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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그린 마일’이다. / 2019년 4월 28일 주일 예배
본문 / 야고보서 4:11-17
여러분은 인생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습니까? 누구나가 한 번쯤은 다 들어봤을 ‘하숙생’이란 노래에서 인생은 나그네 길이며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벌거숭이라고 말합니다. 인생을 하숙생이라고 정의한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남의 집에 잠간 머물다가 가는 손님이 하숙생 아닙니까?
세상 사람들도 인생을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구름 같은 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니 욕심 부리지 말고 착하게 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 14절에서도 야고보는 인생을 안개라고 정의하였습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말씀한 것입니다.
자욱한 안개는 한치 앞도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은 그 인생이 창창할 때는 짙은 안개와 같습니다. 거칠게 없고 두려울 게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짙은 안개도 태양이 떠오르면 서서히 옅어지고 어느 순간에 사라지고 맙니다. 지금 우리 인생 앞에도 태양이 떠오르고 있습니다. 그 빛으로 인하여 짙었던 우리의 인생도 촛불에 타들어가는 양초처럼 서서히 엷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시간이 조금만 더 흐르면 우리의 생명은 흔적도 없이 안개처럼 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 것입니다.
안개가 서서히 걷히면 앞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지금 여러분 인생에서 자욱했던 생명의 안개가 많이 걷히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 앞에 무엇이 보이기 시작합니까? 아직도 세상만 보이십니까?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세상 걱정만 하십니까? 남들보다 더 좋은 것을 갖고 있다고 안심하십니까? 그렇지 못하여 우울하고 낙담하고 있습니까? 이 좋은 세상에서 살 날이 줄어드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있습니까? 언젠가 떠날 것을 생각을 하니 두렵습니까? 아직도 이 세상을 기대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인생에서 생명의 안개가 그 정도로 걷히었으면 이제는 오직 하나님 나라만 보여야 믿음입니다. 마라톤 선수들은 결승선이 눈앞에 보이면 마지막 남은 힘을 다 쏟아 붓습니다. 힘을 남겨놓지 않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그래야 할 때가 아닙니까? 생명의 안개는 거의 다 걷히고 인생의 결승선이 눈앞에 보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죽을힘을 다해 믿음으로 달릴 생각은 하지 않고 세상 걱정, 돈 걱정, 자식 걱정, 인생 걱정 그저 살 생각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죽을 생각만 하고 살려고 합니다. 살 생각만 하다 어느 날 죽는 사람들은 갑자기 찾아온 사망에 떨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죽을 생각을 하고 사는 사람들은 그 죽음조차도 환영하게 될 것입니다.
본문 1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너희가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도다.” 말씀합니다.
내일을 계획하고 인생을 사는 것은 세상을 사는 지혜입니다. 성실하고 정직하게 수고하여 이익을 얻고 생계를 유지하고 향상시키는 것도 하나님이 주신 인생입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인간의 치명적인 한계를 지적합니다. 인생을 열심히 사는 것은 좋다. 우리는 자기 인생을 성실하게 가꾸어야 한다. 그런데 너 내일 어떻게 될지 알고 있니? 라고 묻습니다.
사람들아! 너희는 내일을 알지 못하는 인생들이다! 라는 말씀은 성도들아, 내일은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는 것을 알고 사니? 라는 말씀입니다. 내일은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는 것을 알고 인생을 살라는 것입니다. 인생을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아야하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말씀합니다. 바울 자신도 복음을 전파하는 목회에도 열심을 내었지만 자기 생계를 스스로 책임지기 위해 일도 열심히 하였습니다.
인생을 규모 없이 게으르게 사는 것은 죄입니다. 그러면 열심히만 살면 됩니까? 열심히 사는 사람들은 죽는 줄도 모르고 열심을 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말입니다. 타락한 인생들은 자신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순교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일하지 않고 게으른 것도 자신을 위한 것이고 죽어라 일만하는 것도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방법만 다를 뿐이지 내일을 알지 못하는 인간은 오직 자신을 위해 오늘을 살다가 내일에는 멸망으로 가는 것입니다. 열심히 일한다고 게으른 사람 욕하지 마십시오. 내일을 모르고 사는 인생이라면 다 똑같은 자아숭배자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4장에서 물로 심판을 받았던 노아 시대의 인생들의 그 모습이 앞으로 종말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동일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말씀합니다.
인생들은 내일 세상의 종말이 와도 죽을 때까지 자기 자신을 위해 인생을 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종말이 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지금까지 나를 위해 수고했던 일들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내가 그렇게 아끼던 집도, 의지하던 돈도, 남편과 아내와 부모의 자리도, 딴 사람의 것이 되고 맙니다. 자식은 내 것 같습니까? 착각하지 마십시오. 이 세상에 내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내일을 알지 못하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사실 우리는 내일만 모르는 것이 아니라 오늘도 알지 못합니다. 오늘을 아시는 분도 내일을 아시는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오늘이건 내일이건 인생을 만드신 하나님을 모시고 인생을 살라는 것입니다. 오늘 네 인생에 하나님 없으면 너는 꽝이라는 겁니다. 네 인생에 하나님이 없으면 너는 쭉정이고 껍데기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그 쭉정이들을 불에 던져버리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일은 하나님을 모셔야지. 이런 어리석은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내일부터 열심을 내서 하나님을 섬겨야지 하지 마십시오. 오늘 하나님과 함께 해야 합니다. 내일은 안 올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1999년 미국에서 개봉한 ‘그린 마일’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의 배경은 1935년 미국 남부에 있는 한 교도소입니다. 그 교도소에 어린 여자아이 둘을 살해하였다는 누명을 쓰고 들어온 한 흑인 사형수와 한 백인 교도관의 우정과 인간애를 그리는 작품입니다.
‘그린 마일’은 사형수가 감방에서 나와서 전기의자가 있는 사형 집행장까지 걸어가는 녹색으로 된 복도의 길과 거리를 가리키는 은어입니다. 시상식이나 각종 행사에서 참석자를 맞이하기 위해 행사장까지 들어가는 길에 깔아놓은 붉은 색 길을 레드 카펫이라고 합니다. 레드 카펫은 사람들의 환영을 받으며 걷는 길입니다. 그러나 ‘그린 마일’을 걷는다는 것은 전기의자에 앉는 날로 인생의 종말을 의미합니다.
교도관은 감방에서 사형수들을 데리고 ‘그린 마일’을 통해 사형 집행장까지 인도하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우리 인생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그린 마일’을 걷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한 번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이 사형수인데 지금 교도관이 여러분들을 감방에서 ‘그린 마일’로 불러냈습니다. ‘그린 마일’을 얼마나 걷겠습니까? 겨우 일이 분 걸으면 끝이 납니다. 이 세상을 사는 우리 인생이 그렇게 짧은 것입니다. 사형 집행실의 전기의자에 앉을 때까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모든 인생은 다 사형수입니다. 우리는 다 죽어야 하잖아요. 하나님은 의인은 단 하나도 없다고 판결을 내리셨습니다. 인간은 사형수로 세상에 내려온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내려와 지금까지 사형 집행장이 있는 ‘그린 마일’을 걸어온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아시고 인생을 사셨습니까? 내 인생이 ‘그린 마일’을 걸으며 사형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모르고 사니까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내 인생이 사형 집행장으로 가는 ‘그린 마일’을 걸어가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보십시오. 어떻겠습니까?
도축장으로 가는 소들을 보셨습니까? 그것을 보면 정말 불쌍해서 고기 먹기 힘듭니다. 그 짐승들이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영원한 지옥 불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짐승들도 ‘그린 마일’을 가고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면 버팅기고 저항하고 울부짖고 눈물을 흘리며 두려워합니다.
사형 집행장으로 가는 사형수들 중에는 형 집행실로 가는 도중에 실신하는 사람도 있다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겁에 질려서 자기 두 발로 걷지도 못하고 질질 끌려간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두려움에 미친 듯이 소리 지르고 온갖 저주와 욕을 퍼붓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교도소 밖에 있는 타락한 이 사형수들은 지금 자신이 ‘그린 마일’을 걷고 있다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마귀가 ‘그린 마일’을 걷는 동안 눈을 가려놓았기 때문입니다. 집으로 가던 어린 아이들이 나쁜 사람의 친절과 먹을 것에 쉽게 유인당하여 가야할 곳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사탄은 인생들을 타락한 세상으로 유인하여 ‘그린 마일’을 걷고 있다는 사실을 잊게 하고 아무런 준비도 없이 전기의자에 앉게 만드는 것입니다. 어린아이 같은 인생들은 입에 달콤한 사탕을 주며 그 자아만 숭배해주면 전기의자에 털썩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영광으로 그 정욕과 탐심을 숭배해주면 타락한 인생들은 영원한 심판의 의자에 두려움 없이 웃으며 올라가는 것입니다. 오싹하지 않습니까? 돼지도 눈치가 뻔해서 도축장으로 가는 차에 타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트럭으로 올라가는 길에 먹을 것을 깔아 놓으면 그 식탐 때문에 사망의 두려움을 잊고 맙니다.
사람들이 소나 돼지를 정욕과 탐심으로 유혹하여 조종하는 것처럼 사탄은 타락한 인생들이 걸어가는 ‘그린 마일’에 정욕과 탐심을 미혹하는 이 세상의 각종 영광을 다 깔아 놓고는 사형 집행실로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인생들은 돈 버는 재미, 일하는 재미, 자식 섬기는 재미, 노후 준비하는 재미, 돈 쓰고 다니는 재미, 먹는 재미, 여행하는 재미, 수다 떠는 재미, 운동 술 마약 도박하는 재미, 호색하는 재미, 정치하는 재미, 스포츠 보는 재미, 공부하는 재미, 인기스타를 섬기는 재미, 핸드폰하는 재미, 게임하는 재미, 드라마 보는 재미, 외모 꾸미는 재미 등 육체의 정욕과 탐심을 자극하는 모든 것으로 유혹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또 반대로 어떤 사람들에게는 재미가 아니라 고통을 주어 절망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요즘 인생들의 우상은 재미입니다. 재미를 쫓다가 전기의자에 앉는 줄도 모르는 게 어리석은 인생들입니다. 그런데 전기의자에 앉는 순간 재미는 끝이 나고 영원한 고통이 시작됩니다. 재미없으면 말씀도 안 듣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설교자들도 재미있게 설교해서 웃게 만들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재미입니까? 자아숭배입니까? 언제부터 영혼을 죽이고 살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인생을 웃겨야 되는 재미가 된 것입니까?
본문 16절에서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말씀합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자랑합니까? 무슨 재미로 사십니까? 타락한 육적자아를 숭배하기 위한 이 세상의 영광과 재미와 즐거움은 다 허탄한 것이다 말씀합니다. 거짓된 것이라 믿을 수 없는 것이라 말씀합니다.
이 세상의 영광과 힘과 가치와 명예와 인기와 음란으로 유혹하면 버틸 사람이 없습니다. 사탄은 교회 안에도 엄청난 미혹으로 역사하고 있습니다. 성도들 중에는 진리보다는 불의를, 십자가의 복음보다는 자아를 숭배하는 다른 복음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질주의와 기복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율법주의로 성도들을 미혹하여 자아숭배자로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린 마일’을 걸어가는 인생의 길에서 간교하게 역사하는 사탄의 미혹을 알게 되면 왜 존 번연이 천로역정에서 시장을 통과하는 순례자들이 귀를 막고 하늘을 바라보며 울면서 기도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심정을 이해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말씀한 것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은 정말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게 본능입니다. 넘어질 때 손을 내밀지 않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환자들은 검증되지 않은 신약의 부작용도 두려워하지 않고 임상 실험 대상이 되길 원합니다. 그것이 더 살고 싶은 육체의 본능이지만 그러나 인간의 육체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길은 없습니다. 어차피 인간은 죽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서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 말씀하신 것이 타락한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실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망의 ‘그린 마일’을 지나 심판으로 나아가는 인생들에게 아주 놀랍고 기쁜 소식을 주셨습니다. 비록 전기의자에 앉아 그 육체는 죽을 지라도 그 영혼은 구원을 받아 하나님 나라에서 안식을 누리며 그 육체까지 사망을 이기고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여 영원히 왕 노릇할 것이라는 복음입니다.
이 놀라운 기적이 어떻게 일어난 것입니까? 이것은 인간의 능력과 행위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내린 사형선고가 취소됩니까? 어떻게 사형장으로 가는 그 길에서 죄인이 의인이 될 수 있는 겁니까? 어떻게 사망에서 생명으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영원한 고통에서 영원한 안식으로 바뀔 수 있느냐는 겁니다. 전기의자가 기다리는 그 ‘그린 마일’을 가는 도중에 말입니다. 그 사형수가 무엇을 했다고 말입니다. 그 사형수가 무엇을 할 수나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 사형수로 내려온 인생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은 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사형수들의 죄를 대속하고 사면하기위해 예수님이 죄인들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사형수가 되어 십자가에서 심판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죄인들의 모든 죄를 모두 속량해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대속의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며 주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 1절에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말씀합니다. 할렐루야! 아멘!
여러분은 사형장으로 가던 소망 없는 ‘그린 마일’에서 구원의 기쁜 소식을 들으셨습니까?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으십니까?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리라.” 믿는 자들아! 죽음의 의자에 앉아도 너는 다시 살 것이다!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들의 십자가로 인생들의 죄를 대속하시고 그 아들을 믿는 사형수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에서 예수님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예수님의 재림을 보지 못한다면 성도는 언젠가는 죽음의 의자에 앉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의 죽음은 사망과 심판이 아닙니다. 성도는 자기 죄를 대속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의지하는 믿음으로 인하여 이미 죄를 영원히 사면 받은 의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예수의 피로 씻어낸 죄악을 기억도 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1장 18절에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말씀합니다. 내가 너희들을 긍휼이 여기고 너희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십자가의 은혜로 죄를 사면 받은 성도는 담대하게 죽음의 의자에 앉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모르고 어떤 은혜를 찾는단 말입니까? 이것보다 더 큰 기적이 있습니까? 이 놀라운 복을 받지 못하고 어떤 복을 구한단 말입니까? 주님이 왜 ‘그린 마일’을 걷는 성도들에게 너희들은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 구하지 말라고 하셨겠습니까? 네 육신을 위해 이 세상의 것을 구하지 말하고 하셨습니다.
자신을 위해 살던 그 타락한 자아숭배에서 구원받아 하나님을 위해 믿음으로 사는 거룩한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육체를 위해 이 세상의 것을 구하는 자들은 ‘그린 마일’에서 사면을 받지 못하고 마귀의 미혹에 속아 사형장으로 가는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린 마일’에서 죄를 사면 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말씀하신 겁니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린 마일’을 걸을 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것 구하지 말고 너는 오직 십자가의 은혜로 사면 받은 그 믿음을 가지고 모든 것을 내게 맡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에 속한 자로 이 세상을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할 것이 무엇인지 그런 것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그린 마일’에서 죄를 사면 받은 성도는 오직 믿음을 행함으로 자기의 의인됨을 증거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성도들 중에는 행함이 없는 믿음으로 자신을 속이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형장으로 가는 길에서 사면 받은 의인이 정욕과 탐심으로 살며, 재물을 의지하며, 가난한 자를 돌보지 않고, 교만하며, 다투고, 시기하고, 비방하고, 헐뜯고, 정죄하고 판단하며, 미워하고, 용서하지 못하며,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고, 간음하고, 세상의 영광과 명예를 사랑하며, 선을 행하지 않으며, 허탄한 자랑이나 하며, 두 마음을 품을 수 있느냐는 겁니다. 그들은 사면 받지 못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이라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그린 마일’에서 죄를 사면 받은 의인입니까? 여러분 안에 사면해 주신 그리스도가 계십니까? 믿음으로 살지 못하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구원의 능력이 없는 죽은 믿음입니다. 죽음의 의자에 앉는 순간 영원한 고통으로 떨어집니다. 그러나 은혜를 믿음으로 사면 받은 성도는 사면해 주신 주님의 은혜로만 사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믿음으로 사는 것이 ‘그린 마일’에서 사면 받은 성도의 인생입니다.
지금 모든 인생들은 ‘그린 마일’을 지나 사망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십자가의 은혜로 사면을 받은 사람입니다. 지금은 다 같아 보이지만 사망 앞에 섰을 때에 하나님은 ‘이 사람은 내 아들의 피로 사면을 받은 내 백성이다!’ 선포하십니다. 주님의 보혈로 사면을 받은 성도는 이제는 주님의 것이 되었기에 죽으나 사나 무슨 일을 만나든지 믿음으로만 사는 것입니다.
사면해 주신 은혜와 믿음으로 살고 있습니까? 인생의 ‘그린 마일’에서 믿음을 배우고 믿음으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십자가로 우리를 사면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