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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렬하게 진노하시는 하나님
예레미야애가 2장 1-10절
하나님께서는 항상 자기 백성의 편에서 일하십니다. 항상 당신 편일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입니다. 우리가 어느 편에 서느냐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우리 편이 될 수도 있고, 적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은 하나님을 공경한다면서도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은 부패된 신앙과 영적인 흑암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진노의 막대기로 치십니다. 하나님의 보호와 돌봄을 받기 위해서는 항상 하나님의 편에 서 있어야 합니다. 항상 주님과 동행하는 힘찬 발걸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때론 예상하지 못한 어려움을 만날 수 있지만, 믿음의 눈으로 해석하고 하나님의 의미를 찾는 날이 되길 바랍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2장에서도 1장에서처럼 알파벳순으로 이루고 있습니다. 2장은 시온과 하나님의 백성이 받는 재앙이 예루살렘을 파괴하고 황폐하게 하는 일에 하나님께서 앞장섭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은 결코 정치적, 군사적 패배가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이었음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이전까지는 선지자와 예루살렘이 탄식의 마음을 토로했다면, 이제 하나님의 분노의 감정이 전면에 드러납니다. 본 장에서는 하나님의 불같은 진노와 분노에 온 유다가 통곡합니다.
시온에 진노를 내리신 하나님(1-3)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반대로 잘못하면 원수가 되시기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배반하고 반대편에 설 때, 보호의 손길을 거두시고 진노의 손길로 우리를 대하십니다. 지금 하나님을 적과 원수로 만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편에 서시길 바랍니다.
1슬프다 주께서 어찌 그리 진노하사 딸 시온을 구름으로 덮으셨는가 이스라엘의 아름다움을 하늘에서 땅에 던지셨음이여 그의 진노의 날에 그의 발판을 기억하지 아니하셨도다 2주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들을 삼키시고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셨음이여 노하사 딸 유다의 견고한 성채들을 허물어 땅에 엎으시고 나라와 그 지도자들을 욕되게 하셨도다 3맹렬한 진노로 이스라엘의 모든 뿔을 자르셨음이여 원수 앞에서 그의 오른손을 뒤로 거두어 들이시고 맹렬한 불이 사방으로 불사름 같이 야곱을 불사르셨도다(1-3)
선지자 예레미야는 1장에서 예루살렘의 멸망한 후 그 참상을 탄식하였습니다. 아무도 그들을 위로해 줄 사람이 없었고, 주변 나라들은 바벨론의 침공할 때 도와서 이스라엘의 멸망을 재촉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2장에서도 하나님의 은총을 잃어버린 예루살렘의 모습에서 시작합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그들의 죄악 때문이었다고 말씀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 성은 절대로 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었습니다. 예레미야애가는 1장에 이어서 탄식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시편 탄식시는 탄식하다 마지막에 회복이나 기대에 대한 신뢰 고백으로 끝을 맺지만, 예레미야애가는 거의 대부분 탄식으로만 끝납니다. 계속적으로 예루살렘의 참상을 반복해서 말하는데, 단적으로 그만큼 얼마나 힘든 상태인지를 보여준 것입니다.
⑴ 아름다운 성전을 파괴하심(1)
선지자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자기가 사랑했던 예루살렘을 얼마나 철저하게 징계 하셨는지를 설명합니다. ‘슬프다’라는 ‘에카(הכיא)’로 시작합니다. 이 단어는 장송곡의 분위기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처음을 ‘주께서 어찌 그리 진노하사’(1)라고 시작하고, ‘여호와께 진노하시는 날에는’(22)으로 마칩니다. 본 장의 핵심 주제가 ‘여호와의 진노’라는 것을 잘 드러냅니다. 한 가지 잊어서는 안 되는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복도 허락해 주시지만 반대로 재앙도 내리신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2장에서는 화법(話法)을 3인칭 화자로 등장시켜 예루살렘과 거리를 두고 상황을 설명합니다. 선지자는 예루살렘을 상징하는 ‘땅 시온’, ‘이스라엘의 아름다움’이란 두 가지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전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기뻐하사 자신을 친구처럼 나타냈습니다. 하지만 이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진노하셨다는 점입니다. 진노하심의 첫 번째 징계는 ‘딸 시온을 구름으로 덮으셨는가?’(1)는 것입니다. ‘구름’은 출애굽기에서 광야를 행진할 때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성막을 짓거나 성전을 지었을 때도 여호와의 임재를 상징으로 구름이 성전과 성막을 덮었습니다. 이제는 구름이 여호와의 심판을 상징으로 변했고, 성전에는 여호와의 심판을 상징하는 구름으로 덮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예루살렘의 아름다움을 하늘에서 땅에 던지셨음이여!’라고, 심판의 구름이 임하자 아름다운 예루살렘 성전은 철저히 파괴되었습니다. 그 짓밟힌 아름다움이 예루살렘 성 전체로 확장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영광을 땅에 던져 완전히 비참한 상황으로 만드셨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그의 발판’은 기본적으로 언약궤를 나타내지만, 여기서는 확대되어 언약궤가 있었던 시온 전체를 상징합니다. 성전과 언약궤만 있으면 안전하리라는 이스라엘의 신학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궤가 있는 예루살렘 성마저 버리셨습니다. 심판은 하늘에서 땅으로 던지셨습니다. 언약은 깨어졌고 기억에서 사라졌습니다. 사람들도 기억하고 싶지 않는 사건들이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배신과 거짓으로 가득한 이스라엘을 기억하고 싶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매우 강력한 표현들을 사용하여 이스라엘의 파멸과 몰락을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무자비하게 다루셨습니다.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토록 미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언약을 맺지 않았다면 그토록 잔인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망각의 하나님께서는 무서운 분이십니다. 마치 치매에 걸린 부모님이 자녀를 타인으로 대한 것처럼, 그 동안 관계를 잊으시고 무자비한 심판으로 매우 잔인하게 다루셨습니다.
⑵ 견고한 성벽까지도 파괴하심(2)
이전에 이스라엘은 매우 융성하여 근처 나라들보다 강력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반대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먼저 스스로 욕되게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긍휼히 여기지 않고, 그대로 방치해서 두셨습니다. 그 결과 야곱의 성읍인 예루살렘은 바벨론에 의해 정복당한 것입니다. 난공불락의 견고한 성채들도 무너졌습니다. 특히 예루살렘의 강함을 ‘도성’, ‘성벽’, ‘망대’, ‘성문’, ‘빗장’ 등으로 다양하게 묘사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강력한 요새들도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긍휼을 거두시자 견고한 성이 잿더미로 변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발등상이며 이스라엘의 영광인 성전도 돌보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발판인 언약궤까지 원수들에게 빼앗기고 짓밟히게 하셨습니다. 그날에는 나라 전제와 지도자들도 수치를 당했습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긍휼을 떠난 사람들을 많이 소개합니다. 가인은 범죄한 후 여호와 앞을 떠나서 먼저 한 일은 성을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그 성의 이름을 ‘에녹성’, 즉 ‘선생’이라고 불렀습니다(창세기 4:17-18). 가인은 자신이 왕으로 군림 하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성은 자기 방어와 보호 본능에서 나온 불신의 벽이었습니다. 그 성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안전한 장소가 결코 될 수 없었습니다. 노아 홍수 후 바벨탑을 쌓은 것도 홍수와 같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기 위한 안전 대책이었습니다(창세기 11:1-9). 사람들은 오늘도 자신의 안전을 위하여 끊임없이 성을 쌓습니다. 전혀 안전 조치가 불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기지 않는 안전은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성도들은 이 세상을 안전하게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아가는 것이 성도들의 목적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안전을 추구하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안전은커녕 파멸과 멸망을 맛보고 말았습니다.
⑶ 이스라엘의 능력을 제거하심(3)
다음으로 선지자는 여호와의 진노가 ‘이스라엘의 모든 뿔을 자르셨음이여’라고 소개합니다. 여기서 ‘뿔’은 힘과 권능을 상징하고, 오른손도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잘랐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모든 힘과 권위 그리고 왕권을 거두어 가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오른손’은 원래 하나님의 백성을 돕던 손길이지만, 이제는 원수들 앞에서 그 손을 거두십니다. 더 어려운 것은 하나님의 돕는 손길마저 없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을 돕지 않은 것뿐만 아니라 야곱을 불살라 버리셨습니다. 모든 것을 태우며 아무 것도 남기지 않는 불 심판으로 야곱은 흔적도 찾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더 충격적인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원수가 되신 것입니다. 예레미야애가는 일관되게 하나님께서 얼굴을 돌리신 것을 말씀하십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불의에 눈감는 것은 사랑이 아니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자신의 불의로 타인이 고통을 당하는 것을 못 본척하면서 사랑하신 분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시자 예루살렘은 너무 쉽게 무너졌습니다. 친히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이신 성전도 돌보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보다 성전과 법궤를 우상화한 이들을 향한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결과입니다(예레미야 3:16). 자신의 죄와 하나님의 진노의 심각성을 무디게 하는데 십자가의 사랑을 이용한다면 십자가마저 수단과 우상으로 전락할 것입니다.
시온의 원수가 되신 여호와(4-5)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맹목적인 사랑을 약속하신 적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원하면 언제든 하나님의 능력과 긍휼을 사용할 수 있다고 하신 적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백성을 이길 수 있는 세력은 없습니다. 하지만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원수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자신 밖에 없습니다.
4원수 같이 그의 활을 당기고 대적처럼 그의 오른손을 들고 서서 눈에 드는 아름다운 모든 사람을 죽이셨음이여 딸 시온의 장막에 그의 노를 불처럼 쏟으셨도다 5주께서 원수 같이 되어 이스라엘을 삼키셨음이여 그 모든 궁궐들을 삼키셨고 견고한 성들을 무너뜨리사 딸 유다에 근심과 애통을 더하셨도다(4-5)
이 단락의 핵심은 ‘원수 같이’라는 표현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원수와 대적으로 등장합니다. 아무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하나님이라고, 그분의 역사가 기억나지 않을 만큼 혹독하게 심판하십니다.
⑴ 진노의 불을 내리신 하나님(4)
하나님께서는 자녀와 같았던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지키셨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이스라엘 배신의 결과 ‘원수 같이’와 여기신 것입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을 보호하시던 그의 오른손을 거두셨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의 대적에게 향할 손으로 활을 잡으시고 이제 반대로 이스라엘을 향해 유다에게 활을 쏘셨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을 지키던 여호와의 오른손이 이제는 분노를 불처럼 일으키며 딸인 시온의 장막 위에 쏟고 계셨습니다. 예레미야서에서 선지자는 ‘주를 알지 못하는 이방 사람들과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아니하는 족속들에게 주의 분노를 부으소서 그들은 야곱을 씹어 삼켜 멸하고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였나이다 하니라’(10:25)라고, 야곱을 삼킨 이방인에게 내려달라고 요청한 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진노의 불을 열방이 아닌 야곱에게 쏟아놓으셨습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향해 인내하셨고, 하나님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⑵ 애통을 더하게 하신 하나님(5)
이전에 예루살렘과 유다의 다른 성읍들은 견고하고 요새화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의 원수가 되어 진노하사 그들을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이곳에서 ‘삼키다’란 반복적으로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여호와께서 유다 땅을 철저히 파괴하셨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마치 삼킨 것처럼 파괴되었습니다. 과거에 이스라엘은 환란과 적에 공격에 대하여 위풍당당한 성들이었습니다. 이러한 궁궐과 성들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시는 성이기 때문에 절대적인 성으로 무너질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궁궐과 성들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두부가 깨어지듯 손쉽게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로 딸인 유다는 슬픔과 애통에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시온 성전을 허무신 여호와(6-7)
이스라엘에게는 역설과 모순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버리면 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멸망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면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우상까지도 불태워지는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호하신 막을 거두시면 더 이상 안전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을 망각했던 것입니다.
6주께서 그의 초막을 동산처럼 헐어 버리시며 그의 절기를 폐하셨도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절기와 안식일을 잊어버리게 하시며 그가 진노하사 왕과 제사장을 멸시하셨도다 7여호와께서 또 자기 제단을 버리시며 자기 성소를 미워하시며 궁전의 성벽들을 원수의 손에 넘기셨으매 그들이 여호와의 전에서 떠들기를 절기의 날과 같이 하였도다(6-7)
하나님께서는 작정하신 몇몇 사람을 데려가서 천국에 채우시려는 분은 아니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하나님을 닮은 자, 하나님처럼 사랑하는 자만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나라를 사모하지 않는 이스라엘은 하나님 나라도 그리고 하나님 성전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지키는 절기와 제사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성전 파괴와 절기를 폐하신 모습을 묘사합니다.
⑴ 절기를 폐하신 하나님(6)
이스라엘은 이전에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지켜 행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 중에 거룩한 임재의 표시를 남겨 놓으셨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면서 아름답게 해주시던 것들이 사라졌습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초막’은 이스라엘이 절기를 지킬 때 하나님을 만나는 곳으로 임시 거처(居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을 무지막지한 힘으로 파괴하시고, 흔적도 남지 않은 동산처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이곳은 더 이상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완전하게 파괴시킨 것입니다. 좀 더 확장시켜 이해하면 이스라엘과의 만나는 절기를 흔적도 없이 만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께 드리는 절기도 폐하신 것입니다. 다시 반복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시온에서의 절기와 안식일을 잊어버리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포로로 끌려가고,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어 시온에서 더 이상 절기와 안식일을 지킬 수 없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여호와는 맹렬한 진노를 내려 왕과 제사장들이 큰 치욕을 당하도록 버려두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치고 지키길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런 역할을 온전히 못하고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그들의 영적인 권위와 제사를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책임은 일반 백성들의 책임보다 무거웠습니다.
⑵ 제사를 거부하신 하나님(7)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제단을 버리시고 자신의 성소를 미워하셨다고 합니다. ‘제단을 버렸다’는 것은 ‘거부하였다’는 뜻입니다. 선지자는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이유를 여호와가 제단을 거부하시고 미워하셨기 때문으로 해석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망하기 직전에 예루살렘 성에서는 각종 이방 신들을 위한 제의가 행해졌으며, 죄 지은 손과 피 흘린 손으로 부정한 제사를 드리는 경우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종교와 관련된 모든 날과 상징물들이 모두 파괴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성전, 초막, 절기와 안식일, 제단, 성벽, 성문, 왕과 대신들, 예언자들, 장로들 등 모든 종교 제도들을 파괴하시고, 가장 거룩한 지성소마저 원수들의 손에 넘겨주셨습니다. 또한 궁전의 성벽도 원수의 손에 넘기셨다고 표현하는데, 이는 전쟁의 맥락에서 ‘ ~를 ~의 손에 넘겨준다.’라는 말이 승리를 약속하는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언제나 이 약속을 듣고 전쟁에 나가 승리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여호와는 원수와 손잡고 그들의 손에 성벽을 넘겨주십니다. 원수들은 여호와의 전에서 승리를 축하하며 잔치를 열고 떠들썩하게 먹고 마십니다. 그 모습에서 마치 예전에 절기의 축제를 즐기던 이스라엘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그러면서 씁쓸하고 가슴 아픈 풍경에 애통해합니다. 성도들에게 가장 비참한 결과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불행과 고난도 하나님과 함께하면 소망이 있습니다. 아직은 끝이 아니라 붙잡을 수 있는 기회가 있고 힘차게 날아오를 순간이 있습니다. 하지만 물질이 풍부하고 염려할 것이 전혀 없으며 모든 일들이 형통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떠나셨다면 절망의 시간입니다. 왜냐하면 그곳에 더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정한 인간들의 종교적인 행위만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왕과 대신들을 포로로 잡아갔으며,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백성들에게 성막이나 절기와 안식일, 제단 그리고 왕이나 제사장도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모든 것이 더러워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대하신 것은 자기만족을 위해 종교행위가 아니라 자기 백성들과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화해의 제단을 버려졌습니다. 각종 번제물을 드림으로 용서와 기회는 사라졌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지성소에 거하지 않습니다.
시온 성벽을 허무신 여호와(8-10)
지금은 교회들이 고난을 받는 시대입니다. 예레미야 시대처럼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고난은 아닐지라도 교회들이 직간접적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습니다. 이것은 스스로 잘못된 행동들을 통해 부끄러움을 자초한 것이며 그로 인해 영적인 능력을 잃은 힘겨운 시대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들이 고난당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떤 자세를 취해야 살아가야 합니까?
8여호와께서 딸 시온의 성벽을 헐기로 결심하시고 줄을 띠고 무너뜨리는 일에서 손을 거두지 아니하사 성벽과 성곽으로 통곡하게 하셨으매 그들이 함께 쇠하였도다 9성문이 땅에 묻히며 빗장이 부서져 파괴되고 왕과 지도자들이 율법 없는 이방인들 가운데에 있으며 그 성의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묵시를 받지 못하는도다 10딸 시온의 장로들이 땅에 앉아 잠잠하고 티끌을 머리에 덮어쓰고 굵은 베를 허리에 둘렀음이여 예루살렘 처녀들은 머리를 땅에 숙였도다(8-10)
선지자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모습을 계속해서 기록합니다. 이제 아름답고 견고했던 성벽이 허물어지는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후손들에게 죄악의 결과가 얼마나 참혹한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장면을 후손들이 잊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⑴ 성벽을 파괴하신 하나님(8)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벽을 헐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아름다운 성전을 허무셨던 여호와께서 이제는 이스라엘의 보호 장치인 예루살렘 성벽들마저 허무십니다. 이 장면은 매우 자세하게 나타나는데, 성벽을 헐기로 결심하신 하나님께서 줄을 띠십니다. 여기서 줄은 ‘다림줄’을 의미합니다. 원래 다림줄은 집이나 건물을 지을 때 주로 반듯하게 세우는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성벽을 허무실 때 다림줄로 측량하며 매우 계획적이고 정밀하게 파괴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성벽을 허무는 일에서 손을 거두지 않고 부지런히 계획한 일을 실행하신다고 고백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역을 보며 성벽과 성곽은 통곡합니다. 여기서 성벽과 성곽을 다시 의인화하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성벽의 무너짐을 바라보는 예루살렘 사람들의 심정을 표현한 것입니다.
⑵ 말씀이 사라지도록 만드신 하나님(9)
이스라엘에 점점 비참한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성문은 넘어져 땅에 묻히고 문빗장은 부서져 파괴되었습니다. 이것은 예루살렘 성이 완전히 파괴되어 더 이상 예루살렘 사람들을 지켜줄 것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침략 속에서 왕과 제사장은 이방인의 나라로 끌려가고, 그 성의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묵시를 받지 못합니다. 이미 하나님의 인내와 자비의 시간이 지났기 때문입니다. 이전에 많은 예언자들을 통해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제 하나님은 더 이상 말씀하시지 않고 행동으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⑶ 장례식처럼 심판하신 하나님(10)
이런 재앙에 대한 반응으로 장로들은 애도하며 침묵하고, 예루살렘의 처녀들은 땅에 머리를 대고 엎드립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으로 위로를 받을 곳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모습을 선지자는 마치 장례식장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모습으로 묘사합니다. 이것은 깊은 슬픔과 절망에 망연자실한 모습입니다. 장로와 처녀라는 대조되는 묘사는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이런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에게 예배와 안식은 하나님의 백성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과 영광이며 거룩으로 단장하는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느새 예배는 짐이 되고 안식일은 지겨운 시간이 되었습니다. 영광과 거룩을 버리고 쾌락과 탐심을 추구하는 세속인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이 싫었습니다. 말씀은 구속과 억압의 상징이었고 자기 죽음은 멍청한 짓이며 섬김과 헌신은 열정을 강조하는 노동 착취이며, 복음을 위해 권리를 포기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며, 복음만이 진리라고 외치는 것은 미개인이나 하는 수준 낮은 것이라고 치부해버렸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멸시하고서 무사한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묵시를 외면한 백성들의 성인 예루살렘을 하나님께서 원수들과 함께 직접 파괴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 없는 그들의 유희를 통곡으로 바꾸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맹렬한 심판을 하셨습니다. 그들을 너무도 사랑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직접 치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히브리서 12:8)라고 하였습니다. 징계를 통한 주의 부르심에 겸손히 돌아가야 합니다. 지금은 회개하고 돌아갈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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