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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이공 신도비명병서 〔監司李公神道碑銘 幷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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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사공(太史公 사마천(司馬遷))이 〈순리열전(循吏列傳)〉을 쓰면서 서두에 이르기를,
“법령과 형벌이 미비해도 양민이 두려워하여 몸을 닦는 이유는 관리가 어지럽게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 사리를 따르면 또한 잘 다스릴 수 있다.”
하였다. 나는 일찍이 이 말을 가지고 근세의 사대부 중에 옛 순리에 견줄 만한 사람을 찾아보았는데, 오직 고(故) 감사 연안(延安) 이공(李公)만이 여기에 가까웠다.
공은 어려서부터 두각을 나타내어 하는 말이며 행동거지가 참으로 훌륭하였다. 12세에 부친 증(贈) 영의정 공의 상(喪)을 당하여 어른 못지않게 곡하고 울며 슬퍼하였으며, 악려(堊廬)에서 형님 연원공(延原公 연원부원군(延原府院君) 이광정(李光庭))을 따라서 강학에 몸을 맡겨 조석으로 게을리하지 않아 탁월하게 일찍 성취하였다. 족부(族父) 첨정 이희(李憙)는 아들이 없었는데, 공의 선량한 인품을 사랑하여 공에게 사후의 일을 맡기고 싶다고 연원공에게 간청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우리 부모가 돌아가셨는데 남의 후사가 되는 것은 인정상 차마 못할 짓입니다.”
하며 눈물을 그치지 않자, 연원공도 강요할 수 없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첨정공이 적의 칼날에 목숨을 잃자 공은 몸소 임시로 매장한 시신을 수습하였다. 그리고 그의 부인이 죽자 두 상여를 모두 고향의 선산으로 반장(返葬)하였으며, 그의 조카를 세워 제사를 주관하게 하고 그 토지와 노비를 모두 돌려주었는데 이때 공은 겨우 약관의 나이였다. 공이 엄격하게 행동을 절제하고 독실하게 의리를 지킨 것이 어떠한가.
성균관 진사에 오른 지 얼마 안 되어 마침 호남(湖南) 사람이 다른 사람의 지시를 받고 상소를 올려 퇴계(退溪) 선생을 헐뜯었다. 관학(館學) 유생들이 모두 모여 장차 그 무고를 밝히려고 하면서 “이모(李某)가 아니면 안 된다.”라고 하고는 공을 데리고 서울로 갔다. 논의할 적에 대사헌 김륵(金玏) 같은 선배는 공의 말을 한 번 듣자마자 심복하였으며, 그 글은 공에게 일임하고 말 한 마디도 돕지 않았으니, 공이 돈후하고 문장에 뛰어난 것이 이러하였다.
갑진년(1604, 선조37)에 천거되어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임명되었으나 좋아하는 바가 아니었기에 즉시 스스로 면직을 청하고 돌아갔다. 이듬해 또 천거되어 단계를 뛰어넘어 호조 낭관에 임명되었으나 공은 겸손한 태도를 지켜 나아가지 않았다. 그해 겨울에 은율 현감(殷栗縣監)으로 옮겼는데 처음 지방관으로 부임한 것이었다. 이로부터 낮은 벼슬에서 높은 벼슬까지 모두 열한 관직을 지냈는데 모두 관직에 적합하다하여 교서를 내려 특별히 표창하고 표리(表裏)를 하사하는 은혜가 전후로 잇달았다.
은율현에 있을 때에 정무를 본 지 얼마 되지 않아 조사(詔使)가 오게 되었다. 이웃 고을의 농민들이 농사일을 제쳐두고 조반과 석식도 거른 채 사신의 관사에서 힘을 다해 일하면서도 오히려 일을 완수하지 못해 처벌을 받을까 두려워하였다. 공이 경계 위에 사는 백성을 고용하여 민역(民役)을 대신하게 하니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어지럽지 않아 온 경내가 편안하였다.
관찰사 최동립(崔東立)은 평소 공과 마음이 맞지 않았는데 현에 와서는 일부러 열 몇 가지 의심스러운 송사를 공에게 주고 판결하게 하였다. 공은 조금만 듣고도 판결하는데 문서의 뒷면에 바람이 일어나듯 신속하게 처리하니, 최동립은 혀를 내두르며 크게 칭찬하였다. 또 온 도내의 공안(貢案)을 개정하는 일을 공에게 맡겼는데, 공이 처음에는 그다지 마음을 두지 않는 것 같더니 아전을 불러서 물어 계산하여 산과 바다에서 생산되는 물건의 수량과 가격을 열 손가락으로 헤아려 확실히 일치하였는데 순식간에 일을 마쳤다. 최동립이 더욱 탄복하여 약속도 하지 않았는데 생각이 일치하여 암행 어사와 함께 포장(褒狀)을 올렸는데 그 내용에 “백성을 다스리는 재주는 공수(龔遂)와 황패(黃霸)에 견줄 만하고 일을 헤아려 처리하는 능력과 국량은 사람들이 미치지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순천 부사(順天府使)로 있을 때는 대체로 은율현을 다스릴 때의 추요(樞要)를 바꾸지 않았지만 은율현보다 교활한 아전이 순종하고 의지할 데 없는 외로운 백성이 안도하였다. 당시 공과 성명이 같은 사람이 있었는데 관함(官銜)도 공과 같았다. 그의 친구 가운데 가난한 선비 한 사람이 딸을 시집보낼 비용을 청하기 위해 왔는데, 공을 만나보니 자기 친구가 아니어서 실망하며 물러났다. 공이 그와 함께 앉아 천천히 그 까닭을 물어보니 그 사람이 꾸밈없이 사실대로 말하였다.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당연합니다.”라고 하고는 그를 더욱 후하게 대우하고 필요한 물건을 한 가지도 부족함이 없도록 마련해 주었다. 그 사람이 사례하며 말하기를 “내 벗이라도 필시 이렇게는 못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지금까지도 사대부들 사이에서 공을 장자(長者)라고 칭송하는 말이 쇠하지 않고 있다.
동래 부사(東萊府使)로 부임했을 때는 오랑캐가 성질이 간교하여 온갖 속임수와 변덕을 부렸는데 공이 한결같이 신의로 대하며 옛 약속을 준수하고 용서하지 않자 왜인이 감히 뇌물과 속임수로 농락하지 못하였다. 계축년(1613, 광해군5)에 가둬 놓은 잠상(潛商)이 도망치는 바람에 법에 걸려 파직되자, 동래 사람들이 공이 유임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양주에 있을 적에는 다음과 같았다. 양주는 본래 경기의 한 도회지로, 그곳 백성은 교활하게 상업에 종사하며 도성과 교통하여 이권을 차지했으므로 이곳을 맡은 지방관은 으레 다스리기 어려운 것을 근심하였다. 공은 정사를 하면서 순전히 법만 따르지 않고 자애로움과 온화함으로 보완하니, 늙은이는 봉양을 받고 젊은이는 생업에 종사하였으며 딸이 있는 집안에서는 반드시 제때 시집을 보낼 수 있었다. 감사가 올린 도내 관리의 인사 고과에서 공이 1등을 차지하니, 특별히 계마(繫馬)를 하사하였다.
하지사(賀至使)가 되어서는 행낭이 텅 빈 채로 돌아왔다. 공이 요동(遼東)에 도착했을 때 조선이 배반했다는 거짓말이 몹시 떠들썩했는데 의주 부윤(義州府尹) 이극신(李克信)이 진강 유격(鎭江遊擊)에게 인심을 잃어 보복을 당했기 때문이다. 공은 정사(正使) 이상길(李尙吉)을 대신하여 즉시 정문(呈文)을 초했는데 말의 논리가 분명하고 치밀해서 아문(衙門)에서 한 번 보고 감동하였으며 숱한 의혹이 얼음 녹듯 풀렸다. 분호조(分戶曹)의 관리가 되어서는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교역하고 값이 많이 떨어지면 거두어들였다가 비쌀 때 방출하여 쓸데없는 비용을 줄이고 고통받는 이들을 소생시켰으니 어찌 군량을 수송하는 일에만 국한되었겠는가.
계해년(1623, 인조1)에 인조가 즉위하자 맨 먼저 공을 의주 부윤(義州府尹)과 안악 군수(安岳郡守)에 임명하였는데 미처 숙배하기 전에 충청 수사(忠淸水使)로 이임되었으니 권력을 쥔 자가 문무를 겸비한 공을 훌륭히 여겼기 때문이다. 부임한 뒤 방만하고 필요 없는 것을 찾아서 척결하고 묵은 병폐를 제거하자 노 젓는 수군들이 몹시 기뻐하였으며 변방 일대가 일신(一新)되었다.
갑자년(1624) 봄에 역적 이괄(李适)이 천리를 무시하고 반란을 일으키자 전함을 정비하고 갑옷을 입고서 출동하려 하였는데 달려와 구원하라는 명령이 내렸다. 공이 목욕재계하고 군사들에게 맹세한 다음 성심으로 경건하게 기도하자 태풍이 순풍으로 바뀌는지라 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단숨에 질풍을 타고 강도(江都)에 이르렀는데 대가(大駕 어가)가 이미 남쪽으로 내려간 뒤였다. 공이 눈물을 뿌리며 몹시 통탄하고서 배를 놔두고 보병을 이끌고 곧장 공주(公州)로 달려가 근왕(勤王)한 다음 명령을 받고 돌아왔다.
이때 함경 감사(咸鏡監司) 권반(權盼)은 모 도독(毛都督 모문룡(毛文龍))과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모 도독이 오랑캐 소굴을 소탕한다고 칭탁하고 유격 두 장수를 보내 북쪽 변경을 드나들었기에 북쪽 변경이 소란하였다. 조정에서는 급히 권반을 교체하여 그 일을 수습하기로 하였는데, 영의정 이원익(李元翼) 공과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 공이 이구동성으로 어전에서 공을 천거하며 “지금 인재로는 이모(李某)보다 뛰어난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하여 마침내 공을 발탁하여 권반을 대신하게 하였다.
공이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자 출발하기 전에 역관을 보내 유격을 만나게 하여 후한 예물로 미리 손을 써놓고, 공이 뒤따라가 유격을 대면하여 손바닥을 가리키듯이 쉽고 분명하게 이로움과 해로움을 설명하였다. 그러자 유격이 공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끄덕이며 깊이 들어갈 계책을 약속하였고, 또 병졸들의 횡포를 금하고 약탈했던 소와 말을 모두 돌려주었으므로 북방이 안정되었다. 군자는 이에 공이 일을 민첩하게 처리한 것을 칭찬하기 보다는 자신이 공을 차지하지 않고 양보하여 권반에게 돌린 것을 훌륭하게 여겼다.
북관(北關)은 비록 유적(儒籍)에 소속된 사람이라도 궁술과 기마술을 숭상하고 시서(詩書)를 경시하는 것이 풍속이었다. 공은 한 번 변화시킬 것을 생각하여 조덕(趙德)과 같은 사람을 얻어 스승으로 세워서 여러 고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어린 선비들을 가르치게 하고, 때때로 공이 순시할 때 공령(功令)에 따라 그 능력을 등급으로 매기니, 향교와 서당에서 현송(絃誦)의 문풍(文風)이 크게 진작되었다.
도내의 장정들이 으레 아병(牙兵)의 명부에 부정한 방법으로 이름을 올려 비록 세초(歲抄) 때가 되어도 수령이 감히 큰소리로 문책하지 못했는데, 공은 모두 제 고을로 쫓아 보냈다. 구제(舊制)에 아병은 으레 뽑아 재능을 시험하고 그 포(布)를 징수하여 병영의 비용에 보탰는데, 공은 또 포의 징수를 금지하고 병영으로 모두 이적(移籍)하여 오직 조련에만 치중하였다.
북병사(北兵使) 이기빈(李箕濱)이 임소에서 병사하자 변방의 민심이 흉흉하였다. 그러나 공은 차분함을 잃지 않고 편의 사목(便宜事目)을 조목조목 아뢰고 회령 부사(會寧府使) 김준룡(金俊龍)에게 격문을 보내 임시로 병사(兵使)를 대행하게 하였으며, 또 남병사(南兵使)와 북우후(北虞候) 이하에게 그의 지시를 받도록 하였다. 공이 상황의 변화에 적절히 대처한 것을 상성이 매우 훌륭하게 여겨 비록 승정원에서 공이 독단으로 처리했다고 탄핵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공이 북방에 있던 기간은 겨우 1년이 넘었을 뿐인데, 시행하고 조치한 것은 모두 작은 은혜나 목전의 공리(功利)가 아니라 장구하게 시행할 수 있는 것이었다. 만일 공에게 몇 년의 수명을 연장해 주어 일을 마치게 하였다면 적들이 북문에서 제사 지낼 것임을 어찌 굳이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을축년(1625, 인조3) 여름에 조사(詔使)가 온다는 말이 있어서 안변(安邊)에 머무르며 지휘를 기다리다가 병이 심해져 일어나지 못했는데, 임종할 때 간절하게 타이른 말은 모두 국사였고 사적인 것은 하나도 언급하지 않았다. 향년 53세였다. 부음이 전해지자 인조가 애통해하며 지나는 곳마다 호상(護喪)하여 영구의 운송을 도우라고 명하고, 낭관을 보내 제문으로 치제(致祭)하였다. 사대부들은 아는 사람이건 모르는 사람이건 공의 집에 와서 조문하였다.
공의 휘는 창정(昌庭), 자는 중번(仲蕃)이며, 연안(延安) 사람이다. 선조 습홍(襲洪)은 고려를 섬겨 태자 첨사(太子詹事)가 되었으며, 그 뒤로 누대에 걸쳐 잇달아 현달하였고 본조에 이르러서도 끊이지 않았다. 휘 인문(仁文)은 문과에 급제하여 첨지중추부사를 지냈고, 인문의 아들 휘 말(𡊉)은 문과에 급제하여 삼척 부사(三陟府使)를 지냈고, 말의 아들 휘 경종(慶宗)은 여산 군수(礪山郡守)를 지냈고, 경종의 아들 주(澍)는 바로 공의 부친이다. 주는 계유년(1573, 선조6) 알성시에 급제하고 병자년(1576) 중시(重試)에 급제하였다. 사간원 정언으로 옮겼는데 몹시 강직하게 간언하니 세상에서 여헌가(呂獻可)의 기풍이 있다고 일컬었다. 이로 인해 가산 군수(嘉山郡守)로 나갔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맏아들 연원공(延原公)이 귀해져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진주 유씨(晋州柳氏)를 부인으로 맞이하였는데 중종조(中宗朝)에 영의정을 지낸 순정(順汀)의 증손이자 군수 사필(師弼)의 딸이다. 슬하에 아들 둘을 두었는데, 장자는 연원부원군(延原府院君) 광정(光庭)이고, 공은 그의 아우이다. 공은 만력(萬曆) 계묘년(1603)에 진사가 되고, 무신년(1608, 광해군 즉위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공은 침착하고 고요하며 관대하고 돈후하였으며, 효성과 우애는 천성으로 타고났다. 항상 어린 나이에 어버이를 여읜 것을 죽을 때까지 가슴 아파했는데, 기일(忌日)이 되면 반드시 처음 상을 당했을 때처럼 지극히 애통해하였다. 백씨(伯氏)를 엄부(嚴父)처럼 섬겨 아침저녁으로 찾아뵙고 문안하는 일을 병든 때가 아니면 거르지 않았으며,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먹지 않고 아무리 적더라도 반드시 올렸으며, 추위와 더위에 맞는 의대(衣襨)는 아무리 멀더라도 꼭 챙겨 드렸다. 조카들을 돌보고 친척을 대함에 있어서는 각각 그 도리를 극진히 하였다. 남과 사귈 때는 선을 좋아하기는 길게 하고 악을 미워하기는 짧게 하였으며, 남과 잘 어울려 자신의 주관을 내세우려 하지 않았으며, 일을 도모하면 성공하였고 성공하면 반드시 남에게 양보하였으며, 화려한 의복을 몸에 걸치지 않았고 요사스럽거나 화려한 물건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공의 몸이 닦여진 것이 이와 같았다. 그러므로 관리의 다스림으로 확대함에 그 근원을 만나지 않음이 없었다. 문무(文武)를 상황에 따라 사용하고 강유(剛柔)를 잘 조절하여 어지러운 매듭은 저절로 풀리고 어렵고 복잡한 상황에 봉착해서도 막힘이 없었다. 세상 사람들이 항상 말하기를 “지금 사람이 옛 사람에 미치지 못한다.”라고 하지만, 공의 공적으로 말하면 사마천(司馬遷)이 저술한 〈순리열전(循吏列傳)〉 속의 인물과 견주더라도 어찌 손숙오(孫叔敖)나 정자산(鄭子産)보다 못하겠는가.
공은 혼탁한 세상에 살면서 말과 행동이 모두 정직했지만 법망에 걸리지 않았으니 이는 실로 천행이었다. 정사년(1617, 광해군9)에 모후(母后 인목대비(仁穆大妃))의 궁(宮)에 숙배하는 것은 세상에서 크게 금기로 여겨 피했는데 공은 홀로 이를 행하고 개의치 않았다. 정홍익(鄭弘翼) 익지(翼之)와 김시양(金時讓) 자중(子中)이 당세의 죄인이 되자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모르는 것처럼 외면하였는데, 공은 맥주(麥舟)의 은혜를 베풀면서도 어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토목공사를 마구 일으키고 세금을 마구 거둔 것이 광해군이 망하게 된 이유였는데, 공이 상소하여 극력 간언하자, 광해군이 대노하여 “임금을 팔아 정직을 산다.”라고까지 하였다. 이때 이승과 저승의 사이가 털끝만한 간격도 없었다. 이 몇 가지 일은 비록 영무자(甯武子)의 우직함에는 조금 못 미치는 듯하지만 녹(祿)을 먹으면서도 구차하게 영합하여 용납되기를 구할 뿐 간언하는 글 한 장도 올리지 못하는 자가 공의 기풍을 듣는다면 어찌 죽고 싶을 정도로 부끄럽지 않겠는가.
공은 일생 동안 독서를 좋아하여 《대학》, 《중용》, 《논어》, 《맹자》와 주자서(朱子書)를 깊이 공부하였는데, 비록 번다한 정무를 처리할 때도 틈만 나면 반드시 글 읽기를 그치지 않았다. 일찍이 문경(聞慶)의 산수를 좋아하여 화산(華山)의 북쪽에 터를 잡아 집을 짓고 화음무구옹(華陰無求翁)이라 자호(自號)하였다.
부인 성산 이씨(星山李氏)는 처사 응명(應明)의 딸이자 대사성 철균(鐵勻)의 4대손이다. 집안일은 오직 공이 하는 대로 따랐고 오직 근검을 신조로 삼았으며 가난 때문에 군자에게 근심을 끼치지 않았으니 부인이 얼마나 어진지 알 수 있다. 공보다 8년 뒤인 숭정(崇禎) 임신년(1632, 인조10) 모월 모일에 서울에서 세상을 떠났고, 그해 5월에 공의 묘에 합장하려 하였는데 묏자리에 물이 침식하여 마침내 6월 모일에 파주(坡州) 오리동(悟里洞)에 있는 공의 조부 여산공(礪山公)의 묘소 아래 오좌(午坐)의 언덕에 다시 묏자리를 잡았고, 계유년(1633) 2월에 공의 묘를 옮겨 부인과 같은 묘혈(墓穴)에 합장하였다.
슬하에 6남 1녀를 두었다. 장남 심(襑)은 대군사부(大君師傅)가 되었다. 둘째 아들 진(袗)은 문과에 급제하여 광주 부윤(廣州府尹)이 되었다. 셋째 아들 완(𧚁)은 문과에 급제하여 지평을 지냈는데, 청렴과 정직이 남달랐으나 단명했다. 넷째 아들 괴(襘)는 문과에 급제하여 제주 목사(濟州牧使)가 되었다. 다섯째 아들 제(𧞓)와 여섯째 아들 암(裺)은 모두 단명했다. 딸은 의금부 도사 정식(鄭栻)에게 출가했다. 측실 소생으로 2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상(裳), 경(褧)이고, 딸은 홍우명(洪又明), 이립(李岦), 이즙(李楫)에게 출가했다.
심은 참판 이민환(李民寏)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2녀를 낳았다. 장남 관징(觀徵)은 문과에 급제하여 학유가 되었다. 차남은 정징(鼎徵)이다. 딸은 윤이구(尹爾久), 이운근(李雲根)에게 출가했다. 진은 수사(水使) 성준길(成俊吉)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4녀를 낳았다. 아들은 이징(頤徵)이다. 딸은 영흥 부사(永興府使) 이여발(李汝發), 이증(李增), 이우정(李宇鼎), 이호징(李虎徵)에게 출가했다. 완은 군수 이원량(李元樑)의 딸에게 장가들어 5남 3녀를 낳았다. 아들은 귀징(龜徵), 문징(文徵), 휴징(休徵), 봉징(鳳徵)이고, 하나는 어리다. 딸은 이창주(李昌胄), 송창문(宋昌文)에게 출가했고, 하나는 어리다. 괴는 부사 이경인(李景仁)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여섯을 낳았는데, 우징(虞徵), 하징(夏徵), 주징(周徵), 명징(明徵)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제는 찰방 한성일(韓誠一)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아들이 없어서 정징을 후사로 삼았다. 암은 사인(士人) 정천섭(鄭天涉)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2녀를 낳았다. 아들은 태징(泰徵), 진징(震徵)이다. 딸은 이시격(李時格)에게 출가했고, 나머지는 어리다. 정식은 1남 3녀를 낳았다. 아들은 인수(仁壽)이다. 딸은 참봉 유명기(兪命夔), 유집(柳集), 사인 이정한(李井漢)에게 출가했다. 남녀 증손은 많아서 기재하지 않는다.
광주 부윤 진과 제주 목사 괴가 공의 행적과 관력(官歷)을 행장으로 엮어 변변치 못한 나에게 주며 말하기를,
“선인이 돌아가신 지 오래되었는데도 비석을 세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비문을 갖추지 못한 것은 불초한 저희들의 죄입니다. 실은 기다리는 바가 있어서이니, 집사께서는 욕되게도 우리들과 교유한 지 오래되었기에 감히 꾸밈없는 명문(銘文)을 청합니다.”
하였다. 내가 비록 늙었지만 의리상 감히 사양할 수 없어서 이미 이상과 같이 서술하고 또 명(銘)을 짓는다. 명은 다음과 같다.
선비는 항상 재주가 부족하여 / 士常患才輇
그 뜻을 펴지 못할까 근심하고 / 不能讐其志
항상 때를 만나지 못하여 / 常患不遇時
시행하지 못할까 근심한다네 / 不能有所施
이공으로 말하면 / 若李公者
재주가 이미 크고 / 才旣大矣
때도 만났으며 / 時亦遇矣
벼슬길도 열렸다네 / 進塗闢矣
요직이 아주 가까이 있었는데 / 進執洪樞實咫尺矣
허망하게 누가 그 수명을 빨리도 앗아갔나 / 芒乎孰敓其壽之速邪
한 지방을 다스리는 데 그치고 다 발휘하지 못했으니 / 局於一方之治而不咸
아, 우리 임금님 조정에서 탄식한 이유는 이 때문이었지 / 繄我后之臨朝咄唶者以此
자신이 다 누리지 않고 / 不贏其躬
후손을 이루어주는 것도 / 以成後人
하늘의 도이니 / 亦天之道兮
마땅히 자손들이 잇달아 고관에 오르리라 / 宜爾子孫之軒冕繼軌
[주-D001] 감사 이공 신도비명 : 이 글은 이창정(李昌庭, 1573~1625)의 신도비명이다. 이창정의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중번(仲蕃), 호는 화음무구옹(華陰無求翁)이다.[주-D002] 부친 …… 공 : 이주(李澍)를 가리킨다.[주-D003] 악려(堊廬) : 악실(堊室)과 여막(廬幕)으로 거상하는 곳을 가리킨다. 악실은 상제(喪制)가 연제(練祭) 이후에 거처하는 곳이다. 《禮記 雜記》[주-D004] 표리(表裏) : 옷의 겉감과 안감을 가리킨다.[주-D005] 의주 부윤(義州府尹) …… 때문이다 : 《광해군일기》 10년(1618) 3월 13일 기사에 이와 관련된 기사가 보이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진사 이건원(李乾元) 등이 상소하여, “진강의 유격 구탄(丘坦)이 중강(中江)에 개시(開市)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우리나라에 화를 내고 있으니 뒷날 반드시 우리를 무함할 소지가 있습니다. 이극신이 또 변방에서 화근을 만들어 진강으로 하여금 성을 쌓고 병력을 증강시켜 우리나라의 일에 대비하게 하였으니, 뒷날의 화는 필시 이보다 심할 것입니다. 변무(辨誣)하는 임무를 사은사(謝恩使)에게 맡겨 속히 진강에서 성 쌓는 일을 그만두게 함으로써 중국인들이 그 성을 가리켜 ‘몇 년도에 조선이 배반하려 하자 이 성을 쌓았다.’라는 말을 하지 못하게 하소서.” 하였다. 《光海君日記 10年 3月 13日》[주-D006] 조덕(趙德) : 소식(蘇軾)의 〈조주한문공묘비(潮州韓文公廟碑)〉에 “처음에 조주 사람들은 학문을 몰랐는데, 공이 진사 조덕에게 명하여 스승이 되게 하니, 이로부터 조주 선비들이 모두 문장과 덕행에 독실해져 일반 백성에게까지 영향이 미쳤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다스리기 쉽다고 알려져 있다.”라고 하였다.[주-D007] 공령(功令) : 과거시험에 쓰이는 시문을 말한다.[주-D008] 현송(絃誦) : 시(詩)를 전수하고 배울 때 현악(弦樂)에 맞추어 노래하는 것을 현가(弦歌)라 하고, 음악 없이 낭독하는 것을 송(誦)이라 하는데, 수업하고 송독(誦讀)하는 일을 가리킨다. 《禮記 文王世子》[주-D009] 세초(歲抄) : 해마다 6월과 12월에 죽거나 병들거나 도망간 군인을 조사하여 보충하던 것이다. 《銀臺條例 吏考 歲抄》[주-D010] 적들이 …… 것임 : 《사기(史記)》에 보인다. 위 혜왕(魏惠王)이 제 위왕(齊威王)에게 나라에 보물이 있는지 묻자, 위왕은 훌륭한 신하 4명을 거론하며 검부(黔夫)에게 서주(徐州)를 지키게 하였더니 연(燕)나라 사람은 북문에 제사하고 조(趙)나라 사람은 서문에 제사하고 옮겨서 따라온 자가 70여 집이라 하였다. 《史記 卷46 田敬仲完世家》[주-D011] 여헌가(呂獻可)의 기풍 : 헌가는 송(宋)나라 여회(呂誨)의 자인데, 당시 사람들이 그의 강직함을 인정하였다. 직간하기로 유명하여 재상 한기(韓琦)의 불충한 죄 5가지를 탄핵하고, 또 어사 범순인(范純仁), 여대방(呂大防)과 함께 구양수(歐陽脩)를 탄핵하였다. 왕안석(王安石)이 집정(執政)이 되자 당시에 인재를 얻었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여회는 중용할 인물이 아니라고 말하고 마침내 상소를 올려 그를 탄핵하였다. 사마광(司馬光)도 그의 선견지명에 탄복하여 스스로 그만 못하다고 하였다. 《宋史 卷321 呂誨列傳》[주-D012] 근원을 …… 없었다 : 원래는 학문과 공부가 경지에 오른 뒤에는 어떤 경우든 모두 이익을 얻는 것을 이르는데, 여기서는 마음먹은 대로 일이 순조롭게 되는 것을 형용한다. 맹자가 말하기를 “군자가 깊이 나아가기를 도(道)로써 함은 자득하고자 해서이니, 자득하면 거(居)함에 편안하고, 거함에 편안하면 이용함이 깊고, 이용함이 깊으면 좌우에서 취하여 씀에 그 근원을 만나게 된다.〔資之深, 則取之左右逢其原.〕 그러므로 군자는 자득하고자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孟子 離婁下》[주-D013] 세상 …… 못한다 : 한유(韓愈)의 〈송양거원소윤서(送楊巨源少尹序)〉에 보인다.[주-D014] 맥주(麥舟)의 은혜 : 부조하여 상(喪)을 돕는 것을 가리킨다. 송(宋)나라의 범순인(范純仁)이 보리 5백 섬을 배에 싣고 오다가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석만경(石曼卿)을 보고 그에게 보리를 주고 돌아왔다. 《冷齋夜話》[주-D015] 영무자(甯武子)의 우직함 : 《논어》에 “공자가 말하기를 ‘영무자는 나라에 도가 있을 때에는 지혜롭고 나라에 도가 없을 때에는 어리석었으니, 그 지혜는 따를 수 있으나 그 어리석음은 따를 수 없다.’라고 하였다.” 하였다. 《論語 公冶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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