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 오시수의 큰아들 오상유는 경신 1680년 2월 승문원 정자에 승서되었다가 5월에 경신피화를 당하여 오시수를 배행하여 삼수군 배소에 가 같이 고통을 감내하였었다. 그러나 윤 8월에 모부인 권씨의 상을 맞아 다시 건천동으로 오는데 오는 도중 숨 돌릴 틈도 없이 통곡의 심정으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길을 나서 성야에 분상하였다.
다시 9월에 오시수가 왕옥(王獄)에 잡혀 왔다. 10월에 마침내 사사(賜死)의 명이 있자 오상유는 피를 뿌리고 눈물을 머금어 마치 살고 싶지 않은 듯하였다.
그렇게 갑자기 어머니 상을 당하여 침통한 한가운데에서 또다시 근 반년 만에 아버지인 오시수의 억울한 사사를 당했으니 얼마나 세상이 원망스럽고 하늘이 무너지는 상심을 겪었을지 감히 상상이 되지 않는다.
신축 1681년 6월에 오시수의 상고를 맞은 후 3년을 불견천일하고 무시로 곡읍하여 거의 누수가 말라서 성혈이 되고 양안이 실명할 지경에 이르렀다.
후일 기술한 시편을 살펴보며 당시의 모습을 살펴보자.
회포를 기술함(述懷)
오상유
봄풀이 푸르르니 왕손(王孫. 春草는 年年綠하니 王孫을 帰不帰란 古詩에서 나옴)의 한숨이요
꽃은 붉었으니 두견(杜鵑. 啼血梁花枝라 하고 不如帰라 슬피 운다 전해짐)새의 귀촉도(歸蜀道)를 슬퍼하네
알지 못하겠구나 어느 세월에나
천지간(天地間)에 다시 머리를 되돌릴까
草綠王孫恨 花紅杜宇愁 不知何日月 天地更回頭
오상유에게 닥친 사람의 삶은 삶이 아니요 오로지 고통의 연속이다. 고통이 과연 욕심을 가진 이에게만 찾아온다는 이야기는 단지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 이들이 하는 인간의 말 꾸미기에서 나온 이야기이지, 사실 고통은 하늘이 준 운명이자 그 사람의 숙명일 것이다.
경신피화를 당할 때 오상유의 나이는 23세 내외, 지금으로 보면 아직 한참 어린 나이로 세상에 첫발을 디디고 새롭게 경험해야 할 그 시기에 그는 벗어날 수 없는 경험과 고통으로 수많은 앞날을 보내야 했던 것이다.
또 둘째 아들 오상부는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11살, 그렇게 두 어린 형제를 망망대해의 파고 속에 남겨 둔 채 이 가정의 운명은 어쩌란 말이냐?
과천에서 사제 천여(天如, 오상부)와 작별하다(果川別舍弟 2수)
저암 오상유(吳尙游)
천지간에 무궁한 한스러움은
우리 형제 같은 사람은 없으리라
백년의 길고 긴 날 하루같이 어버이 사모하는 눈물로
금년에 또 아우와 이별하는 심정을 더욱 서러워하노라
其二
해는 저무는데 나귀는 게으름만 피우고
추풍은 쓸쓸하게 부는데 외기러기만 슬피 우네
삼백 리 길 멀고 먼 하늘가엔 흰구름만 떠 있고
남북으로 돌아다보니 한스러운 서러움에 눈물만 흐르네
天地悠悠恨 無如我弟兄 百年風樹淚 今日送君情
落日靑驢倦 秋風獨鷹愁 看雲三百里 南北屢回頭
시에서 표현된 내용은 후일의 상황을 표현한 모습인데도 이 정도이니 그 당시에는 슬픔이 너무나 커 어떤 기록도 남길 처지가 안 되었을 것이다. 10여 년이 지난 이 때까지도 이 형제의 대화에서 나타나는 이렇게 잔인한 한의 서러움을 자연스레 표현할 수밖에 없음은 당시가 어떠했을까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그들의 고향은 당시 한양의 건천동이었므로 그들이 한양을 뒤로하고 아버지 오시수의 재실이 있는 공주의 월굴까지 내려올 때 상황을 후일 지은 시를 통해 유추해 보자.
장자인 오상유는 아버지의 묘소를 지켜야 하는 까닭에 공주로 자신의 식솔을 모조리 데리고 내려와야 했지만 차자인 오상부는 서울 근처 과천에서 전장을 마련하고 살았던 것 같다.
다음은 오상유가 한양을 뒤로하고 내려오며 읊은 시들이다.
천안의 주막집에서(天安店)
오상유
황량한 성안으로 늦은 나발 소리 울리는데
가을의 찬 기운 가득한 서릿발에 옷소매가 절로 여며지네
북풍을 이겨 내려는 말(馬)은 길게 한소리 울부짖고
새벽달만 어느새 서창 밖에서 밝게 빛나네
荒城殘角聲 霜重秋衫薄 北風征馬嘶 曉月當窓白
황량한 성, 가을의 찬서리, 북풍을 이겨 내려는 마음 등 그의 시에 나타난 시 구절에는 오로지 싸늘하고 서글픈 감정을 나타내는 표현뿐이다. 한양을 뒤로하고 공주까지 내려오는 중간지점인 천안에서 하룻밤을 유숙해야만 하고 그 감정을 그대로 새벽달에 감정 이입시켜 나타내었다. 그래도 이 시기엔 슬픔을 어느 정도 이겨 내려는 마음이 느껴지는 모습이다.
차령(車嶺)고개
오상유
남으로 차령고개 위에 올라
북쪽으로 바라보니 서울이 아득히 멀어라
해는 지고 연기는 차가운데
가벼운 바람에도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지네
南登車峴上 北望帝京遙 落日寒烟裏 風輕木葉凋
너무나 먼 고향이 되어 버린 한양 땅, 그리고 과거의 영화. 이제 그에게 남아 있는 현실은 벼슬길에서도 멀어지고 포근한 가족과 친척들에게서도 영영 헤어져서 오로지 궁벽한 시골에서 한을 삭이는 일에만 온 생애를 쏟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 그에게 ‘해는 지고 연기는 차가우며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은’ 어쩌면 호사스러운 시구절인지도 모른다.
사실 오상유는 현종 15년 갑인 1674년인 17세에 상해(초시합격)했다. 그리고 을묘 1675년인 18세에 사마에 중해 성균진사가 되었고 무오 1678년 21세 3월에 문과 증광시 병과에 합격하였으니 거의 역사상 최연소 과거급제자급에 속한 인물이다. 그런 그에게 한순간 일어난 이러한 운명은 정신을 차렸을 때 받아들이기 힘든 고통 중의 극한 고통이었을 게다.
궁원(弓院)
오상유
깎아지르는 절벽으로 십 리나 연해 있고
수많은 마을이 노거수에 덮여 있는데
금강이 멀지 않은 곳에서 흐르고
옛 활터(射場)에 공산이란 표지가 있구나
十里陰崖裡 千村老樹間 錦江知不遠 古堠記公山
과거에 급제했을 때 아버지 오시수는 기뻐하며,
“내가 25세에 등과하였는데 선고께서 너무 이르다고 경계하시던 말씀이 아직도 귀에 남았거늘 금일 너는 나보다 4년이나 앞서 등과하였으니 내가 너무 과분한 것을 근심하노니 다시 글을 읽고 10년 후 쯤 출사해도 늦지 않으리라.”
말씀하시던 그 모습을 평생을 두고 잊지 않았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