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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의 그늘 / 장시백
“애인 있습니까?”
“예, 있습니다.”
“애인 이름이 뭡니까?”
“혜정입니다.”
“좋습니다. 애인 이름을 세 번 부르고 뛰어내립니다.”
“혜정아, 혜정아, 혜정아!”
선우는 조교 앞에서 헬기래펠 훈련을 받고 있었다. 헬기래펠은 공중기동훈련의 일환으로 적진으로 침투하기 위해서 완전무장을 하고 헬기에서 뛰어내리는 하강훈련이다. 태양이 이글거리는 성하의 날씨에 흘린 땀이 군복을 적시고, 얼굴에 허옇게 달라붙은 소금을 수없이 털어내야만 하는 매우 혹독한 훈련이다. 그러나 선우는 즐거웠다. 이제 훈련의 막바지로 이틀 후면 대대장 앞에서 훈련시범을 한다. 그러면 모든 훈련의 과정이 끝나게 되고, 훈련에 참가한 부대원 중에 시범요원은 포상휴가를 가게 되기 때문이다. 선우는 혜정의 이름을 목청껏 세 번 외치고 나서 모형헬기에서 아래로 힘차게 발을 내디뎠다. 그런데 큰 실수를 했다. 뛰어내리면서 중심을 잃어 몸이 앞으로 지나치게 쏠렸기 때문에 왼손을 뻗어 땅바닥을 짚었다.
“으악.”
선우는 비명을 질렀다. 땅바닥을 짚은 손의 충격이 심해 팔꿈치 뼈가 빠져서 뒤로 튀어나왔다. 너무 아파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소리만 질러댔고 지켜보던 분대장이 달려와서 선우를 부축하여 의무대로 데려갔다.
선우는 왼쪽 팔에 깁스하였고 야간 점호 시간이 되자 소대장이 내무반에 들어왔다.
“이선우!”
“네, 일병 이선우!”
“넌 이번 포상휴가에서 제외된다. 규율에 따라 부상병은 휴가를 나갈 수 없다.”
갑자기 앞이 캄캄해졌다. 그런 규율이 있는 줄도 몰랐다. 야간 점호가 끝나고 취침시간에도 잠이 오지 않았다. 선우의 눈앞에는 혜정의 얼굴이 밤새도록 아른거렸고 얼굴을 덮은 모포는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선우와 혜정은 같은 중학교에 다녔다. 2학년 겨울방학 직전에 복도에서 마주친 혜정의 모습에 선우는 불면증이 생겼다. 휴대전화는커녕 기계식전화기도 동네에서 이장 댁에만 있었던 시절, 선우는 긴긴 겨울밤을 하얗게 지새우며 편지를 썼고 또 찢어버리기를 수십 번, 그러다가 겨울방학이 다 지나가고 말았다. 학교에서는 틈만 나면 혜정의 교실을 기웃거렸고, 학교에서 끝나면 몰래 혜정의 뒤를 따라가다가 혜정이 집으로 들어가는걸 보고나서 제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혜정의 뒤를 밟다가 들켜버렸다.
“너 뭐하는 놈이냐? 왜 내 동생 뒤를 몰래 따라다녀?”
혜정이보다 두 살 더 먹은 혜정의 오빠였다.
“너 우리 혜정이 꼬셔 보려고 그러나 본데, 조막만 한 놈이 벌써부터…….”
선우는 뒤통수를 얻어맞고 집으로 돌아갔고, 그날에도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등굣길에서 혜정이의 같은 반 친구 윤숙을 만났다. 윤숙은 선우와 같은 초등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서로 편한 사이다.
“윤숙아, 부탁 하나만 들어주라.”
“뭔데?”
“학교 끝나면 뚝방으로 혜정이를 좀 데려와 줘.”
“호호호, 너 혜정이 좋아한다며? 안 온다고 하면?”
“어떻게 좀 해봐.”
학교에서 읍내 방향으로 십오 분 정도 걸으면 뚝방길이 있다.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고 한적해서 조용히 고백하기에 좋은 장소라고 생각했다. 선우는 윤숙을 믿고 학교에서 나오자마자 혹시라도 혜정이보다 늦을까 봐 뚝방으로 달려갔다. 혜정이가 오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생각하며 삼십 분 정도 기다렸을까, 먼발치에서 혜정의 모습이 보였다. 가슴이 요동치기 시작했고 손과 발, 다리까지 후들거렸다. 다가오는 혜정의 모습은 당당하고 씩씩해 보였다.
“남자가 왜 그 모양이야? 말도 못하고.”
“아, 그게…….”
“됐고, 내가 지금 분명히 말하는데, 난 소심한 거 정말 싫어해. 그리고 우리 오빠가 때린 건 내가 대신 사과할게.”
그 후로 두 사람은 매일 만났고 빨리 친해졌다. 소심한 면이 있지만 만나기만 하면 너무 재미있게 해주는 선우가 혜정은 좋았다. 선우는 혜정의 뽀얀 얼굴과 애교 있는 말투를 좋아했다. 두 사람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도시에 있는 남고와 여고에 진학하게 됐는데 둘 다 학교에서 가까운 곳에 방을 얻어서 자취생활을 했다. 그 두 학교는 거리가 너무 멀어서 둘이 만나기는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그런데도 선우는 학교수업이 끝나면 곧바로 버스를 타고 삼십 분이 넘는 거리에 있는 혜정이 자취하는 동네로 갔다. 둘이 웃고 떠들다 보면 시간 가는 줄을 몰라서 마지막 버스를 놓치기가 일쑤였고, 한 시간이 넘는 거리를 선우는 밤마다 걸어가야 했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자 선우는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점점 혜정과의 만남이 줄어들었다. 혜정은 실업계 고등학교에 다녔고 졸업 후에는 취업할 계획이었다. 두 사람은 각각 대학 진학과 취업을 목표로 열심히 공부했다. 2년 후, 선우는 서울에 있는 대학에 들어갔고, 혜정은 대전에 있는 회사에 들어갔다. 전화기가 흔치 않았던 시절이라서 둘은 자주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사랑을 확인해갔다. 선우는 대학에서 운동권 선배들과 친해지면서 민주화를 외치는 시위에 적극 가담하였다. 결국은 주동자로 몰려서 체포되었고 군대에 자원하지 않으면 감옥살이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가면 편지 자주 해, 내가 꼭 면회 갈게.”
그러나 무슨 일인지 신병훈련소를 마치고 자대배치를 받으면 면회 온다던 혜정은 소식이 끊겼다. 틈이 날 때마다 편지를 써서 보냈는데도 답장은 단 한 번도 오지 않았다.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지만 혜정의 소식을 알아낼 방법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휴가 나가는 날을 그토록 간절히 기다려왔는데 부상으로 포상휴가를 나갈 수가 없게 되었던 것이다.
연병장 너머로 코스모스가 흐드러지게 피었고, 선우의 팔꿈치도 거의 회복되었다. 선우는 그 코스모스를 보며 걷다가 혜정생각에 빠져서 또 대열을 이탈했다.
“이선우, 똑바로 못 가나!”
소대를 인솔하는 분대장이 호통을 쳤다. 코스모스가 울창한 길을 지나면 사격장이 나오고, 그 사격장을 지나면 높은 산이 있다. 선우가 속한 소대는 그 산으로 싸리 빗자루 작업을 나가고 있었다. 전방에는 코스모스 꽃이 지고 나면 곧바로 겨울로 접어든다. 군대에서 월동준비로 중요한 일 중의 하나는 싸리비를 만드는 일이다. 떨어지는 낙엽과 끊임없이 내리는 눈도 치워야 되기 때문이다. 산에 오르자 분대장의 지휘대로 각자 싸리를 찾아 흩어졌고 선우도 열심히 싸리를 찾아내어 베었다.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고 잠시 앉아서 휴식을 취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싸리를 찾아 소대원들이 모두 흩어졌기 때문에 선우의 주변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바닷물을 담아놓은 듯 새파란 하늘과 능선 사이로 혜정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고 선우는 갑자기 일어나 능선을 향해 달리며 중얼거렸다.
“저 능선만 넘어가면 이 지긋지긋한 곳을 빠져나가서 혜정이를 찾을 수 있어.”
험한 산을 달리던 선우는 얼마 못 가서 주저앉았다. 고개를 떨구고 잠시 숨을 돌리더니 머리를 들어 올렸다. 조금 전에 보았던 능선 위 파란 하늘에 이번엔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선우는 머리를 좌우로 크게 흔들고 나서 급하게 싸리 빗자루 작업을 하던 곳으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소대원이 모두 집결해 있었고 분대장이 선우를 보고 소리쳤다.
“아, 정말 이 씨발 놈 때매 미치겠네. 어디 갔다 오냐?”
선우는 배가 아파서 볼일을 보고 왔다고 둘러댔다.
하얀 겨울이 되었고, 드디어 선우는 군대에서 첫 정기휴가를 나왔다. 도시의 겨울은 군대에서만큼 하얀 겨울은 아니었다. 대전에 있는 혜정의 주소에는 혜정이가 살고 있지 않았다. 이사 간 지가 일 년은 다 되어간다고 그 집의 주인이 말했다. 혜정의 소식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찾아보았으나 그녀의 소식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혜정이 살았던 읍내 시골집에도 찾아가 보았으나 그녀의 가족은 도시로 이사 갔다고 그 집 주변에 사는 이웃들이 말해주었다.
“오빠, 이제 그딴 거 잊어버려. 맘먹고 소식 끊은 사람이 찾는다고 돌아온대?”
여동생 선숙이 오빠를 위로하며 밤새도록 함께 술을 마셔줬고, 선우는 술에 취해 엉엉 울어댔다.
선우는 무사히 군 복무를 마치고 제대했다. 복학은 하지 않기로 했고 신림동 고시촌으로 들어갔다. 고시촌은 별천지였다. 고시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모인 동네라기엔 일부 관악산 아래를 제외하면 너무 화려하고 시끄러웠다. 그곳은 공무원준비생, 대학입시생, 직장인들이 뒤섞여서 밤새도록 술 마시며 노는 동네로 보였다. 선우는 관악산 바로 아래에 있는 조용한 고시원을 선택하여 공부에만 전념했다. 성공하는 것이 복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토록 오래도록 사랑했던 사람을 잊는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책 속에서 혜정의 얼굴이 보이기도 했고 산책하다가 혜정과 체형이 비슷한 여자의 뒷모습을 보면 가슴이 콩닥거리기도 했다. 혜정과 재밌게 놀다가 헤어지는 꿈을 꾸었을 때는 잠에서 깨어나 엉엉 울기도 했다. 아침저녁으로 관악산을 오르며 마음을 다잡고 노력했으나, 어느덧 사법고시 1차 시험에서 3번이나 떨어졌다. 체력은 점점 떨어졌고 잡념은 더욱 심해졌다. 더 자주 관악산에 올랐다. 산에 오르면 자주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다. 단발머리에 체구는 작았고 흰 운동복에 줄넘기를 허리에 두르고 나타나는 여자였다. 나이는 선우보다 다소 어려 보였다. 산에서 자주 마주치다 보니 어느새 서로 눈인사를 하는 사이가 되었다. 어느 날 선우는 책을 사러 책방에 갔다. 책을 둘러보다가 눈에 익숙한 여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단발머리였다. 모른 척 책을 고르고 있으면서도 그녀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책을 골라 계산대로 갔더니 그녀가 먼저 와서 계산하는 중이었다. 그녀가 선우를 보고 살짝 머리를 숙였다. 선우는 책을 사 들고 나가는 여자를 뒤따라 나가서 말을 걸었다.
“혹시 안 바쁘시면 커피 한 잔 사드려도 될까요?”
“안 그래도 커피가 마시고 싶었어요. 감사해요.”
두 사람은 서점 옆 건물 2층에 있는 커피숍으로 들어가서 대화를 나누었다. 그녀의 이름은 강미연이라고 했고 선우와 가까운 고시원에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고 했다. 두 사람은 서로 공부하는 내용과 고시원 생활에 관하여 얘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서로 시간이 맞을 때에는 산에 운동하러 같이 가자고 약속했다. 이후로 두 사람은 매일 같이 산에 다녔고 함께 식사하는 일도 많아졌다. 미연은 줄넘기를 잘했고 커피를 매우 좋아했다. 선우는 미연이 줄넘기하는 모습을 보고 감탄했고 그 모습이 너무 귀엽고 예뻐 보였다. 선우의 머릿속은 점점 혜정의 모습 대신에 미연의 모습으로 채워져 갔다. 두 사람은 점점 가까워졌고 얼마 후에 미연은 서울시 지방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미연은 고시원을 나와 구로구에 있는 집으로 들어갔고 임용이 되기 전까지 음식을 싸가지고 자주 선우를 찾아왔다. 미연이 임용되고 나서부터 발걸음이 뜸해지자 선우는 허전하고 허무한 생각이 들어서 외로움을 많이 느꼈으며 잡생각이 많아서 공부에도 전념할 수 없었다. 게다가 서른이 가까워지는 나이에 부모에게 돈을 받아서 공부만 하는 일도 마음이 불편해졌고, 공부를 중단하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선우는 공부하기가 싫어져서 매일 여섯 시만 되면 미연이 근무하는 동사무소를 찾아갔다.
“미연아, 우리 결혼할까?”
“나도 생각은 해 봤는데 부모님께서 허락하지 않을 거야, 오빠가 시험에 합격하지 않는 한은.”
“취직하면?”
“시험은 포기하려고? 그렇게 힘들어?”
선우는 경기도 시흥시에 있는 법무사사무소 사무원으로 들어갔다. 법원 민원인들에게 상담을 해주고 각종 사건의 소장과 각종 신청서 등을 작성하는 일을 했다. 그중에 이혼 관련 소장을 작성하는 일이 가장 많은 업무였다. 처음엔 일이 어려웠지만 선우는 빠르게 일을 배우고 적응해 나갔다. 신림동에 있는 고시원에서 직장까지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며 출퇴근했다. 퇴근 후에는 자주 미연과 만나서 함께하는 미래를 이야기하며 즐거워했다. 사연을 들은 선우의 부모는 시흥시에서 집을 구할 만큼의 전세자금을 보내주었다. 그리고 미연의 부모는 선우와 미연의 끈질긴 설득에 두 사람의 결혼을 허락했다. 드디어 결혼을 한 두 사람은 사는 것이 즐겁고 행복했다. 그리고 똘똘하게 생긴 아들과 예쁜 딸을 연년생으로 낳았다. 넉넉한 살림살이는 아니었어도, 두 사람의 앞날에는 총천연색 무지개가 펼쳐진 듯 보였다. 몇 년 후 선우는 사무소의 사무장으로 승진했고 월급도 많이 올랐다. 아이들도 잘 자라서 유치원에 다니고 미연도 공무원 생활에 만족했다. 행복한 사람들이 미래를 더 두려워한다고 하던데 그들에겐 그러한 걱정조차도 없었다.
여느 때처럼 선우는 사무실에서 민원서류를 작성하고 있었다. 법무사인 소장이 운동복차림으로 늦게 출근하더니 몇 가지의 업무를 점검하고 나서 골프 약속이 있다며 급히 나가버렸다. 그리고 불과 삼십 분 만에 교통사고가 났다고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다. 사망사고라고 했다. 그리고 이후부터 선우는 사무실에 출근하지 않았다. 아니, 출근할 곳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졸지에 백수가 된 선우는 자격증을 따기로 마음먹고 주택관리사, 공인중개사 등의 수험서를 잔뜩 사놓았다. 인터넷 동영상강의도 신청했다. 아침에 아이들과 미연이 집을 나서는 것을 배웅하고 나면 선우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자격증을 따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해야겠다고 결심은 했지만, 몸과 정신은 점점 나태해져 갔다. 그러다 보니 낮잠을 자다가 나가서 친구들을 만나 당구장에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 잦아졌다. 스마트폰 앱을 통해서 옛 친구들과도 연락이 닿아서 만났고, 선우의 집에서 가까이 사는 친구들도 있었기 때문에 백수로 사는 일이 그리 심심하지는 않았다. 아내 미연이 꼬박꼬박 월급을 받으니 살림살이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다 보니 술을 먹고 늦게 집에 들어오는 날이 많아졌고, 가끔은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도 있었다. 미연은 그런 선우 때문에 근심하기 시작했고 그동안 철석같이 믿어왔던 남편에 대한 의심도 생겼다. 신혼 때부터 금실이 좋기로 동네에 소문났던 집에서는 이제 크고 험악한 소리가 집 밖으로 새어나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미연은 아침마다 차려주었던 밥상을 더는 차려주지 않았고, 선우는 아이들과 아내를 배웅하기는커녕 아침에 눈도 뜨지 않았다. 어느 날 선우가 당구장에서 당구를 치다가 짜장면을 시켜서 먹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고향 친구 석구였다.
“선우야, 윤숙이 생각나지?”
“그럼. 걔 잘 지내?”
“응, 어제 윤숙이가 너 전화번호 물어봐서 알려줬다. 혹시 전화 안 왔어?”
“아니. 근데 무슨 일로?”
“자세한 건 모르고.”
선우는 중학교 때 윤숙에게 혜정이를 불러달라고 했던 일이 떠올랐다. 통화를 끝내고 짜장면 그릇을 비운 선우는 계속 친구들과 당구를 치며 놀았다.
“이번엔 맥주 내기, 지는 팀이 단란주점 쏘는 거다.”
“오케바리.”
그날에도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단란주점에서 밤새도록 술을 퍼먹고 날이 밝아서 들어가 거실 바닥에 쓰러져 잠들었다.
“어쩌다가 내가 저런 사람을…….”
출근 시간이 되자 미연이 쓰러져 잠든 선우를 향해 한 마디 던지고 아이들과 집을 나섰다. 오후가 한참이나 지나고 나서야 잠에서 깬 선우는 냉장고에서 생수병을 꺼내 입을 대고 벌컥벌컥 들이마시고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문자메시지가 여러 개 와 있었는데 그중에 선우의 눈을 의심케 하는 메시지가 하나 있었다.
-선우 전화기 맞지? 나 혜정이야. 윤숙이가 번호 가르쳐줬어. 너 편할 때 아무 때나 전화해도 돼. 그리고 미안해.
선우는 거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혜정과의 옛 추억들이 머릿속을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선우는 가슴을 움켜잡고 흐느꼈다. 이십 년 가까이 묻어두었던 이별의 아팠던 상처가 터져버린 것이다. 선우는 한 참 동안 그렇게 주저앉아 넋이 나간 사람처럼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휴대폰을 집어 들고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어디야? 난 경기도 시흥인데 만날 수 있으면 만나자. 보고 싶다.
-난 충남 천안에 살아. 난 상관없으니 네 맘대로 약속을 정해. 나도 보고 싶어.
-버스 타고 갈 테니 저녁 일곱 시까지 시외버스터미널로 나와. 난 차가 없어서.
-알았어.
선우는 정확한 시간에 천안에 도착했다. 터미널 안과 밖을 아무리 둘러봐도 혜정은 보이지 않았다.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터미널 안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계속 두리번거렸다. 선우의 눈에 익숙한 체형을 가진 여자가 다가왔다. 정말 혜정이가 틀림없었다. 세월이 많이 흘렀는데도 혜정의 모습은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선우는 의자에서 일어나다가 도로 주저앉고 말았다.
“왜 그래, 괜찮아? 어디 아픈 거니?”
“아니, 어제 술을 많이 먹어서 그래. 저녁 안 먹었지?”
“같이 먹으려고 기다렸지. 내가 잘 아는 맛있는 데가 있어. 따라와”
혜정이 앞장섰고 선우는 따라갔다. 혜정이 터미널을 나가더니 골목길을 여러 번 돌아서 흰색 고급 승용차 앞에서 멈추어 섰다.
“이 시간에는 여기밖에 차를 댈 데가 없더라고, 여기 타.”
혜정은 능숙해 보이는 운전솜씨로 골목길을 빠져나가 대로를 달렸다. 차가 멈춘 곳은 고급스러운 생선구이 전문점이었다.
“너 생선구이 좋아했잖아. 내가 고등어 구워주면 정말 맛있게 잘 먹었었는데.”
선우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혜정을 따라 식당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앉았고 혜정은 안색이 평화롭고 표정이 자연스러워 보였다. 선우는 왠지 마음이 불편하고 표정은 부자연스럽게 굳어 있었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혜정은 밝은 미소를 지으며 생선구이와 반찬을 젓가락으로 집어서 선우의 밥그릇에 놓아주었다. 선우는 목구멍 속으로 음식을 내려보내기가 거북해서 물을 자꾸만 마셨다.
“미안한데, 나 밥이 안 넘어가서 그러는데, 다른 데 가서 맥주나 마실까?”
“어제 술 많이 마셨다고 했잖아, 그런데 또 술 마시고 싶어?”
혜정은 계산대로 가서 식대를 냈고 두 사람은 식당을 나와 근처에 보이는 맥줏집으로 들어갔다. 선우는 생맥주 500cc를 단숨에 들이마시고 나서 이번엔 1,000cc를 달라고 했다. 선우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다시 생맥주가 나오자마자 벌컥벌컥 마셨다. 시간이 지나 얼굴이 다소 붉어지더니 혜정에게 물었다.
“어떻게 되었던 거야?”
선우는 답답함을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오른손으로 가슴을 툭툭 때려대다가 혜정의 얼굴을 보고 놀라서 동작을 멈추었다. 생기발랄했던 혜정의 표정은 어두워져 있었고 두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선우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다소 긴장한 기색으로 혜정을 바라보기만 했다. 혜정이 훌쩍거리며 콧물을 훔쳐내더니 입을 열었다.
“너 군대에 가고 얼마 후에 회사에서 회식이 있었어. 너를 생각하다가 그 자리에서 우울하게 있었더니 우리 회사 대리가 몸이 안 좋으면 일찍 들어가라고 하며 집에 데려다 준다는 거야. 그래서 그놈 차를 타고 집에 갔는데 그놈이 억지로 집에 따라 들어와서 몹쓸 짓을 했어. 난 그놈을 감당해낼 수가 없었어. 그 후로 나는 회사에 안 나가고 집에 있었는데 매일 그놈이 찾아오는 거야. 그래서 난 그 집에서 나와 그놈이 모르는 이모 집에 가 있었고, 얼마 후에 시골에 있는 부모님이 대전으로 이사해서 부모님과 함께 살았는데, 지나고 보니 내 뱃속에는 그놈의 아이가 자라고 있었어. 난 아이를 낳았고 부모님은 그놈을 찾아서 결혼을 시켰어. 근데 난 그놈이 정말 싫었어. 아이 때문에 그냥 꾹꾹 참으면서 살았는데 글쎄, 그놈이 결국은 떠나가더라.
“어디 갔는데?”
“죽었어. 회사 일로 현장에 갔다가 사고가 나서.”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혜정이 생맥주 1,000cc를 달라고 하더니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했다. 선우도 1,000cc를 더 달래서 벌컥벌컥 마셨다.
두 사람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술이 잔뜩 취해서 그동안의 사연들을 모두 털어놓았다. 그리고 서로의 손을 움켜잡고 엉엉 울었다. 그날 밤 두 사람은 모텔로 들어가서 처음으로 같은 침대에서 함께 잠을 잤다. 다음 날 아침에 두 사람은 함께 아침밥을 먹었으며 마치 오래된 부부처럼 다정한 시간을 보냈다.
선우는 혜정과 헤어져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 길에서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먼저 집에 가서 아내에게 외박한 사실을 어떻게 둘러대야 할지가 고민이었고, 다시 만나게 된 혜정과의 관계는 어떠한 결론을 내야 할지가 답이 나오지 않았다. 선우는 아내를 사랑했고 아이도 둘씩이나 있는데, 그런 아내와 헤어질 수도 없는 일이고, 그토록 그리워했던 혜정을 다시 만나게 되었기 때문에 다시는 헤어지고 싶지도 않았다. 연이틀 과음에 밤잠도 제대로 못 잤던 선우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곯아떨어졌다. 저녁때가 되고 아이들과 함께 집에 돌아온 아내가 선우를 깨웠다.
“도대체 어디에서 잠도 못 자고 와서 그래?”
“친구들과 고스톱 치느라고, 돈 잃은 놈이 보내줘야 말이지, 정말 미안해.”
“그렇다 치고, 도대체 어쩌려고? 앞으로 집도 장만해야 하고, 애들 크면서 점점 힘들어질 텐데 어쩌려고 그래? 자격증을 따든지 취직을 하든지 해야 할 것 아냐.”
“알았어. 정신 좀 차리고 다시 잘 생각해서 결정할게.”
일단 고비는 넘겼다. 꼬치꼬치 따져 묻지 않는 것이 일단 다행이라고 여겼고, 한편으로는 더 미안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앞으로 정말 어찌해야 할지가 도대체 결론이 나지 않아서 선우의 머릿속은 점점 더 복잡하게 엉켜버렸다. 한밤중에 집을 나와서 혜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잘 갔어? 괜찮아? 와이프는 뭐래?”
“둘러댔어. 캐묻는 성격 아니야.”
“다행이다. 일찍 자. 어제 잠 못 잤잖아.”
“집에 와서 잤어. 한 가지만 물어보자. 이건 만약인데, 너 혹시 나랑 살래?”
“너 와이프는 어쩌려고? 아니, 안 그래도 너를 만나기 전에 생각해 봤는데 난 멀쩡한 너희 가정을 깨고 싶지도 않고 우리 아들 때문에라도 안 돼. 그냥 우리 가끔 보자.”
“그래, 만약이라고 했잖아. 그냥 물어 본 거야.”
혜정과의 통화를 마치고 집으로 들어가니 아이들은 잠들어 있었고 아내가 할 말이 있다는 표정을 하고 선우를 쳐다보았다. 한고비를 넘겼다는 선우의 생각은 오산이었다.
“아이들 잠들면 말하려고 했어. 우리 이혼해. 아이들은 내가 키울 거고. 충분히 생각했으니까 다른 변명은 하지 마.”
미연은 선우 앞으로 사진 몇 장을 던졌다. 선우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사진에는 선우가 버스터미널에서 혜정을 만나는 것과 모텔로 함께 들어가는 모습이 찍혀 있었던 것이다.
“방금 나가서 통화했던 것도 그 여자지?”
선우는 모든 게 들통 났다는 것을 깨닫고 재빨리 무릎을 꿇었다.
“사랑해, 내가 사랑하는 건 자기야. 용서해줘, 한 번만. 아이들을 봐서라도 제발.”
그러나 미연은 콧방귀만 뀌고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가버렸다.
선우는 방문 앞에서 용서해달라고 한참을 소리쳤으나 미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선우는 밖으로 나가서 밤새도록 술을 퍼마시며 고민하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집에 들어가 거실 소파에서 잠들었다.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때 잠에서 깨어나 보니 집안이 어수선해져 있었다. 미연과 아이들의 옷가지와 커다란 여행 가방이 보이지 않았다. 휴대폰으로 재빨리 전화를 걸어보니 미연의 전화기는 꺼져있었다. 곧바로 처가에 전화했다. 미연의 어머니가 받았다.
“얘기 다 들었네. 우린 자네를 용서할 수가 없어. 형편없어 보이는 놈을 미연이가 하도 졸라서 결혼시켰더니 그 대가가 겨우 이건가? 다시는 연락하지 말고 찾아올 생각은 하지도 말게. 도장 찍을 준비나 하고.”
전화가 끊어지자 선우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선우는 열흘 넘게 술과 잠으로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초췌한 모습에 정신적으로도 정상은 아닌 듯했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갑자기 혜정에게 전화했다.
“혜정아, 이번엔 진짠데, 나랑 살래?”
“나 사실은 네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다 알아봤어. 어렸을 때의 소심한 성격은 고치지 못한 것 같더라. 난 이제 너 안 좋아해. 나랑 헤어지고 나서 너 맘고생이 심했다는 게 미안해서 한번 만나 보았던 것뿐이야. 아직도 미안하긴 하지만, 난 지금 다른 남자가 있어. 다시는 만나지 말자. 미안하다.”
혜정이 먼저 전화를 끊자 선우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한동안 주저앉아 생각에 잠기더니 벌떡 일어나서 베란다로 나가 창문을 열어젖히더니 창밖으로 몸을 내던졌다. 아파트 4층에서 아래로 떨어지던 선우는 벚나무가지를 부러뜨린 뒤 화단으로 떨어졌다. 마침 그 앞을 지나던 아파트 주민이 그 광경을 목격하고 119에 전화를 걸었다. 구급대원은 도착하자마자 선우의 부러진 팔에 부목을 하고 병원으로 옮겼다. 부러진 팔과 나무에 긁힌 상처 이외에 다른 큰 부상은 없었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은 미연과 미연의 어머니가 병원으로 달려왔다. 깁스를 한 채로 잠들어 있는 선우의 팔을 보고 미연의 어머니가 혀를 차며 말했다.
“아이고 이 미련한 것. 어쩌자고 그런 짓을, 속도 징그럽게 썩이네. 그 정신으로 어떻게든 살아볼 궁리를 했어야지, 이 미련한 것아.”
그 소리에 잠에서 깨어난 선우가 미연을 보고 말했다.
“미안해, 다른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그랬어.”
미연이 다가가서 선우의 가슴을 치며 말했다.
“겨우 그거였어? 너란 놈,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또 실망하게 해!”
미연은 선우의 가슴에 이마를 비비며 엉엉 울었고, 선우는 ‘미안해’를 반복하면서 미연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눈물을 흘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