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천안 UBF 오요한 목자의 성경 66권 강해서 원문보기 글쓴이: 말씀 선생
에스라 8장 강해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움을 받은 에스라
에스라 8장 1-36
에스라 8장 18우리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고
에스라 8장 강해 끝입니다.
에스라는 레위인을 찾고 안전하게 성물을 옮기는데 겸손히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선한 손으로 도와주셔서 에스라의 이차귀환은 이루어집니다.
(에스라와 함께 온 지도자들)
1-14절을 보십시오. “아닥사스다 왕이 왕위에 있을 때에 나와 함께 바벨론에서 올라온 족장들과 그들의 계보는 이러하니라 비느하스 자손 중에서는 게르솜이요 이다말 자손 중에서는 다니엘이요 다윗 자손 중에서는 핫두스요 스가냐 자손 곧 바로스 자손 중에서는 스가랴니 그와 함께 족보에 기록된 남자가 백오십 명이요 바핫모압 자손 중에서는 스라히야의 아들 엘여호에내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이백 명이요 스가냐 자손 중에서는 야하시엘의 아들이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삼백 명이요 아딘 자손 중에서는 요나단의 아들 에벳이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오십 명이요 . 엘람 자손 중에서는 아달리야의 아들 여사야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칠십 명이요 스바댜 자손 중에서는 미가엘의 아들 스바댜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팔십 명이요 요압 자손 중에서는 여히엘의 아들 오바댜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이백십팔 명이요 슬로밋 자손 중에서는 요시뱌의 아들이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백육십 명이요 베배 자손 중에서는 베배의 아들 스가랴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이십팔 명이요 아스갓 자손 중에서는 학가단의 아들 요하난이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백십 명이요 아도니감 자손 중에 나중된 자의 이름은 엘리벨렛과 여우엘과 스마야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육십 명이요 비그왜 자손 중에서는 우대와 사붓이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칠십 명이었느니라“ 아닥사스다 왕이 위에 있을 때에 스가랴와 함께 바벨론에서 올라온 족장들의 계보를 기록합니다. 본장 1절에서 14절까지는 에스라와 함께 귀환한 제2차 귀환민의 수효입니다. 이 수효는 제1차 귀환민의 사람과(2:3-63) 비교하면 불과 1/3 가량에 불과합니다. 4-14절에 나오는 가족명들은 요압 자손을 제외하고는 2:3-15에 모두 나옵니다. 본문의 명단은 두 명의 제사장 명단과 다윗의 후손 이름으로 시작하는 특징을 보여줍니다(2절). 반면에 2장에서는 제사장 가계가 나중에 언급됩니다. 족장은 그들의 조상들의 족장이라는 문자적 의미가 있습니다. 계보는 세다 혹은 등록하다의 뜻이 있는 동사의 재귀적 강의형 부정사입니다. 따라서 스스로 등록한 것이란 의미입니다. 비누하스는 아론의 손자요(대상 6:3, 4) 엘르아살의 아들(대상 6:4)로서, 아론의 대제사장직을 아비 엘르아살을 거쳐서 인계받았던 인물입니다(7:5). 따라서 이 사람의 자손은 보다 정통성있는 제사장 가문으로 자처할 수 있었습니다. 게르솜은 피난처의 뜻입니다. 이 사람은 한 제사장 가문의 우두머리였던 것같습니다. 이다말은 아론의 말째 아들입니다(대상 6:3). 그의 후손은 정통성에 있어서 비느하스 가문보다는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다말의 후손인 엘리는 대제사장 및 사사로서 그 명성을 날렸습니다(삼상 1:3). 그러나 엘리의 두 아들의 범죄로 말미암아 다윗과 솔로몬 초기의 아비아달을 끝으로 그 가문에서는 더 이상 대제사장이 나오지 못했습니다(왕상 2:26, 27, 35). 다니엘은 하나님의 재판관의 뜻입니다. 다니엘서의 저자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다윗 자손은 유다 왕가를 형성했던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들 중 제1차로 귀환했던 사람 가운데 대표적 인물로는 스룹바벨이었습니다(1:8 2:2). 핫두스는 대상 3:19-22에 따르면 스룹바벨의 4대 손입니다. 만일 스룹바벨이 B.C. 560년 경에 태어났다고 하고 한 세대를 약 25년으로 잡는다면, 핫두스는 스룹바벨로부터 4대째이므로 그가 B.C. 458년에 에스라와 함께 왔다는 사실은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일백 오십 명은 바로스 자손 중 바벨론 생활을 청산하고 유다로 귀환하려고 자청한자의 숫자입니다. 스라히야는 여호와는 뛰어나시다의 뜻입니다. 엘여호에내는- 내 눈이 여호와를 향한다의 뜻입니다. 스가냐 자손은 칠십인역에 근거하여 삿두 자손 스가냐가 잘못 표기된 것으로 봅니다. 야하시엘은 하나님께서 보신다라는 뜻입니다. 에벳은 종이라는 뜻으로서 하나님의 종이라는 의미를 갖는 아브디엘의 약칭인 듯합니다. 아달리야는- 여호와는 존귀하시다의 뜻입니다. 여사야는 여호와께서 구원하셨다의 의미입니다. 미가엘은 누가 하나님과 같은가?라는 뜻입니다. 요압 자손은 제1차 귀환에는 참여치 않은 듯합니다. 요압은 여호와는 아버지이시다의 뜻입니다. 여히엘은 하나님이여 영원 무궁 하옵소서의 뜻입니다. 오바댜는 여호와의 종이라는 뜻입니다. 슬로밋 자손은 대부분의 학자들이 이것을 바니의 자손 슬로밋으로 봅니다. 그 근거는 칠십인역이 이 같은 견해를 지지합니다. 최초 귀환자들 중에 바니 자손이 있으며(2:10), 4-12절의 귀환자 명단이 모두 조상의 이름, 가족의 대표 이름, 그대표의 아버지 이름 등 세 요소가 함께 나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슬로밋은 평화로움의 뜻입니다. 요시뱌는 여호와께서 더하심의 뜻입니다. 학가단은 작은이란 뜻입니다. 요하난은 여호와께서 사랑하심이란 뜻입니다. 아도니감은 나의 주께서 일어나셨다의 의미입니다(2:13). 나중 된 자은 오래 머물다의 뜻을 갖는 동사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뒤에 처져 남아 있었던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여기의 나중 된 자는 아도니감 자손에 속한 가족들 중 마지막으로 에스라와 함께 팔레스틴으로 귀환한 가족의 우두머리를 가리킬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아도니감 자손은 한 가족도 빠짐없이 전체가 팔레스틴으로 귀환했습니다. 엘리벨렛 은 구원의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여우엘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심이란 뜻입니다. 스마야는 여호와께서 들으셨다의 뜻입니다. 우대는 돕는의 뜻입니다. 사붓은 주어진의 뜻입니다.
(레위 사람을 부름)
15절을 보십시오. “내가 무리를 아하와로 흐르는 강 가에 모으고 거기서 삼 일 동안 장막에 머물며 백성과 제사장들을 살핀즉 그 중에 레위 자손이 한 사람도 없는지라 이에 모든 족장 곧 엘리에셀과 아리엘과 스마야와 엘라단과 야립과 엘라단과 나단과 스가랴와 므술람을 부르고 또 명철한 사람 요야립과 엘라단을 불러 가시뱌 지방으로 보내어 그 곳 족장 잇도에게 나아가게 하고 잇도와 그의 형제 곧 가시뱌 지방에 사는 느디님 사람들에게 할 말을 일러 주고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섬길 자를 데리고 오라 하였더니” 스가랴가 무리를 아하와로 흐르는 강 가에 모았습니다. 거기서 삼일 동안 장막에 머물며 백성과 제사장을 살폈습니다. 그 중에 레위 자손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에스라는 모든 족장을 부르고 명철한 사람을 불러 가시바 지방의 잇도에게 나가게 하였습니다. 느다딤 사람들에게 부탁을 하여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섬길 레위인을 데리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아하와로 흐르는 강가는 동쪽으로부터 흘러와서 유프라테스 강으로 들어가던 지류(支流)입니다. 이 지류가 유프라테스 강과 만나는 곳에 아하와란 마을이 있었습니다. 현재는 그 강이 이스 강이란 명칭으로 불리워집니다. 아무튼 이 강가는 유대인이 많이 모여살고 있었던 닙불과 매우 가까운 곳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에스라가 삼 일 동안 장막에 유(留)한 것은 팔레스틴으로 귀환하려던 사람들이 광야 여행길에 충분히 대비하고 있었음을 잘 보여줍니다. 느헤미야도 예루살렘에 도착한 지 사흘이 지난 후에 성벽 시찰에 나섰습니다(느 2:11). 레위 자손들의 업무가 너무도 고통스러우리만큼 과중했기 때문에 그들은 고국행을 포기했을 것입니다. 제1차 귀환 때의 귀환자 명단에는 상당수의 레위인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2:40-42). 그렇다면 여기서 에스라가 레위인들을 급히 데려오도록 한 것은 효율적인 성전 봉사에 대한 고려와 아울러 귀환 대열에 레위인들을 소수이나마 참여시킴으로써 어떤 상징적 의의를 부여하고자 함이었습니다. 모든 족장 불렀다고 할 때 원문에는 모든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본절의 족장은 적절치 못한 번역입니다. 족장들의 명단을 보면 이들이 결코 가족들의 대표가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2-14절). 여기의 족장은 다만 레위인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만큼 영향력 있는 인물들, 즉 지도자로 보아야 합니다. 물론 이들 중에 한 가족의 우두머리가 포함되어 있었을 가능성은 배제될 수 없습니다(13절). 엘리에셀은 도움의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아리엘은 하나님의 사자(獅子)의 뜻입니다. 엘라단은 하나님은 주시는 분이란 뜻입니다. 야립은 그가 다툴 것이다의 뜻입니다. 나단은 주어진이란 뜻입니다. 스가랴는 여호와께서 기억하셨다의 뜻입니다. 므술람은 동행한의 뜻입니다. 명철한 사람은 분별하다 혹은 이해하다의 뜻을 갖는 동사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분별력 및 이해력을 소유한 율법 교사를 가리킬 것입니다(느 8:8, 9). 요야립은 여호와께서 아심이란 뜻입니다. 가시뱌 지방으로 보냈는데 가시뱌는 은장색의 뜻을 갖는 어근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이 고장은 원래 은세공이 발달했던 곳으로 추측될 만합니다. 지방은 문자적으로 그 장소의 뜻입니다. 이것은 (1) 단어 앞에 그의 뜻을 갖는 정관사가 붙어있다는 사실, (2) 마콤이란 단어가 구약 성경에서는 하나님께 예배드려지던 성소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단어(신 12:5, 11 14:23 왕상 8:29 렘7:3, 6, 7)라는 사실 등 때문에 특별한 의미를 갖는 말로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상당수가 주거하던 곳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간과치 말아야 할 것은, 이 마콤이란 단어가 유대 문헌에서는 율법을 가르치는 곳으로서의 회당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가시뱌에는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지도하며 간단한 예배 의식이 거행되던 기관이 있었다는 추측도 가능합니다. 그곳 족장 잇도는 학개의 조상 잇도와는 뜻이 전혀 다른 이름입니다. 그 의미는 고상한 혹은 강력한 입니다. 이 사람은 가시뱌에서는 상당한 영향력을 가졌던 인물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잇도와 그 형제...느디님 사람은 느디님 사람을 또 다른 의미인 임명된 자들인 것으로 보고 잇도와 그 형제, 즉 임명된 자들이라고 해석해야 합니다. 할 말을 일러주고는 문자적으로 그들의 입에 할 말을 두었다 의 뜻입니다. 수종들 자는 섬기다, 봉사하다의 뜻을 동사의 분사로서, 성전 제사와 관련된 직무의 수행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대상 16:4 27:1).
18-20절을 보십시오. “우리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고 그들이 이스라엘의 손자 레위의 아들 말리의 자손 중에서 한 명철한 사람을 데려오고 또 세레뱌와 그의 아들들과 형제 십팔 명과 하사뱌와 므라리 자손 중 여사야와 그의 형제와 그의 아들들 이십 명을 데려오고 다윗과 방백들이 레위 사람들을 섬기라고 준 느디님 사람 중 성전 일꾼은 이백이십 명이었는데 그들은 모두 지명 받은 이들이었더라” 에스라는 하나님 여호와의 손의 도우심을 얻었습니다. 그들이 레위 자손 중에 말리의 자손 중에서 명철한 자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 외에 지명 받은 성전 일꾼을 데리고 왔습니다. 이스라엘의 손자, 레위의 아들이라고 불러 에스라가 특별히 야곱을 이스라엘이라고 한 까닭은 에스라서와 함께 에스라가 기록한 역대상의 족보와 조화를 이루며(대상 2:1), 그 이름이 갖는 특별한 의미(창 32:24-29)를 상기케 함으로 본절에서의 성과가 철저하게 하나님의 축복임을 강조하려는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말리의 자손 중에서 명철한 자를 데려오라고 할 때 말리는 레위의 아들 중 셋째(말째)였던 므라리의 장자로서 성전의 기구를 책임지던 가족의 조상이 되었습니다(민 4:31-33). 다른 곳에서는 마흘리라는 이름으로 나옵니다(출 6:19 대상 23:21 24:26). 그 이름의 뜻은 병든 입니다. 아무튼 말리의 자손 중이라는 말은 잇도가 데려온 레위인들이 하나님의 전을 섬기는 데 완전한 적격자임을 보여줍니다. 그가 데려온 명철한 사람에서 명철한 사람은 종교적 의미의 지혜나 분별력 그리고 그것의 적응 능력을 지닌 사람을 뜻합니다. NIV는 유능한 사람(capable man)으로 번역했습니다. 세레뱌는 분명치는 않지만 여호와께서 열(熱)을 보내셨다 의 뜻입니다. 이 사람은 성전의 용기 및 도구를 관리했으며(24절,에스드라상 8:47, 54), 에스라의 율법 교육 사업에 적극 참여하였습니다(느 8:7 9:4, 5 10:12). 우리 말 번역은 분명히 밝혀주지 못하고 있지만 이 사람은 말리의 자손임이 확실합니다. 므라리 자손 중에서는 므라리의 전체 후손 중 므라리의 장자인 말리의 후손을 뺀 나머지를 가리킵니다. 말리의 동생 무시의 후손들을 말합니다(대상 6:19). 므라리는 레위의 셋째 아들이었습니다(대상 6:16). 다윗과 방백들이 주어...수종들게 한 느디딤 사람은 다윗은 레위인들의 반차를 정하면서(대상 23-26장), 그때 그 레위인들에게 느디님 사람들을 배정해줬던 것 같습니다. 방백은 군사 혹은 정치 분야 등에 있어서의 책임자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단어로서 특별히 여기서는 군사 지도자를 가리킵니다. 이들은 전쟁을 통해 이방인들을 포로로 데려와서 그들을 느디님 사람들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느디님 사람 중 이백 이십 명과같이 많은 숫자는 바벨론 땅에 계속 잔류를 고집해왔던 레위인들을 팔레스틴으로 귀환토록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을 것입니다. 레위인들이 귀환을 거부한 주된 이유 중의 하나가 과중한 고역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이 같은 결과는 지극히 자연스럽습니다. 느디님 사람 중에서 성전 일꾼이라는 말은 느디님 사람들이 성전 봉사에 참여할 수 있을만한 자격자들임을 시사해주는 말입니다. 레위인을 포함하여 259명이 모였습니다.
(에스라가 안전을 위해서 금식 기도함)
21을 보십시오 “그 때에 내가 아하와 강 가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우리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여 우리와 우리 어린 아이와 모든 소유를 위하여 평탄한 길을 그에게 간구하였으니” 그때에 스가랴가 아하와 강가에서 금식을 선포하였습니다. 우리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여 우리와 아이와 모든 소유를 위하여 평탄한 길을 간구하였습니다. 구약 성경은 보통 금식을 기도와 함께 언급합니다(삼상 7:5,6 대하 20:3-13 에 4:16). 금식은 말할 나위도 없이 특별한 문제 혹은 위기의 극복을 위해 시행되곤 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한 것은 에스라 일행이 하나님께 기도 및 금식을 하면서 가졌던 영적 태도입니다. 스스로 겸비하여 는 괴로움을 당하다 혹은 낮추다 등의 의미가 있는 동사의 재귀적 사역형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자신을 학대하듯이 적극적으로 낮추어서 어떤 인물 혹은 절대자에 대해서 지극히 순종적 자세를 견지하는 것을 말합니다(창16:9 왕상 2:26 시 107:17 단 10:12). 어린 것은 문자적으로 조그만 어린이이나 본절에서는 보다 광의적으로 해석하여 여자와 노인 그리고 어린이까지로 보아야 합니다. 평탄한 길은 문자적으로 곧은 길의 의미입니다(사 40:3, 4). 그러나 이것은 안전한 길이라는 의미입니다(NIV). 고대에는 길을 지키고 있다가 약탈을 일삼는(31절) 무리들이 꽤많았다고 합니다.
22,23절을 보십시오. “이는 우리가 전에 왕에게 아뢰기를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내리신다 하였으므로 길에서 적군을 막고 우리를 도울 보병과 마병을 왕에게 구하기를 부끄러워 하였음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를 위하여 금식하며 우리 하나님께 간구하였더니 그의 응낙하심을 입었느니라” 스가랴가 전에 왕에게 아뢰기를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신을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 권능과 진노를 내리신다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지켜 주심을 믿기 때문에 길에서 적군을 막고 그들을 도울 보병과 마병을 왕에게 구하기를 부끄러워하였습니다. 찾는...자에게 선을...배반하는...자에게는...진노를 베푸시는 하나님은 성경의 주된 사상 중의 하나입니다(대하 15:2 롬 2:6-10). 길에서 적군을 막고 우리를 도울 - 많은 은금을 소유했고 또한 유약자들을 동반했던 에스라의 일행에게 있어 매복해 있을 도적 떼는 큰 위협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에스라는 자신의 귀환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이루어진 것임을 확신하였으므로, 위험한 귀환 여정을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만 의지하여 감행하고자 결단했습니다. 적어도 에스라에게 있어서는, 거룩한 목적을 지니고 귀환하면서 이방의 왕에게 의존한다는 것이 수치스럽게 여겨졌을 것입니다. 느헤미야의 경우는 바사 군대의 호위를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간주하고 기꺼이 수락하였습니다(느 2:7-9). 우리는 이 사실만으로써 에스라의 믿음이 느헤미야의 믿음보다 우월하다고 단정지어서는 안 됩니다. 페르시아 왕의 도움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것은 각자의 관점과 강조점의 차이에서 기인한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스가랴가 이를 위하여 금식하며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간구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느헤미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적들에서 보호하여주셨습니다.
(성물을 안전하게 관리함)
24-27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내가 제사장의 우두머리들 중 열두 명 곧 세레뱌와 하사뱌와 그의 형제 열 명을 따로 세우고 그들에게 왕과 모사들과 방백들과 또 그 곳에 있는 이스라엘 무리가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드린 은과 금과 그릇들을 달아서 주었으니 내가 달아서 그들 손에 준 것은 은이 육백오십 달란트요 은 그릇이 백 달란트요 금이 백 달란트며 또 금잔이 스무 개라 그 무게는 천 다릭이요 또 아름답고 빛나 금 같이 보배로운 놋 그릇이 두 개라” 그때에 에스라가 제사장의 우두머리들 중에 열두 명을 따로 세웠습니다. 24절부터 30절까지는 아하와 강가를 떠나기 위한 준비 과정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제사장...십 이 인 곧 세레뱌와 하사뱌 는 제사장...십 이 인과 세레뱌 및 하사뱌로 고쳐야 맞습니다. 만일 한글 개역을 그대로 따른다면, 세레뱌와 하사뱌는 제사장이 되는 셈입니다. 그러나 세레뱌와 하사뱌는 레위인임이 분명합니다(18절). 제사장과 형제를 따로 세우고 에서 따로 세우고 는 나누다 혹은 구별하다의 뜻을 갖는 동사의 사역형으로서, 본질적 차이가 있으나 합해져있는 둘을 완전히 가르는 것을 가리킵니다(창 1:14 레 10:10 신 10:8 대상 25:1). 특히 따로 세우고는 제의적(祭儀的) 맥락에서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여기서 에스라가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함께 구별시킨 이유는 제사장들은 거룩한 물건들을 취급하는 책임자라는 점에서, 한편 레위인들은 그것들을 운반하는 등의 부수적 업무를 담당해야하는 책임자라는 점에서 함께 구별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적어도 에스라는 율법 학자였기 때문에, 이런 규정들을 익히 알고 있었고 또한 그대로 시행하고 있었습니다(7:10). 제사장과 레위인들에게 이스라엘 무리가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드린 은과 금과 그릇들을 달아서 주었습니다. 스가랴가 그들에게 은과 금과 그릇들의 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언급되는 은금에는 바벨론 사람들로부터 얻은 것도 포함되어 있을 것입니다(7:16). 그곳에 있는 이스라엘 무리는 에스라와 함께 팔레스틴으로 돌아오지 아니한 유대인들을 가리킵니다. 그때에 상당수의 유대인들이 바벨론 및 페르시아 땅에 남아 있었습니다(에9:30). 그들이 드린 에서 드린 은 올리다 혹은 높이다의 뜻이 있는 동사의 사역형 분사로서, 높은 곳에 물건을 올려놓는 것이나 높은 사람에게 예물을 바치는 행위를 표현하는 단어입니다(레 2:9 민 18:30, 32 대하35:8). 은이 육백 오십 달란트는 약 8.5톤입니다. 은 기명이 일백 달란트는 3.75톤으로 봅니다. 환산의 비율이 확실하지 않아 오늘날의 추정 기준으로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대단히 많은 양이었음에는 분명합니다. 금잔...이십 개...일천 다릭에서 금잔은 성전에서 사용되던 금기명이 아닙니다(7:20). 한편 일천 다릭은 영화(英貨) 약 11,000파운드 정도에 해당합니다(2:69). 아름답고 빛나 금같이 보배로운 놋그릇은 무엇을 가리키는 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그러나 학자들은 이것을 구리와 아연의 합금인 황동으로 만들어진 그릇으로 생각합니다.
28-30절을 보십시오.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여호와께 거룩한 자요 이 그릇들도 거룩하고 그 은과 금은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즐거이 드린 예물이니 너희는 예루살렘 여호와의 성전 골방에 이르러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의 우두머리들과 이스라엘의 족장들 앞에서 이 그릇을 달기까지 삼가 지키라 이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은과 금과 그릇을 예루살렘 우리 하나님의 성전으로 가져가려 하여 그 무게대로 받으니라” 스가랴가 그들에게 너희는 여호와께 거룩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 그릇들도 거룩합니다. 은과 금은 여호와께 즐거이 드린 예물입니다. 여호와께 거룩한 자는 제사장 및 레위인들이 특별히 일반 백성들과 구별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바쳐진 신분임을 가리킵니다(출 29:1 39:30 레21:6 민 3:12, 13). 여기의 거룩한은 봉헌하다 혹은 구별하다 등의 뜻을 갖는 동사에서 온 형용사로서, 하나님께 특별히 바쳐짐으로써 인간들에 의해 함부로 다뤄질 수 없게끔 된 상태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은과 금은...드린 예물이니에서 은과 금도 거룩히 구별되었음을 말해주는 한 표현입니다. 이런 거룩성은 거룩히 구별된 제사장 및 레위인만이 그것들을 다뤄야하는 분명한 이유입니다. 그들은 이것을 하나님의 성전에 가져가서 제사장들과 레위사람들과 이스라엘 족장 앞에서 달기까지 조심하여 지켜야합니다.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성전에 가져가기 위해서 무게대로 그것을 받았습니다. 여호와의 전 골방에서 달기까지 지카라고 하였을 때 골방은 성전의 건물 양편에 위치한 방들로서 한 쪽에는 제사장들이 쓰는 방이, 그 반대 편에는 창고가 있었습니다.(왕상 6:15 느 13:5). 제사장의 두목이 단다고 하였을 때 두목은 책임자를 의미합니다(단 1:7). 그렇다면 제사장의 두목은 제사장의 업무를 총괄적으로 감독하던 제사장을 가리킵니다(33절). 이스라엘 족장은 이스라엘의 우두머리라는 뜻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삼가지키라고 할 때 삼가지키는 것은 깨어라 그리고 지키라의 의미입니다. 이같이 해야 할 이유는 행로 중에 도적을 맞거나 혹은 탐심에 사로잡힌 유대인들이 야심한 틈을 타 훔쳐가는 것을 막아야 할 필요성 때문이었습니다. 이 예물들은 귀환 여행의 마감 시점에 이르러 재차 점검되고 계수되었습니다(34절).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하나님께 바쳐진 물건들을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일에 대한 책임을 떠맡는 등 에스라의 명령에 순종하고 있음을 의도적으로 보여줍니다. 운반에 관한 총체적 책임은 제사장들에게 있지만, 이 일은 실제적으로 레위인들에 의해 담당되었습니다(24절)
(안전하게 예루살렘에 도착함)
31절을 보십시오. “첫째 달 십이 일에 우리가 아하와 강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갈새 우리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도우사 대적과 길에 매복한 자의 손에서 건지신지라” 첫째 달 십이일에 스가랴 일행은 아하와 강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그들이 기도한 대로 우리 하나님의 손이 그들을 도우사 대적과 길에 매복한 자의 손에서 건지셨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때 아하와 강가를 집결지로 삼아 정월 초하루에 거기에 모였었습니다(7:9). 그들은 거기서 삼일간 인원을 파악하던 중 레위인들이 한 사람도 없음이 밝혀지자 그들을 불러오는 등의 일에 9일을 소비하고 12일에 그 강가에서 출발할 수 있었습니다. 대적에서 건지셨다는 말은 구하다 혹은 찾다 등의 뜻을 갖는 동사의 사역형으로서, 악인들의 무리에게 사로잡혀 있는 상태에서 구출하거나 위기일발의 위급한 재앙의 상태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적극적 행위를가리킵니다(창 32:11 삼상 12:10 시 25:20 렘 22:3).
(성물을 안전하게 전달함)
32-34절을 보십시오. “이에 예루살렘에 이르러 거기서 삼 일 간 머물고 제사일에 우리 하나님의 성전에서 은과 금과 그릇을 달아서 제사장 우리아의 아들 므레못의 손에 넘기니 비느하스의 아들 엘르아살과 레위 사람 예수아의 아들 요사밧과 빈누이의 아들 노아댜가 함께 있어 모든 것을 다 세고 달아 보고 그 무게의 총량을 그 때에 기록하였느니라” 그들은 예루살렘에 이르러 거기 삼일 간 머물렀습니다. 유하고는 좌정하다 혹은 안식하다의 뜻을 갖는 동사의 파생형입니다. 에스라 일행이 먼길의 여행 후 몸과 마음의 휴식 기간을 가졌습니다. 제 사일에 하나님의 성전에서 은과 금과 그릇을 달아서 제사장 므레못의 손에 넘겼습니다. 느 3:4, 21에서는 학고스의 손자 우리아의 아들 므레못으로 나옵니다. 2:61에 따르면 학고스 자손들은 자신들의 혈통을 증명치 못함으로 해서 제사장 직분의 수행이 유보되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여기서는 그 후손들이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하고 있음을 볼 때, 그들이 자신들이 제사장의 후예임을 증명하는 데에 마침내 성공했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우리아는 여호와는 빛이시다의 뜻이고 므레못은 거만이란 뜻입니다. 제사장 엘르아살과 레위 사람 요사밧과 레위 사람 노이다가 함께 있어 모든 것을 다 세고 달아보았습니다. 요사밧은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에서 율법책의 뜻을 해석하여 백성을 깨닫게 하는 역할의 담당자(느 8:7)요 이방 여인을 취하여 율법을 범한 자요(10:23)요 하나님의 전 바깥 일을 받은 자(느 11:16) 등으로 묘사됩니다. 요사밧이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주신다 입니다 그 무게의 총량을 기록하였습니다. 빈누이는 헤나닷의 아들로서 예루살렘의 성벽 한 부분을 중수한 책임자였습니다(느 3:24). 그 이름의 뜻은 세워진 입니다. 노아댜는 여호와께서 자신을 계시하셨다라는 뜻입니다. 물품 인수의 실질 책임자는 므레못이었고 다른 사람들은 다만 입회인이었습니다. 34절은 내부 및 외부의 도적을 만나지 않음으로써(29절), 일체의 물품 손실이 없었음을 보여줍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의 손이 에스라의 일행에게 함께했다는 사실(31절)을 보여줍니다. 당장에 책에 기록한 것은 성전 재산의 도난 및 횡령 방지를 목적으로 한 것입니다. 에스라는 어쩌면 그 물품 목록을 아닥사스다 왕에게 보내서 모든 물품들이 제대로 인계되었음을 증명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예배드림)
35,36절을 보십시오.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 곧 이방에서 돌아온 자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는데 이스라엘 전체를 위한 수송아지가 열두 마리요 또 숫양이 아흔여섯 마리요 어린 양이 일흔일곱 마리요 또 속죄제의 숫염소가 열두 마리니 모두 여호와께 드린 번제물이라 무리가 또 왕의 조서를 왕의 총독들과 유브라데 강 건너편 총독들에게 넘겨 주매 그들이 백성과 하나님의 성전을 도왔느니라”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습니다. 사로 잡혔던은 제거하다 혹은 이동하다를 뜻하는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해외로의 추방 사실 자체 및 그렇게 된 자를 가리킵니다. 이 단어는 구약 성경 중 왕하 24:15에서부터 나오기 시작하여 모두 약 41회 나오는데 거의 대부분이 바벨론에 의해 유대인들이 포로로 끌려간 사건과 직접 관련되어 사용됩니다. 이 말은 포로가 된 유대인 및 그 사건을 지칭하는 고유 명사로 이해됩니다. 이스라엘 전제를 위한 수송아지와 숫양과 어린 양을 드렸습니다. 번제는 하나님께서 여행을 안전하게 마칠 수 있도록 해주신 데 대한 감사하고 여행 직전에 있었을 수도 있는 서원의 이행하고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는 헌신 등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또 이스라엘 전체를 위해 속죄제를 위하여 숫염소를 드렸는데 이 모든 것은 다 태워서 드렸습니다. 에스라와 함께 온 새로운 귀환자들이 금번 제사의 주관자들이 되었습니다. 최초의 귀환자들도 바벨론에서 귀환한 직후 이 같은 제사를 드렸었습니다(3:3 6:17). 수송아지는 차라리 황소로 봄이더 타당합니다(창 32:15 렘 50-27). 열 둘은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상징하는 숫자입니다(6:17). 수양이 아흔 여섯은 매 지파당 여섯 마리씩에 해당되는 수효입니다. 어린 양이 일흔 일곱 은 수량의 많음을 강조하기 위한 숫자적 표현입니다. 속죄제는 포로지에서의 신실하지 못했던 삶을 회개하며, 또 그 죄악들을 사함받기 위해 드려졌을 것입니다. 모두...번제물이라는 것은 실제적으로는 속죄제의 제물까지를 포함합니다. 그런데도 번제물이라고 한 까닭은, 하나님께 바친 제물의 대부분이 번제의 제물이기 때문입니다. 무리가 왕의 조서를 총독에게 주니 그들이 성전의 일을 도왔습니다. 왕의 조서는 에스라와 그 일행을 도우라는 명령(7:20-26)을 말합니다. 왕의 관원은 그야말로 총독이라고 번역될 수 있는, 상당히 광활한 정복 지역을 왕을 대신하여 다스리는 관리를 가리킵니다 이 단어는 최고급의 관리를 뜻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 말이 히브리 원문상 복수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여기의 총독들이 유프라테스 강 서편의 총독 한사람과 애굽을 다스리던 총독 등 두 명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관원을 왕의 관원이라고 한 것은, 앞의 왕의 조서와 조화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 관원이 왕의명령을 그대로 이행해야 할 신분임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 때문입니다. 총독들들은 적은 지역을 다스리던 지방 관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6:6). 그들이 도와서 왕의 명령(7:20-26)이 그대로 이행되었습니다. 도왔느니라는 높이다 혹온 주다의 뜻을 갖는 동사의 강조형으로서, 그들은 어떤 물질 등을 제공함으로써 성전 예배가 권위를 회복하고 원활히 지속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이 있어서 그들을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에스라 8장 강해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움을 받은 에스라
에스라 8장 1-36
에스라 8장 18우리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고
에스라 8장 강해 끝입니다.
|
출처: 천안 UBF 오요한 목자의 성경 66권 강해서 원문보기 글쓴이: 말씀 선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