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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베드로전서 3장 18-22절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사도 베드로는 계속해서 선을 행하되 열심으로 선을 행하라고 강조합니다. 왜 선을 행하라고 하는가?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나타냄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입니다(벧전2:9,12 참조). 그러나 선을 행하면서도 선에 대하여 선으로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악에 대하여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나타낸다면 많은 부분 선으로 반응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이것이 곧 의를 위하여 받는 고난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고난에 대하여 사도 베드로는 그것 자체가 복되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런 복 가운데 있는 자들은 결코 저들이 두려워하는 것으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저들이 근심하는 것으로 근심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면서,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그분만을 거룩하게 하는 일에 선한 열심을 가지라고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믿음과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누구를 대하든 온유함으로, 또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자세로 하라고 말합니다. 나아가 선한 양심을 가지라고도 말하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선한 양심은 선한 행동을 나타내며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선행을 욕하는 자로 하여금 결국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전체적인 내용 안에서 사도 베드로는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까지 말합니다. 모든 것을 작정하시고 작정하신 바에 대하여 섭리로 역사하실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목적, 그리고 때가 되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어디 있는가?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란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를 택하시고 때가 되어 부르신 목적이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인가? 베드로전서 3장 9절로 답하자면 이것입니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로마서 8장에서는 조금 더 분명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8:17-18) 한 마디로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복과 동일한 복을 얻도록 하기 위하여 이 땅에서는 잠시잠깐 고난을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다만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 때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에 대하여 괜찮다는 생각은 주의를 해야 합니다.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조차 하나님께서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지만,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것 때문에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도 괜찮은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를 택하시고 부리신 목적은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까지 괜찮은 것처럼 생각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낫다고 말합니다.
이런 맥락 속에서 사도 베드로는 다시금 예수 그리스도를 주목하도록 하는데, 이것은 베드로전서 2장에서 말한 의도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0절과 21절을 보면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러니까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참으면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것인데,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일에 대하여 친히 본을 보이신 분이 누구냐? 예수 그리스도시란 겁니다. 왜 그리스도께서 친히 본을 보이셨는가? 우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기 위해서란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시금 예수 그리스도를 주목하게 하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그것이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더 낫다고 할 때 바로 이 일을 위하여 본을 보이신 분이 누구시냐? 예수 그리스도시란 겁니다. 그러나 본문은 단지 본을 보이셨다는 것으로만 말하지 않고 위로와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근거를 말씀해 주시는데, 그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이런 이해를 가지고 오늘 본문 18절 상반부를 보시면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하여 언급하는데, 그의 죽음은 어떠한 죽음인가? 죄를 위한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죄가 아니라 자기 백성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죽음입니다. 비록 인성을 취하셨지만 아담의 본성 그대로를 물러 받은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되고 나신 분, 모든 부분에 있어 우리와 같으시지만 죄는 없으신 분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히4:15 참조). 그런 그가 누구의 죄 짐을 지고 죽으셨는가? ‘예수’라는 이름의 뜻처럼 자기 백성의 죄입니다.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신 의로운 분이시만 그런 분이 죄인을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신 것입니다.
특별히 사도 베드로는 ‘단번에’ 죽으셨다는 말을 하고 있는데,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여 죽었다고 할 때 그리스도의 희생의 공로와 안전함은 그가 한 번 고난을 당하시고 죽은 것을 충분하다는 것을 명확하게 하는 부분입니다. 비교하자면 이것은 구약 시대 율법에 따른 희생제물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히브리서 7장 27절에 보면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율법에 따른 희생제물은 매일 그리고 매년 희생제물을 드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에 따른 희생제물의 실체가 그리스도요, 그의 희생은 하나님의 공의를 온전히 만족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요19:30).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가 온전히 만족되었다는 것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을 통해서도 언급되지만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은 그분의 희생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켰다는 가장 결정적인 증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죽음을 통해 자신을 희생시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시고, 나아가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었다는 것을 그의 부활로, 그리고 그의 승천으로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단번에 죽으셨다는 것을 통해 모든 죄 문제를 해결하셨고, 견인의 은총까지 확고히 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럼 왜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는가? 이어지는 18절 중반부를 보시면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본래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신데 반해 사람은 아담의 타락 이후 죄인으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맨 처음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는 죄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깨버린 것이 바로 죄입니다.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먹음으로 인해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그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 지은 아담과 하와를 찾으시자 두려움으로 숨어버렸습니다. 이처럼 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았습니다. 어느 정도까지 갈라놓았느냐?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꿀 정도로 갈라놓았습니다(롬1:23 참조). 사람의 마음에 종교의 씨앗이 있어 하나님을 부인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마음에 하나님 두시를 싫어할 뿐 아니라(롬1:19, 롬1:28 참조)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고 할 정도로 갈라놓았습니다(시14:1 참조). 그만큼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시켜버렸던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시킨 바로 그 죄를 해결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친히 공의의 형벌을 받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는가?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참되게 믿는 자들은 죄인으로서가 아니라 의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겁니다. 이 사실을 사도 바울은 히브리서 4장에서 이런 내용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4-16)
조금 더 구체적으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한다고 할 때 그것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가? 사도 베드로는 이미 베드로전서 2장에서 이렇게 말한 바가 있습니다. 24절을 보시면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는가? 왜 우리를 위하여 대신하여 죽으셨는가?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토록 살게 되는 거기에 있지만 그런 삶이 지상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지셨기 때문에 너희는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사는 자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하여, 다시 말해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우리로 하여금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도록 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죽으실 뿐만 아니라 살아나셨고,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 18절 하반부부터 시작해서 22절까지의 내용입니다. 18절 하반부에서는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말하고 22절에서는 승천과 하나님 우편에 계시는 내용을 말합니다. 특히 22절 하나님 우편에 계시다는 내용을 말하면서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의 죽음은 단순히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부활과 승천을 거쳐 모든 것에 대한 권세를 가질 정도로 영광스럽게 되는 데 있다는 것을 알리는 내용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오늘 본문을 통해 다시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으신 것처럼 너희도 고난을 받도록 하기 위함이고, 고난만이 아니라 그가 영광을 받으신 것처럼 너희도 영광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도록 하기 위해서 오늘 본문이 있는 겁니다.
계속해서 18절 하반부를 보시면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다고 할 때 그의 죽음은 육체로서 죽은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때 육체는 이어 나오는 ‘영’을 영혼으로 해석하면서 영혼과 대조적인 의미에서의 육체란 의미가 아니라, 인성을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때가 차매’(갈4:4) 인성을 취하셨습니다. 이때 인성은 우리와 똑같이 영혼과 육체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인성을 취했다는 것은 신성이 인성으로 변화가 되었다, 혹은 신성을 버리시고 인성을 취하셨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신성은 신성 그대로 있는 가운데 인성을 취하신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때가 차매 인성을 취하신 이후로 신성과 인성이 연합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육체로 죽임을 당하셨다는 것은 인성으로서 죽임을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죽음이 영혼과 육체의 분리라고 할 때 예수님 역시 인성을 취하신 분으로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증거 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죽으시고 난 뒤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것을 본문에서는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다고 표현합니다. 이때 ‘영’에 대하여 몇몇 해석들이 있지만, 조금 전에 말한 것처럼 인성의 영혼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어떤 분은 이때 영을 예수님의 신성으로 이해합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2장 19절, 10장 17절과 18절에서 예수님 스스로 부활하실 수 있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2장 19절만 읽어드리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그래서 매튜 풀 주석에서는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에 대하여 ‘즉 그 자신의 신성으로’ 살리심을 받은 것으로 주석합니다. 반면 어떤 분은 이때 영을 성령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칼빈의 주석을 보면 “그리스도께서는 비록 육체의 연약함으로 고난을 받으시기는 했지만 성령의 능력으로 다시 일어나셨다. 그러므로 십자가나 그의 죽으심은 그리스도에게 해를 미칠 수가 없었다. 생명은 승리를 쟁취하기 때문이다.”고 설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으로 해석하든, 아니면 하나님의 영이신 혹은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으로 해석하든 사실 큰 차이는 없지만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다고 할 때 능동이 아닌 수동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성령 하나님으로 이해하는 것이 조금 더 낫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리고 칼빈 주석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부활이 있다는 것, 비록 죽었지만 다시금 생명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은 죽음이 그리스도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는 분명한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그것이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더 낫다고 할 때 이 일을 위하여 본을 보이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시라면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만 의식해서는 안 되고 그의 부활까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22절을 통해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그의 승천과 하나님 우편에 계신 것까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고난은 고난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의를 위한 고난,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은 반드시 영광으로 화답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8:17-18)고 말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해서 고난만 받는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은 영광을 위한 고난일 뿐입니다. 또한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을 때 그런 고난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해를 끼칠 수 있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조차 그의 고난이, 그의 죽음이 해롭게 만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었다는 것을 설명하면서 죄 문제에 대한 완전한 해결과 견인의 은총까지 확고히 하신 것이라고 설명을 드렸지만, 이 땅에서 받는 여러 가지 고난과 환난 등이 우리의 구원을 막지 못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영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부활하게 하신 것처럼 동일하게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시고 결국 이기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고난에 대하여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죽었던 예수 그리스도를 살리셨다는 이 내용 속에서 고난 가운데서도 위로와 소망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셔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고난만 말하지 않고 부활과 승천과 하나님 우편에 계시다는 것까지 말하고 있는 것이니다.
이어지는 19절 이하 21절은 죽음과 부활을 말하는 18절과 승천과 하나님 우편에 계시다는 내용을 말하는 22절 사이에 마치 삽입구처럼 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알리고자 하는 바가 있는데, 일단 19절과 20절을 보시면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영’은 18절 하반부에 있는 대상으로 성령 하나님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하여 선포하신 것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누구에게, 무엇을 선포했는가? 일단 대상은 옥에 있는 영들입니다.
이 옥을 지옥으로 이해하여 어떤 이들은 예수님께서 실제로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가톨릭이 말하고 있는 연옥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한 예로 사도신경에 보면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문구가 있는데, 우리말로 번역 된 사도신경에서는 이 부분이 빠져 있습니다. 우리말로 된 사도신경은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본래 사도신경은 십자가에 못 밝혀 죽으시고 장사하셨다는 내용 다음에 지옥으로 내려가셨다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 내용 이후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내용으로 연결이 됩니다. 그리고 이런 고백과 관련해서 본문의 내용을 근거로 말하기도 하는데, 실제로 예수님께서 지옥으로 내려가셨는가? 우리는 그렇게 해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먼저 사도신경의 내용부터 정리하자면 문구 자체는 지옥에 내려가셨다고 고백하고 있지만, 이 내용으로 지옥강화설로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칼빈은 제네바 요리문답에서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해석합니다. 65문인데 “목사: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말이 부가된 의미는 무엇입니까? 아이: 이는 그리스도께서 영과 육의 분리를 뜻하는 자연적인 죽음만을 겪으신 것이 아니고 그 분의 영혼이 사도 베드로가 “죽음의 고통”이라고 말한 바 있는(행2:24) 상상하기 힘든 괴로움 속에 갇혀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다음과 같이 해석합니다. “44문. 거기에 “지옥에 내려가셨고”라는 말이 왜 덧붙여져 있습니까? 답. 내가 크나큰 시험을 받을 때에라도,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시는 동안 내내, 특히 십자가에 달려 계시는 동안, 말할 수 없는 고뇌와 고통과 공포와 지옥의 괴로움을 친히 당하심으로써 지옥의 고뇌와 고통으로부터 나를 구원하셨다는 것을 확신하고, 이로써 전적으로 위로를 얻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처럼 사도신경에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문구가 있지만 그 내용이 지옥강화설을 주장하는 내용은 아닙니다. 여러분, 지옥은 어떤 곳입니까? 지옥은 천국과 반대되는 곳으로 믿음 가운데 있지 않는 자들이 가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에서 유를 만들었다고 할 때 보이는 곳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까지 만드셨기에 천국과 지옥도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진 곳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만들었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가실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특히 택자의 머리로 계신 그리스도께서 친히 지옥으로 갈 수 있는가?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어떤 내용까지 있습니까? 거지 나사로는 죽어 천국에 들어갔고 부자는 죽어 지옥에 갔는데 지옥의 고통이 너무 심해 부자가 나사로를 보내어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이때 아브라함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눅16:25-26) 특히 26절 천국과 지옥은 왕래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합니다. 그런데 택자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옥에 내려갈 수 있는가?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셨다고 할 때 이 ‘옥’은 어떤 의미이고 ‘옥에 있는 영들’은 누구를 의미하는가? 그것을 설명하는 것이 20절입니다. 20절을 다시 한번 보시면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그러니까 옥에 있는 영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입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방주를 준비할 동안 살아 있던 자들인데, 그들을 옥에 있는 영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구원의 은총을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죄와 죽음과 사단에 얽매인 영혼들,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자유함을 얻은 자들이 아니라 여전히 감옥에 갇혀 있는 자들이라는 의미에서 옥에 있는 영들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반면에 노아의 날 방주 안에 들어가 구원을 받은 자들이 있었는데, 바로 노아의 가족들입니다.
정리하자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성령으로 노아 시대에도 가셔서 복음을 전하셨는데, 이때 ‘가서’란 표현은 실제로 가셨다는 것이 아니라 히브리서에서 증거 하는 것처럼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히1:1)란 의미에서 가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노아 시대 때 노아는 그 시대의 선지자로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노아와 관련해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후서 2장 5절에서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라는 표현까지 합니다. 본문에서는 무엇을 선포했는지를 밝혀주고 있지는 않지만,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후서에서 노아와 그의 식구들이 의를 전파했다고 말합니다. 신약 시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을 세워 성령의 함께 하심으로 복음을 전하게 하신 것처럼, 구약 시대에도 그렇게 역사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를 통한 의의 전파를 받아 들였는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홍수를 통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반면 홍수 심판 가운데서도 노아와 그의 식구들은 방주 안에 있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바로 이것을 19절과 20절을 통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왜 이러한 내용을 말하는가?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본을 보여주셨는데, 그것이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만 받으셨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고난으로 말미암아 죽으셨지만 다시금 살아나셨습니다. 고난만 받는 것이 아니라 고난 가운데서도 구원의 은혜가, 나아가 영광의 은혜가 주어질 것임을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이미 구약에서부터 증거 되고 있는데, 그 한 예가 노아 시대에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노아 시대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방주를 지었습니다. 그가 하는 일은 방주를 짓는 일, 그리고 하나님의 의를 전파하는 일이었습니다. 달리 말하면 복음을 전파하면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있을 것을 전했습니다. 방주를 짓는 것은 이런 심판의 경고를 외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노아에 대하여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마태복음 24장 38절과 39절에 보면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라고 말씀합니다. 단순히 일상의 삶을 살아갔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전혀 관심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늘에 대하여 관심이 없었다, 복음에 대하여 무관심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모든 생각은 어디에 있었는가? 지상에서의 삶에만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노아의 행동이 얼마나 어리석어 보였겠습니까? 온갖 조롱과 비방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을 경고했지만 그 심판을 비웃었던 겁니다. 노아는 그런 고난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고난만 있었는가? 그렇지 않았습니다. 홍수가 내리면서 물로 온 세상을 덮을 때 방주 안에서 구원의 은총을 맛보았습니다. 저들은 온통 지상의 삶에 집중했다면, 노아는 복음 안에서 하늘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영광의 은혜에 대한 소망으로 고난을 견딜 수 있었던 겁니다.
그렇다면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더욱 분명한 복음의 내용을 알고 있는 우리는 더더욱 구원의 은혜와 영광의 은혜에 대한 소망으로 고난을 견뎌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하기 전,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시기 전,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는 일반적인 역사의 시작이 아니라 그 이전에 살았던 노아조차 복음 안에 있는 하늘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이 땅에서의 고난을 견뎠다면 우리는 더더욱 그러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칼빈은 그의 주석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경건한 영들에게 나타났다는 것과 이들은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고난을 참고 견딘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지지 아니할까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또 이렇게도 말합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그들에게 조상들의 형편도 그와 같았음을 기억하게 함으로써 온 땅이 악한 자들로 온통 뒤덮여 있다 하더라도 성도들의 생명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안전하게 지켜질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 요약적으로 말하길 “세상은 항상 불신자들로 가득 차 있지만 경건한 자들은 그들의 많은 수효 때문에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노아는 비록 불신자들로 둘러싸여 있었고 그를 따르는 자들은 거의 없었지만 그는 결코 자기 믿음의 정도에서 벗어나지 않았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의를 위한 고난, 선을 행함으로 받게 되는 고난이 있다 할지라도 성령 하나님께서 죽었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신 것처럼, 노아 시대 땅에 있는 모든 사람을 심판하시는 가운데서도 노아의 식구를 구원하신 것처럼 우리를 구원하시고 살리신다는 것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난 가운데서도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게 여기에 있습니다. 고난 가운데서도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게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과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는 내용이 고난을 받는 우리에게 위로와 소망의 내용으로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은혜가 구약에조차 주어졌다면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 백성에게도 예외가 아닌 것입니다.
다시 20절 후반부를 보시면 “...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고 말하고 난 뒤 이 물에 대하여 설명하기를 21절에 보시면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홍수로 모든 인류를 심판하셨는데, 동일한 그 물이 방주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표로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 그리스도가 믿는 자들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않는 자들에게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벧전2:7-8 참조). 동일한 물이지만 어떤 자들에게는 심판의 내용으로, 어떤 자들에게는 구원의 표로 있는 것입니다.
구원의 경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근거한 것이기에 사도 베드로는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라고 설명합니다. 부활은 죽음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물 자체는 구원의 표라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물이 구원 자체는 아니란 것입니다. 홍수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 할 때 그렇게 죽은 자들에 대해서는 유기자로 봄이 마땅할 것입니다. 그럼 방주 안에 있는 노아의 식구들은 다 택자인가? 창세기의 이후 내용을 보면 함과 그의 아들 가나안과 관련해서 저주가 선언되는 내용이 있는데, 쉽게 노아를 비롯한 여덟 식구는 택자라고 말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지상 교회 안에는 알곡만 있는 게 아니라 가라지도 함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방주 안에 있다고 해서 무조건 택자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혹 그들 모두가 택자라는 전제 아래 있다 하더라도 그들로부터 태어난 모든 자가 택자인가? 광야교회라는 표현처럼 저들도 교회 안에 있다 할지라도 그들 모두가 택자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어쨌든 노아 시대 홍수가 방주 안에 있는 자들에게 구원의 표로 있었는데, 이것이 오늘날 세례의 의미라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례 자체가 구원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습니다. 세례는 구원의 표이지 구원 자체는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가톨릭에서 세례 없이는 구원이 없다고 말한 것은 결코 성경의 지지를 받을 수 없습니다.
이런 세례에 대하여 설명하기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라고 말합니다. 우리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 외에는 없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1장에서 이 사실을 분명히 했습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1:18-19) 때문에 구원의 표인 세례 자체는 결코 우리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세례를 통해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를 가지게 만든다고 설명합니다. 어떻게 세례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를 가지게 만드는가? 이때도 세례 자체보다는 세례가 가지는 의미 때문인데, 세례의 의미 안에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있고 그런 연합은 그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산다는 내용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로마서 6장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6:3-4)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라고 할 때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로마서 6장 4절의 의미입니다. “...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간단히 말하면 믿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가 연합되지만 이런 연합이 세례의 내용을 통해 가르쳐진다고 할 때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 우리도 그 안에서 죽으며 그리스도께서 다시금 살아나실 때 우리도 그 안에서 다시 살아나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할 수 있는 자로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것을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라고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오늘 본문 18절에서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심으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신다고 할 때 우리를 어떤 자리에 이르도록 하고자 하시는가? 세례의 의미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로서 그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사는 자로 있도록 하기 위함이란 것입니다. 그와 함께 죽고 그의 함께 산 자가 되었다면 이제는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는 자로 서도록 하기 위해서란 것입니다.
우리가 의를 위하여 고난 받아야 하는 이유,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아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고난을 받지만 고난으로 끝나지 않으리라는 확신도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죽음과 부활만 말하지 않고 승천과 하나님 우편에 계신 것까지 말하는데, 이것 또한 고난으로 끝나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주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2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한다면 그의 능력이 미치지 못할 시간, 장소는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지만 그의 능력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겁니다. 고난 가운데서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고난 가운데서 넘어지는 일도 있지만 완전히 넘어지지 않고 다시금 일어설 수 있는 힘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실 뿐만 아니라 승천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계심으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셨습니다. 그 권세를 누구를 위하여 사용하시는가?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신 대상입니다. 본래는 불의한 자였지만 그의 의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입니다. 바로 그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의를 위한 고난이요,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라고 할 때 우리는 고난 받는 것 자체를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앞서 그 길을 가셨고, 이제 몸 된 교회로 하여금 그 길을 가도록 부르십니다. 부르시되 죽음만 보게 하신 것이 아니라, 부활을 보게 하시고, 승천을 보게 하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셔서 누구도 그 권세를 이길 수 없다는 것도 보게 하십니다. 그런 분이 어떻게 우리는 지켜 보호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처럼 우리에게도 영광이 보장되어 있는 것이고, 그 영광을 위하여 잠시잠깐 고난을 받으라고 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수없이 많은 고난을 받겠지만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 영광의 큼은 우리가 겪고 있는 고난이 지금은 크게 보인다 할지라도 영광을 받는 자리에서는 그 고난이 너무 보잘 것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연약함이 있기 때문에 지금은 고난이 너무 크게 보인다 할지라도 우리의 고난은 어쩔 수 없는 상황 가운데 펼쳐지는 고난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써의 고난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 고난은 영광을 주시기 위한 고난이기 때문에 소망을 가지고서 고난을 감당해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에게 연약함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도우심을 항상 구하는 자세로 고난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야만 합니다. 죄와의 싸움을 싸우면서 선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향해서만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 걸어가야 할 길이고, 그 길을 우리보다 앞서 주께서 걸어가셔서 우리더러 그 길을 따르라고 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주의 말씀을 따라 주를 쫓는 마음으로 현재의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고, 이 고난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말할 정도로 의를 위한 고난이 가치 있음을 알리기도 하는 겁니다. 우리는 그런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소망을 위로로 삼고 주께서 뜻하시는 고난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