과한 뒤 다시 어딘가로 걸어갔다. 왕자 인형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할아버지 인형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내가 보기에는 왕자도 이제 변할 것 같구나. 잘 된 일이야.”
발레리나 인형도 왕자가 조금은 좋아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발레리나 인형은 할아버지 인형과 왕자 인형의 도움으로 선반을 안전하게 내려왔다.
그렇지만 끝이 없는 길과 내리쬐는 밝은 조명에 발레리나 인형은 지친 상태였다. 그렇게 먼 길은 아니지만, 한동안 움직이지 않아 약해진 몸 상태로 오늘 안에 길을 다 가는 것은 무리였다. 그러나 발레리나 인형은 고집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나 걸었을까, 어느새 큰 유리 창문 밖으로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발레리나 인형은 노을이 무척 예쁘다고 생각했다. 붉은 노을과 하얀 구름이 겹쳐 분홍색을 띄었다. 발레리나 인형의 눈 앞에 발레리노 인형이 아른거렸다. 붉은 노을과 발레리노 인형의 얼굴이 함께 섞여 일그러져 보였다. 문득, 발레리노 인형이 얼굴을 붉힌 채 자신에게 고백하던 날이 스쳐 지나갔다. 모든 것이 아른거렸다. 그리고 끝내 일그러졌다. 자신이 저지른 실수에 모든 것이 망가져버린 것처럼, 한없이 구겨져 버렸다. 그렇게 발레리나 인형은 쓰러졌다.
발레리나 인형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캄캄한 밤이었다. 온몸이 끊어질 듯 아파왔다. 발레리나 인형은 줄로 지탱해져 있어야 할 자신의 팔 다리를 살펴보았지만, 이미 줄은 전부 끊어져 있었다. 발레리나 인형은 좌절했다. 줄이 없으면 걷지 못할 텐데, 발레리나 인형의 머릿속에는 어떻게든 발레리노 인형을 만나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창문을 타고 커튼을 훑으며 들어오는 밤바람이 선득해 발레리나 인형은 몸을 떨었다. 하지만 발레리나 인형에게는 허리에 묶인 숄을 풀어 어깨에 덮을 수 있는 힘조차 없었다. 하지만 발레리나 인형은 여기서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자신을 위해 조언을 해준 할아버지 인형, 조금 미웠지만 분명히 큰 도움이 되어준 왕자 인형에게 떳떳하고 싶었다.
‘그래, 작은 것부터 생각하자. 줄이 없다고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아닐 거야.’
발레리나 인형은 생각했다.
따스한 온기가 기분 좋게 몸을 감쌌다. 발레리나 인형은 어깨에 숄을 두르고 걷고 있었다. 발레리나 인형은 끝내 손가락 하나를 움직였고, 그다음이 팔, 다리였다. 그렇게 발레리나 인형은 6시간 만에 서게 되었다. 자신이 설 수 있게 되었을 때, 발레리나 인형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동안 줄이 끊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움직이지도 못했는데, 줄은 그저 내가 만들어낸 강박 같은 것이었다고 생각하니 이 모순적인 상황에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줄 같은 건 원래 중요하지 않은 거였어. 사실 나는 나 스스로를 줄에 옭아매고 있었던 걸지도 몰라’
발레리나 인형은 생각했다. 걸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발레리나 인형은 작은 문틈 사이로 불이 새어나오는 것을 발견했다. 인형들의 크기에 딱 맞는 문이었다. 발레리나 인형은 문을 두드렸다. 익숙한 남자가 문을 열어 주었다. 기사 인형이었다. 기사 인형은 발레리나 인형을 알아보고서는 안에 있는 누군가에게 외쳤다.
“저기, 이리 좀 와 봐요..!”
문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야? 누가 왔어요?”
공주 인형이 열려있는 문으로 발레리나 인형을 발견하고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발레리나..! 너, 어떻게..”
기사 인형은 발레리나 인형을 집에 들어오게 하고는 문을 닫았다.
발레리나 인형은 거실에 주저앉아 있는 공주 인형을 말없이 안아주었다. 그날 밤, 발레리나 인형은 공주 인형의 새 집에서 푹 쉴 수 있었다. 기사 인형이 발레리나 인형을 붙잡고 밤을 샐 기세로 질문을 늘어놓던 공주 인형을 발레리나가 피곤하지 않겠냐며 말린 탓에, 다음날 아침에 공주 인형의 질문 공세가 쏟아졌다. 공주 인형의 질문에 일일이 답을 하던 발레리나 인형은 문득 궁금해져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한 군데도 안 다쳤어?”
그러자 공주 인형이 웃으면서 말했다.
“왕자가 길을 알려 줬어. 너야 우리 배웅 못해서 몰랐겠지만, 우리 절벽에서 뛰어내리지 않았어. 다행이지.”
그리고는 덧붙였다.
“그거 하나 알려준다고 엄청 생색 내더라. 내가 왜 알려 주냐고 물어보니까 자기는 백성을 지킬 의무가 있대. 웃기지?”
발레리나 인형은 그제야 생각이 나 말했다.
“왕자가 너한테, 그리고 기사님한테도 전해 달래. 그동안 자기가 했던 행동들, 다 사과하고 싶대. 정말 미안하다고.”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기사 인형이 입을 열었다.
“어쩌면 왕자도,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닐지도 몰라요.”
발레리나 인형과 공주 인형이 무슨 뜻이냐는 듯이 쳐다보자 기사 인형이 말을 이어나갔다.
“왕자 인형도, 주변에서 자꾸 외모에 신경 써라, 항상 옷은 잘 입어야 한다, 이런 말들에 사로잡힌 건 아닐까요?”
기사 인형은 그렇게 말을 마치고 빙긋 웃었다.
공주 인형은 기사 인형의 말을 듣고 깊은 생각에 빠진 것 같았다. 발레리나 인형도 마찬가지였다.
그 순간, 문이 벌컥하고 열렸다. 공주 인형은 깜짝 놀라 일어나며 말했다.
“아, 내가 말을 안 했구나.”
발레리나 인형은 문이 열리는 소리에 뒤를 돌아 봤다. 큰 키에 갈색 생머리, 붉은 빛이 살짝 도는 얼굴. 발레리노 인형이었다.
발레리노 인형은 발레리나 인형을 보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웃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보고 싶었어.”
발레리나 인형은 발레리노에게 뛰어가 안겼다.
“미안해,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괜찮아. 찾아와 줘서, 그리고 사과해 줘서 정말 고마워.”
외면은 중요한 것이 아니야. 정말 중요한 것은 소중한 사람들을 알아보는 내면이야. 발레리나 인형은 속으로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